동주 열국지 8
김구용 옮김 / 민음사 / 1990년 8월
평점 :
절판


東周 列國志

                                                                   

[ 8 ]

戰國時代, 스스로 왕이 되니

 오왕 부차는 월왕 구천이 보낸 두 여자를 보자 한 쌍의 선녀가 하강한 듯하여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넋을 빼앗겼다. 서시는 요염하고 비위를 잘 맞추기는 정단보다 월등하여 부차의 사랑을 독점했다. 부차는 서시를 위하여 별궁을 짓고 흥이 나는 대로 그녀와 놀면서 국사를 돌보지 않았고 오자서가 찾아와도 바쁘다면서 만나주지 않았다.

 

  월왕 구천이 이번에는 흉년을 핑계로 곡식 만 석을 빌려가서는 다음 해에 갚을 때 곡식 상등품만 골라 솥에 약간 쪄서 보냈다. 오나라에서는 이 좋은 상등품의 곡식으로 파종을 했으니 농사가 잘 될 수가 없어 크게 흉년이 들었다. 그리고 월왕은 칼 잘 쓰는 처녀와 활 잘 쏘는 진음을 초빙하여 군사들을 조련하였다.

 

   오왕 부차는 사사건건 자신을 반대하는 오자서에게 칼을 내려 자살하게 하였다. 오자서는 자신이 죽으면 눈을 뽑아 월나라 군사가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동문에 걸어두라고 유언을 하고 죽었다. 오왕은 오자서의 목을 끊어 반문성루에 걸어 두었다.

 

 오왕 부차가 진()나라와의 패권을 다투기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떠나가자 월왕 구천은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오왕 부차는 대회에서 맹주가 되어 오나라로 돌아갔지만 먼 길을 갔다가 와서 지친 군사들은 월나라 군사에게 여지없이 대패했다. 월나라는 지난날 월나라가 오나라에 복종했던 것과 똑 같이 복종하겠다는 오나라의 항복을 받고 귀국했다.

 

  ()나라는 초나라에 흉년이 든 걸 기회로 알고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치러갔다가 대패하였고 초나라는 진나라까지 쳐들어가서 진민공을 잡아 죽이고 마침내 진나라를 멸망시켰다그 해에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가 주색에 빠져 나라를 돌보지 않고 있음을 알고 군사를 일으켰다. 오성이 함락되기 전날 밤 성 위에 죽은 오자서의 머리가 나타났다. 오왕 부차는 싸움에 패하여 결국 자살했고 백비는 죽임을 당했다.

 

  월왕 구천은 드디어 제, (), , 노 네 나라 군후와 대회를 열었고 동방의 백주가 되어 마침내 패권을 잡았다. 월왕의 패업을 도왔던 범여는 신하들을 의심하고 모든 공로를 독차지 하려는 월왕의 속 마음을 알고는 그의 곁을 떠나면서 문종에게 월왕은 고생은 함께할 수 있으나 함께 부귀를 누릴 인물은 못 된다는 서신을 남겼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멸망시켰건만 공로가 있는 신하에게 한 치 땅의 상도 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지난날의 신하들을 경원했다. 그래서 신하들은 점점 월왕 구천을 만나 보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월왕은 그 뒤 문종조차 자진케 했다. 월왕 구천은 왕위에 있은 지 27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자손은 대대로 패후로서 자처했다.

 

  진()나라는 원래 6경이 서로 권세를 다투다가 지씨, 조씨, 위씨, 한씨의 4가가 국권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진나라 땅을 각기 나눠 가져 임금인 진출공보다 많은 땅을 차지하였. 진출공은 강성한 4가를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사실상 진나라의 국권을 가진 지백이 3가의 땅을 뺏으려고 하다가 조씨가와 전쟁이 일어나 자신은 칼에 맞아 죽고 지씨는 몰락하고 말았다. 졍권을 잡은 조양자가는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서 아들 조완을 불러 한씨, 위씨와 진나라를 세 쪽으로 나누어 나라를 세우라고 유언한다. 드디어 3가는 각각 나라를 세우고 진정공을 몰아내었다. 이리하여 진()나라는 29대 만에 망하고 위, 한 조의 3진이 들어섰다.

 

  제위왕은 왕이 된 이후로 날마다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러자 한, , , 조 등 여러 나라들이 심심하면 제나라를 쳤다. 제나라 장수들은 여러 번 싸웠지만 늘 지기만 했다. 어느 날 거문고를 잘 안다는 선비 추기가 찾아와 제위왕을 일깨워 주었고 왕은 추기를 정승으로 삼았다.

 

  제위왕은 탐관오리들을 숙정하고 어진 인재를 뽑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이리하여 모든 나라 제후들도 제위왕을 두려워하고 제나라에 복종했다. 이 당시 천하는 제, , (), , , , ()의 일곱 개의 큰 나라가 있었고 서로 실력이 비등했다. 그런 가운데 제위왕이 맹주로 추대되었다.

 

 이제 천하 이곳저곳에서 신흥 세력이 일어나고 많은 영웅과 인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3(三振)정립한 이후로 이미 사실상 전국시대는 시작된 것이었다.

 

  공손 앙은 ()효공을 찾아 갔다. 진효공은 여러 번 시험 끝에 그를 좌서장으로 발탁했다. 위앙은 마침내 모든 법령을 뜯어고치고 진효공의 인준을 받아 이를 시행하기 시작하자 백성들 간에 의견이 분분했고 법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러자 위앙은 그들을 잡아들여 모두 벌하였고 불평을 늘어놓는 태자까지도 그 스승들을 코를 베고 얼굴에 문신을 새겼을 만큼 엄격한 법 집행으로 나라를 개혁하였다. 이리하여 함양으로 서울을 옮긴 진나라는 천하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었.

 

  주()나라 귀곡이란 곳에 한 은자(隱者)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지난날 제자백가 중의 한 사람인 묵자와 함께 운몽산에서 약초를 캐며 수도를 한 일이 있기도 했다. 그는 세상을 등지고 자취를 감추고 살아서 사람들은 그를 귀곡선생이라 불렀다. 그는 천문, 지리, 수학과 병학, 유세법, 출세학에 통달하였으며 선가의 비법까지 정통했다.

 

  그의 제자들 중에 손빈과 방연이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결의형제를 맺고 선생 밑에서 병법을 배웠다. 그러던 중 방연이 먼저 출세를 위해 위나라로 떠났고 떠나면서 그는, 자신이 출세하면 반드시 손빈을 임금에게 천거하겠다고 약속했다. 손빈은 그 후 스승으로부터 자신의 조부 손무가 지은 병법 13을 얻어 공부를 하고 방연에게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보다 우수한 손빈에 대한 시기심으로 방연은 그를 위혜왕에게 천거하지 않았고 묵자가 이를 보고 위혜왕에게 손빈을 천거했다. 그때서야 방연은 마지못해 편지를 보내면서 마치 자기가 힘을 쓴 것처럼 생색을 냈다. 하지만 천성이 오만하고 질투심이 강한 방연은 계속 손빈을 모함하고, 손빈이 제나라와 내통한 것처럼 간계를 꾸며 그의 두 다리를 절단하는 형벌을 받게 만들었다. 하지만 손빈은 방연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방연의 사악함을 알게 된 손빈은 간질병을 가장하여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제나라로 탈출에 성공하였고 제위왕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위나라가 전쟁을 일으켜 방연이 조나라로 쳐들어가자 손빈을 군사로 삼은 제나라가 위나라로 쳐들어갔다. 제군을 만난 위군은 대패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제나라에 손빈이 있는 것을 안 방연은 제나라 정승 추기에게 천금의 뇌물을 주어 손빈을 모함하게 하지만 계획은 실패했고 제선왕이 등극한 후 방연이 한나라를 치러가자 손빈이 위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방연은 급히 회군하여 제군과 맞서지만 손빈의 계략에 걸려 계곡에서 무수히 화살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손빈은 원수를 갚고 대승하였다. 그 후 손빈은 귀곡 선생에게 전해 받은 할아버지의 저서 손무병서 13편을 써서 제선왕에게 바치고 은퇴했다.

 

  이리하여 제선왕은 천하에 위엄을 크게 떨쳤다. 그 후 제선왕은 제나라가 강한 것만 믿고 술과 여색에 빠졌고 선비란 것들과 날마다 황당무계한 토론을 하거나 궤변만을 일삼을 뿐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때 종리춘이라는 못 생긴 여자가 나타나 제선왕에게 충고하고 왕후가 되었으며 제선왕은 정신을 차리고 나라를 크게 다스렸다.

 

  한편, 방연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진()효공은 위나라로 쳐들어갔다. 위나라 공자 앙이 진나라 위앙의 간계에 넘어가 생포되었고 위앙은 이를 이용하여 오성을 함락시켰다. 위나라는 진나라에게 서하 땅을 양도하고 강화조약을 맺었다. 진효공은 위앙에게 상군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그를 상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진효공이 죽고 진혜문공이 제위에 올라 자신의 스승들에게 벌을 내렸던 상앙의 정승 직을 빼앗았다. 나라를 개혁한다고 남에게 못할 짓도 서슴없이 저질렀던 그는 결국 오우분시(五牛分屍)의 형을 받았고 성난 백성들은 달려들어 그의 시체를 씹었다. 일족들도 다 죽음을 당했다. 진혜문공은 스스로 왕이라 자칭하고 모든 나라에 사신을 보내 땅을 진나라에 바치라고 분부했다.

 

  모든 나라의 군주들은 이 분부를 받고 어리둥절했다. 초나라 초위왕은 사신을 쳐서 반죽음을 만들어 보내기도 했다. 이에 낙양에 있던 소진이 겸병지책(兼倂之策)을 주장하고 나와서 진혜문왕을 설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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