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 3
원백대 / 보람 / 1995년 12월
평점 :
절판


女皇帝 則天武后

                                                                                                           原百代

   

[ 3 ]

모반의 소용돌이

 

  황후가 된 무조는 고종이 폐후 왕씨와 숙비 소씨를 찾았다는 애기를 듣고는 그녀들에게 태형을 내려 죽게 한다. 두 여인이 원한을 품고 죽으면서 특히 소씨는 죽어 고양이가 되어 쥐로 다시 태어나는 무후의 목젖을 물어 끊어 죽이겠다는 저주를 퍼붓는다. 그 후 후궁에는 고양이 사육이 금지 되었으며 밤이면 죽은 두 여인의 혼령과 고양이가 자주 출몰하여 시녀들과 궁녀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무후는 한 치의 동요나 약함도 보이지 않고 당당한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아랫사람들을 감탄시킨다.

 

  그 후로 망령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지만 무후는 혼자서 자주 망령에 시달림을 받게 되고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었다. 망령 소동이 진정된 후에도 무후는 거처를 태극궁 동북쪽에 위치한 대명궁으로 옮기는데 망령을 이용하기도 한다. 무후의 후광으로 승진된 배다른 오빠 둘과 사촌 오빠 둘이 양씨에게 인사차 들렀다가 오만하게 굴었다는 얘기를 들은 무후는 그들을 원지로 좌천시켜 버리자 조신들은 그것이 외척을 멀리하는 사려 깊은 조치라고 크게 환영을 한다.

 

  태자 충이 자진 퇴위를 청원하고 무후의 큰 아들 홍이 태자가 된다. 장손 무기는 여전히 정권의 최고 관직에 있었지만 이미 실권은 그의 손을 떠나고 있었다. 무씨 입후 제 1의 공로자가 된 이의부는 갑자기 분에 넘치는 군총을 입자 부하들로부터 뇌물을 거두고 잔인한 보복을 하는 등 표리부동하고 음험한 짓을 계속하여 당시 사람들은 의부의 웃음 속에는 비수가 숨겨있다며 그를 이묘(李描)라고 불렀으며 그의 야비한 행동에 분개한 단보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를 이용할 목적인 무후의 입김으로 무마되기도 하였다.

 

  무후가 고종의 제 7 황자인 셋째 아들을 철()을 출산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전의를 가다듬어 무후의 입후를 반대했던 무기 일파의 주요 인물인 한원, 내제, 저수량, 유석을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 이 세상의 끝이라 여기는 곳으로 좌천시켜 버린다. 그리고 무기의 바로 발밑에 해당하는 그의 친척들도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좌천시켜 버리더니 모반을 핑계로 그 역시도 좌천시켜 유폐시켜 버린다. 무기 일파에 대한 치죄는 계속되어 그들의 가족은 물론 친척까지 참살당하거나 유배되었고 그 후 그는 결국 자결한다.

 

  무후는 또한 숙적 무기 일파를 고립시키고 제거해 나가는 한편, 태종 때 편찬한 씨족지에 자신의 일족을 가장 높은 문벌의 명가로 등재하고 그 이름을 성씨록으로 바꾸기까지 하여 세상의 비웃음을 사기도 한다.

 

  고종은 아버지 태종을 닮아 중풍을 앓고 있었는데 이 무렵부터 지병이 또다시 악화되어 심한 두통과 현기증에 시달려 더 이상 정무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무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지만 몇 달 후 고종의 지병은 쾌유되었다. 무후는 네 번째 사내아이를 낳았고 욱륜(旭輪)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 때 양씨와 함께 산후 조리를 위하여 입궐했던 큰 딸 한국 부인이 다시 고종과 은밀한 관계를 맺었다가 급사한 시체로 발견된다. 무후의 밀명으로 독살되었다느니 무후의 보복이 두려워 자살했을 것이라느니 온갖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한국 부인이 비명횡사한 후 언니의 외동딸은 위국 부인이 되어 빈번히 궁중을 출입하고 있었다. 고종은 이 처녀에게 마음을 두기 시작했고 그녀 또한 어머니가 무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믿고는 복수심에서 의도적으로 고종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무후 역시 이런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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