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발행판 - 유주현 장편소설 - 소설 대원군 전5권 (각P335)
신원문화사 / 1993년 2월
평점 :


소설 대원군

                                                                                                            유주현

   

  [ 5 ]

 

  왕비 민씨는 어렵게 얻었던 왕자를 잃고부터 생각이 많아지고 성정도 표독스러워졌다. 정나인을 시켜 상감이 침전에 들 때 병풍 뒤에 몸을 숨겼다가 뒷문으로 빠져나가게 하여 상감의 투기를 일으켜 놓았다. 며칠이 지난 밤 민씨 일당과 조성하, 영하 형제와 이유원이 모여 면암 최익현으로 하여금 상소를 하게 할 모의를 꾸민다.

 

  최익현의 대원군을 헐뜯는 상소가 가납되어 그는 동부승지에서 호조참판으로 승진하였다. 대원군 편에서도 최익현의 상소를 물리치라는 상소를 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계원의 연서로 올리는 한편, 사간원과 사헌부를 비롯하여 성균관 유생들을 모두 동원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정국은 소연하기 시작했다. 민비의 교활한 사주를 받은 상감은 일단 최익현을 이용하여 임금의 친재로 정권을 잡을 계략을 진행시킨다. 이 순간의 주도권은 여자 민비가 쥐고 있었으며 그 동안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요직에 심복들을 심어 놓고 있었다. 그녀는 최익현의 또 한번의 상소를 계획한다.

 

  왕은 아직 행사해 보지도 못한 자신의 친재권이 또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가고 있는 광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이제 두 진영의 대치는 첨예화했다. 민비는 민승호를 통하여 그녀의 간계를 실행해 나가고 대원군은 천하장안을 시켜 그들 일당의 동정을 파악한 다음 상감을 만나러 대궐로 향한다. 그러나 이미 지시를 받은 수문장이 문을 열지 않아 대원군의 입궐을 저지한다. 그날 왕은 만기를 천재한다는 윤지를 내렸다. 대원군의 십년 세도가 하루아침에 허물어졌다.

 

  상심한 대원군은 선영에 가서 성묘하고 양주 직곡 산장에서 아들인 상감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열흘째가 되어도 임금은 나타나지 않았고 아들 재선이 와서 전국에 암행어사가 밀파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준다. 민비 일파는 대원군 주변 인물들의 죄과를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상지가 인솔하는 천하장안이 서울로 파견되었다.

 

  그 이틀 후 경복궁에 화재가 발생하여 중전의 침전이 소실되었다 한다. 민비는 이를 운현궁의 소행으로 엮으려하지만 증거가 없다. 그러던 중 왕자를 출산했다. 왕자는 약질이란다. 중전은 지밀에까지 무당을 불러들이고 내탕금을 물 쓰듯 뿌리고 있단다.

 

  동래 온천장의 요정에 일본인들이 모였다. 일본은 대원군이 갑자기 실각을 하자 조선 내정의 급변을 예견하여 일종의 첩보대를 밀파한 것이다. 그들의 예상대로 대원군의 수하였던 경상도 관찰사 김세호, 동래부사 정현덕, 부산훈도 안동준이 파직 유배되고 대일정책에도 변화가 생겼다.

 

  민승호에게 전달된 폭탄이 터져 그는 암살되었다. 운현궁을 지목하고 범인 색출에 나섰지만 단서조차 잡을 길이 없었다. 중전은 민태호의 아들 영익을 민승호의 양자로 보내 그의 뒤를 잇게 했다. 민규호가 이조판서 겸 도통사로 세도재상으로 등장했다. 민규호가 할 일은 대원군의 남은 세력들을 철저하게 뿌리 뽑고 왕자를 왕세자로 책립하여 민비의 지위를 확고하게 굳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왕자는 돌이 다 되어가도 걸음마는 고사하고 일어서지도 못했을 뿐 더러 온 몸에 수두가 생겨 부스럼투성이로 병치레가 심했다.

 

  중전은 왕자의 수복을 빈다고 허구한 날 궁중에서 치성과 굿과 무꾸리에 여념이 없었다. 전국 명산대찰에 산천 기도를 드리고 공양을 하게 했다. 중전이 어린 왕자를 위해 물 쓰듯 쓴 돈이 실로 막대했다. 왕실의 금고격인 내수사는 석 달이 못가서 바닥이 났다. 선혜청의 국고도 끌어다 써서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돈을 받고 벼슬을 팔기 시작했다. 벼슬을 산 사람들은 부임하자마자 돈을 긁어모았다. 이래저래 죽어나는 것은 백성뿐이었다.

 

  봄이 되자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연일 수 많은 상소문이 날아들었다. 심상치가 않았다. 민비는 눈썹 하나 까딱 안 했고 왕은 모르는 채 딴전을 피웠다. 민심을 교란하는 무리들은 모조리 잡아 극형에 처하라는 분부다. 민씨 일족의 태도는 강경일변도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조정의 원로대신들이 반발하고 나섰. 드디어 대원군이 1년 반 만에 운현궁으로 돌아왔다.

 

  일본 군함 운양호가 강화도에 포격을 하고 영종도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하고 물러갔다. 그러나 조정은 쉬쉬하고 유야무야로 넘어갔다. 바다 건너에서 그런 태풍이 일고 있거나 말거나 이 나라 조정에서는 도통 알 바가 아니었다. 오로지 정적제거의 악랄한 싸움에 몰두할 뿐이다.

 

  영의정 이최응의 집에 화약이 터졌다. 며칠 후 화적의 장물을 취급했다는 장가를 잡아들이고 그가 대원군의 측근인 신철균의 문객이라는 것을 알고는 신철균을 잡아서 문초하였다. 그러나 그는 운현궁과의 관련을 부인하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 대원군은 신철균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 주었다.

 

  어느 날 이상지는 맹인 점쟁이가 대원군의 죽음을 기원하고 그의 화상에 화살을 날리는 장면을 목격하고 대원군의 허락을 받고 그를 운현궁으로 납치해 온다. 와서 보니 그는 이하전이 죽게 된 화근을 제공한 바로 그 인물이었다. 대원군은 그를 국문하지 않고 풀어주었지만 그는 운현궁에서 풀려나 대궐로 가서 민비의 손에 참살 당했다.

 

  1876년 고종이 등극한 지 10년이 되는 병자년,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는 6척의 군함과 800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강화도 앞 바다로 침범해 왔다. 그들은 걸핏하면 대포를 쏘고 총질을 하면서 행패를 부리고 다녔다. 대원군에게 의견을 듣고자 하는 임금을 말리는 사람은 항상 민비였다. 이번에도 최익현은 상소문을 올려 왕과 조정대신들을 호되게 후려쳤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민심도 조정을 욕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22일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원군의 오랜 쇄국정책이 굴욕적인 조건으로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나라 형편도 세상 물정도 많이 변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닫는 민씨 척족 세력은 계속 거세어 가기만 했다. 이제 세도재상은 민태호고 알짜 권력은 민영익이 쥐고 있다는 것이다. 대원군의 아들 이재선을 옹립하려는 역모가 발각된 일이 있었다.

 

  1882년 임오년. 정월에 관례, 2월에 책빈례로 왕궁에서는 연일연야 잔치가 벌어졌다. 민비는 더욱 더 기승이다. 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전국의 명산과 대찰이 불공과 치성으로 떠들썩하다. 금강산에는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일만 이천 봉우리마다 돈 일천 냥, 쌀 한 섬, 소머리 하나, 베 한필씩이 공양되었다. 나라의 재정이야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닌 중전 민씨의 소행이었다. 큰 감투는 중간 감투를, 간 감투는 작은 감투를 시켜 갈퀴질을 했으며, 말직들은 백성들을 쥐어짰다.

 

  군인들의 급료가 자그마치 13개월이나 밀렸다. 더구나 두 종류의 군대가 생겨, 젊고 건장한 초록 군복의 별기군들은 일본의 신식 총에다 신식 훈련을 받으며 급료도 꼬박꼬박 거르지 않고 주었다. 그러나 나이 많은 구식 군인들은 언제 쫓겨날지도 모르는 판국이었다. 그러다가 6월 초닷샛날, 한 달 치 급료로 받은 쌀은 모래가 반인데다 썩은 쌀에 정량의 반도 되지 않았다. 군인들은 분노했고 항의 하고 다툼이 일어났다.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사건의 전말을 듣고 주모자를 체포하여 엄형에 처하라 불호령이다. 주모자들이 체포되어 갔고,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모인 군중의 수는 겉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운현궁의 이상지가 이들을 선동하고 나섰다. 무기를 탈취한 군인들의 눈에는 살기가 번뜩였다. 무위대장 이경하가 달아나고 일본공사관이 포위되었지만 공사 하나부사를 포함한 일행들은 무사히 빠져나가 본국 나가사끼로 탈출했다.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뒤챘다. 누구도 이 난국을 타개할 자신이 없었다. 임금은 운현궁에 특사를 보냈다. 그러나 궁궐은 이미 군인들이 쳐들어가 있었다. 군인들은 민비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민겸호를 살해하고 하나부사와 협상을 벌였던 김보현도 살해했다. 왕은 전권을 대원군에게 넘겼다. 모두 민비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민비는 그 난리 속에 무감 홍재희에 업혀 화개동 윤태준의 집으로 가서 숨어 있다가 여주로 도망가고 있었다. 도중에 촌 아낙네들이 자기를 험담하는 얘기를 듣고는 몇 달 후 대궐로 다시 들어갔을 때 그 마을을 집 한 채 남기지 않고 불태워 버리게 했다는 뒷 이야기도 있었다.

 

  대원군이 나선다고 조건없이 쉽게 수습될 성질의 난리가 아니었다. 대원군은 하는 수 없이 왕비가 죽었다고 공표한다. 흥인군이 난군들에 의해 참살을 당했다. 거드럭거리던 민씨 일족의 집은 거개가 평지풍파가 됐다. 국상이 발표되고 투옥되었던 선비들과 유배된 유생들이 방면되고 대원군을 옹호하다 귀양살이를 간 사람들이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때 청군이 입성한다. 주진영선사 김윤식과 천진에 머물고 있던 어윤중이 청국에 원병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중전 민씨의 소행임이 틀림없다. 내요(內擾)에 외병(外兵)을 끌어들이다니, 큰일날 짓이다. 대원군은 청군의 힘을 빌려 일군을 막아 보겠다고 생각하지만 청군의 장수들은 대원군을 유인, 납치하여 텐진으로 가서 그를 감금하다시피 한다. 그 틈을 타서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맺었다. 민비가 환궁했다. 그러나 하는 짓은 변함이 없이 똑 같다. 대궐 안에서 공공연히 굿판이 벌어진다.

 

  개화당이 혁명을 일으켜 수구당의 거두 조영하, 민태호, 민영목,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등을 살해하여 정권을 잡고 대원군의 환국을 요청했지만 청군의 반격으로 일본군이 패퇴하면서 개화당 정부는 3일만에 그 막을 내렸다. 홍영식, 박영교 등이 청군에게 목숨을 잃었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두 번의 변란을 겪은 왕과 왕비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왕비는 더 불안한 마음이었고 아라사 군대를 불러들여 일본과 청을 견제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아라사 공사 웨베르의 부인과 독일인 묄렌도르프와 친하게 지내면서 인아배청(引俄背淸) 정책을 채택했다. 이에 청나라는 대원군을 환국시켜 민비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다.

 

  대원군은 3년 만에 환국을 했다. 운현궁을 지키고 있던 이상지가 독살 당했다. 대원군은 운현궁의 대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민씨 일족 또한 대원군을 철저하게 고립시키는데 혈안이 되었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다시 돌아 올 기회를 엿보고 민비는 남자 구실을 못하는 왕세자로 인해 시름이 깊다. 운현궁에 자객이 들어 폭발물을 터뜨린다. 대원군의 수하들이 잡혀가서 호된 국문을 받는다. 대원군은 추선의 사망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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