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조선총독부 (1~5묶음판매)
배영사 / 1993년 1월
평점 :


소설 조선총독부

                                                                                                            유주현

[제 2 권]

 

(---1권에 이어---)

   데라우치는 고종이나 순종을 일본으로 건너가게 하여 일본 천황 앞에 무릎을 꿇도록 해 보자 하였으나 생각을 바꿔 박람회를 개최할 계획을 세운다. 그런 중에서도 그들은 조선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낱낱이 수집하고 있었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흥사단, 하와이의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국민회,중국 땅에 망명한 신규식의 동제사 등. 국내에서는 독립의군부사건이 발각되기도 하였으나 지하운동 조직으로 나선 광복단에 대해서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호남선과 경의선 철도가 완공되고 조선호텔도 낙성을 봤다. 드디어 조선총독부 시정 5주년기념 물산공진회가 개최되었다. 911일부터 시작된 공진회는 10월 말까지 계속되어 도합 120만 명의 구경꾼이 동원됐다.

 1916년 봄에 데라우치는 천하명당 경복궁 자리에 동양 최대의 웅장한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로 결정한다. 결정하면 실천하는 사나이 데라우치, 조선 민중의 반대나 민족적 감정쯤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 한 달 뒤 데라우치는 조선에서 물러나 총리가 되어 일본으로 떠났다.

  이토로부터 받은 일본 천황이 하사한 국화문장의 금시계를 퇴기 성춘희로부터 거금 1만원에 산 송병준은 제2대 총독 하세가와 환영연에서 거드름을 피운다. 하세가와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인물이었다.

 

  간악한 무리들은 또다시 고종이나 순종을 일본으로 건너가게 하여 일본 천황 앞에 무릎을 꿇도록 하는 동상(東上)과 천기봉사(天機奉伺) 공작을 진행한다. 하세가와의 지시를 받은 이완용이 고종에게 퇴짜를 맡자 윤비(순종비)의 백부 윤덕영이 고종을 못살게 괴롭히고는 억지로 허락을 받은 양 준비를 서두르게 한다.

 

  1917년은 봄, 여름이 다 가도록 전국적으로 혹심한 한발이 계속되었다. 그로 인해 무고한 조선 농민들이 피해자가 되는 사건들이 발생한다. 일인과 물꼬 싸움을 하던 조선 농부가 쇠스랑에 맞아 즉사하고, 일인 농장에서 품팔이 하던 젊은 임부가 겁탈을 당한 끝에 그 집에 불을 질러 일가족 네 사람이 몰살된 사건, 일인의 우물에서 물을 긷던 조선 처녀를 엽총으로 쏘아 죽인 부부가 함께 시체를 암매장하려다 발각되어 부락민들이 들고 일어난 피비린내 나는 사건 등.

 

  데라우치가 터전을 닦아놓은 것이지만 하세가와 부임 이래 야마가다 정무총감이 전담 수행한 일을 보면, 순종의 동상(東上)과 천기봉사(天機奉伺)로 조선 민중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 모욕하기. 토지조사 사업으로 하루아침에 땅을 잃은 농민들이 비렁뱅이가 되어 북간도로 건너간 일. 대전의 여파로 밀려온 호경기 속에 미곡검사령을 제정하여 우량미를 싼값으로 일본으로 실어가기. 무역을 장려한다고 금, , 철광석 등을 관세를 철폐하여 헐값으로 몽땅 실어내기. 2개의 사단을 용산과 나남에 상설하여 조선을 위압하고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활용. 대정친목회와 식산은행을 개설하여 친일 동화정책의 전위로 삼고 조선 땅 삼천리를 일본의 식민

지 경제 체제로 확립시키는 작업을 실시하는 일 등이었다.

 

  순종이 굴욕적인 도쿄 여행에서 돌아온 지 몇 달 안된 1917. 11. 10 창덕궁에 화재가 발생한다. 이완용은 이틈을 이용하여 순종을 고종과 함께 덕수궁에 있게 하고 창덕궁을 일본 황실에 헌납할 계획을 세우지만 이를 간파한 윤덕영에 의해 좌절되고 그 책임을 대정실업친목회 예병석에게 미루어 옥신각신 싸움을 벌인다. 친일의 깃발 아래 명목없이 물고 뜯는 이전투구(泥田鬪狗). 일본인은 비웃는다 선인! 아아, 너무나 파쟁을 좋아하는 조선인!”

 

  왕세자 이은과 이본궁방자(梨本宮方子) 여왕의 어혼약(御婚約) 소식이 전해진다. 결혼식을 4일 앞두고 고종이 서거한다. 결혼식은 연기되고 국장이 준비된다.

 

  김성수, 현상윤, 송진우는 일본 유학생 송계백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문과 거사 계획을 검토, 논의하고는 동지들을 규합하고 명망 높은 지도층을 모시기로 한다. 그리하여 육당 최남선 등을 포섭하고 최린 선생을 핵심 지도자로 추대한다. 천도교 3대 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도 참여하게 된다. 1919. 2. 8 도쿄에서 일본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벌였으며 고종의 국상 이틀 전인 1919. 3. 1 정오를 기하여 수많은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만세 소리와 함께 시위행진에 들어간다. “대한독립 만세! 만만세!”

 

吾等我 朝鮮獨立國임과 朝鮮人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이 독립선언서는 육당 최남선이 썼으며,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천도교 16, 대표 손병희. 기독교 15, 대표 이승훈. 불교 2, 대표 한용운)은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서 서명식을 가졌다.

 

  독립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일제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는 피비린내 나는 탄압정책을 철저하게 전개하였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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