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모반의 수레바퀴
도성 홀한성을 점령한 대창해는 태자 대신덕을 동궁에 가두고 서궁을 봉쇄했다. 대가 약한 대신덕은 순순히 국새를 내놓았지만 고태후는 끝까지 굴종하지 않았다. 태후와 태자의 교지를 받들어 황위에 오르려 했던 대창해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대창해가 원만한 계위에 골몰하는 동안 대인수의 토평군은 무서운 기세로 도성으로 향했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농기구와 사냥무기를 들고 토평군에 자원하자 군사는 갈수록 불어났다.
황제의 친정군과 반란군은 공격과 퇴각을 번갈아 하며 수시로 전투를 벌였다. 대창해는 성 안에 비치된 마초와 군량이 충분하기에 반란군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성 안에 있던 대도만적이 대곤명을 베고 반란군을 압도하자 반란군은 달아나면서 태자를 시해하고 말았다.
놀란 대창해가 도성을 공격하자 친정군이 반란군의 배후를 짓쳐들었다. 병장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반란군의 수효가 삽시간에 늘었고 대창해는 목이 잘렸다.
을사유신과 북벌, 당나라를 비롯한 신라와 일본과의 다양한 교역, 해를 이은 풍년, 병들고 기궁한 백성들을 나라에서 구휼한 덕에 발해 강역은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런데 대인수가 병상에 누웠고 병은 점점 깊어갔다. 경술(830)년 섣달 스무닷새, 발해 문자 만들기에 그토록 애쓰며 백성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받던 대인수 숨을 거두었다.
대인수의 뒤를 이어 맏손자 대이진이 계위했으나 그는 나이가 어린데다 성품도 유약했다. 대이진은 어머니 해수련의 뜻에 따라 대내상에 대공정을, 내시감에 해지량을 임명하고 도독과 자사를 비롯하여 장수들을 교체했다. 해지량은 발해 문자인 선문 배우기를 금하고 태사 신작을 서서히 물리치라고 권한다.
해지량의 사촌 아우로 영원부 염주 자사로 부임한 해무량의 심복 왕가희가 뇌물 심부름을 갔다가 신작에게 곤장을 맞고 퇴짜를 맞는 일이 발생했다. 해무량은 직을 이용하여 어마어마한 재물을 챙겼고 그것을 또 뇌물로 사용했다.
이에 황제는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시어사 고덕술을 염주로 파견했지만 그는 해무량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황제는 태사 신작의 의견에 따라 해동정에게 밀명을 내려 다시 암행 감찰을 명했다. 그러나 그 역시 해무량의 암계에 걸려 아예 그쪽 편으로 돌아섰다.
가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해지자 거상 장사경과 율창직이 반란을 일으켰다. 군사들이 합류했고 농어민은 물론이고 염전의 역부들과 상인, 삯일꾼들까지 반란 대열에 뛰어들었다. 반란군은 황제의 친정과 해태후 일파의 숙청을 요구하고 해무량과 해지량은 참하라고 주장했다.
해지량은 대이진에게 반간계를 쓰도록 건의한다. 반란군은 해태후가 폐비되어 사가로 내쫓기고 해무량과 해지량이 옥에 갇힌 것을 알았다. 황제가 환궁하여 친정할 채비를 했다는 것도 알았다. 신작과 반란의 주역들이 황제의 칙지를 받들어 성문을 통과하는 순간, 창검궁시로 무장한 금군들이 달려들어 사정없이 찌르고 베었다. 신작의 목이 달아났다.
황후 주신강은 대이진의 행동을 안타까워하며 거사를 궁리한다. 해태후의 생신날 기예를 펼치던 예인들이 태후에게 달려든다. 태후는 비도를 맞고 쓰러졌고 해지량이 시위 군사들을 지휘하여 예인들을 제압했다. 태후는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사건의 전발이 밝혀졌다. 비도를 던진 무리는 황후 주신강의 사주를 받은 오사마 무리였고 오사마는 황후의 시위로 잠시 서궁에 머물다가 궁성을 떠나 용마사에 머문 것으로 밝혀졌다. 용마사는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었고 오사마를 가르친 승려 석지담은 참살당했다.
해태후는 한시 바삐 황상을 폐하여 태상황으로 삼고 대건황을 보위에 올리고자 노심초사했다. 해지량은 아편을 궁중에 퍼뜨려 황제와 태후, 대건황이 중독되기도 했다.
대이진이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삶을 마감했고 대건황이 뒤를 이어 등극했다. 해태후는 해지량의 의견에 따라 반란을 일으킬만한 황친들과 이에 동조할 만한 신하들까지 숙청하여 태후의 입지를 굳건히 다졌다.
후궁 선송지가 해태후를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대건진과 대간정, 선무방과 공모하고 태후의 단약을 만드는 이승겸을 포섭하였다. 그런데 황제의 총애를 받는 선송지를 시기하여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후궁 윤가원이 선송지와 이승겸이 만났다는 소문을 듣고 의아해 하며 선송지를 섬기는 궁녀 달풍기를 문초하다 죽게 만들고 해태후를 찾아가 소문을 부풀려 고자질 한다.
해무량과 승려 의명이 군사를 양성하여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건의 하지만 해지량의 의견을 참고한 해태후는 이를 반대한다. 해무량은 염상들에게 사병을 거느리도록 권고한다.
태자 대현석의 생일잔치가 열리던 날 용봉탕 속에 독을 넣은 사실이 발각되자 이승겸은 용봉탕을 마시고 자결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대건황은 선송지를 후궁에서 폐하여 떠나보냈다. 해태후가 그녀를 쫓았을 때는 선송지와 선무방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역질이 도성에 몰아쳤다. 약도 기도도 굿도 효험이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수십 명이 죽어 나가고 채 묻지 못한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소문은 해무량의 지시로 사병을 초모할 때 역질이 만연한 서쪽 변방의 장정들을 불러들였기 때문이라 했다. 역질을 윤행시킨 해무량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수없이 올라왔다.
해지량이 해태후에게 해무량을 제물로 삼으라고 아뢰었다. 해지량이 보낸 칙서를 받은 해무량은 군사를 일으키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날 밤 두 번째 황제의 밀지를 들고 온 충무장군 임달선에 의해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역질이 물러나자 곳곳에 많은 술사와 도사들이 우후죽순처럼 기승했다. 자신들이 기도하고 굿을 해서 역질이 물러갔다고 주장했다. 그 동안 끊임없이 승려들을 모아 기도하고 병자를 돌보던 의명선사와 덕산대사를 찾아 절로 모여드는 불자들도 늘어만 갔다. 해태후도 그들의 공적을 인정했다.
신묘(871)년 봄, 대건황은 사냥 행차에 나섰다가 사슴 고기를 먹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고 다음 날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었다. 태자 대현석이 등극하였고 황친을 비롯한 구신들과 의명선사가 선제의 승하에 의혹을 품고 검시를 주품했다. 황제는 태후의 눈치를 살피며 검시를 반대했다.
선제를 검시했던 태의를 통해 독살임을 알게 된 의명은 성각사로 덕산을 찾아갔다. 영인 중 기예를 제대로 익힌 연소강과 오사명이 황상의 밀지라는 임달선의 명을 받고 의명과 덕산을 암살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두 사람은 태복경 고재정을 만나 전말을 실토했고 고재정은 황제의 허락을 받고 금군을 점고하고 경기군을 도성으로 불러들여 해지량과 임달선을 처치하였다.
해태후는 급히 태후궁을 빠져나가 황제의 침궁으로 달려가서 문을 걸어 잠갔다. 의명이 잘 벼린 칼 한 자루를 들고 침궁 안으로 들어갔다. 한식경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의명선사가 나서고 뒤따라 삭발한 소복차림의 여인이 나섰다. 태후는 죽었고 바구니가 될 여자라며 의명이 태후를 데리고 나갔다.
대현석은 황숙 대건진에게 대내상 자리를 권했으나 거절당하자 겁에 질려 그를 권지국사로 봉하는 조서를 내렸다. 대권이 황친 대건진 수중에 떨어지자 백관들은 대건진에게 충성을 맹약했다. 그해 늦가을 해태후가 서거했다.
장례를 마친 후 군사 양성 문제로 덕산과 말다툼을 한 대건진은 심복들에게 모든 사찰을 파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키는 폐불 단행의 결심을 밝혔다. 이 얘기를 전해 들은 덕산은 참화가 이어질 것이니 참회하라며 정진을 위해 토굴로 들어갔다.
사리를 친견하면 대운이 든다고 생각한 대건진은 장자인 대진윤을 당나라에 파견했다. 그런데 일행은 폭풍을 만나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때를 같이하여 조정에서 사원을 폐하고 승려를 환속시킨 뒤 처형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도처에서 젊고 의분에 찬 승려들이 패를 나누어 덕산대사가 정진하는 성각사와 의명선사가 정진하는 법화사로 몰려들었다. 공주 대미현이 가솔들을 이끌고 성각사로 들어갔고 옹주 대혜진은 법화사로 달려갔다. 백성들도 스스로 몸을 살라 죽겠다며 사원으로 모여들었다.
한사코 사찰을 불태우고 두 승려를 치죄하자고 주장한 고재정이 명을 받아 장복사에게 공주는 압송하여 옥에 가두고 옹주는 만인이 보는 앞에서 참하고 자신의 주장를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대장군 장복사는 성각사로, 장수 미소긍은 법화사로 진병하였다.
공주는 떠났고 덕산은 불타는 성각사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법화사도 의명과 옹주가 법당에 불을 지르고 문을 잠가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두 절을 폐사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민심이 흉흉해졌다. 권지국사가 군사를 보내 두 승려와 공주, 옹주를 태워 죽였다는 소문이 그럴듯하게 나돌았다.
대건진이 새 첩 정수향을 총애하자 오미랑은 시기심에 정수향에게 살을 놓는 비방굿을 하다 발각되었지만 대건진은 이를 별 문제 삼지 않는다. 오미랑은 무예를 연마하면서 황자 대위해와 자주 만날 수 있었고 남색을 좋아하는 그의 성적취향을 잘 맞춰주어 친해지게 되었다.
고재정은 대건진이 오랜만에 사냥행차를 나가는 날을 거사일로 택일했다. 오래 전부터 궁리한 정변으로 대건진을 주살하고 황제 대현석을 폐한 후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로 작정했었다. 장복사는 꿈속에서 덕산과 의명이 현몽을 하자 마음을 고쳐먹고 대건진에게 사실을 보고했다.
대건진을 독화살로 주살했다는 보고를 받은 고재정은 황궁으로 진입하여 황제를 붙잡았다. 그런데 장복사가 배신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고재정은 장복사의 큰 아들 장군석을 죽이며 저항했지만 피투성이가 되었고 결국 처자식을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였다. 권지국사가 입성하고 반란군이 항복함으로써 난은 평정되었다.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대건진은 황제가 스스로 양위하고 태상황으로 물러나기를 청했다. 대현석은 망설임 없이 선위를 약조했다. 그런데 대위해의 아이를 가진 오미랑이 도주한 사실이 알려지자 대건진은 분기탱천하여 대위해를 압송하고 오미랑을 사로잡으라고 명했다.
황후는 임재미에게 은밀하게 밀지를 전했고, 아홉 사원을 돌며 부처님께 작별을 고하는 황후를 옹위하던 그녀의 품속에 있던 밀서가 둘째 날 감쪽같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