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대발해(大渤海)
김홍신
2. 다시 뜨는 고구려 혼불
당나라 황제 무측천은 조칙을 내려 대중상과 대조영, 거란의 이진충과 손만영의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그들을 죽여 없애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이진충이 그렇게도 원하던 거란의 왕위에 올랐다. 대조영의 예측대로 이진충이 무상가한에 올라 사방을 공격하자 그동안 동조를 꺼리던 각처의 거란 수장들이 군사를 내어 본진과 합류했다, 군사와 군마가 계속 늘어났다. 그런데도 이진충은 고구려군이 요하를 건너 안동도호부를 쳐부수고 요동 땅으로 달려갈 것을 두려워하여 대문예와 그가 이끌고 간 군사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볼모로 삼고 있었다.
당나라 조정은 거란과 고구려 유민들이 연전연승한다는 소식에 원병을 추가로 보냈다. 싸움은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이 와중에 수세에 몰린 이진충이 대중상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이진충이 대중상의 조언대로 항복하겠다는 간계를 써서 영주성을 점령하려고 온 당나라군을 모조리 섬멸하였다.
이진충의 약속을 받은 대중상은 요하를 건너 접전을 벌였고 무측천은 대조영에게 칙서를 보내 이진충과 서로 싸우게 할 목적으로 이호경식지계(二虎耕食之計)를 펼친다. 이진충은 대조영에게 군자금을 청하고 대조영은 요동성 공격 채비를 서둘렀다. 요동성 안에는 이미 주석모가 세작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주석모는 성주 공손강이 그의 딸들에게 진작부터 욕심을 품고 있었음을 알고 그의 딸을 이용하기로 했다. 잔치가 끝나고 밤이 깊어지자 주화랑은 성주의 가슴에 칼을 꽂았고 자신은 성주의 칼 아래 목숨을 잃는다.
그 시각, 대조영의 군사들은 성문을 열고 사정없이 짓쳐들어 요동성을 함락시켰다. 위기를 느낀 안동도호 배현규가 기병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거란군이 서진하는 동안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은 계속 동진하면서 당나라의 크고 작은 성을 빼앗아 군세가 날로 높아졌다. 대조영의 배현규와의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하였고 이진충은 유관을 점령하였다. 거란군의 형세는 날로 늘어 기병의 수효만도 얼추 5만이니 되었다. 대중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진충은 손만영의 의견에 따라 유관을 도성으로 삼아 중원을 핍박할 생각을 가졌다. 거란은 수주와 단주, 미승을 공략하여 재화를 실어 날라 비축했다.
거란군의 행영에 당나라의 칙사가 당도했다. 칙서에는 영주와 귀주를 봉지로 줄 테니 대중상과 대조영을 잡아 바치라는 것이었다. 이진충이 당나라를 안심시키고 서진 채비를 서두를 즈음 당나라는 돌궐을 부추겨 군사를 일으키게 했고 무유의를 영주로 달려가게 했으며 조인사와 마인걸이 이끄는 토격병을 출병시켰다.
적의 총공세를 감당할 수 없음을 직감한 이진충은 대조영에게 원군을 청하기로 하고 군사 역밀의 제안에 따라 대중상과 대문예를 구고려 진영으로 돌려보낸다. 대무예와 대문예, 두 손자를 앞세운 대중상은 당나라 군사를 이끄는 장현우와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다. 대조영의 스승 손담은 초모한 군사 2천여 명에 5천 군사를 증원 받아 안시성 공략에 나선다. 손담은 야간 전투를 벌여 적들을 성 밖으로 유인하여 궤멸시키고 안시성을 점령했다. 이제는 기회를 보아 안동도호부를 깨뜨릴 계획이었다.
대조영은 손담의 주장을 받아들여 돌궐의 묵철가한에게 대문예와 아우 대야발을 사자로 보냈다. 대야발 일행이 돌궐의 지경에 들어서 밤을 보내다 이리떼를 만나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사달두와 사사란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묵철을 만나 화친의 약속을 받는다. 묵철은 대조영에게 달릴 때 붉은 땀을 흘린다는 명마, 한혈마를 징표로 주었다. 그런 과정에서 사사란이 대문예에게 연정을 품고 두 사람은 후일을 약속한다.
대중상은 거란군과 연합하여 숭주로 향하고 당 조정은 허흠적을 숭주로 보낸다. 허흠적은 싸움에 패하여 생포된다. 대조영은 오골성을 겁략하고 백암성을 빼앗게 했다. 유관에 머물던 이진충은 당나라 대군의 진병과 돌궐의 남진으로 사태가 급박해지자 허흠적을 끌고 가서 안동도호 배현규를 회유하라는 군령을 내린다. 그러나 허흠적은 오히려 싸우도록 배현규를 독려하자 화가 난 복지량이 허흠적의 목을 날려 버린다. 그 모습을 본 배현규는 복지량을 공격하여 그를 죽이고 본진까지 쳐들어가 거란군을 짓밟았다.
그 무렵 돌궐의 묵철가한은 양주를 공략하여 양주도독 허흠영을 사로잡고 당나라에 세 가지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첫째, 당나라에 빼앗긴 영토와 백성을 돌려받고, 둘째, 거란의 배후를 공격할 때 필요한 군자금을주며, 셋째, 당나라 황실과 국혼을 맺자는 것이었다. 가장 당황한 것은 거란이었다. 당나라는 묵철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며 결국 돌궐이 거란의 배후를 엄습할 것이 분명했다. 한편, 신성을 치기 위해 진병했던 고구려군도 기습을 노렸으나 계책을 미리 파악한 배현규에 의해 패퇴하고 말았다.
양주 함락에 놀란 당나라 조정이 묵철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약조했으나 묵철은 당나라를 믿지 않았고, 연합하여 당나라를 공격하자는 거란 이진충의 제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대조영에게 함께 거란을 치자는 서신을 보내왔다.
대중상의 의견에 따라 대조영은 걸사비우에게 1만 군사를 주어 3만으로 위장케 하고 거란이 보기에는 원군 같고 돌궐이 보기에는 거란을 배후에서 치려는 기세를 유지하게 하였다.
이진충과 손만영이 각각 영주와 창성을 지키게 되자 당나라 군사들이 그들을 멀찍이 에워쌌고 묵철이 남진하여 영주와 창성의 양도를 갈라놓았다. 이진충은 다친 군마와 부상병을 앞세워 당나라 군사들을 몰아쳤고 일단 승기를 잡자 더욱 강하게 당군을 추격했다. 그러다 그만 돌궐의 군사를 만나게 되자 그들을 피하여 당나라 진영을 뚫고 영주로 입성하려 하였으나 도중에 매복에 걸려 그만 황천객이 되고 말았다.
이진충이 죽자 한 차례 실랑이가 있었지만 손만영이 그 뒤를 이었다. 이후 손만영은 돌궐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어 이진충의 원수를 갚았다. 돌궐군은 참패를 설욕하기 위해 송막을 기습하여 이진충과 손만영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무상가한에 올라 기세가 등등해진 손만영은 기세 좋던 돌궐 군사들을 거침없이 깨뜨리고 돌궐 지경까지 추격했다. 그리고는 대조영의 도움을 받아 돌궐과 당나라의 진병을 막을 수 있었다. 거란 대장군 이해고와 고구려 대야발의 연합군이 기주를 함락시켰다.
박작성 근처에서 고구려 유민이 군사를 초모한다는 풍문을 듣고 주석모, 대화인, 손재가 나섰다. 그들은 복국을 핑계로 유민들을 갈취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던 검연각과 안무를 제압했다. 주석모와 대화인은 부부의 연을 맺는다.
요서와 요동 일대에 매서운 겨울이 닥쳤다. 손만영의 거란군은 겨울이 깊어 갈수록 더욱 용맹을 떨쳤고 당군을 몰아쳐 여러 성을 깨뜨리고 영역을 넓혀 나갔다. 국호를 주로 바꾼 당제 무측천은 45만의 정예병을 투입하여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다. 손만영은 대조영을 찾아 화친을 청하고 대조영은 원군을 지원하기로 했다. 봄이 오고 당나라 18만 정병이 영주를 겨냥해 진격하자 손만영은 고구려 군사 3만에 말갈과 해의 군사 2만, 그리고 휘하의 7만을 합친 12만의 대군으로 협석곡으로 진군했다.
전투가 벌어지고 당군이 무서운 기세로 공격했다. 그때 갑자기 당나라 진영에서 퇴각을 알리는 징소리가 급하게 울렸다. 연합군이 선봉에 포로로 잡혔던 당나라 군사를 내세웠던 것을 당나라 장수 왕효걸이 눈치 챈 것이었다. 연합군의 차도살인(借刀殺人) 전술이었다.
야간 공격을 감행한 연합군은 허수아비를 안고 화살을 막으며 치고 들었고 그렇게 밀고 밀리는 전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벌어졌다. 서로가 물러설 수 없는 전황이었다. 그러나 혈전을 벌인지 사흘이 지나면서 당군이 밀리기 시작했고 협석곡 동쪽까지 추격당한 왕효걸은 연합군에게 협공을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당나라의 대참패였다.
묵철은 함께 유주를 공략하자는 손만영의 제안을 거절했고 대조영은 손만영과 함께 유주를 공격하여 전리품을 나눠 가졌다. 진노한 무측천은 묵철의 청을 수락하기로 했다. 묵철가한은 연합군이 유주를 공격하자 즉시 거란의 본거지 중의 하나인 유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당나라 조정이 묵철의 요구를 들어주어 돌궐군이 출병하게 하고 다시 수십만 대군을 진발시켰다 한다. 거란이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을 예상한 대조영 진영에서는 위계로써 나라를 세우고 당나라에 복속하는 척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고구려와 말갈은 잔치를 크게 벌여 각각 진국과 허국을 선포하고 대중상과 걸사비우가 등극하는 한편, 포로들을 석방하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복속을 청했고 그 사실을 돌궐의 묵철에게도 알렸다. 손만영은 고구려의 복국 선포가 위계임을 간파했으며 하북을 공략하여 돌궐의 진병을 멈추고자 한다. 중원 깊숙이 서진하던 거란군은 당나라 대군과 돌궐군의 협공에 전진을 멈추었다. 해족의 수령 이석명이 묵철가한에게 항복한 후 거란을 향해 창끝을 겨누었고 습 또한 돌궐에 항복했다.
거란은 전후좌우로 60만 대군에게 포위된 상황이었다. 손만영은 급히 모든 군사를 영주성으로 회군시켰다. 새벽부터 비가 내리는 날 기습전을 벌이지만 당나라 궁노수들에게 밀려 퇴각을 하였고 야율사로 역시 돌궐을 맞아 전투를 벌이다 패해 퇴각했다.
당나라 군사들이 영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손만영은 성을 떠나 혈로를 뚫었다. 맹장 야율사로가 영주성을 사수하다 전사했고 군사들이 전멸했단다. 손만영이 고구려 정주성에 의탁하자 날마다 패잔병과 부상병들이 무리지어 정주성으로 몰려 들었다.
당나라 장구철이 손만영에게 항복을 권하는 군첩을 보냈다. 장구철이 이끄는 대군이 정주성에 도달했다는 급보를 들고 손만영의 방문을 연 역밀은 깜짝 놀라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피범벅이 된 이부자리에 머리 없는 손만영의 시신이 반듯이 눕혀져 있었다. 한 때 그의 비복이었다가 시위낭장이 된 노궁노가 호원랑에게 혹하여 섬기던 주인의 목을 벤 것이었다. 노궁노는 손만영이 수급을 들고 당나라 장구철의 진영을 찾았다. 이진충이 전사한 지 꼭 이홉 달 만에, 영주 봉기를 일으킨 지 일 년 여드레 만에 손만영은 머리 없는 귀신이 되어 저승길을 밟았다.
정주성을 벗어난 거란의 이해고와 측근들은 고구려로 가자는 역밀의 말을 듣지 않았고 역밀과 개례를 없애기로 모의하였다. 이해고가 개례와 항복을 막던 역밀의 두 아들을 죽이고 당나라에 항복했다. 이해고가 항복하자 대조영은 당나라와 돌궐을 걱정하게 되었다 그러자 안무와 검연각이 찾아와 계책을 상신하여 허락을 받는다. 안무와 검연각은 3천2백의 군사와 함께 당군의 복장을 하고 돌궐을 친 다음 다시 돌궐의 복장을 하고 당군을 격파하고 돌아온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이해고 일당의 처리를 놓고 다른 주장들이 있었으나 사면하고 벼슬을 내렸다. 을유(697)년 9월 9일, 무측천은 반란이 평정되었다고 결론짓고 사면령을 내린 후 대중상을 진국공에 봉하고 말갈수령 걸사비우를 호국공에 봉했다.
고구려 진영에서는 도읍지를 정하는데 의견이 분분하였다. 태백산과 홀한해, 동모산이 거론되었다. 동진을 계속하던 대중상은 백암성에서 무측천의 칙서를 들고 거들먹거리는 당나라 사신 이걸명을 크게 꾸짖어 돌려 보내고 그 모습을 본 걸사비우는 급히 말을 몰아 말갈군 행영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