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만나러 간다 뉴욕 도시의 역사를 만든 인물들
베티나 빈터펠트 지음, 장혜경 옮김 / 터치아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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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대도시가 그러하듯 뉴욕 역시 도시의 인상을 좌우하는 것은 건물이 아니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죽었거나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이 책에서 소개할 20명의 뉴요커들은 뉴욕을 찾아온 당신에게 여행 가이드처럼 친절하게 뉴욕을 안내해 줄 것이다. [p. 7]



뉴암스테르담에서 뉴욕으로


널리 알려져 있듯이 뉴욕의 전신은 네덜란드의 식민지 뉴암스테르담이다.

네델란드인들은 영국의 미 대륙 지배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식민지를 건설했지만 운영 비용은 최소화하고자 했다.

~ 중략 ~

게다가 북미는 향신료나 설탕, 차같이 뚜렷한 경제적 수익 모델이 없어서 상대적으로 우선순위가 낮은 지역이었다.1)


그러다 보니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뉴암스테르담은 서서히 와해되고 있었다. 이에 네덜란드에서는 피터르 스타위버산트(Pieter Stuyvesant, 1612~1672)을 총독으로 임명하여 질서 회복을 꾀했다. 그는 뉴 할렘으로 가는 도로를 닦고, 항만 시설을 넓혔으며 인디언과 영국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700미터 길이의 담을 쌓는 등 낙후된 작은 항구를 소도시로 변화시켰다. 그의 노력으로 기반이 닦이고 성장하던 뉴암스테르담에 1664년 영국인이 침략했다. 이때 뉴암스테르담은 이미 18개 언어가 사용2)되는 코즈모폴리턴의 도시로 변했기에, 식민지 총독이 항전(抗戰)하려 했으나 주민들의 반발로 영국의 식민지 뉴욕이 되었다.



예술가의 성지(聖地)


New York! ‘예술가의 성지(聖地)’라고도 불리는 도시.


먼저 음악부터 보면, 이곳 뉴욕은 전위적이거나 기존의 흐름을 깨는 음악이 많이 탄생한 곳이다. 예컨대 1970년대의 펑크 록, 1990년대의 얼터너티브 등은 이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꿨다고 평가되는 영국의 전설적인 록밴드 비틀즈의 존 레논(John Lennon, 1940~1980)가 비틀즈 탈퇴 후 정착해서 솔로 활동한 곳이기도 하다. 그는 뉴요커보다 더 뉴욕을 사랑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뉴욕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뉴욕은 재즈의 도시라는 별명에 맞게 재즈 문화를 꽃피운 곳이기도 하다. 재즈 문화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1901~1971)이 살았던 퀸스의 저택은 이제 뉴욕을 대표하는 유명인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코스에 포함되는, ‘루이 암스트롱 하우스 박물관이 되었다.


미국의 클래식 역사에 있어서도 뉴욕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바로 유럽 클래식과 미국 재즈를 섞어 가장 미국적인 재즈 심포니 <랩소디 인 블루(Rhapsody in Blue>(1924)를 작곡한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 1898~1937) 덕분이다.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이끈 레너드 번스타인은 <랩소디 인 블루>


이것은 살아 숨 쉬는 미국이다. 조지가 너무나 잘 알았던 미국의 대도시 생활, 미국 사람들, 미국의 라이프스타일, 미국의 힘, 미국의 위대함이다.” [p. 44]


라고 정의했을 정도다. 그의 또 다른 걸작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1935)도 가장 미국적인 오페라 혹은 뮤지컬로 꼽힌다.


고전을 재해석했다고 볼 수 있는, 뉴욕판 로미오와 줄리엣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1957)를 작곡한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는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도 유명하다.


영화 쪽으로 눈을 돌리면,

우디 앨런(Woody Allen, 1935~ )의 가장 우아한 뉴욕 영화라고 하는 <맨해튼>(1979)


“1, 그는 뉴욕을 숭배했다. 아니 터무니없을 정도로 그곳을 우상화했다.” 자신이 얼마나 뉴욕을 사랑하는지 고백하는 아이작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인상적인 도입부[p. 115]


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우디 앨런이


나에게 뉴욕은 항상 마법과 흥분, 기쁨의 장소다. 뉴욕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절대 살고 싶지 않다.” [p. 110]

라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게 들린다.


외적 역할과 내적 감정을 녹여 하나로 만들라는 콘스탄틴 스타니슬라브스키(Константи́н Станисла́вский, 1863~1938)의 이론을 기초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이론을 활용해 더욱 확대,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는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 기법을 창시한 리 스트라스버그(Lee Strasberg, 1901~1982)도 빼먹을 수 없다. 그가 책임자로 있었던 연기의 명당 액터스 스튜디오(The Actors Studio)’  리 스트라스버그 연기학교(The Lee Strasberg Theatre & Film Institute)’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비열한 거리(Mean Streets)>(1973), <대부 2(The Godfather: Part 2)>(1974), <택시 드라이버>(1976), <성난 황소(Raging Bull)>(1980) 등으로 유명한 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 1943~)는 뉴욕 최고의 성격 배우로 꼽히며, 현대의 뉴욕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도 불린다.


문학부분에서는 <뉴욕 3부작(The New York Trilogy)>(1987), <달의 궁전(Moon Palace)>(1989)으로 유명한 폴 오스터(Paul Auster, 1947~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The Blindfold)>(1992)시리 허스트베트(Siri Hustvedt, 1955~ ) 부부,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1948)의 작가이자 마릴린 먼로의 3번째 남편으로도 유명한 아서 밀러(Arthur Miller, 1915~2005), 1940년대 초 맨하탄의 아파트에 세 들어 사는 시골 출신 젊은 여성의 삶을 그린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1958)을 쓴 트루먼 커포티(Truman Capote, 1924~1984) 등이 있다.



뉴욕을 만든 또 다른 사람들


아메리카 드림의 성공 신화를 쌓은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 1839~1937)은 스탠더드 오일을 창립, 석유로 막대한 돈을 벌어 미국 최초의 백만장자가 됐다. 그러나 1911년 은퇴를 한 후 자산사업에 몰두했다. 록펠러 센터(1931~1939)와 리버사이드 교회(1927~1933)을 세웠으며, 그의 아들 존 D. 록펠러 2세는 국제연합의 뉴욕 유치를 위해 건설 부지 구입비용 850만 달러를 기부했다.


도시의 어둠을 담당하는 범죄조직을 대표하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마피아의 거물인 찰스 ‘러키’ 루치아노(Charles ‘Lucky’ Luciano, 1897~1962)와 범죄에 대한 강경한 입장으로 도시의 범죄율을 극적으로 감소시킨 뉴욕의 107대 시장 루돌프 줄리아니(Rudolph Giuliani, 1944~ )를 비교해서 보는 것도 뉴욕을 아는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이처럼 <그들을 만나러 간다 뉴욕>은 저자가 선정한 20명의 뉴요커에 대한 짧은 전기를 통해, 그들이 뉴욕이라는 도시에 남긴 발자취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동시에 현재의 뉴욕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펴보려는 취지에서 쓰여진 책이다.


뉴욕을 여행할 때, 이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그들의 삶을 떠올리며 보는 것도 뉴욕을 즐기는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저자가 선정한 20명 가운데 생존인물이 포함되어 있다 보니 시간의 경과에 따라 루돌프 줄리아니처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3)는 점이 아쉽다. 또한 단순한 전기(傳記)들을 모아 엮은 형식이기에 이것만으로 뉴욕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기에는 미흡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뉴욕의 특정 장소와 관련된 에피소드나 그들의 작품 가운데 뉴욕과 관련된 부분을 강조하여 이를 엮어보는 쪽이 더 인상적인 뉴욕 가이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1) 콜린 우다드, <분열하는 제국>, 정유진 옮김, (글항아리, 2017), pp. 100~101

2) 앞의 책 p. 97에 따르면 뉴프랑스의 예수회 신부였던 聖 이삭 조그(Issac Jogues, 1607~1646)는 뉴암스테르담의 인구가 500명인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18개였다고 추산했다고 한다.

3) 이용욱, “ '법질서 시장줄리아니의 몰락”, <경향신문> 2021.06.25 (https://m.khan.co.kr/opinion/yeojeok/article/202106252035005#c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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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박자 느려도 좋은 포르투갈
권호영 지음 / 푸른향기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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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박자 느린 여행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차례 봐서 그런 것일까? 왠지 청량한 파란색의 아줄레주(Azulejo) 타일 벽화가 인상적인 이 책의 표지에 친근감이 느껴졌다.

 

이 책, <반 박자 느려도 좋은 포르투갈>은 제목에서 여행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그래서 흔들의자나 등받이 의자에 기대고 옆 테이블에 놓인 커피 향기를 즐기며 봐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제목도 신호음이 들리자 마자 허겁지겁 뛰는 것이 아니라 ‘반 박자’의 여유를 가지고 출발하자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막상 책을 펼치고 보니

 

한 박자 반 정도 느린 편이다, 나는. 한 박자 서두른 게 분명했는데, 한 박자 반만큼 뒤처지니 다시 그만큼 뒤에 있다. [p. 4]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당황했다. 어? 도대체 어떤 여행을 하자는 거지? 설마 예전에 많은 사람들이 겪어 왔던 패키지 여행처럼 서두르는 여행을 하자는 것인가? 모두다 알다시피 해외 여행을 패키지로 출발하면 게임에서 주어진 퀘스트를 깨는 것처럼 정해진 무엇을 시간에 쫓기듯이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여행’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다가 인증 사진 몇 장을 남기거나 기념품 몇 개를 사오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 된 듯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다행히 저자의 포르투갈 여행은 한 박자 빠른 여행이 아니었다. 오히려 느리게 혹은 쉬엄쉬엄 순간순간을 즐기는 여행이었다.

 

햇살은 커다란 창이 난 곳으로 하염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하얀 커튼 그림자가 출렁거렸다기지개를 쭉 켜고 침대 옆에 놓인 디지털시계를 보니 오전 7시다. 블루투스 오디오를 켰다. 호텔 로비에서 틀어주는 음악을 방에서도 들을 수 있다. 포르투갈에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잔잔하고도 리드미컬한 노래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30분을 더 가만히 누워있었다[pp. 232~233]

 

그래. 여행이라면 이런 여유 정도는 누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행의 즐거움

 

또 다른 여행의 즐거움이라면 이국적인 먹거리일 것이다.

 

포르투갈에서 사람들은 요리를 하고, 함께 그 음식을 나눠 먹는 데 시간을 쏟는다. 서민들의 삶과 역사가 담긴 식재료로 만든 음식과 와인은 사람들이 많이 모일수록 더 맛있게 느껴진다. 천연 재료의 맛을 살린 담백한 요리가 많은 이유는 직접 잡은 물고기, 직접 키운 야채와 포도처럼 신선한 식재료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포르투갈에서는 음식의 역할이 중요하다. [p. 271]

 

포르투갈’하면 떠오르는 먹거리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르고,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에그타르트다. 포르투갈에서는 이를 ‘나타(nata)’, 정확히는 ‘파스텔 드 나타(pastel de nata)’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래서 에그타르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저자가 에스프레소 한 잔과 함께 먹으면 행복해진다는, 리스본 벨렘지구에 있는 ‘Pasteis de Belem’1)의 에그타르트의 맛이 궁금해졌다. 그때 함께 마신 에스프레소의 맛도!

사실 꼭 먹어봐야 한다는 음식은 기대치가 높아져서 어지간한 맛에는 실망하게 되기 쉽다. 심지어 나는 마카오에서 로즈 스토우즈 베이커리(Lord Stow’s Bakery [安德魯餠店])’의 에그타르트를 먹고, 맛은 있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이 곳의 에그타르트를 맛보지 않고 귀국한다면 세상의 그 어떤 비극보다도 슬픈 일’이라고 소개받은 에그타르트는 불행히도 내 영혼을 사로잡을 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와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가장 먼저 프랑스를 떠올린다. 하지만 포르투갈에도 와인이 있다. 그것도 영국에서 프랑스의 보르도 와인을 대체하기 위해 선택한! 그 와인이 포르투갈 북부 도우루(Douro) 강 상류 인근에서 생산되는 포트 와인이다. 와인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해 수십 개의 와이너리 투어가 있다는데, 저자는 포르투갈 여행기간이 충분하지 않거나 와이너리 투어에 큰 관심이 없다면 대형 와이너리를 추천한다. 그러면서, 저자가 좁은 골목을 오래 걸어가 발견했던 아우구스투스 와이너리 투어와 같은 각자의 신념과 전통을 이어가는 작은 와이너리의 매력도 피력한다.

 

포르투갈 요리의 대표적인 식재료가 소금절인 대구인 바갈라우(Bacalhau)로 알고 있었는데, 의외로 문어 요리를 찾는 장면도 많이 나왔고, 실제로 거의 매일 문어 요리를 먹은 것으로 보인다.

 

포르투갈에서 매일 먹는 문어 요리는 오늘도 예외가 없다. 운 대구와 오징어, 야채와 감자를 곁들여 식감을 달리하며 먹는 식사는 더 재미있다. [p. 139]

 

알고 보니 문어[Polvo]도 포르투갈 요리의 대표적인 식재료 가운데 하나였다.

 

 

먹거리만 여행의 즐거움이 아니다. 그저 이국적인 먹거리를 음미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여행을 가지 않고, 국내에 들어온 각 나라 요리의 전문점을 방문해도 무방할 일이다. 아무래도 즐길 거리도 있어야 여행에 흥이 난다.

한국의 판소리처럼 포르투갈에도 민속음악이 있다. ‘파두(Fado)2)’라고 하는 이 음악은 판소리와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되기도 한다.

 

첫 파두 레스트랑에서는 두 명씩 온 여행자들에게 4인 테이블을 공유하길 권하면서 빈자리가 없게끔 공간을 꽉 채웠다. 일하는 직원은 느렸고, 사람이 많아 주문이 밀렸다. 고급 레스토랑이 아니었기에 로컬 음식 위주로 파는 것 같았다. 심지어 영어 메뉴가 없어서 심혈을 기울여 골라야 했다. 와인을 마시면서 프랑스에서 왔다는 옆자리에 앉은 두 여행자들과 간단한 일상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졌다예상치 못한 순간이 불이 꺼졌고, 어둠 속에서도 분주하게 움직이던 직원은 테이블 위에 음식을 올려놓았다. 오브리가다(감사합니다).”라고 말한 그 순간 어디선가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목청 좋은 한 파디스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때의 강렬한 전율을 잊지 못한다. 여자와 남자가 주고받듯 노래를 하며, 레스토랑 그 좁은 테이블 사이를 조금씩 이동하기까지 한다. 사각지대에 있는 손님을 위한 배려였을까. 둘의 고혹적인 목소리에 빠져들 때쯤 저쪽 코너에서 다른 가수 한 명이 합류한다. 그렇게 또 한 명이 더 합류했고…. 자유롭게 노래하는 파디스트의 향연에 여행자들은 카메라를 꺼냈지만, 아무도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았고,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도 없었다. 어차피 어두워서 사진이 찍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은 그들의 표정과 연주와 목소리에만 집중했다. 밥이 나왔지만 배고픔도 잊은 채였다. 그 작은 로컬 레스토랑에서의 파두 가수들은 식당의 여행자들과 소통하며 노래하고 있었다밝은 노래는 몸짓으로, 슬픈 선율은 눈빛으로 허공에 만들어낸 그들의 손짓과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마음을 울리며. [pp. 169~170]

 

다만, 그녀가 들은 두 번째이자 보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들은 파두는 그때의 전율을 다시 한번 안겨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좀더 고급지고 세련된 멋을 얻는 대신 서민의 삶에서 나온 날 것의 감정을 놓친 것이 아닐까?

 

마치 홍보대사도 된 듯이 포르투갈 여행을 가는 사람마다 오비두스(Obidos)를 추천했다가 후회했다는 저자의 말처럼, 사람마다 혹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좋아하는 여행지의 느낌은 다 다를 것이다.

 

포르투갈에서 어디가 가장 좋았어?”하는 질문에 지금의 나는 다른 답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내가 겪고 있는 시절에 따라 대답은 달라질 것이다.

중략 ~

내가 겪은 계절과 당신의 계절의 온도는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p. 122]

 

우리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

 

1) 원조 에그타르트 맛집이라는 파스테이스 드 벨렘(Pasteis de Belem)에 대해서는 오봉파리(obonparis)라는 사이트의 포스팅(https://www.obonparis.com/ko/magazine/pasteis-de-belem-lisbon)이 유용하다.

2) 파두(Fado)는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서정적인 분위기의 민속 음악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사우다드(Saudade)가 서려 있다. 흔히 우리나라의 한(恨)과 비슷하다고 말하곤 하는데 나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원망이나 억울함, 안타까워 응어리진 마음과는 다르다. 향수, 그리움, 열정, 운명, 질투와 슬픔, 좌절과 용기가 어린 그들의 삶이자 정서이다. 그렇다고 한없이 우울해하거나 슬퍼할 이유도 없다. 삶의 질감이 드러나는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 파두라는 것일 뿐, 일상생활에서는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정도의 의미로도 가볍게 사용할 수도 있다고 하니까. [p.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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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속 건축 도시 속 건축 시리즈
김태일 지음 / 안그라픽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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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속 건축]을 보기에 앞서

 

한 도시의 건축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현재 존재하는 건축물 그 자체만 아니라 그 공간에 축적된 시간까지 함께 들여다보아야 한다. 나아가 그 공간에 살던 사람들의 삶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건축물과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이상현 교수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의 말을 변형하여 “그들이 건물을 빚어내고, 건물은 우리를 빚어낸다1)”고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제주(濟州)’라는 공간에 세워진 건축물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전통적인 제주의 건축물은 초가(草家)와 와가(瓦家)처럼 자연에 도전하고 적응한 결과의 산물이다. 아니, 한국 전통건축의 특징일지도 모른다.

 

중국이나 일본의 정원은 그 경계가 칼로 자른 것처럼 선명하고 명확합니다. ‘여기까지는 정원이고 여기까지는 사람이 앉아서 감상하는 곳’ 그런 식입니다. 경계뿐만 아니라 각 공간의 프로그램도 아주 정확합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정원은 그 경계를 손으로 선을 뭉개놓은 것처럼 아주 흐릿합니다. 심지어 그곳이 정원이지 그냥 풀들이 자라서 만들어진 풀밭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을 때고 있습니다. 자연의 일부가 인간의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공간이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살아 있는 것 같은 역동성이 느껴집니다.2)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권두에 있는 제주의 자연, 역사, 건축문화, 언어[방언] 등에 대한 간결한 소개는 의미 있다. 우리가 제주의 공간에 축적된 시간에 대해 찾아볼 수고를 절약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제주 속 건축]은

 

제주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크게 산남(山南, 서귀포시)과 산북(山北, 제주시)으로 나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이를 감안, 서귀포시와 제주시를 각각 세 개의 지역으로 나눠 155개의 건축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제주의 건축물 외에도 각각의 지역을 소개하는 파트의 마지막에 제주를 상징하는 일곱 가지 특별 요소인 오름, 곶자왈과 중산간, 돌하르방, 밭담과 산담, 용천수(湧泉水), 마을의 허한 공간으로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방사탑(防邪塔), 제주어민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관리하는 등대인 도대불 혹은 등명대(燈明臺)를 얘기한다. 왜냐하면, 어떻게 보면 건축물과 상관없다고 여길 이런 요소들에 의해 제주 건축의 개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먼저 ‘서귀포시 서부지역’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알뜨르 비행장(1937), 제주도산 현무암을 사용하여 벽체(壁體)를 쌓고 목조 트러스 위에 함석지붕을 씌우는 등 건축 기술자의 참여 없이 건축될 수 밖에 없었던 한국 전쟁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남제주 강병대(强兵臺) 교회(1952) 등과 승효상(承孝相, 1952~ )의 제주추사관(2010), 안도 다다오[安藤 忠雄, 1941~ ]의 본태(本態)박물관(2012)이타미 준으로 알려진 유동룡(庾東龍, 1937~2011)의 포도호텔(2001)과 방주교회(2009) 등 유명 건축가의 작품이 존재한다.

 

서귀포시 서부지역특히 대정지역은 예로부터 바람이 세고 땅이 거칠어 사람이 살기 어려웠던 곳이다. 그래서 유배의 공간, 항쟁의 공간으로 불린다.

중략 ~

이러한 이유로 서귀포시 서부지역은 조선시대의 유배 문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진 제주의 상징적 공간으로 평가 받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모진 환경에 피어난 추사의 예술혼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 뒤에 숨겨진 우리 역사의 깊고 짙은 슬픔을 느낄 수 있다. 현재는 이국적 경관에 상업자본이 접목되어 미술관, 박물관, 주거 시설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유명 건축가의 작품이 곳곳에 자리 잡았다. 그 덕분에 서귀포시 서부지역 일대는 ‘건축 박물관’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p. 34]

 

서귀포시 동(洞)지역’에서는 예술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기당 미술관(1987)3), 소암 기념관(2008), 이중섭 미술관(2002) 등이 밀집되어 있다.

 

서귀포시 동부지역’에서는 조선시대 정의현(旌義縣)의 중심으로,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제주성읍마을과 앞에서 언급한 안도 다다오의 모던하고 아름다운 설계가 돋보이는 글라스하우스(2008), 유민미술관[舊 지니어스 로사이](2008)을 볼 수 있다.

 

제주성읍마을,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 우도……. 서귀포시 동부지역에서 기억할 만한 곳이다. 서귀포시 서부지역의 건축에 전통적, 근대사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면, 서귀포시 동부지역은 수려한 자연경관에 현대적 건축물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곳이다. [p. 90]

 

제주시 서부지역’에서는 선사시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제주 고산리 유적이 있다.

 

제주시 서부지역은 아주 먼 옛날 이 일대에 정착해 살았던 인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한경면에 위치한 제주 고산리 유적은 동북아시아 신석기시대의 문화 연구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p. 190]

 

제주시 동부지역’은 암괴(巖塊)지역에 형성된 숲인 곶자왈, 밭의 경계에 쌓은 담인 밭담, 용암 분출로 생긴 독립된 형태의 기생화산인 오름 등으로 제주의 자연색이 짙게 배어나는 곳이다. 이런 자연환경을 이용, 전략촌으로 건설된 낙선동 4.3성은 ‘제주시 동(洞)지역’의 제주 4.3평화공원 기념관과 함께 건축적 측면을 넘어 역사적으로도 기억해야 할 장소라고 한다.

 

제주시 동(洞)지역’에서는 조선시대 제주지역 행정의 중심지였던 제주읍성 등 탐라와 제주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현재의 제주시 동지역은 과거 제주목이었던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원도심, 1980년대 개발을 시작한 연동, 노형동 일대로 구성된다. 특히 원도심에는 제주 역사와 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흔적이 산재해 있다. 탐라국의 시조에 관한 전설이 깃든 삼성혈, 제주읍성의 관덕정(觀德亭)과 제주목관아(濟州牧官衙) 등이 그러하다. 그 안에는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이야기가 쌓여 있으며, 고달프고 애절한 민초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옛 골목길, 산지천, 관덕정 광장 등에서 그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제주시 동지역은 그래서 더 흥미로운 곳이다. [p. 134]

 

앞에서 언급한 것들이 한데 어울려 이 책, <제주 속 건축>을 일반적인 여행 가이드북이나 제주 건축물에 대한 백과사전 이상의 것으로 만든다. 만약 특별한 여행을 꿈꾼다면, 이 책 끝부분에 수록된 ‘제주 건축 도보 여행 추천 코스’와 ‘제주 건축 테마별 추천 여행지’를 참조하면 된다. 그리고 이 책에 소개된 155개의 건축물을 대부분의 건축물에 대한 간결한 서술과 특정 건축물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는 서술을 엮어 단짠단짠의 조합처럼 맛깔 나게 소개함으로써 건축에 대한 독자의 견문을 넓혀주려는 시도를 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지금 제주건축에는 새로운 고민과 시간이 필요하다. 고유한 건축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제주 건축의 정체성을 단순히 외형적, 표피적 관점에서 모색하려는 사고(思考)에서 벗어나, 건축과 공간의 본질적 문제에 초점을 두고 건축작품을 탐색하려는 실험적 노력이 필요하다. [p. 24]

 

고 말함으로써 제주건축, 나아가 한국건축에 대한 조언을 더함으로써 이 책의 특별함을 더하고 있다.

 

1) 이상현,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 (효형출판, 2013), p. 36

2) 임형남/노은주, <나무처럼 자라는 집>, (인물과사상사, 2022), pp. 51~53

3) 1987년 개관된 국내 최초의 시립 미술관으로 제주가 고향인 재일교포 기당(寄堂) 강구범에 의해 건립되어 서귀포시에 기증되었다. 서귀포 출신 변시지(邊時志, 1926~2013) 화백의 상설 전시실이 이 미술관을 대표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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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 (여름 에디션)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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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구 끝 온실>은 총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모스바나’와 ‘3장 지구 끝의 온실’의 주인공은 2129년을 살아가는 더스트 생태학자 정아영(이하 ‘아영’)이고, ‘2장 프림 빌리지’의 주인공은 2058년 멸망한 세계를 언니와 함께 헤매는 아이, 나오미 재닛(이하 ‘나오미’)다. 마치 액자소설 같은 구성의 이 소설은 운명에 저항하고 희망을 얘기한다. <지구 끝 온실>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유명한 격언처럼, 시시각각 멸망을 향해 달음박질하는 세상에서 기어이 희망의 씨를 뿌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니까.

 

실질적인 이야기는 ‘유령 도시’로 알려진, 강원도 해월의 복원 사업이 진행되는 중, 세발잔털갈고리덩굴, 소위 ‘모스바나’가 수상할 정도로 빠르게 증식하면서 시작한다. 이에 방제 담당은 더스트 생태 연구센터에 모스바나의 성분 분석을 의뢰한다. 연구센터에서 근무하던 연구원 아영은 이 임무를 떠맡았고, 해월시의 불법 회수 처리업자들이 남긴 제보에서 어린 시절 이웃에 살던 이희수 할머니의 정원을 떠올렸다.

 

어떤 집의 정원이었다. 아영은 정원을 향해 홀린 듯이 걸어갔다. 정원의 흙이 푸른빛을 가득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허공에도 푸른색을 띤 먼지가 흩날렸다. 마치 푸른빛이 정원에 한 겹 덧씌워진 듯한 모습으로, 자연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 같은, 으스스하면서도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풍경이었다. 가까이 가서야 아영은 그곳이 이희수의 정원이라는 걸 깨달았다. 원래 알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시들하던 나무도 무성한 잡초들도 지금은 그림자로만 존재했다. 푸른빛의 먼지들만이 느린 바람을 타고 흩날리고 있었다. [p. 67]

 

아영은 에티오피아의 아디스 아바바(Addis Ababa)에서 열린 생태학 심포지엄에 참석하는 기회를 틈타,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모스바나의 푸른빛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 노력의 결과, 더스트 시대에 모스바나를 약초로 활용하면서 사람들에게 ‘랑가노의 마녀들’이라고 불려진 자매 중 나오미와 만나게 된다.

 

아영이 나오미로부터 들은 것은 먼 과거, 더스트에 의해 멸망을 향해 치닫던 2058년의 이야기였다. 자가증식 나노붓의 크기를 줄이다가 그 나노붓이 통제에 벗어난 상태에서 유출된 결과가 더스트 사태였다. 이후 더스트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둠을 만들었지만 어느새 둠을 유지하기 위해, 아니 둠에 살고 있는 기득권자들을 위해 서슴없이 사람을 죽이는 세상이 되었다. 수단이 목적이 된 것이다.

 

돔 시티는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더 자인한 방식으로 침입자들을 학살했다. 작은 마을들도 돔 시티에서 보낸 로봇들에게 파괴당했다. 건질 수 있는 것은 전부 가져가 시체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목격한 사람들의 말이었다. [p. 230]

 

뿐만 아니라 아마라, 나오미 자매는 더스트에 내성을 지녔다는 이유로 사냥감이 되고 실험대상이 되었다. 그녀들이 랑카위(Langkawi) 연구소에서 가혹한 실험에 시달리다가 침입자들의 습격으로 연구소가 무너지는 틈을 타서 도망친다. 그 와중에 유토피아 같은 도피처의 소식을 듣는다. 계속된 도피 생활로 아마라의 건강이 악화되자 마지막 희망을 갖고 그 도피처로 향했다.

그곳, 프림 빌리지는 놀랍게도 실존하는 유토피아였다. 대부분의 유토피아가 사람들의 머리 속을 유령처럼 떠도는 것과 달리 그곳은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는, 실재(實在)하는 공간이었다. 물론 불안요소는 있었다. 프림 빌리지의 리더 지수만이 들어갈 수 있는, 언덕 위 온실 속에 사는 사이보그 식물학자 레이첼이 건네는 작물들과 더스트 분해제에 의해 마을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힘이 없는 평화가 지속될 수는 없는 법, 평화롭던 프림 빌리지는 침략자들의 습격으로 붕괴된다. 그리고 이를 예상했던 프림 빌리지의 리더인 지수는 나오미에게 더스트 분해제 제조법을 알려주면서

 

떠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야. 만약의 경우를 이야기하는 거지. 이 덩굴은 바깥에 지금 이곳과 비슷한 환경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야. 우리가 혹시 이곳을 더 지킬 수 없게 되더라도, 이게 있으면 또 다른 프림 빌리지를 만들 수 있어. [p. 236]

 

라고 한다. 그리고 침략자들이 습격하자, 지수는 이에 저항하는 대신 프림 빌리지 사람들에게 레이첼이 개량한 더스트 대항종인 모스바나 종자를 주며 뿔뿔이 흩어지게 했다.

 

지금부터는 실험을 해야 해. 내가 가르쳐준 것, 그리고 우리가 마을에서 해온 것들을 기억해. 이번에는 우리가 가는 곳 전부가 이 숲이고 온실인 거야. 돔 안이 아니라 바깥을 바꾸는 거야. 최대한 멀리 가. 가서 또 다른 프림 빌리지를 만들어. 알겠지? [p. 242]

 

이후 프림 빌리지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모스바나를 세계에 퍼트려, 인류가 재생의 첫발을 디딜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그들의 행적은 오랫동안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인식되었고, 오히려 더스트를 만들어낸, 솔라리타 연구소가 공개한 자료를 토대로 한 더스트 대응협의체의 대응만 널리 알려졌다. 분명 이들이 거대 흡착 그물 및 다공성 포집 기둥 설치 등의 더스트 제거 작업과 증식형 분해제인 디스어셈블러의 살포를 통해 더스트를 감소[2차 감소]한 것은 맞다. 그렇다고 둠 밖에 살던 이들의 영웅적인 희생이 잊혀져야 할까?

프림 빌리지 사람들의 처지를 보며, 왠지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던진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오버랩 되었다.

 

아마도 그래서 <지구 끝 온실>에서 화자(話者) 역할을 한 아영을 대신해서 작가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마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p 389]

 

라는 말을 남기게 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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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이창익 지음 / 인간사랑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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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사색하는 시간]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살아 있는 죽음’은 <월간 미술> 2017년 12월호에 발표한 <죽지 않는 것들의 죽음에 관하여>와 2010년 3월 <역사와 문화>19호에 발표한 <죽음의 연습으로서의 의례: 이중 장례식의 구조와 의미>를 새로 고쳐 쓴 것이다. 2부 ‘죽음의 해부도’와 3부 ‘죽음 너머의 시간’은 1998년 2월에 발표한 <시간과 죽음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의 석사학위논문을 물음만 남겨둔 채 모두 새로 다시 쓴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이십여 년 전에 내가 처음 제기했던 학문적 물음을 뼈대로 삼고 있다. 4부 ‘사라지는 죽음’은 2013년 9월 <종교문화비평> 통권24호에 발표한 <죽음에 관한 일곱 가지 이야기: 정진홍의 죽음론>을 새로 고쳐 쓴 것이다. [p. 12]

 

즉, 저자가 이미 발표한 글들을 첨삭과정을 통해 하나의 책으로 엮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일까?

 

1부 ‘살아 있는 죽음’에서는 로버르 에르츠(Robert Hertz, 1881~1915)의 이중 장례식에 대한 연구결과를 중심으로 ‘죽음’이라는 관념을 살펴본다. 죽음 후에 시체가 완전히 부패하여 뼈만 남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1차 장례식[‘살’의 장례식] 동안 죽은 자의 영혼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방황한다고 여겨진다. 살이 제거되고 뼈만 남게 되면, 이를 가지고 2차 장례식[‘뼈’의 장례식]을 치른다. 이를 통해 비로소 죽음이 완성되고, 죽은 자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소속이 바뀐다.

저자에 따르면

 

이중 장례식은 개별성을 지우고 집합성을 창조하는 의례, 즉 시간을 지우고 영원을 창조하는 의례라고 할 수 있다. [p. 58]

 

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원시사회의 이중 장례식은 종교가 다른 사회영역으로부터 분화될수록 변형된다. 이로 인해 삶에 대한 인식이 이질적인 단계가 연속된 계단식에서 단일한 직선으로 변화했다.

 

장례식이 어떤 식으로 해석되고 번역되든, 장례식은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사회에서 삭제하려는 시도이다. 장례식이라는 중간단계를 거쳐야만, 죽은 자는 조상이라는 익명의 집합성에 용해되어 새로운 존재로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p. 88]

 

뭔가 모순적이지만, 일단 죽어야만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대체로 종교에서는 오로지 죽음을 통해서만 더 이상 죽지 않는 불멸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p. 128] 

 

아마도 그래서 저자는 죽음을 ‘탄탈로스의 바위’에 비유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죽음은 ‘탄탈로스의 바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탄탈로스의 머리 위에 매달린 채, 언제 허공에서 떨어져 탄탈로스의 머리를 박살낼지 알 수 없는 이 바위로 인해, 탄탈로스는 감히 신의 음식을 먹지 못한다. 아마도 제우스는 탄탈로스의 오만함을 징벌하기 위해 머리 위에 바위를 매달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위는 인간과 신의 건널 수 없는 경계선을 의미한다. 탄탈로스는 바위의 추락을 감수하지 않는 한, 신의 음식에 손을 댈 수 없다. 신처럼 살려면 탄탈로스는 신들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음식에 손을 대는 순간 바위가 떨어질 것이다. 신처럼 살려고 하는 순간 탄탈로스는 인간으로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죽음은 항상 신과 인간의 차가운 경계선을 알려준다. [p. 125]

 

 

2부 ‘죽음의 해부’와 3부 ‘죽음 너머의 시간’에서는 ‘시간’관념을 중심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다양한 종교적 상상력을 유형화한다.

 

인간은 시간 개념을 통해 인간만의 죽음을 발견한다. 죽음과 시간의 복잡한 내적 관계는 인간에게만 드러나는 현상이며, 인간은 시간을 통해 죽음을 넘어선 시간의 차원, 즉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도약할 수 있다. 인간은 시간을 통해 시간 너머를 꿈꾼다. 인간은 시간 너머의 존재, 또는 죽음 너머의 존재를 꿈꿈으로써 죽음을 넘어서려 하고, 자신의 존재를 이미 죽은 자뿐만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자와 연결시킨다. [p. 356]

 

이처럼 모든 ‘죽음’의 문화는 ‘죽음 너머’를 상정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사후세계와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죽음은 삶의 끝이면서도 또 다른 세계가 시작될 수 있는 기점으로 상상된다. 완전한 끝만이 완전한 시작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그 기저에 자기만의 죽음의 신화를 품고 있다. [p. 414]

 

 

4부 ‘사라지는 죽음’에서는 현대사회의 죽음의 관념에 대해 서술한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너무 빨리 죽는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제사, 추도식, 무덤과 같은 죽음을 지연하는 사회적 장치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즉, 생물학적으로는 죽었을지라도 사회적 기억을 통해 오랫동안 불멸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 과거와는 반대로 너무 늦게 죽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의술의 발달로 인한 죽음의 지연현상으로 생물학적 죽음에 선행하는 사회적 죽음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자연적인 죽음 대신 인공적인 죽음인 안락사(安樂死), 존엄사(尊嚴死)와 같은 ‘좋은 죽음’의 개념이다. 결국 최근에 많이 논의되는 ‘좋은 죽음’ 혹은 ‘웰다잉(Well-Dying)’은 결국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한 시대적 위기의식이 가져온 산물인 셈이다.

 

웰다잉은 자기가 살았던 자리를 깨끗하게 치우고, 남은 자들에게 최대한의 작은 상처를 주고, 그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고백하면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는 말 같다. 이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표준화된 ‘엔딩 매뉴얼’에 따라 자신을 죽음을 준비하면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죽음의 기술’을 습득해야 할 것 같다. 결국 웰빙이나 웰다잉은 자신의 삶과 죽음의 질에 대한 개별적 책무를 강조하는 말이다. [p. 500]

 

과거에는 ‘죽음’과 그에 관련된 일은 사회적 책무였다.

 

우리가 죽은 자와 함께 형성하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의 존재를 파괴로부터 보호하는 일이다. 이 공동체는 내 존재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p. 378]

 

하지만 의학이 발달한 현대사회가 되면서 지나치게 늦은 죽음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좋은 죽음’이나 ‘웰다잉’은 이런 과정에서 과거 사회적 책무였던 것들이 개인적 책무로 변화하는, 즉 ‘개별화’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좋은’이고 ‘웰(well)’일까? 그리고 이런 ‘좋은 죽음’이나 ‘웰다잉’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그저 막연히 단어로만 다가왔던 ‘죽음’ 그리고 ‘웰다잉’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고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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