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락 알베르 카뮈 전집 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8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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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이하 ‘카뮈’)의 <전락(轉落, La Chute)>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멕시코 시티’라는 바(bar)에서 ‘누군가’를 만난 변호사 장-바티스트 클라망스(이하 ‘클라망스’)의 고백이다. 마치 모노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클라망스는 스스로를 ‘참회한 재판관’이라고 말하며 며칠에 걸쳐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고 세상을 비판한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듯한 독백 속에서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저자는 타인에게 무관심한 인간의 이기심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먼저 화자(話者)인 클라망스는 인간은 모두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은 어쩌다가 닥친 불행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죄(罪)는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타인을 심판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심판’은 회피하려 한다고 얘기한다.

 

어떤 인간일지라도(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현자(賢者)들이면 몰라도)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공격을 방어하는 유일한 길은 악질적으로 구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심판 받지 않으려고 부랴부랴 남을 심판하러 덤비는 겁니다어쩌겠어요?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생각, 마치 본성의 바탕에서 우러나듯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은 바로 자기는 아무 죄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저 키 작은 프랑스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사내는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그가 호송되어 왔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던 서기에게 이의신청을 해야겠다고 고집을 했어요. 이의신청이라니? 서기와 그 동료들이 웃어댔습니다. “소용없어, 이 친구야. 여기선 이의신청 따윈 하는 게 아니라구.” “그렇지만 말입니다, 내 경우는 예외거든요. 난 죄가 없습니다!” 하고 키 작은 프랑스인이 말했어요. [pp. 85~86]

 

이처럼 나만 예외라고 주장하는 것의 밑바탕에는 심판을 회피하려는 마음이 깔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심판을 받지 않는 길을 선택한다.

 

우리는 자신의 안 좋은 점을 고치거나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러자면 우선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는 판정을 받았어야 했을 터이니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는 그저 남에게 동정을 받고 제가 가고 있는 길을 가면서 격려를 받고 싶은 겁니다. 요컨대 죄를 짊어지고 있는 것도 싫고 또 동시에 깨끗해지려고 노력하지도 않겠다는 겁니다. [p. 88]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기 보다는 타인의 위로와 주위 사람들의 인정에만 연연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것은 클라망스도 과거에 그런 인간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전쟁, 자살, 사랑, 가난 같은 것에 사정이 어쩔 수 없을 때는 관심을 갖긴 했지만 그것도 예의상이거나 피상적으로 그랬을 뿐이지요. 때로는 내 일상생활과 관계가 없는 어떤 대의명분에 열렬한 관심을 기울이는체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나의 자유가 위협받는 경우라면 물론 다르겠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거기에 가담하지 않았어요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그저 표면만 스치면서 미끄러지는 거예요. 맞아요. 모든 게 내겐 겉만 스치면서 미끄러져갔어요. [p. 56]

 

예전에 클라망스는 가난하거나 변호할 능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변호하면서, 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덕망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는 클라망스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한 결과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다리 근처를 산책하다가 어떤 여성이 자살 시도하는 걸 목격했지만 그냥 지나쳐버린다. 왜 그랬을까? 주위에 그를 심판 혹은 평가할 다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까?

몇 년 후 갑자기 그는 그때 죽은 여성의 웃음소리를 듣는 환청을 겪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무엇이 원인이 되어 그가 죽은 이의 웃음소리를 듣게 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각성을 통해 그는 깨닫는다.

 

자기 자신을 비판함이 없이 남을 비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남을 비판할 권리를 갖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통렬히 비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재판관은 누구나 다 결국은 참회자가 되고 마는 법이니까 길을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가서 우선 참회자로서의 직업에 종사하다가 마침내는 재판관이 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내 말 알아들으시겠어요? 좋아요. 하지만 좀 더 분명히 이해하실 수 있도록 내가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중략 ~

우선, 선생께서도 경험해보셨듯이,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공공연한 고백을 하는 일입니다. 나는 종횡무진으로 나 자신을 고발합니다.

중략 ~

자, 딱하게도 이게 바로 나라는 인간입니다!”하고 말하지요. 논고가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내가 나의 동시대인들에게 내밀어 보이는 초상화는 거울로 변해버립니다. [pp.140~142]

 

이런 방식으로 그는 먼저 참회자(懺悔者)가 되어 자신을 비판(批判)하고, 이어 재판관이 되어 타인을 심판(審判)한다. 하지만 그의 심판은 단지 ‘말’로만 이루어졌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남이 우리 말을 곧이듣는다고 한번 가정해보시죠? 그럼 정말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할 테죠. 아이구 떨려……. 물이 얼마나 차갑다구요! 그렇지만 안심해도 돼요! 이제는 때가 너무 늦었어요. 언제나 너무 늦은 것일 겝니다. 천만다행이지 뭡니까! [p. 148]

 

<전락>이라는 이름의 그 현란한 자기 고백은 지식인의 한계였을까? 아니면 또 하나의 언어유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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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 2023-10-20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글인 것 같습니다…🥹💗💗 저도 이 책을 읽은 적 있는데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서 포기했던 책이라서요… 항상 올려주시는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KOEMMA 2023-10-21 08:21   좋아요 0 | URL
1. 주인장님의 격려에 감사합니다.^^

2. 저도 막연해서 고민하다가 이해가 되는 부분만 엮어서 정리했습니다.
 
도쿄 근교를 산책합니다 - 일상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작은 여행, 특별한 발견
이예은 지음 / 세나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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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근교를 산책 합니다]는

 

작가의 말’에 담긴

 

이 책은 ‘도쿄에 사는 사람들은 주말에 어디에 갈까’라는 호기심에서 출발했습니다지난 수년간, 한 달에 한 번 꼴로 전철과 버스를 타고 도쿄 근교 도시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제 일상을 더 풍요롭게 하는 총 스무 번의 만남에 이르렀습니다. 도쿄를 조금만 벗어나도 전철 밖 풍경이 극적으로 바뀝니다. 소박하지만 분명한 도시와 마을의 특징이 눈에 들어옵니다. 비록 세련된 멋이나 트렌드와는 거리가 멀어도, 주민들이 애정을 갖고 오랫동안 가꿔온 문화와 꾸밈을 덜어낸 삶이 특별한 여운을 남깁니다도쿄 근교를 산책하며 발견한 낯선 나라의 이야기를 더 많은 이와 나누고 싶었습니다. [p. 5]

 

라는 말처럼 이 책은 우리에게 도쿄 근교에 대해 소개하지만, 도쿄 근교 여행 가이드북은 아니다. 말 그대로 도쿄 근교의 10개 현(縣)을 배경으로 ‘음식’, 인상 깊게 감상한 일본 문화 ‘콘텐츠’, 그리고 ‘키워드’라는 3개의 테마로 20개의 글을 엮은 책이다. 각각의 글마다 해당 콘텐츠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담담히 얘기하고, 산책 tip, 가 볼만한 곳을 덧붙였으니 여행 가이드와 여행 에세이의 사이 어딘가에 있는 셈이다.

 

 

음식

 

가장 먼저 소개된 곳은 도쿄에 참치를 공급하던 가나가와[神奈川]현 미우라[三浦] 반도였다. 저자는 이곳에서 참치의 다채로운 맛을 한번에 만끽할 수 있는 ‘마구로 만개 세트’를 맛보며, 에도 시대(1603~1868)에 생선을 좋아하는 고양이도 외면하고 뛰어넘어 간다는 뜻에서 ‘네코마타기[猫]’라고 불리며 버려졌던 참치의 영욕(榮辱)을 생각한다.

 

살다 보면, 본질이 바뀌지 않아도 상황이 바뀐 탓에 대우가 달라지는 경우 종종 본다. 그 옛날, 기름지다는 이유로 천대받던 참치가 지금은 똑 같은 이유로 선호되듯이 말이다. 먼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던 참치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인정받으려 애쓰거나 억지로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면 언젠가 세상이 알아준다 메시지는 꽤 희망적이다. [pp. 22~24]

 

가나가와현 에노시마[江の島]에 가서는 그곳의 명물, 시나스동을 시켰다가 한일 양국의 인간관계가 반영된 비빔밥과 돈부리의 차이를 떠올린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나는 두 나라의 밥 요리에 곧잘 빗대곤 한다. 우리나라의 비빔밥이나 식사의 마지막에 나와 우스갯소리로 ‘코리안 디저트’라고 불리는 볶음밥은, 밥과 토핑이 한 몸처럼 뒤범벅된다. ‘우리’라는 틀 안에서 말 그대로 지지고 볶으며 서로에게 동화되는 인간관계 보는 듯하다. 한편, 일본의 덮밥인 돈부리는 토핑과 흰 밥의 경계가 뚜렷하다. 입에 넣기 직전까지도 둘을 완전히 섞지 않음으로써, 재료 본연의 맛을 유지한다는 점도 큰 차이다. 혹시 아무리 친한 사이에서도 타인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일본인의 성향 무의식 중에 음식에도 반영된 것은 아닐까. [p. 29]

 

도치기[?木]현 닛코[日光]의 특산품인 가열한 콩물의 막인 유바[湯波]와의 만남을 애기한 글에서는 여행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여행은 사실 바깥세상이 아닌, 내면의 세계를 탐험하는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안전지대를 벗어나 낯선 환경에 자신을 노출함으로써, 다름 아닌 자신의 성향과 취향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여행자가 정작 관찰하는 대상은 외부 풍경이나 이국의 문화보다는 그런 자극에 반응하는 나 자신이 아닐까. [p. 64]

 

 

콘텐츠

 

천편일률적인 패키지 여행에 질린 이들이 자신들만의 테마를 선정해서 자유롭게 돌아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여행 방법의 한 가지가 자신들이 흥미롭게 본 영화, 드라마, 뮤직비디오, 소설, 애니메이션, 만화 등에 나온 장소를 돌아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쓰메 소세키[夏目 漱石, 1867~1916]가 쓴 소설 <도련님>의 배경이 된 온천 마을인 마쓰야마[松山]는 온천을 즐기러 오는 사람보다 소설 <도련님>의 발자취 따라 거닐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라고 한다.

 

가나가와현 가마쿠라[鎌倉]는 막부 정치를 시작한 미나모토 요리토모[源 賴朝, 1147~1199]가 거점으로 삼은 곳이지만, 이 책에서는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배경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게 부각된다.

 

스즈와 학교 친구들이 즐겨 가던 식당과 카페를 방문했고,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원작 만화에서 인상 깊게 본 작은 신사와 가게도 부지런히 둘러보았다. 그렇게 온종일 이야기의 무대를 누비며, 나만의 추억을 덧씌웠다. 물론 내 여행은 사전 답사도 편집도 거치지 않은 현실이라, 모든 과정이 영화처럼 아름답지는 않았다. 스즈와 언니들이 맛있게 먹던 전갱이 튀김을 기대하고 간 에노시마의 한 식당에서는 똑같은 메뉴를 팔지 않았고, 만화에서 스즈가 요시노의 남자친구를 미행하던 어느 신사에서는 카메라를 떨어뜨려 고장 내고 말았다. 또 스즈와 사치가 서로의 속마음을 터놓던 산을 찾아 2시간을 헤맸지만, 태풍 탓이었는지 등산로 입구가 폐쇄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전혀 아쉽지 않았던 이유는 영화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바다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네 자매는 이나무라가사키의 해안선을 거닐며 아버지의 추억을 반추한다. 스즈에게는 다정했을지 몰라도, 세 언니에게는 자신들을 버린 원망스러운 아버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치는 이제 언니들에게 스스럼없이 장난도치는 막내 스즈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고백한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동생을 남겨준 아버지는 분명 다정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p.116]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지 못해 저자의 감상에 쉽게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반대로 내가 읽어보았던 소설 <설국>의 배경이 되는 니가타[新瀉]현 유자와[湯澤]를 방문한 이야기는 내가 그 자리에 있지 못한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도쿄에서는 이미 매화가 만개하고 성미 급한 벚꽃도 고개를 내밀던 겨울의 끝자락, 다카한에서의 하룻밤을 예약한 뒤 에치고유자와역으로 향하는 신칸센에 올랐다. 창가에 앉으니 멀리 눈이 소복이 쌓인 산에 시선이 닿았다. 깜깜한 터널을 지날 때마다 설산이 한기를 몰고 내게 뚜벅뚜벅 다가오는 것 같았다. 에치고유자와역에 내리기 전 마지막 터널을 통과하자 고작 1시간 반 만에 도쿄와 완전히 다른 계절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산맥과 건물의 지붕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신칸센이 없던 시대에 설국을 찾은 시마무라처럼 보통열차를 탔다면, 길이 약 9.7km에 이르는 시미즈 터널을 지나야 한다. 긴 어둠을 지나 이토록 환한 설경을 마주한다면, 국경이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처럼 강렬한 인상을 받지 않을까. [p. 160]

 

언젠가 겨울에 도쿄를 방문할 일이 있으면 한번 유자와를 방문해서 설국의 정취를 느껴보고 싶다는 기분이 절로 드는 글이었다.

 

 

키워드

 

키워드’라는 테마로 여러 글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일본을 알 수 있는 키워드라고 하면 좋은 것은 기꺼이 취한다라는 뜻의 ‘이이토코도리[良いとこ取り]가 대표적인 키워드가 아닐까 생각한다. 마쓰오카 세이고[松岡 正剛, 1944~ ]는 ‘이이토코도리’라는 일본식 문화편집 방식이야말로 ‘일본의 정체성’이라고 주장할 정도다.

 

도시로 보면, 가나가와현의 항구 도시인 요코하마야말로 이이토코토리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요코하마는 1859년, 미국에서 온 페리 제독에 의해 닫혀 있던 빗장을 푼다. 비록 무력에 의한 불평등한 개항이었지만, 이는 요코하마가 서양 문화를 흡수해 눈부시게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새로운 문명과 기술을 발 빠르게 체득한 요코하마인은 당시 일본에서 흔치 않았던 서양식 호텔과 베이커리, 이발소를 열었고 아이스크림과 칵테일을 만들었으며, 경마와 야구 시합을 즐겼다. 자연스레 외국인은 물론 선진 문물을 배우려는 일본인까지 요코하마로 몰려들었다.

중략 ~

지금도 요코하마 곳곳에는 150여 년 전 뿌리를 내린 세계 각국의 문화가 살아 숨 쉰다. 덕분에 여행객도 마치 셀렉트 숍에 온 기분으로 원하는 것을 취하는 이이토코토리 여행이 가능하다. [pp. 207~208]

 

또 다른 키워드로는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가 있다.

 

일본인은 오래 전부터 벚꽃을 죽음과 결부해 왔다. 한번 피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절정에 이르고, 가장 화려할 때 덧없이 흩어지는 꽃잎이 생의 무상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데, 바로 일본인만의 미의식이라 불리는 모노노아와레다. [pp. 290~291]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개념이지만, 이를 반영한 작품으로는 이와이 슌지의 <4월 이야기>, <러브 레터> 등이 있다고 한다.

어쨌든 ‘모노노아와레’의 미학(美學)때문에 일본의 정서가 과거지향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도쿄 사람들의 ‘에도[江戶] 시대’에 대한 감정도 ‘모노노아와레’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도쿄에 살다 보면, 이곳 사람들은 에도 시대(1603~1868)에 대한 집단적 향수를 앓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100년 넘은 가게를 일컫는 시니세[老?]는 흔하지만, 에도 시대 때부터 내려온 곳은 훨씬 각별하게 친다. 또, 도쿄 국제공항이나 스카이트리처럼 도시를 대표하는 시설에는 에도를 테마로 한 공간이나 전시물이 빠지지 않는다. 단순히 도쿄의 옛 지명이 에도라서는 아니다. 에도 시대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에도를 지금의 수도로 만든 도시의 기원이자, 어쩌면 근대화 이전의 일본을 상징하는 정신적 고향이기 때문이다. [pp. 234~235]

 

하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도쿄에는 에도 시대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동네가 사라졌다. 다행히 개발의 열풍이 비껴간 덕분에 에도 시대의 분위기가 잘 보존된 곳이 있다. 바로 ‘고 에도[小 江戶]’라고 불리는 사이타마[埼玉]현 가와고에[川越]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 사회, 고에도로서의 자부심을 꼿꼿이 지켜나가는 가와고에는 가끔 들춰보고 싶은 오래된 사진첩과도 같다. 물질적 풍요나 첨단 기술은 도쿄에 집약되어 있지만, 막상 도쿄가 잃어버린 에도의 풍경은 가와고에에서 숨 쉬고 있으니. 그래서일까. 도쿄로 돌아오는 전철을 타고 가와고에를 떠날 때, 나는 일본인의 추억 한 페이지를 거닐다 나온 기분이 들었다. [p. 240]

 

 

이 리뷰는 세나북스로부터 무료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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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 주택지 - 인구 폭증 시대 경성의 주택지 개발 정암총서 12
이경아 지음 / 집(도서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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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개발의 시작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주택 공급은 짓고자 하는 사람과 지어주는 사람만 존재하는 일종의 주문생산 방식이었다. 그런데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 경성에서부터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인구가 갑작스럽게 늘어나고 엄청난 주택난으로 몸살을 앓게 되면서 주택 공급 방식도 바뀌게 된 것이다조선 500여 년간 약 10만에서 20만 내외로 유지되던 한양의 인구 규모가 불과 30년 만에 100만에 육박하게 되는, 그야말로 ‘인구 폭증 시대’를 맞았다. 개발자 또는 개발회사는 앞다투어 대규모 필지를 사들이고 그것을 나누어 불특정 다수에서 분양하기 시작했다. [p. 9]

 

주택 개발의 시작이자, 부동산 투기의 시작인 셈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후암동의 학강(學岡) 주택지, 장충동의 소화원(昭和園) 주택지와 함께 경성의 3대 주택지로 손꼽히던 북아현동의 금화장(金華莊) 주택지다.

 

금화장 주택지는 원래 토막민이 움집을 짓고 살던 빈민촌이었다금화장 주택지 개발을 할 당시 토막민들과 갈등이 생기는 일은 당연했다. 새롭게 개발된 신규 서양식 주택지와 주변으로 밀려난 토막민의 초라한 움집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것은 비슷한 시기 신당동을 포함한 경성의 여러 주택지 개발에서 나타난 모습과 매우 유사했다. 결국 밀려난 토막민들은 아현리와 홍제내리로 옮겨 아무런 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비위생적이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p. 310]

 

이렇게 토막민이 움집을 짓고 살던 빈민촌을 밀어낸 자리에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명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금화장 주택지는 금화산에 둘러싸여 있고 금화원이 있어서 녹음과 사계절의 풍경을 즐길 수 있고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땅이 건조하며 공기가 맑은 위생적인 주택지로 여겨졌다. 그야말로 자연과 함께 하는 교외 주택지의 이미지가 금화장 주택지에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일찍부터 전차가 연결되어 도심부는 물론이고 한강의 마포까지 손쉽게 연결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주택지가 개발된 이후에는 전차를 타고 경성역, 용산, 멀리는 한강교를 건너 노량진과 영등포까지 갈 수 있게 되었으니 더할 나위 없는 주택지였다. 금화장 주택지 올라가는 언덕 바로 앞에는 죽첨정이정목 전차역이 있었으며 인근에는 서대문소학교와 미동보통교, 죽첨보통교와 같은 교육시설적십자병원과 같은 의료시설동양극장과 같은 문화시설 등등 생활편의시설이 주택지 주변에 두루 구비되어 있었다. 이렇듯 시대의 유행을 타고 나타난 신규 주택지 금화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최적의 주택지로 인식되면서 경성의 3대 주택지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pp. 304~306]

 

물론 이 과정에서 시세 차익을 노린 부동산 투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도쿠가와 요리사다[德川 賴貞]은 이 땅을 30만원에 매입해서 10년 만에 130만원에 매각했다.

 

“이곳은 원래 도쿠가와[德川] 가문의 도쿠가와 요리사다[德川 賴貞] 후작이 1916년에 매입한 땅이었다고 한다. 도쿠가와 요리사다는 장래 토지가격이 상승할 만한 곳을 찾았는데, 하세가와[長谷川] 군부 사령관에게 의뢰하여 찾은 땅이 바로 이 일대 토지와 부산의 토지였고 이것을 30만 원에 매입했다. 이 땅을 1926년 마스다 다이키치[增田 大吉]가 130만 원에 매입했다고 하니 이전 소유자였던 도쿠가와 요리사다는 엄청난 시세차익을 남긴 셈이다.” [pp. 306~307]

 

 

한옥 개량의 노력 - 정세권과 박길룡

 

주택 개발의 시대는 ‘문화주택’이라고 불리던 서양식 주택의 시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문화주택’의 광풍(狂風) 속에서도 한옥을 개량하여 경제적이면서도 위생적인 주택을 공급하기 위한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인 경성의 건축왕 기농(基農) 정세권(鄭世權, 1888~1965) (https://blog.yes24.com/document/9734348) 최초의 조선인 건축사무소를 개설한 일송(一松) 박길룡(朴吉龍, 1898~1943)이다.

 

먼저 정세권을 살펴보면,

 

그는 조선 재래주택의 단점을 발견한 뒤 경제적이면서도 위생적인 주택을 목표로 매년 300여 호의 개량주택을 지었다주택 공급방식으로는 연부, 월부의 판매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의 주택난에 다소 도움이 되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직접 주택 개량의 실험대상이 되었다. 개량주택에 들어가 살다가 매각하기를 반복하면서 단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다시 개선해 나가는 식으로 주택 개량 실험을 이어나갔다. 당시 박길룡과 같은 건축가들과 교류하면서 주택 개량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느 건축가도 정세권처럼 많은 한옥을 직접 짓고 살아보며 실질적인 개량안을 내놓진 못했다. [p. 21]

 

이러한 정세권의 한옥 개량 노력이 집약된 것이 가회동 한옥 단지다.

 

그 동안 가회동 일대는 역사적, 지리적 위상, 가장 한옥 밀도가 높은 한옥단지 정도의 이유로 유명세를 탔다. 100년이 넘은 조선시대 한옥밀집지역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굳이 ‘100년’, ‘조선시대’라는 용어로 치장하지 않아도 다른 한옥단지와 차별화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건축왕이자 민족운동가였던 정세권, 정세권이 가진 조선 주택 개량에 대한 꿈과 이상이 다양하게 실현되었던 곳그래서 20세기 전반 한옥이 ‘도시 주택’으로 변화해 가던 모습을 가장 다채롭게 보여주고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 가치는 다른 한옥단지와 견줄 수 없다. [pp. 39~40]

 

이렇게 정세권이 실무적으로 한옥 개량을 위해 노력했다면, 박길룡은 이론적으로 한옥 개량을 위해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일찍부터 조선 주택에 관심을 두고 각지를 여행하면서 조사하고 그 기록을 도면으로 남겨, 이를 바탕으로 집중식(集中式) 평면배치와 부엌과 온돌, 변소 등의 개선안을 제시했다.

 

박길룡은 1926년부터 1943년 서거하기 전까지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거의 매해 빠지지 않고 주택 개량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한글 매체든 일본어 매체든, 신문이든 잡지든 매체를 가리지 않고 재래 주택의 단점을 이야기하고 당시 주택건축 현황을 비판하고 개량에 관한 논의를 펼치고 개량안을 제시했다. 개량안은 단지 말뿐 아니라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 투시도, 액소노매트릭, 사진 등과 함께 게재해 대중의 이해도를 높였다.

중략 ~

그는 이미 지어진 주택에 대해서는 방의 위치를 바꾸는 것 같은 응급 조치책을 제시하고 새롭게 지어질 주택에 대해서는 개선안을 내놓았다. [pp. 78~80]

 

하지만, 박길룡이 원하는, 집중식 배치의 건물과 주변의 외부공간을 두는 한옥을 짓기 위해서는 대규모 토지와 건물이 요구되고문화주택’에 대한 열풍 몰아치고 있기에 이러한 주택 개량에 대한 박길룡의 생각은 온전히 반영되지 못했다. 그나마 그의 생각을 가장 많이 반영한 것이 244평의 대규모 대지에 지어진 경운동 민병옥 가옥[지금의 민가다헌(閔家茶軒)]이다.

 

삼청동 H자형 하이브리드 주택의 평면과 입단면도

출처: <경성의 주택지>, p. 122

 

길가에 면한 부분에는 서양식으로 보이는 2층의 오오카베[大壁] 구조의 주택을 배치하고 안쪽에는 1층의 한옥을 배치한, 한일(韓日)절충의 H자형 주택을 제시한 김종량(金宗亮, 1901~1962)의 하이브리드 주택도 이러한 주택 개량을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별도의 출입 동선과 화장실 등을 두어 임대가 용이했으나 공간의 낭비가 심하고, 공사비가 비쌌으며, 겨울의 추위로 일본인마저도 다다미가 아닌 온돌을 선호했기에 널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양식 주택, 문화주택의 도입과 광풍

 

당시 자유연애를 부르짖었던 신여성은 문화주택을 통해 상대방의 경제력을 가늠해 결혼 여부를 결정하기도 했는데, “문화주택만 지어주는 이면 일흔 살도 괜찬어요. 피아노 한 채만 사주면”이라는 문구에서 나타나듯 자신의 삶을 문화주택과 치환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생기기도 했다. 따라서 문화주택을 선호하는 여성을 노리는 사기꾼이 나타난다거나, 문화주택을 미끼로 결혼했다가 결국 파경에 치닫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문화주택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점점 많아져서, 어떤 이는 문화주택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에 무리하게 은행대부를 받아 지어보기도 했지만 이자를 갚을 능력이 안 되어서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문화주택을 은행에 넘기고 은행에 넘어간 문화주택은 결국 외국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가 버리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pp. 48~49]

 

이렇게 ‘문화주택’으로 대표되는 서양식 생활을 선호하면서도 온돌로 대표되는 기존의 습성은 버리지 않았다. 그 괴리 속에 외관은 벽돌조의 서양식 주택, 내부는 일본식 목조 주택 모듈과 중복도형 공간 구성을 취하면서 온돌 공간을 유지하는 한국, 일본, 서양의 주거문화가 공존하는 현상이 빚어졌다. 마치 서양문화를 수용하던 20세기 조선을 상징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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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도시를 생각해 - 우리가 먹고 자고 일하고 노는 도시의 안녕을 고민하다
최성용 지음 / 북트리거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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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한 도시생활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것들

 

오늘날 ‘도시화’는 더 이상 피할 수 있는 현상이다. 한국의 경우, 광복이 후 압축적인 도시화의 결과, 2021년 기준으로 인구의 91.8%가 도시에 살고 있다1)이처럼 도시화가 되돌릴 수 없는 현상이라면,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도시화가 진행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한국의 도시화를 상징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아파트’다. 1980년에는 전국 주택 중 아파트 비중이 7%(37만호)였는데, 30년 만인 2010년에 이르면 59%(819만호)로 급증2)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주택을 재산증식을 위해 사는(buying) 물건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한 몫 했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주택난 해소라는 같은 목적으로 아파트를 짓기 시작한 파리와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파리는 시내와는 멀리 떨어진 교외에 낮은 임대료를 내고 장시간 사용할 수 있는 장기 임대 아파트를, 서울은 시내 또는 시내에 가까운 곳에 매매가 가능한 분양 아파트를 건설했다. 그 결과

 

파리의 아파트는 위험지역이라는 인식과 함께 저소득층의 주거 공간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서울의 아파트는 선호하는 주거 형태가 되었고 중산층 이상의 소득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습니다. [p. 36]

 

이처럼 선의로 시작된 파리의 아파트 정책이 실패했지만, 서울의 아파트 정책도 완벽하게 성공한 것은 아니다. 아파트 단지 안과 밖의 구분과 갈등, 단지 내의 분양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의 구분과 갈등, 아파트를 구매할 능력이 없는 원주민이 쫓겨나는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 등을 통해 아파트 단지를 ‘게토’로 만들어냈다.

 

출입을 막는 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더라도, 아파트 단지 하나가 만들어지면 주변 시가지에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공간이 생기는 것 같은 효과를 낳기도 합니다.

중략 ~

아파트 단지 입주자들이 이용하는 내부 공간에는 근사한 정원이 조성되어 있지만,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마을의 경관은 견고한 담장과 건물의 긴 외벽 탓에 삭막하고 단조롭습니다. 주변이 어떻게 되든 단지 안쪽의 전용 공간만 쾌적하면 그만인 것이지요. 이 아파트 담을 따라 걷는다고 상상해 봅시다. 걷고 싶은가요? 상점이 있고, 사람들의 사회적 교류가 이뤄지던 거리는 아파트 단지의 등장과 함께 ‘통행로로서의 길’만 남게 됩니다. [pp. 47~48]

 

이처럼 ‘통행로로서의 길’은 도시생활의 편리성을 위해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 가운데 하나다.

 

교통체증 해소를 위해 선택한 자동차 우선의 교통정책도 보행자 교통사고의 급증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마치 산업혁명 시기에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처럼, 자동차가 사람을 잡아먹었던 것이다. 다행히 이 문제는 ‘보행권’으로 상징되는 노력에 의해 많이 완화되고 있다.

 

자동차 중심의 거리가 사람 중심의 거리로 바뀌는 일은 단순히 걷기 편한 길로 바뀌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걷고 싶은 거리가 많아지고, 그 길을 걷는 사람이 늘어나면, 그로 인해 시민의 일상이 작은 부분에서부터 변화하거든요. 더 안전해지고, 우연한 만남이 늘어 이웃과 더욱 가까워지고, 동네 상점은 손님으로 북적이게 되고, 공동체 구석구석이 더 건강해지지요. [p. 26]

 

물론 저자가 바라는 것처럼 긍정적인 변화만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파리의 임대 아파트 건설처럼 선한 의도가 나쁜 결과를 빚어낼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우리는 단일 민족 국가라는 신화 속에서 살아왔다. 물론 옛 부여 지역에 정착한 속말 말갈(粟末 靺鞨)이나 백두산 근처에 정착한 백산 말갈(白山 靺鞨) 같은 말갈계 고구려인 혹은 발해인이 존재했고, 신라의 9서당 가운데 하나인 ‘흑금서당(黑衿誓幢)’에서 알 수 있듯이 말갈계 신라인도 존재했다. 하지만, ‘3D 업종’ 기피로 인한 외국인 노동자, 농촌의 노총각 문제로 인한 국제결혼 등으로 증가한 이주민과의 갈등, 최근 지하철 시위로 부각된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 등은 여전히 우리가 다른 존재와의 공존(共存)에 서툴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1996년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를 촉진하는 시민의 모임에서 시작된 (사)장애물 없는 생활환경 시민연대는 독특한 주장을 하고 있다.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도시를 만들어 놓고 난 다음에 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장애물이 없는 도시를 만드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의 전환이 있었거든요. 국적, 나이, 장애, 성별 등에 따른 제약 없이, 처음부터 모든 사람이 함께할 수 있도록 도시를 설계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편의 시설을 따로 설치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이렇게 보편성을 중심으로 도시를 만드는 기법을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라고 합니다. 장애나 장벽이 없는 환경을 만든다는 뜻에서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즉 ‘무장애’라고도 하고요. [pp. 136~137]

 

좋은 얘기이기는 하지만, 기존의 도시에는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힘든 주장이다. 전쟁이나 재해로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거나 새로 도시를 만들 경우에나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지속 가능한 도시개발

 

개발제한구역의 지정 및 관리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3조에 의하면 ‘그린벨트’라 불리는 개발제한구역은 도시의 무질서한 확산을 방지하고 도시 주변의 자연환경을 보전하여 도시민의 건전한 생활환경을 확보하기 위해 설정되었다. 하지만 신도시를 개발하는 등 조금만 토지가 필요하게 되면 대뜸 그린벨트 해제를 들먹인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그린벨트가 개발예정구역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닐까?

 

2019년, 대장들녘은 3기 신도시 예정지에 포함되면서 ‘대장지구’로 불리게 됐습니다. 주택 공급을 늘려야 한다는 정책적 필요 속에서, 넓게 펼쳐진 대장들녘이 개발의 적지로 꼽힌 것입니다. 대장들녘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잘 보존해야 할 개발제한구역’이 아니라 ‘언젠가는 개발해야 할 개발예정구역’에 그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보통 개발제한구역을 해제할 때는 이미 훼손이 많이 진행되어 보존 가치가 낮은 4, 5등급의 개발제한구역이 대상이 됩니다(개발제한구역은 1~5등급으로 나뉘는데, 1등급이 환경적 가치가 가장 높고 5등급이 가장 낮습니다). 대장지구는 면적의 99.9%가 개발제한구역이고, 그 중 84.5%가 2등급 이상의 보존 가치가 높은 땅입니다. 3등급까지 포함할 경우 그 수치는 92.2%로 올라갑니다. [pp. 263~264]

 

개발제한구역 해제를 통한 양적인 도시 개발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도시를 개발하는 다른 방법이 있을까? 뉴욕의 ‘하이라인 공원(The High Line)’으로 대표되는 도시재생이 있다. 이 방식은 버려진 도시 건축물에 숨을 불어넣어 과거와 미래를 조화시킨다. 그리고 ‘공생(共生)’을 전제로 하는 지속 가능한 도시개발 방식이기도 하다.

 

낡은 공장은 일단 밀어 버려야 한다는 시선을 거두고 나니, 조금씩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인천시 서구 가좌동에는 ‘코스모 40’이라는 복합 문화 공간이 있습니다. 카페, 공연장, 전시장이 어우러져 있는 이곳은 오래된 화학 공장을 개조해서 만들었다는 독특한 이력을 자랑합니다. 건물이 위치한 곳에는 원래 코스모화학이라는 이산화티타늄 정제 공장이 있었습니다.

중략 ~

1968년부터 40여 년간 자리를 지켰던 공장은 울산으로 이주하면서 2016년을 끝으로 가동이 중단됩니다. 그리고 철거 절차에 들어갑니다. 오염 물질을 내뿜는 공장의 가동 중단과 철거는 지역 주민들에게는 희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역의 한 회사가 이곳의 역사적 가치에 주목해 공장의 한 동을 매입하면서 ‘코스모 40’이라는 새로운 페이지가 열리게 됩니다. 전체 45개 동 가운데 유일하게 철거되지 않고 남겨진 40번째 동이 리모델링 대상이었지요. 이곳의 이름이 코스모 40인 이유입니다. 기존의 오래된 공장 건물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필요한 시설은 새롭게 증축해 연결하니 멋진 공간이 탄생했습니다. [pp. 290~292]

 

어떤 방법이든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누구나 살고 싶은 도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1) 국토교통부/한국국토정보공사(LX), ‘도시계획현황’(e-나라지표).

(https://www.index.go.kr/unity/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1200)

 

2) 국토연구원 자료. 최성용, <내일의 도시를 생각해>, (북트리거, 2021), p.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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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 살인 사건 - 카뮈의 <이방인>,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
카멜 다우드 지음, 조현실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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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다르게 읽어보기

 

프랑스령 알제리 출신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이하 ‘카뮈’)의 <이방인>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1)

 

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소설 <이방인>은 프랑스령 알제리에 사는 평범한 직장인인 ‘뫼르소’라는 남자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일상을 살아가던 중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이게 되기까지의 상황을 그린 1부와 ‘뫼르소’를 재판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느끼는 부조리함,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고 변화하는 주인공의 의식을 통해 묘사하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방인>이 가해자 ‘뫼르소’만 조명하고 있기에 우리가 무심코 넘어가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피해자인 아랍인 ‘무싸’와 그 가족의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가 가해자의 인권은 보호되고 피해자의 인권은 보호되지 못하는 사례들을 보는 것처럼, 아랍인 '무싸'는 시신조차 보호받지 못했다.

 

<뫼로소, 살인 사건>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이방인>의 이야기를 피해자 아랍인 ‘무싸’ 가족의 입장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이 작품이 잘 알려진 원작의 전복(顚覆)을 꾀하는 유일한 작품은 아니다. <춘향전>의 전복을 꾀한 영화 <방자전>(2010)도 있고, <제인 에어>의 전복이랄 수 있는 진 리스(Jean Rhys, 1890~1979)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1966)도 있다.

 

 

하룬, 또 다른 뫼르소

 

이 소설 <뫼르소, 살인 사건>의 화자(話者)는 <이방인>에서 ‘뫼르소’에게 살해당한 아랍인의 동생 ‘하룬’이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누군가에게 말하는 듯한 형태로 쓰여진 작품이지만, 읽다 보면 <뫼르소, 살인사건>의 ‘하룬’에게서 <이방인>의 ‘뫼르소’가 떠오른다.

 

뫼르소에 대한 증오에서 출발하여 그를 집요하게 분석하던 하룬은, 결국 자신이 뫼르소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뫼르소가 조국이 아닌 땅에서 고아처럼 떠도는 삶을 살았다면, 하룬은 죽은 형이 살아오기만을 바라는 엄마 곁에서 죽은 듯 지내야만 했다. 뫼르소가 대낮에 햇빛 아래에서 저지른 살인을 하룬 역시 한밤중에 달빛 아래에서 저지른다. 또한 뫼르소가 살인 자체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죄인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하룬은 프랑스인을 죽였지만 죽인 시기가 알제리 독립 이전이 아니라 이후라는 점에서 비난 받는다. 이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두 사람은 똑같이 종교를 맹렬히 부정하며 자신의 존재를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확고한 태도를 보인다. [pp. 202~203]

 

다시 말해, <이방인>이나 <뫼르소, 살인사건>에서는 일반적인 살인 사건에 대한 재판처럼 살인의 구성요건을 가지고 다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살인 행위 그 자체와 관련 없는 요소 때문에 가해자가 비난 받고 판결이 선고된다. 뭔가 우스꽝스럽고 ‘부조리’한 느낌이 든다.

 

프랑스인 뫼르소가 눈부신 햇빛이 따가운 오후 2시에 알제리인을 살해했듯이, 알제리인 하룬은 달빛이 서늘한 새벽 2시에 프랑스인을 살해한다. 다음에는 그 프랑스인의 유족이 알제리인을 살해할까? 뭔가 이상한 ‘뫼비우스의 띠’를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왠지 저자가 지나치게 <이방인>을 의식한 나머지 재해석 혹은 안티-테제가 돼버린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피해자 ‘무싸’의 남겨진 가족들의 고통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 들면서 ‘뫼르소’ 이야기를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맴돌았다.

 

1) 알베르 카뮈, <이방인>, (책세상, 2012), p.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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