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발행판 - 유주현 장편소설 - 소설 대원군 전5권 (각P335)
신원문화사 / 1993년 2월
평점 :


소설 대원군

                                                                                                            유주현

 [ 4 ]

 

  천주교인들은 서양인 선교사들을 이용하여 서양의 힘을 빌려 아라사인들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종삼, 홍봉주, 김면호가 건의서를 가지고 대원군을 찾아간다. 건의문에서 모욕감을 느끼기도 하였지만 대원군은 베르뉘 주교를 만나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남종삼은 개인적인 일로 시일을 늦추게 되고 베르뉘는 대원군을 만날 의사가 없다고 한다. 대원군은 화가 났다.

 

  창덕궁 희정당에서 연 이틀째 중신회의가 열렸다. 중신들은 모두 공맹을 숭상하는 유교에 젖어 있었다. 김병학과 이경재는 주문모 신부의 사건과 황사영의 백서 사건을 거론하며 사학의 금압을 주장한다. 드디어 대원군은 서교의 금압에 관한 교령 반포를 지시한다. 또다시 여린 중신회의에서 조대비의 교명이 낭독되었다. 사교도는 엄중 치죄하라.

 

  베르뉘와 홍봉주의 가족들이 체포되었다. 불과 이삼일 사이에 세명의 서양인 신부와 한명의 주교가 투옥되고 300명이 넘는 내국인 신도들이 체포되었다. 도주 중이던 남종삼도 체포되었다. 베르뉘 주교의 종복인 이선이가 유다로 둔갑을 해서 포졸들을 이끌고 신도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수시 도처에서 부작용도 있었다. 사원(私怨)을 가지고 분풀이를 하거나 무고하는 비행도 적잖았고 금품을 뜯어내어 사복을 채우는 무리들도 많았다. 하여간 서교의 금압령은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망나니들은 새남터에서 신도들의 목을 자르고 세검정에서 칼을 씻었다. 서울의 수구문 밖은 천주교도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그 썩는 냄새가 인근 사람들의 코를 막게 했다.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모조리 참살 당했다. 평양에서도 대구에서도 광주에서도 전주에서도 그랬다. 세계사에 일찍이 없었던 대량학살이었다. 3년 동안 죽은 자가 8천명이 넘었다. 그러나 이런 북새통에도 용케 살아남은 외국인 신부들이 있었고 그들은 이 나라 조정에 대한 무서운 보복책을 꾀한다.

 

  욕심이 과해진 초월은 자기가 대원군의 총애를 받는 기생인양 소문을 내어 재물을 챙기고는 운현궁의 청지기 이만복과 정을 통하면서 그를 이용하여 추선을 제거하고 대원군을 자기 집으로 모실 궁리를 한다. 천주교인이라 모함을 받은 추선의 집에서는 불상들만 발견되었고, 불륜을 저지른다는 추선의 집 담을 넘은 괴한을 잡아 문초하니 그는 이만복의 부탁으로 돈을 받고 그 짓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만복은 그 날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었다.

 

  상감은 열다섯 살이 되어 있었다. 철종의 대상(大祥)도 무사히 마치고 조대비를 위시한 궁중에선 왕비책립에 대한 만반의 준비가 진행되었다. 전국에 금혼령이 내렸고 승정원에 들어온 처자단자는 46, 초간택에서 우선 열 명의 처녀를 뽑고재간택에서는 6명이 밀려났다. 삼간택에서 드디어 왕비가 탄생했다. 이미 고인이 된 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친정 아저씨 민치록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었다. 대원군이 백낙시절 김병학과 사돈되기로 약조했었고 삼간택에까지 남아 형식적이나마 민씨 처녀와 겨루게 되었지만 외척세도를 생각하여 김가네 딸을 배제시켰다.

 

  상감의 가롓날 대원군은 요사스러운 꿈을 꾼다. 노랑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처녀색시가 도끼로 용마루를 찍고 있었다. 구경꾼이 모였고 아무도 말리지 않았으며 누구도 그의 명령도 듣지 않았다. 대원군을 그 자리에 쓰러져 도와 달라고 소리치다 잠에서 깨었다. 딸의 가례를 보기 위해 부부인 이씨는 몰래 궁궐로 숨어들었다가 그동안 상감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귀인을 보게 된다.

 

  개를 잡아먹는 이상한 풍조가 떠돌고 있었다. 개고기를 먹는 풍습이 전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반 상민들은 삼복 때 복놀이 복고기로 개를 먹었다. 그런데 최근엔 반상을 가리지 않고 천주교 신자들이 집에서 기르던 개를 때려잡았다. 천주교가 박해를 받으면서 서로 비밀연락을 위해 밤중에 몰래 내왕하다가 개가 짖어대는 바람에 화를 입었다는 얘기며 반대로 포졸의 접근을 알고 미리 피신해서 무사했던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틈에 천주교 신자들은 개를 없애야 하고 귀한 손님에게는 개를 잡아 대접하는 것으로 풍습이 되어 버렸다.

 

  이래저래 세월은 어수선하고 대원군에 대한 세평은 잘한다, 잘못한다가 갈려지기 시작했다. 교동 나합의 집에서 김씨 일문이 회집했다는 보고를 받은 대원군은 나합을 불러 회의내용을 문초하지만 나합은 거리낌 없이 당당했다. 대원군은 부인 민씨의 휴양을 빌미로 김흥근의 별장을 뺏다시피 한다.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미국 상선 셔먼호가 습격을 받아 불타고 선원들이 타 죽었다. 상감은 가례 후에도 이귀인의 처소에만 들른다는 소문이다. 이귀인이 태기가 있는 것 같아 진맥을 하니 태기가 아니라 체기란다. 하지만 본인은 임신이라며 두 달이 넘었단다.

 

  1867918, 경기도 남양만에 정체를알 수 없는 이양선(異樣船) 3척이 나타났다. 이들은 불국의 선박으로 천주교 금압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에 침공해 온 것이라고 한다. 한강수로가 막히자 식량과 생활필수품이 귀하여지고 민심이 흉흉해졌다. 악질 관헌들은 다시 강화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수사명령을 빙자해서 금품을 우려내고 개인끼리의 이해싸움에 끼어들어 악행을 마구 저질렀다. 경복궁 중건 공사도 중단 상태에 빠지고 인부들은 주변의 색주가로 몰려들어 난잡하게 놀아댔다. 관비지만 여순경의 직능을 가지고 있는 다모를 동원하여 매음녀들을 단속하게 한다.

 

  일단 물러났던 불국의 함대가 재침해 왔다. 군함은 7척이었다. 이런 사태를 미리 예견했던 대원군은 조신회의를 소집하고 임전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한다. 불란서 군대가 강화도에 상륙했다. 음력 98일 새벽 불란서군의 선공으로 드디어 전투가 벌어졌다. 강화성 남문은 어처구니없게 함락되었다. 강화성 안의 장령전을 비롯하여 모든 관아가 적에게 점거 당하였고 80문의 대포와 6천여 정의 총기를 비롯한 군기(軍器)를 빼앗겼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금은보화와 대량의 전곡은 물론 사고와 관아 소장의 귀중도서도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불군의 총사령관 로즈는 선교사의 살해를 교사한 당사자를 즉시 엄중 처벌하고 전권대사를 임명하여 조약을 체결토록 하라는 협박장을 보내왔다. 대원군은 이를 묵살하고 오로지 전투력 강화에 여념이 없었다.

 

  강화산성을 점거하고 살인, 방화, 약탈, 겁탈을 자행하던 불란서군의 횡포에 백성들은 단결해 갔다. 문수산성과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한 그들은 강화섬의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패주해 갔다. 이른바 병인양요는 끝났다. 그러나 불란서군의 두 차례에 걸친 강화도 침범은 쇄국정책을 더욱 굳히게 만들었다.

 

  경복궁 공사가 다시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만 화재가 발생해서 전국에서 고르고 골라 쌓아둔 그 좋은 목재들이 숫검정이 되어 버렸다. 대원군은 원납전 제도를 강화하고 더 많은 노역 동원을 지시한다. 재정이 모자라면 원납전 일만 냥을 내는 상민에게 벼슬도 주고, 세율도 높이고, 서울의 사대문을 드나드는 백성에게 문세(門稅)를 징수하게 한다. 새로이 당백전을 주조하여 엽전 백배로 쓰게 했다. 대원군의 이러한 무리한 공역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게 되자 그의 독재를 탄핵하는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다. 유학의 거성 이항로와 그의 수제자 최익현이 소문()을 보내 온다.

 

  드디어 신궁의 중요한 전각들이 낙성이 되었다. 대원군은 이날 이후 심한 피로를 느껴 의욕이 없다. 부인 민씨의 권유로 강화로 추선을 만나러 가는 길에 들른 주막에서 민심을 듣는다. 추선과 몇일을 보내고 강화를 떠날 무렵 창덕궁 낙선재 별실에서는 대원군의 중형인 흥인군 이최응과 민승호, 조성하, 영하 형제가 자리를 함께하고 대원군을 성토하고 있었다. 대원군이 조정과 상의도 없이 독단으로 효종이 북벌에 대한 군자금으로 비원 주합루 마루 밑에 묻어 놓은 수천 근의 은괴를 파내어 경복궁 조영비로 전용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상감과 중전, 조대비에게 각각 알리게 되고 그들은 단식투쟁을 시작하고 독배를 마실 준비를 한단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은 창덕궁으로 들어가 자신이 마실 독배도 준비시키게 하니 상감과 조대비는 어쩔 수 없이 사건을 무마시킨다. 1868년 무진년. 경복궁이 드디어 완성되고 국왕과 왕실이 새로 준공된 경복궁으로 옮겨 갔다.

 

  왕실에서도 경사가 났다. 이귀인이 왕자를 낳았고 완화군이라고 봉군했다. 질투와 불안감을 느낀 민비는 자주 이귀인의 처소를 찾아가 본부인으로서 너그럽고 인자한 마음씨를 이귀인에게 보여 주었다. 상감은 애꾸눈 박유붕을 불러 왕자의 관상을 보게 하지만 박유붕은 조금만 두고 보면 알 것이라며 상감의 재촉에도 그 결과를 얘기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날 이후 그는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완화군이 홍역에 걸렸다가 고비를 넘기고 사후 조리 중이었다. 그런데 민비가 산삼을 줘서 달여 먹이게 한다. 열병에 삼든 약을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왕자가 죽었다. 산삼을 달여 먹고 펄떡펄떡 뛰다가 기어코 죽고 말았다. 관련 궁인들이 불려가서 국문을 받았지만 범증을 밝혀내지 못한다.

 

  민비는 오빠 민승호를 자주 지밀로 불러들여 밤이 깊도록 밀담을 나누기 일쑤였다. 민승호는 대원군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인물들과 잦은 접촉을 가졌다. 흥인군 이최응, 조성하, 영하 형제, 조두순, 최익현 등이 민씨네 문중의 만규호, 민겸호, 민태호의 패와 갑자기 친해졌다. 함경감사 시절 돈바리까지 실려 보내던 이유원도 그 민씨네 문중과 급속도로 접근되고 있었다. 운현궁의 정보망도 대강 알고, 대원군은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펠트라는 서양 해적이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글하는 일이 있었다. 완화군을 잃고 실신 상태로 나날을 보내던 이귀인이 죽었다. 이제 젊은 왕은 민비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대원군은 무서운 고독에 빠질 때가 잦기 시작했다. 아들은 자라 성년이 되었고 주위에서 조차 자기를 적으로 돌리는 듯한 눈초리를 자주 느껴야 했다.

 

  1871년 신미년, 대원군이 집정한 지 8년째다. 미국 함대가 남양만에 나타났다. 병인년에 미국 상선을 불태운데 대한 보복으로 또다시 전화(戰火)는 서해를 낮밤없이 밝혔다. 대원군은 척화론(斥和論) 발표하였고 그들은 마침내 물러났다. 른바 신미양요다.

 

  일본인들의 정한론은 오래 전부터 싹터 왔다. 조선의 민심은 흉흉해지기 시작했고 정적들은 이를 모두 대원군의 쇄국주의 탓으로 돌리고 그를 고립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민비가 왕자를 낳았으나 죽고 말았다. 그러자 민비는 그것을 운현궁의 보복으로 몰아가면서 상감에게 친정하기를 계속 부추긴다. 하지만 대원군은 민비 일파의 암세포처럼 커가는 조직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왜인들의 발호를 막을 궁리에 골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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