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읽는 북학의 - 조선의 개혁.개방을 외친 북학 사상의 정수
박제가 지음, 안대회 엮고옮김 / 돌베개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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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북학의>

 

북학의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아마 대부분 학창시절에 배운 대로 조선시대 실학자인 초정(楚亭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쓴()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자는 내용의 책이라는 것이 떠오를 것이다좀더 구체적으로 청과 해상 통상을 확대할 것수레나 선박의 사용을 늘릴 것절약보다는 소비를 권장하여 생산을 자극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1)했다는 사실까지 기억할 수도 있다또 고루(固陋)한 성리학자들의 소중화(小中華의식을 극복하고 조선의 개혁과 개방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저술이라는 의견을 덧붙일 이도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그런데 우리가 <북학의(北學議)>에 대해 이것만 알면 될까아니 우리가 <북학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앞에서 언급한 것 외에 무엇이 더 있을까?

 

먼저 <북학의>에 대해 살펴보면이 책은 한 번에 만들어진 책이 아니다박제가는 1778년 절친인 청장관(靑莊館이덕무(李德懋, 1741~1793)와 함께 진주사(陳奏使)2)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갔다 와서 <북학의>를 저술했다일반적인 책이라면 여기서 끝인데박제가는 이후 수년간 내용을 보완하여 이를 <북학의 내편>과 <북학의 외편>으로 만들었다그러다 1798정조(正祖재위 1776~1800)가 백성들을 위한 농서(農書)를 구하자 기존 <북학의>의 1/3 정도 내용을 간추리고 농업 관련 내용을 추가한 <진소본(進疏本북학의>를 만들어 바쳤다때문에 북학의는 내편’ 및 외편과 진소본이 존재하고서로 중복된 내용도 있다.

 

저자는 이러한 점을 감안하고현대의 독자들이 어렵게 여기는 고증적이고 복잡한 부분을 제외시켜이를 주제에 따라 4장으로 다시 분류하여 재구성했다.

 

 

박제가가 본 당대 조선의 문제

 

먼저 1장 왜 북학인가에 실린 1778년 본의 서문에서 현재 백성들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곤궁해지고국가의 재정은 날이 갈수록 궁핍해지고 있다” [p. 20]고 말해위기에 빠진 당대 조선의 현실을 진단한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빌 클린턴 후보가 내걸었던 문제는 경제야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와 같은 얘기인 셈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경제에 어떤 문제가 생겨서 국가와 백성이 가난해진 것일까박제가는 네 가지 기만(四欺)과 세 가지 폐단(三弊)때문이라고 구체적으로 꼬집는다.

 

네 가지 기만(四欺)은 다음과 같다.

인재가 아주 드문데도 인재를 양성할 방도를 강구하지 않고재용(財用)이 날이 갈수록 고갈되는데도 소통시킬 방법을 생각하지 않으며, “세상이 말세로 가니 백성이 가난하다라는 핑계를 대니 이것은 국가가 자기를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하급 관료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국경 밖으로 사신을 갈 때에는 모든 것을 역관들에게 위임합니다좌우에서 자기를 옹위하게 하면서 체모를 허술하게 할 수 없다고 하니 이것은 사대부가 자기를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과거 시험의 숲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병려문(騈驪文)3)의 길에서 기운을 다 소진하고 나서는 천하의 책을 몽땅 묶어 두어 볼만한 것이 없다고 말하니 이것은 공령문(功令文)4)짓는 자들이 자기를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자가 있고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할아버지나 아버지 항렬의 어른에게 절을 하기는커녕 손자뻘 조카뻘 되는 어린 자가 어른을 꾸짖는 일도 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쭐대며 천하를 야만족이라 무시하며 자기야말로 예의를 지켜 중화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이것은 우리 풍속이 자기를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 [pp. 28~29]

 

세 가지 폐단(三弊)은 다음과 같다.

사대부는 국가가 만든 것입니다그러나 국법이 사대부에게는 적용되지 않으니 이것이 자기를 피폐케 하는 것이 아닙니까?

과거(科擧)란 인재를 취하는 도구입니다그런데 인재의 선택이 과거로 인해 망가지니 이것이 자기를 피폐케 하는 것이 아닙니까?

서원을 설립하여 선현(先賢)의 제사를 받는 것은 선비를 숭상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왔습니다그런데 부역에서 도망하는 장정과 금주(禁酒)를 빚는 자들이 숨어 지내는 소굴이 되고 있으니 이것이 자기를 피폐케 하는 것이 아닙니까?” [p. 29]

 

 

조선이 살 길통상

 

앞에서 열거한 조선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박제가는 1766년에 쓴 병오년 정월에 올린 소회에서 현재 국가의 가장 큰 폐단은 한마디로 가난입니다그렇다면 이 가난을 어떻게 구제하겠습니까중국과 통상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p. 23]라고 주장하여 구체적인 위기극복 대안을 제시한다.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통상을 통해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우고[學中國], 낙후한 경제의 부흥을 추진하여 개인은 풍요로운 생활을 구가하고 국가는 부국강병을 실현”[p. 6]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선진국의 문물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다하지만 당시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생각하는 선진 문물과 박제가가 생각하는 선진 문물은 달랐다극단적으로 말하자면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명()나라 이전의 정신문화를박제가는 청()나라의 물질문화를 각각 선진 문물이라고 생각했다고 할 수 있다다시 말하면 박제가가 배우자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은 유학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학문이 아니라 서민의 행복하고 윤택한 삶즉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수단이다여기서 이용(利用)’은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영위하는 것을 가리키고, ‘후생(厚生)’은 삶을 풍요롭게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비하하며 무시하고조선이야말로 유일한 문명국인 소중화(小中華)” [p. 49]라고 우쭐거리는 사대부들은 정신적 승리에 만족하는 어리석은 이요반드시 도태시켜야 할 나라의 좀벌레일 수 밖에 없다.

 

조선의 살 길이 중국과의 통상이니 이를 위해서는 수레와 배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고도로나 교량과 같은 사회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그래서 그런지 이 책 3장 북학의 실천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이 수레먼저 사람이 타는 태평차(太平車), 짐을 싣는 대차(大車), 외바퀴 수레인 독륜차(獨輪車), 수레에 돛을 단 풍범차(風帆車등 청나라에서 사용하는 수레의 종류를 나열하고수레 운영의 장점을 얘기한다그리고 나서 중국 촉(지방의 잔도(棧道)와 같이 극도로 험준한 지형도 아니면서 산천이 험준하다는 핑계로 수레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비판한다나아가 산천이 험난해서 수레를 사용할 수 없다면, “그저 통행하기 좋은 지역만이라도 수레를 통행시켜 도()마다 그 도에 적합한 수레를고을마다 그 고을에 적합한 수레를 쓰는 게 어떤가만약 고개 때문에 사용을 꺼린다면고개를 넘을 때만 사용하는 수레가 얼마든지 있다” [p. 149]고 말한다.

이런 방식으로 배도로다리 등의 주제에 대해 조선과 청의 상황을 대비하는 형태로 조선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당대인이 본 <북학의>

 

이 책의 4장 ‘<북학의>의 평가는 보만재(保晩齋서명응(徐命膺, 1716~1787)과 연암(燕巖박지원(朴趾源, 1737~1805) <북학의서문으로 되어 있다소제목에 비하면 내용이 아쉬운데이 두 사람이 모두 북학파에 속하고 <북학의>의 서문을 써 줄 정도로 박제가와 친분이 있기 때문이다이 책에서의 <북학의평가는 북학파에 의한 평가란 말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박지원이 쓴 서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책[북학의]을 남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남들은 당연히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믿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남들은 우리에게 화를 내리라화를 내는 성격은 편벽된 기운에 원인이 있고우리 말을 믿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중국의 산천을 여진족 땅이라고 죄악시하는 데 있다.” [pp. 257~258]

결국 조선시대 지식인 계층인 사대부가 소중화 의식을 버리지 않는 한, <북학의>는 믿을 수 없는 허황된 글이 된다는 것이다따라서 박제가가 꿈꾸었던 조선의 개혁은 그저 일부 지식인의 몽상(夢想)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북학의>를 통해 내비쳤던 박제가의 문제의식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1) <고등학교 한국사>, (천재교육, 2018), p. 156

2) 진주사(陳奏使): 중국에 외교적으로 알려야 할 일이 발생했을 경우 임시로 파견하는 사신. 중국으로부터의 책문(責問) 또는 중국측의 오해에 대한 해명, 조선 내의 반역사건에 대한 전말보고 등을 위해 파견했다.

3) 병려문(騈驪文): 표준어는 변려문이다. 장이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對句)로 이루어져 수사적(修辭的)으로 미감(美感)을 주는 문체이다. 사륙변려문(四六騈驪文)이라고도 한다.

4) 공령문(功令文): 과거 시험에 쓰는 시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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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 서울을 다시 짓는 건축가, 황두진의 나의 도시 이야기
황두진 지음 / 해냄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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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인가

 

남북 분단과 한국 전쟁이라는옆구리에 깊이 새긴 상흔(傷痕속에서 우리는 쓰러지지 않고 일어났다물론 그 짧은 시간에 일어나기 위해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의 희생이 요구되었다더불어 우리만의 확고한 정체성도 잃어야 했다.

때문에 특색 없는 아파트와 빌딩이 도시의 대부분을 차지한회색도시 서울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화상 같은 공간이 되었다물론 김영삼 대통령이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듯이 우리도 아파트와 빌딩 같은 건물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울 수는 있다하지만그런다고 해서 개화기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수천 번도 넘게 우리 스스로 내팽개친 우리의 정체성이 되돌아 오지는 않는다지금이라도 우리의 정체성을 쌓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솔직히 잘 모르겠다다만예일대 건축학교를 졸업하고 미국건축사 자격을 획득했지만한옥을 현대건축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일련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이라면 뭐라도 힌트를 줄 것 같았다그래서 선택한 것인 서울 토박이 황두진이 자신이 살았던 동네와 집들을 떠올리며 쓴 개인의 역사이자 서울 변천사인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이다물론 이런 류의 책이 처음인 것은 아니다얼마 전에 읽었던TV프로그램 <알쓸신잡시리즈로 인기를 얻은 건축가 유현준의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도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살았거나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공간들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는 서울에서 태어나지금도 서울에 사는서울 중에서도 강북 통의동에 사는 ‘동네’ 건축가 황두진이 얘기하는 서울이야기이다자신의 어렸을 적 서울을 얘기하면서 그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느꼈던 서울의 기억과 지금의 서울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어 청바지에 기타 하나 들고 노래하는 포크 가수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무엇보다도 거창하거나 난해한 건축 이야기가 아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서울이라는 도시는 나에게 이런 곳이었습니다라고 읊조리는 느낌이어서 더욱 그렇게 느낀 것 같다.



세간의 관심이라는 독()


그러면서도 건전한 상식인이라면 말할 수 있는 일침(一針)도 몇 개 늘어놓아초밥의 와사비처럼 톡 쏘는 느낌을 안겨준다.

통의동을 포함한 창성동 및 효자동 일대는 여러 가지 점에서 경복궁 반대쪽인 사간동과 삼청동 등 소위 북촌 지역과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여기에는 북촌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도 없고유수한 화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것도 아니다서울시가 야심 차게 추진했던 도심 역사지구 보존사업에서도 이 지역은 빠져 있다한마디로 이렇다 할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지역인 셈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축복인지도 모른다지금까지 그 세간의 관심이라는 것이 한 동네를 얼마나 순식간에 망쳐놓는지 보아왔기 때문이다인사동은 이제 사람이 살 수 없는 동네가 되었고풍운아 박영효의 집은 남산 한옥마을로 옮겨졌다가회동 일대는 한옥보존지구에서 해제되는 즉시 개발의 열풍이 불어 닥쳤다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공룡 같은 굴착기에 의해 수많은 한옥들이 쓸려나가는 광경을 잊지 못한다그리고 드라마 <모래시계>로 인해 정동진은 더 이상 한가로운 바닷가 기차역이 아니다무조건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진보며 발전이라고 믿었던 그 시기에그나마 통의동을 지켜준 것은 엉뚱하게도 이웃의 청와대였다.

남북분단이라는 민족의 비극이 세계적인 자연생태환경인 비무장지대라는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면청와대를 중심으로 하는 권력의 강박적인 자기보호본능이 통의동이라는 도시적 타임캡술을 만들었다.” [pp. 135~136]

저자가 아쉬워했듯이 번듯하고 유서 깊은 집들이 개발과 확장이라는 이름으로 무수히 사라졌다이러한 집 한 채가 사라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살아있는 화석 하나가 사라지는 셈이다게다가 이 순간에도 재건축 승인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무기로 아파트 1개 동은 미래유산이라는 이름으로 보존하고 있다1) 2)고 한다뭔가 반대로 된 것이 아닐까차라리 오래된 건축만큼은 함부로 부수거나 개조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법과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황당한 상황은 저자가 서울 성곽 답사를 시도하면서 맞이해야 했다김중업이 설계한 서산부인과김수근이 설계한 타워호텔을 보면서 그는 김중업과 김수근이들은 우리나라 근대 건축의 두 거장이자 누구보다도 한국적인 것에 대한 논의를 자기의 건축에서 중요한 담론으로 제시했던 장본인들이다그러면서 정작 자신들의 작업 대상지와 직접 관계된 한국건축의 중요한 역사적 유산인 서울성곽에 대해서 이들은 아무 말도 남기고 있지 않다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p. 251]라고 탄식해야 했다.

뿐만 아니다홍파동의 한 다세대주택의 주차장 기둥 사이로 서울성곽의 하부가 보이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마주치기도 해야 했다풍납토성 해자 터에 태양광 주택단지 철거에 따른 건축 폐기물을 매립하라고 지시3)한 공무원에 버금갈 과오가 아닐까?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가 잠잠해지면이 책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통의동도 가 보고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와 내가 거쳐온 동네들을 되돌아 보고 싶다.

 

p.s. 북촌에 있는 1930년대 한옥을 개보수한 무무헌(無無軒), 설계도를 그린 후 그것에 충실하게 낡은 한옥을 해체하고 재구성한 취죽당(翠竹堂), 1936년에 지어진 서촌의 한옥을 젊은 신혼부부의 살림집으로 리노베이션한 애지헌(愛智軒등 저자인 황두진의 한옥 프로젝트의 산물도 보고 싶다.




1) 흉물 아파트가 미래 유산?... 강남 재건축 둘러싼 논란 가열”, <매일경제신문> 20.09.25

 [https://www.mk.co.kr/news/society/view/2020/09/990869/]

2) “금남로 아파트 재개발 문화자원 보존.활용 외면’ “, <광주매일신문> 20.08.31 

 [http://m.kjdaily.com/article.php?aid=1598871549522570005]

3) “송파구청 직원 풍납토성에 쓰레기 불법 매립”, <YTN> 13.02.02

 [https://www.ytn.co.kr/_ln/0103_201302021424127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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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열린책들 세계문학 17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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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yes라고 할 때, 혼자 no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따라서 사회를 벗어나 존재하기 어렵다이런 점을 고려하면개인이 속한 조직 구성원 모두가 ‘yes’를 외칠 때 홀로 ‘no’라고 말하기 어렵다더구나 ‘yes’를 말하도록 강요 받을 때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오세아니아라는 국가는 국가 구성원 모두에게 ‘yes’를 강요하는 조직이다국가의 구성원인 국민은 송수신이 동시에 가능한 텔레스크린에 의해 통제되는 당원과 하층 노동자인 프롤(Prole)로 나눠지고당원은 권력을 누리는 내부 당원과 실무를 담당하는 외부 당원으로 다시 분리된다.

나아가 개인은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오세아니아라는 국가 혹은 당()의 부품으로만 존재한다개인의 개성과 욕구는 말살되고여기에 조금이라도 저항하려는 사람은 그가 존재했다는 모든 흔적이 사라지는 증발이라는 이름으로 제거된다그리고 고문을 통해 인간성을 말살하고 마음까지 빅 브라더라는 오세아니아의 통치자에게 복종하도록 세뇌시킨다.

따라서 노트를 사서 일기라는 개인적인 기록을 작성하는 외부당원인 윈스턴 스미스(Winston Smith) 같은 존재는 돌연변이그러니까 일종의 으로 취급될 수 밖에 없다따라서 빅 브라더라는 상징적 존재를 중심으로 하는 오세아니라라는 국가는 이러한 돌연변이가 전이(轉移)되거나 확산되기 전에 제거하려고 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국가의 조치는 효과 만점이다정상세포가 암세포로 변질되었던 것처럼 평범한 당원이었으나 체제에 의문을 품게 된 원스턴 스미스와 같은 존재가 개성을 상실하고 조직의 부속품으로 다시 되돌아갔으니까.

 “그는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그는 저 시커먼 콧수염 아래에 숨겨져 있는 미소의 의미를 배우는 데 무려 40년이라는 세월을 흘려보냈다잔인하고 부질없는 오해여저 자애로운 품 안을 벗어나 고집스럽고 제멋대로 살아온 유랑이여술 냄새가 배어 있는 두 줄기 눈물이 그의 코 양 옆으로 흘러내렸다하지만 잘되었다모든 게 잘되었다투쟁은 끝이 났다그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p. 347]

 

 

디스토피아는 현재 진행형이다.

 

<1984>처럼 정부가 개인의 삶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전체주의 사회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인은 SNS 등을 통해 개인이 자신의 삶과 기억을 디지털화하여 자발적으로 외부에 노출하고 있다만약 어느 날 디지털화된 자료가 모두 날아간다고 하면 <1984>에서 빅 브라더가 통치하기 전의 세계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모두 당()이 숙청한 것과 비슷한 효과가 발생하지 않을까? <1984>에서는 핵전쟁도 과거를 삭제하는 데 한 몫 한 것 같지만…….

그런 상황에서 CCTV 등을 이용해 개인의 삶을 통제한다면 <1984>의 세계가 현실화되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지금 현재 그런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그래서 진실을 찾고 기억하려는 이들이 소중하다왜냐하면그런 전체주의 사회가 출현한다면 그런 이들이 <1984>에 나오는 원스턴 스미스나 줄리아(Julia)처럼 체제에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그들 대부분은 파멸하고그들의 이야기는 어둠 속에 묻힐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들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우리가 희망을 버리지 않고영화 <암살>에서 안옥윤(전지현 扮)이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줘야지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라고 말했던 것처럼 당장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행동해야 하고다른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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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언어들 - 나를 숨 쉬게 하는
김이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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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어떤 사람이 이 사람보통 사람입니다믿어주세요!’ 그리고 위대한 보통 사람의 시대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대통령이 되었다그 이후 어쩐지 보통이라는 단어가 특별하게 들렸다.

아니원래 보통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그렇다면 보통의 언어는 또 어떤 언어일까제목에 대한 호기심에 집어 든 이 책, <보통의 언어들>은 참 묘한 책이다단어들을 수집해서 그 사용 사례와 의미를 첨가한 형식을 띠고 있는데 사전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오히려 관계’, ‘감정’, ‘자존감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수집한 단어들을 통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늘어놓은 수필집의 느낌이 짙다.

 

첫 번째 ‘관계의 언어’에서 여러 단어를 얘기하고 있지만나는 미움 받다와 선을 긋다에 꽂혔다사실 []’이라는 것은 소통의 도구이지만입 밖을 나가는 순간부터 나의 것이 아니다음악을 감상하는 이가 그 음악에 대해 평가하듯이 듣는 이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당연히 불특정 다수와는 정당한 관계가 성립되기 힘들다그들은 내 의도를 파악하려고 애써야 할 이유도굳이 나와 소통해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그러다 보니 나의 말이나 글에 대해 험담을 하거나 악성 댓글을 달기도 한다그래서 타인과 선을 긋는 일이 중요하다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나오는 AT필드와도 비슷한심리적 거리를 유지하지 않고서는 버티기가 힘드니까.

아무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사람은 위험하다설령 대중적으로 그런 사람이 존재할지언정 측근들 사이에서 차라리 험담이 떠돈다면 그것은 다행이다한 명의 사람이 누구를 대하든 매끄럽다면그 사람은 흡사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은 거니까그걸 아무리 알고 있어도미움은 어릴 때 꼭 먹어야 된다고 엄마가 얹어주던 맛없는 반찬처럼 삼키기가 싫다.” [pp. 23~24]

아마도 그래서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나오고 인기를 얻은 것이 아닐까?

모든 면에서 완벽하면서도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혹시 누군가가 그렇게 보인다면그는 한쪽 면만 드러내는 달처럼 이면(裏面)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끝없이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아무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거울처럼 를 잃어버리고 끝없이 남이 보고 싶은 를 연기해야 하는 지옥도에 들어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면 선 긋기가 필요하다왜냐하면 인간은 나만의 공간을 필요하기 때문이다저자는 열 명의 사람 중 두세 명에게서 미움을 받는다면 문제가 없어 보인다그러나 그게 백 명천 명이 넘어가면 두렵다퍼센티지로는 동률이어도 숫자로 세어지는 마음이 미움이다살면서 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어느 순간 이에 대한 선택을 하기로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긴 대로 살아야겠다는 것’ 말이다방송을 하면서부턴 더더욱 그랬다어쩔 수 없이 호불호(好不好)의 평가를 받아야 되는 일을 시작한 이상내 방향성은 더 명확해졌다그건 바로 대충 미움받고 확실하게 사랑받는 것” [p. 24]이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세심하게 관찰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前提)로 한다흔히 선을 긋다라는 말에는 너에게 불편함을 느껴 거리를 둔다는 뉘앙스가 담겨있어 상대방에게 서운함을 느끼게 된다하지만 저자는 다소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선을 긋는 행위를 통해 나의 영역을 확인하고 나를 인식하려는 것이다그렇기에 소중한 사람일수록 잘 바라보아야 한다세심히 살펴야 한다무언가를 제대로 보려면 최소 한 발자국 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한다사람의 마음도 그렇다당연히 잘 안다고 여기는 순간관계는 V3가 깔리지 않은 컴퓨터가 된다” [p. 30]고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 ‘감정의 언어’에서는 단어가 지닌 특유의 감각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그녀의 표현력을 엿볼 수 있다학창시절에 배웠던 공감각적 표현은 어쩌면 스마트폰 시대에 어울리는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를 들면, “ ‘반짝이다’‘빛나다’라는 말이 시각적인 기억을 주로 환기시키는 반면, ‘찬란하다는 표현은 내게 유리조각들이 부딪혀 챙그렁대는 소리가 나는공감각적인 그것에 가깝다뜨겁게 빛나는 태양보다는그 빛이 내리쬐어 물결에 빛나는 모습이 찬란하다와 어울리는 것 같다.

중략 ~

찬란하다는 말의 실제 발음인 ‘찰-란’은 의 받침 ㄹ과 의 자음 ㄹ이 파도 능선처럼 이어지는 기분이 들어 앞서 비유했던 것처럼 햇살이 닿은 물결의 느낌인 것이다.” [pp. 101~102]

이처럼 너무나 익숙해서 빛나는 것을 몰랐던 단어들의 색다른 모습들을 포착하여 상상의 여백을 만들어주는 것이 저자와 같은 작사가나 시인의 몫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 번째 ‘자존감의 언어’는 작사가 김이나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성찰하게 만드는 단어들로 채워져 있다여기서 언급하는 단어 가운데 과 살아남다는 대조적인 것 같으면서 서로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등래퍼 2>에서 서울외고 입학예정인 하선호는

꿈을 강요하면서

꿈꿀 시간을 주지 않아

모두의 꿈이

책 속에 있다 믿는 거야

중략 ~

철이 없대

하고 싶은 건 없는데

매년 적어 내래

장래 희망 oh ah yeah

없어서 없다 썼는데

그게 왜 의지 부족이고

생각 없는 거야라고 외친다.

 

사실 어렸을 때 커서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과학자선생님 등을 대답하는 경우가 많았다그때는 몰랐는데본능적으로 왜 그러고 싶냐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추가적인 질문을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던 같다결국 그때의 나는 꿈이 없었던 것이다.

 

꿈은 어딘가에서 날아온 꽃씨처럼 소리소문 없이 피어났을 때 비로소 꿈이다어쩌면 어릴 때 반복적으로 받은 질문 탓에 우리는꿈을 목표와 혼동하는지도 모른다영화로 말하자면목표는 어느 만큼의 관객수를 동원할지얼마의 수익을 창출할지 등의 구체적인 수치를 다루는 이야기다반면 꿈은 미술을 논한다어떤 분위기의 장소어떤 색깔과 질감의 의상또 어떤 종류의 소품에 둘러싸인 주인공…. 즉 나를 상상하는 것이 바로 꿈이다.” [pp. 149~150]

 

이렇게 피어난 꿈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은 살아남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치열한 순간들의 연속이다단순히 존재감 없이 꾸역꾸역 버티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을 그녀는 살아남다라는 단어로 고백한다.

무례한 클라이언트에게 일침을 날리지 못하고 웃어버린 순간음악 관련 일을 전혀 하지 않았던 돈 많은 제작자가 가사를 가지고 (빨간 펜으로 줄을 그어가며감 놔라배 놔라 할 때 그 요구를 들어주는 시늉을 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든 일이 그러하듯 좋은 클라이언트랑만 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p. 190]

외부에서 바라보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시선도 많았을 것이다중요한 건빛나는 재능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게 ‘살아남기’라는 것이다금 밖으로 나가면 게임이 끝나는 동그라미 안에서 변두리로 밀려나 휘청거리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고아마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올 것이다그때 볼품없이 두 팔을 휘저어가며 다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그 멋없는 순간 스스로 겸연쩍어 선 밖으로 나가떨어진다면 잠깐은 폼 날지언정 더 이상 플레이어가 될 순 없다.

기억하자오래 살아남는 시간 속에 잠깐씩 비참하고 볼품없는 순간들은 추한 것이 아니란 걸아무도 영원히 근사한 채로 버텨낼 수는 없단 걸.” [pp. 191~192]

 

백조는 수면 위의 아름다운 모습을 위해 수면 아래에서 쉴 새 없디 발버둥 쳐야 한다는 말처럼  ‘스타 작사가라는 후광을 끄고 고단하고 혹독한 생존의 과정을 가감 없이 들려준다.

 

 

이 책은 우리가 자주 표현하는보통의 단어들을 수집하고그 단어들이 다 품어내지 못해 흘러내린 의미와 오해를 섬세하게 포착정리했다고 볼 수 있다저자의 본보기를 따라 보통의 단어 속에 깃들인 특별한 가치를 찾아내는 행위 자체가 우리 삶의 방향성을 찾고 이정표를 세우는 길일지도 모른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Radio record’에는 라디오 「김이나의 밤편지」에서 했던 그녀의 주옥 같은 멘트들이Lyrics’에는 시중에 발표되지 않은 노랫말이 실려 있어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키워드로 모은 보통의 단어들이 어떻게 노랫말로 녹아 드는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마치 부록으로 그녀의 습작 노트를 살짝 보여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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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 미국 문학의 꺼지지 않는 ‘초록 불빛’ 클래식 클라우드 12
최민석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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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의 벽에 부딪힌 사랑

 

공식적으로는 신분제가 사라졌지만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본’, ‘지식’, ‘사회적 위치’, 그리고 취향에 따라 보이지 않는 계층 혹은 계급의 벽이 존재한다. 1920년대 미국의 재즈 시대(Jazz Age)를 상징하는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Fitzgerald, 1896~1940, 이하 피츠제럴드’)는 바로 이 계층/계급의 문제를 다룬 작가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시카고 금융 부호의 딸인 지네브라 킹(Ginevra King, 1898~1980)과의 사랑이 이 보이지 않는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좌절되었다는 작가의 체험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1915년 그녀의 별장에 초대받아 갔다가 그녀의 아버지 찰스 킹이 그녀에게 큰 소리로 외친 가난뱅이는 부잣집 딸과 결혼할 꿈조차 꾸지 말아야 해. (Poor boys shouldn't think of marrying rich girls)” [p. 38] 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뿐만 아니라 이후 앨라배마주 대법원 판사의 딸인 젤다 세이어(Zelda Sayre, 1900~1948, 이하 젤다’)와 약혼했지만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파혼 당한다그리고 그의 첫 장편인 <낙원의 이편(This Side of Paradise)>이 대성공을 거둔 이후 젤다와 결혼에 성공한다.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그는 스탕달(Stendhal, 1783~1842) <적과 흑>(1830)의 주인공 줄리앙 소렐처럼 로 상징되는 신분상승을 꾀했고자신이 쓴 <위대한 개츠비>(1925)의 주인공 제이 개츠비의 삶과 비슷한 궤적을 그렸다.

 

 

재즈시대의 아이콘

 

부잣집 막내로 자란 젤다와의 결혼은 어떻게 보면 계급의 사다리에서 한 칸 더 올라간신분 상승의 증명이기도 했다그래서 일까피츠제랄드는 상류층 사교계에 발들 디딘 후에는 한평생 부를 과시하는 생활을 했다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장기 투숙을 하고대저택에 거주하고상류층 파티에 고급 옷을 입고 참석해 주인공을 자처했다.” [p. 40]

이렇게 술과 파티재즈 시대의 소비와 향락을 대표하는 이 단어들이 피츠제럴드 부부의 삶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물론 그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가 없이는 상류사회에 진입할 수 없지만, ‘()’만 가지고 상류사회의 일원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츠제럴드는 끝까지 상류사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그가 “저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처럼마치 바벨탑처럼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미국의 성장과 향락을 상징(했을지도 모른다)그는 우리가 문학을 해서 얻을 수 있는 최대치의 화려함을 가장 일찍 획득하고 이를 온몸으로 즐기고그 때문에 불나방처럼 그 화려한 불 속에서 타버렸다 [p. 292]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작가

 

마치 화려하게 빛나던 재즈 시대가 1929년 대공황으로 한 순간에 스러진 것처럼 피츠제럴드도 아내 젤다의 조현병자신의 알코올중독막대한 빚으로 밑바닥까지 추락한다.

그의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는 시장의 외면을 받았고 너무나 미국적이라는 이유로 해외 출판도 거절되었다이후 9년 만에 내놓은그의 네 번째 장편 <밤은 부드러워>(1934)도 실패로 돌아갔다물론 핑계거리는 있다. “피츠제럴드가 소설을 쓰는 데 이토록 오래 걸린 이유가 있다그는 볼티모어에서 아내 젤다의 치료비를 대기 위해 짧은 글들을 써야 했다이것이 생활의 주 수입원이었다소설가이지만 본업에 주력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었다동시에 스코티를 양육해야 했고무엇보다 스스로 알코올 중독과 싸워야 했다.” [p. 129]

여기에 1936년에 발표한 에세이 <무너져 내리다(The Crack-up)>은 그의 작가로서의 생명을 사실상 끊어 버렸다이제 피츠제럴드는 순문학 작가로서 찾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p. 103]

 

결국 피츠제럴드는 아예 할리우드로 건너가 유령 시나리오 작가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아내 젤다의 치료비딸 스코티의 교육비자신의 생활비를 위해.

 

당연히 할리우드에서의 삶은 그에게 고통이었다그는 편집자 맥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곳에서 계속 공장 노동자처럼 일하는 건 영혼을 파괴하는 짓입니다영화계 현실은 다음과 같은 역설을 보여줍니다. ‘당신의 개성을 보고 이곳에 데리고 왔지만당신은 이곳에 있는 이상 개성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나아가 그는 각색 작업을 할 때에도오로지 원작에 있는 단어만 써야 한다고 분통을 터트린다수정해야 할 신(scene)이 있으면 마거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마치 성서라도 되는 양 휙휙 넘기며’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를 찾아내야 했다” [pp. 26~28]고 하소연할 정도로.

 

말년의 피츠제럴드는 고충을 겪고 있었다책은 팔리지 않는 데다사는 이는 자신뿐이었고작업한 영화 크레디트에는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건강은 바닥을 쳤고지갑에는 푼돈도 없었다주머니 사정이 나빠진 그는 카페나 식당에서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집 근처의 약국에서 만났다게다가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고 있었기에술을 끊어야 했다. ” [pp. 57~58]

어쩌면 몰락한 것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잊혀졌으니까.

그의 생애 마지막 시기는 그가 자신의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에 나타나면서점 주인들이 놀라던 때였다모두 피츠제럴드가 이미 죽은 줄 알았으니까그만큼 그는 세상에서 잊혀 있었다그리고 어이없게도피츠제럴드는 화가처럼 사망한 후에 빛을 보기 시작한다그것도 그가 죽고 나서 10년이나 지난 후에 말이다.” [pp. 51~52]

 

1998년 초 뉴욕의 랜덤하우스 편집위원회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100대 영문소설 2위로 <위대한 개츠비>, 28위로 <밤은 부드러워>가 선정된 것은 피츠제럴드에게 주어진 수많은 사후(死後)의 영광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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