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남부군 - 상,하 (완결)
두레 / 1988년 1월
평점 :


南部軍

                                                                                                              이 태

  이 태(李泰 1922. 11. 25 1997. 3. 6 ) 본명 이우태. 충북 제천 출생. 서울신문 기자, ‘합동통신기자로 근무. 6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주요작품으로는 남부군, 여순병란, 천왕봉 등이 있다.

 

  소설 태백산맥을 읽다가 등장하는 빨치산의 가공되거나 미화되지 않은 보다 사실적인 정보를 얻고자 읽게 되었다.

 

  이 작품은 6.25사변 중 남한 빨치산을 대표하던 남부군을 주제로한 체험적 수기이다. 남부군은 남한에서 활동한 최초의 조직적 좌익 게릴라 부대였고 특히 빨치산의 전설적 총수 이현상(李鉉相)의 직속부대였다.

 

  작가는 인민군의 서울 진입 후 평양의 조선중앙통신사 종군기자로 전주에 머물러 있다가 19509월 미군이 군산 앞바다의 오식도에 상륙하면서 후퇴의 길에 오른다. 후퇴의 길은 혼란스러웠다. 그와 일행들은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사령부의 대원이 되었다. 그들은 사변 전부터 야산대 활동을 해 오던 ()빨치를 조장으로 조를 편성하여 활동했다. 대원들은 잘 때도 신발을 벗지 않았으며 도당 간부, 여자, 남의 집 머슴살이하다가 온 사람 등 다양하였지만 그 중에 스무 살 안팎의 예쁘장한 소녀가 인기의 중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후 전사했다고 전해졌다.

 

  빨치산은 세 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이렇게 세 가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3()이라는 게 있는데 소리, 능선, 연기(밤에는 불빛)를 조심하라는 것이다. 특히 치명적인 실수는 오발이며, 오발하면 무조건 즉결처분이다. 보급투쟁 때는 조금도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 과오를 저지를 경우 조사나 해명 없이 구두 선고로 사형을 집행했다. 총알이 아깝다고 총창(총검의 북한 말)으로 집행하기도 했다. 아지트를 정하고 사고로 부대가 분산 됐을 때를 대비해 재집결할 수 있는 장소를 비상선으로 정했다.

 필자는 소대장을 맡았는데 소대원은 의용군 출신의 대학생, 남자 고등학생, 여고 졸업반인 학생, 여공 등 경력이 다양했다. 여자 대원들도 잠자리 등 모든 것이 남자 대원과 구별이 없었다. 몇 번의 매복작전을 펼치고 회문산에 도달하여 역습을 받기도 하였다. 빨치산들은 군화가 부족하여 고무신, 짚세기, 또는 맨발이었다. 독수리병단으로 개편되고 백련산 기슭에서 파편상을 입고 며칠간 고열에 시달리며 도주를 하다가 촌로를 만나 환부를 수술하여 위급한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임실군당 유격대와 합동작전을 펼치던 독수리병단은 청웅보루대를 기습하기 직전 오발로 근거리 집중 사격을 받고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그 당시 빨치산들은 중공군의 개입이나 서울 재점령 등의 엄청난 사실을 전혀 몰랐을 정도로 일체의 정보로부터 차단되어 있었다. 몇 번의 청웅 습격이 실패하고 베트레에서 패주한다.

 

  독수리병단과 이별하고 사령부로 떠났다. 황계 통신분소를 설치하고 뉴스 통신을 수신할 수 있었다. 회문산을 포위 공격한 토벌군에 의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사령부는 회문산 탈출을 결정했다. 그 이후로 얼마 동안은 항상 이동하고 항상 교전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거창양민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195145월에 걸쳐 전염병이 빨치산을 엄습했다. 삽시간에 거의 반수의 대원이 앓아 누웠다(후에 이병은 재귀열로 밝혀졌다). 병에서 어느 정도 회복하고는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승리사단으로 차출되었다.

 

  이 승리사단은 여순반란사건의 반란군 잔여 세력이 지리산으로 도피해 들어가자 남로당에서는 이들을 유격대로 전력화할 필요를 느꼈으며 이 때 간부 출신의 이현상이 자진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이 반란군을 기간으로하여 부근의 야산대, 도피 중인 반란 동조 민간인 들을 규합하여 조직하게 된 것이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김일성은 평양방송을 통해 남한 빨치산에게 후방을 교란하여 인민군의 진격에 협조할 것을 되풀이 요구했다. 여러 조직의 빨치산들이 편성되어 전쟁에도 참여하고 후퇴도 하게 되었는데 결국 후방침투에 성공한 것은 이현상이 이끄는 제 4지대인 남부군뿐이었다. 전쟁 중에 이현상은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냥 중후한 인상을 주는 평범한 중키의 묵직하고 과묵한 중년의 사나이였다. 그는 모든 남부군 대원들로부터 흠앙을 받았으며 이름은커녕 직함조차 부르는 법이 없고 그저 선생님으로 불렸다. 송치골의 6개 도당(충청남북도, 전라남북고, 경상남북도) 의에서 도당 위원장들은 이현상의 지휘에 들게 되었다.

 

  51. 12월부터 52. 3월에 걸쳐 지리산 지구에 투입된 군경합동 토벌부대는 3개 사단 4만여 병력이었다. 그 대군이 주요 능선과 골짜기를 점령하고 밤이면 모닥불을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장식했지만 빨치산은 어디 발붙일 곳 없을 것 같은 그 틈새에서도 살아남았다. 봄부터 가을까지의 지리산은 신비의 세계였지만 겨울이 오면 그곳은 공포의 산으로 바뀐다. 변덕스러운 날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돌변하며 눈은 내리는 대로 쌓이기만 하여 지형에 따라 2미터가 넘는 적설을 이루어 이듬해 5월에 들어서야 녹는다.

 

  베트콩이 30년의 밀림생활을 견뎌낸 것은 월맹이라는 보급원이 있었고 시베리아나 만주의 빨치산들도 일정한 해방지구를 갖고 있었기에 장기 항전이 가능했다. 그러나 남한 빨치산은 북한과의 왕래 단절, 노획이나 약탈에 의존한 보급의 부족에 의약품이 없어서 고립되고 약화되어 갈 수 밖에 없었다.

 

  국군의 동계작전이 시작되면서 습격 당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사상자들이 늘어갔다. 그런 중에도 자기비판과 처형이 이루어진다. 백무골에서는 6명의 젊은이가 동사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들은 밤 새 도피 행군을 한 뒤 몸을 녹이기 위해 모닥불을 피워 놓고 불가에 앉아 있다가 스르르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남부군 수뇌부가 모두 포위되어 격전을 치른다. 완강한 저항으로 다행히 날이 어두워지고 토벌군이 물러나 위기를 모면했다.

 

  ‘2차 군사작전에서 남부군 기동사단은 괴멸적 타격을 입었다. 발가락 손가락이 썩어 들어가는 동상 또한 크고 무서운 피해를 주었다. 쫓기고 쫓기다 홀로 낙오하게 되었다. 인간이 사는 세계가 그리워져 통증이 심한 발을 질질 끌며 산기슭을 내려섰다.

 

  그 이후 1953. 9. 17일에서 18일 사이에 이현상은 쓰러졌다고 전해졌으며 김일성에 의해서도 완전 적으로 간주됐다. 1953. 12. 1부터 전개한 국군 5사단의 겨울철 토벌작전이 1954. 2월에 종료되면서 1949년 이래 5년 여에 걸친 소백·지리산지구 공비토벌 교전 10,717, 전몰 군경의 수가 6,333명에 달하고 빨치산 사망자 1만 수천, 피아 2만의 생령이 희생된 남한 빨치산의 처절했던 역사도 끝이 났.

  우리의 아픈 역사의 한 부분을 깊게 들여다 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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