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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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에 남에게 보여지는 ‘나’에 대해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다. 이 소설 <눈부신 안부>의 화자(話者)인 이해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가스 폭발 사고로 친언니 이해리를 잃었기에 그 상실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의 시선을 더 의식했는지도 모른다


부모를 잃은 자식의 슬픔도 크지만, 뜻하지 않는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은 더 클 것이다. 그렇기에 모범생이던 큰 딸 이해리를 가스 폭발 사고로 잃은 해미의 부모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별거하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서로를 볼 때마다 그 아픔을 상대방에게 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 테니까.

그런데 자식을 잃은 부모만 힘겹고 언니를 잃은 해미는 괜찮을까? 해미는 언니에게 “땡땡이 치지 못하는 범생”이라고 놀렸기 때문에 언니가 조퇴하고 거리를 거닐다 사고를 당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아직 어리고 언니에 대한 기억도 적을 여동생 해나까지 의식하면서, 그녀는 멀쩡하다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면서 괴로움을 삭혀야 했다.


살아 있는 게 내가 아니라 언니였다면 언니는 틀림없이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해주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면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좋아요.” 나는 한국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큼이나 낯선 나라로 가는 것이 싫었지만, 엄마 아빠를 위해 그렇게만 말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때로 체념이 필요했다. [p. 30]


엄마를 따라 해나와 함께 옮겨간 곳은 독일 중부의 G시였다. 수많은 장소 가운데 G시를 선택한 것은 엄마의 언니인 ‘행자 이모’[오행자]가 정착한 곳이라는 점도 한몫 했다. 갑자기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의 도시에서 살게 되었지만, 해미는 가족을 의식해서 잘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했다. 바둑에서 훈수 두는 이처럼, 제3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고독과 불안이 잘 보이는 것일까? 간호조무사로 건너가 의사로 정착한, 행자 이모는 그런 해미의 거짓말을 알아차리고, 그녀에게 진짜 친구를 소개시켜 준다. 바로 그녀보다 한 살 위인, 마리아 이모[최말숙]의 딸 ‘레나’였다. 이렇게 만난 레나와 친해진 후 해미에게 가상이 아닌 현실의 친구들이 조금씩 생겨났다.


그 아이들과 있을 때면 나는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나라에서 이주해온 이방인도, 언니를 사고로 잃은 아이도 아니었으니까. 그곳에서 나는 그저 온전한 나였고, 레나는 온전한 레나였으며, 우리는 온전한 우리였다. 그런 시간은 이모가 시장에서 떨이로 사온 무른 산딸기나 살구로 만들어주던 잼처럼 은은하고 달콤해서, 나는 너무 큰 행복은 옅은 슬픔과 닮았다는 걸 배웠다. [p. 40]


선의의 거짓말이라지만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다 보니 자신의 얘기가 모순되지 않도록 해미는 자신의 말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디서나 노트를 들고 다니며 거짓말을 할 때마다 기록을 하는 해미를 보고 사람들은 그녀가 작가가 되고 싶어한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이를 알게 된 레나는 해나에게 뇌종양에 걸린 선자 이모[임선자]의 아들 ‘한수’를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레나와 해미는 선자 이모가 기억을 잃기 전에 그녀의 첫사랑을 만나기를 원하는 한수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아이들은 첫사랑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선자 이모의 일기를 몰래 읽어나갔다. 일기 속에는 선자 이모가 1973년 독일로 떠나온 후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간직해온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흩어져 있다. 하지만 그 첫사랑이 누구인지를 명확하지 않았다. 단지, 확실한 것은 그 첫사랑의 이니셜이 ‘K.H.’라는 사실뿐이었다.


석사학위까지만 받기로 아빠에게 약속하고 독일로 건너왔던 엄마는 학위를 따게 되면 박사과정까지 진학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해나는 한국의 기억을 잃어버린 것처럼 독일어로만 말했고, 나는 도시를 조금씩 좋아하게 되었으며, 그곳이 내 자리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 가족도 행복에 거의 가까워져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언니가 떠오르면 죄책감이 느껴질 만큼의 행복이었다. 죄책감이 가슴을 쿡쿡 찌를 때마다 속으로 언니에게 말을 걸어야 했을 만큼의 행복.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p. 109]


그러나 자신이 있을 곳을 드디어 마련했다는 따스한 안도감도 잠시,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 해미의 가족은 갑자기 한국, 정확히는 아빠가 사는 부산으로 돌아오게 된다. 어느새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境界人)이 된 해미는 타인과의 깊은 교류를 자제하게 된다. 심지어 대학 시절 문학 동아리에서 만나 미묘한 감정을 주고 받던 ‘우재’와도 친구와 연인 사이의 선(線)을 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우재는 해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그 과정에서 해미는 상자에 담아 묻어두었던 선자 이모의 일기와 편지를 떠올리고, 늦었지만 그녀의 첫사랑 K.H.를 다시 한번 찾아본다.


나는 네 마음을 그저 짐작하고 내 마음을 조심스레 암시하면서 두려워만 하다가 너를 잃었다. [p. 299]


선자 이모에게 들은 힌트로 그 사람의 이름이 K.H.로 시작되는 수학시간에 쓰는 용어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해미는 K.H.를 ‘기호(記號)’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해미는 K.H.가 ‘근호(根號, 제곱근)’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끝내 K.H.를 찾아 선자 이모의 일기와 편지를 전할 수 있었다. 비로소 오랫동안 고스란히 묻어두었던 상처를 들추어 실패로 남겨두었던 지난 일들을 바로잡은 셈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고, 늘 동경했던 시인이 되지도 못했고, 뼈아픈 시행착오를 수도 없이 겪었어. 하지만, 내 삶을 돌아보며 더 이상 후회하지 않아. 나는 내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랐으니까.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는 한 내가 겪은 무수한 실패와 좌절마저도 온전한 나의 것이니까. 그렇게 사는 한 우리는 누구나 거룩하고 눈부신 별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으니까. [pp.303~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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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킷 - 제1회 위즈덤하우스 판타지문학상 청소년 부문 대상 수상작 텍스트T 7
김선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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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의 상실, 비스킷이 되어가다 


이 소설의 주인공 성제성(이하 ‘제성’)은 남들보다 예민한 청각으로 인해 ‘청각 과민증’, ‘소리 공포증’, ‘소리 강박증’이라는 청각 관련 질환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이 예민한 청각 덕분에 자신을 지키는 힘을 잃어 눈에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도 가지게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게 된 사람’이라고? 수련을 통해 닌자[忍者]가 된 사람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투명인간이 된 것일까? 아쉽게도 그들은 닌자가 되기 위해 끝없이 수련을 한 것도, 특별한 약을 먹거나 광선을 쐰 것도 아니다. 단지 그들의 존재감이 옅어져서 사람들이 그들을 인식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세상에는 자신을 지키는 힘을 잃어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존재감이 사라지며 모두에게서 소외된 사람.

나는 그들을 ‘비스킷’이라고 부른다. [p. 7]


이들 비스킷을 제성은 어떻게 찾아냈을까?


나는 비스킷을 소리로 인지한다. 미약한 숨소리, 힘없는 발소리, 가볍게 스치는 옷감의 소리를 듣고 그들이 주변에 있다는 걸 안다. 일단 그 소리를 인식하면 곧이어 모습이 보인다.

비스킷은 대체로 형체가 희미하다. 희미한 정도는 비스킷이 자신을 인식하는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비스킷의 상태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

1단계는 반으로 쪼개진 상태. 보이지 않는 건 아니지만, 딱히 존재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주변 사람들이 “어? 너 여기 있었어? 몰랐네.”라고 말하는 단계이다. 몸 선이 흐리고 전체적으로 선명하지 않다. 시력이 좋은 사람은 1단계 비스킷을 만나면 어쩐지 어두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2단계는 조각난 상태. 열 명 중 다섯 명이 바로 옆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만큼 존재감이 불안정하고 자신을 지키는 힘이 약하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를 보는 것처럼 흐릿해서 보았어도 무엇을 봤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유령이나 초자연 현상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2단계에 해당한다. 종종 목소리를 통해 존재감이 드러나서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주변인들이 깜짝 놀랄 때도 있다.

3단계는 부스러기 상태. 존재감이 없어 세상에서 사라지기 직전인 상태다. 투명인간과 비슷할 정도로 잘 보이지 않아 나도 소리로 찾아내기 힘들다. 이때까지 비스킷 3단계인 사람을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비스킷 3단계는 오랫동안 자신을 쓸모 없는 존재로 여겨왔기에 주위에서 덩달아 관심을 꺼버리기도 한다. 그러면 모습을 드러낼 용기가 사라진 비스킷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더욱 숨기는 악순환에 빠진다.

지금까지 관찰할 바로는 비스킷의 단계는 수시로 변한다. 자신을 인정하는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졌다가 재건되기 때문인 것 같다. [pp.7~9]


이런 비스킷을 찾아내다니 뭔가 대단한 능력처럼 보인다. 어쩌면,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대가로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엑스맨>속의 돌연변이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화 <엑스맨>속의 돌연변이들과는 달리 제성에게는 자비에 교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정신 치료 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제성은 어린 시절 길을 헤매다가 개에게 위협당하는 비스킷인 김효진(이하 ‘효진’)을 구해주었다. 문제는 비스킷 3단계에 도달한 효진이는 투명할 만큼 존재감이 흐렸기에, 개 주인을 비롯한 이를 본 사람들이 제성이 그냥 짓기만 하는 개를 뛰어가서 일방적으로 걷어찼다고 여긴 것이다. 이로 인해 제성은 ‘비스킷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복수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결국 제성은 자신의 존재감을, 비스킷이 된 이를 구하고 그들을 위해 복수하는 것으로 채워나간 셈이다. 분명히 비스킷이 된 이들을 구하는 것은 선의(善意)다 하지만 그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복수하는 것은 다르다. 어떤 형식으로 복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복수는 범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수가 주는 쾌감과 허무함에 중독되면 존재감을 증폭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를 파괴하게 된다. 물론 복수는 하지 않더라도 비스킷을 구하는 것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oller, 18921~1984) 목사의 “처음 그들이 왔을 때”라는 글처럼. 너도, 나도 비스킷이 될 수 있으니까.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민단원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비스킷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채식주의를 선언했다가 튄다는 이유로 학폭의 대상이 된 서도주(이하 ‘도주’)나 대입을 앞두고 부모님의 절대적인 관심을 받는 언니와 매 순간 신경 써야 하는 우악스러운 동생과는 달리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는 구걸하듯이 노력해야 하는 상황에 배신감을 느낀 조제 혹은 이지안(이하 ‘지안’)처럼 스스로 존재감을 지우는 경우도 있다. 도주의 경우 학폭 가해자에게 복수를 한다고 하더라도, 지안처럼 자신에게 덜 신경 쓰는 부모가 원인인 경우에는 도대체 누구에게 복수를 해야 할까? 그렇기에 제성의 방식은 어린 시절 치기 어린 미숙함이 빚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제성에게 영화 <엑스맨>속의 자비에 교수처럼 믿을만한 어른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다른 방식을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불필요한 악연들은 좀 더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소설에서처럼 아이들만이 비스킷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른들이 더 많이 겪게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예전에 해고하는 대신, 마치 투명 인간이라도 된 듯한 취급을 하는 방식으로 퇴사를 유도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의 존재가 거부당하는 느낌, 혹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는 느낌에 짓눌려 결국 사표를 제출하지 않았을까?


눈으로 보았어도 믿을 수 없는 존재. 보이지 않아도 좌시해선 안 되는 존재. 그 존재들이 모두 인간이고, 우리의 이웃이라는 걸 잊은 듯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다만 모두가 공감하는 한 가지 사실은 누구도 비스킷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비스킷은 자신을 소외시키는 주변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다. 세상에서 소외되면 많은 사람들은 자존감을 잃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용기마저 잃고 만다. 그렇게 스스로 고립을 택하고 자신을 지켜 낼 힘을 잃으면서 단계를 넘나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스스로를 지켜 내기 위해 힘껏 노력하지만, 꾹꾹 눌러 담았던 쓸쓸한 마음이 어쩔 수 없이 왈칵 쏟아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모습이 희미하게 깜박거린다. 그 때 필요한 건 어디로 나아갈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아득함을 함께 바라보고 손잡아 줄 수 있는 누군가다.

누구나 비스킷이 될 수 있다. 또한 누구나 비스킷을 도울 수 있다. 그 전제를 잊지 않으면 모습이 사라져도 서로를 믿고 존중하며 건강하게 서서히 회복할 수 있다. 그걸로 반은 성공한 거다. [pp. 217~218]


(주)마크로밀엠브레인이 올해 4월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20대의 59.2%가 일상에서 외로움을 느낀다1)고 한다. 개인이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단절된 사회가 가져온 결과인 셈이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비스킷’도 이러한 사회 해체 과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정도의 차이가 있고, 수단의 차이가 있어도 우리 사회 역시 ‘비스킷’을 만드는 사회이기에 서점에 가면, 윤홍균의 <자존감 수업>, 충페이충[叢非從]의 <자존감 회복 수업>, 김태형의 <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처럼 ‘자존감’을 다루는 책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이런 종류의 책들이 출판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주위에 또 다른 ‘비스킷’이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듯해서 씁쓸했다.



 

1) 정현진, “[청년고립24시]10명 중 6명 ‘외롭다’… 관계단절·박탈감 호소”, <아시아경제> 2024.05.05 (https://v.daum.net/v/20240505063021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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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다 1 - 흠영 선집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19
유만주 지음, 김하라 편역 / 돌베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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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만주(兪晩柱, 1755~1788). 그는 한 양반 가정의 외아들로 자라, 두 여성의 남편이자 다섯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갔다. 그리고 서른넷이라는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삶의 대부분을 혼자서 읽고 쓰는 데 할애하여 스물네 권의 방대하고 치밀한 일기 <흠영(欽英)>을 남겼다.

이렇게 그의 삶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에 흔한, 주변부의 삶을 산 사대부에 불과하다.


만약 그가 <흠영>을 남기지 않았다면, 아니 남겼더라도 누군가 그 일기를 연구하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역사에 한 줄도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흠영>을 제외한다면 그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13년간 일기를 꾸준히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몇 배의 기간 동안 일기를 쓴 경우도 많다. 게다가 동아시아의 역법 체계 및 책력(冊曆)인 ‘시헌력(時憲曆)’이 대중적으로 보급된 후 일기 쓰기가 본격화된 것을 감안하면 <흠영>의 특별함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예컨대 삭주부사(朔州府使, 정3품)와 우림위장(羽林衛將, 정3품)을 역임한 노상추(盧尙樞, 1746∼1829)가 68년간 기록한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영의정(領議政, 정1품)을 역임한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71년간 기록한 <경산일록(經山日錄)> 등과 비교해 보면 <흠영>의 저자인 유만주가 일기를 쓴 기간이나 저자의 경력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만주의 <흠영>은 특별하다. 왜냐하면, <흠영>에는 다른 사대부의 일기와 달리, 우리가 흔히 ‘근대(近代)’를 얘기할 때 언급하는 ‘개인’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의 등장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인간이 나타난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양반 사대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예컨대 나는 안동 김씨 김좌근(金左根)의 아들 ‘김병기(金炳冀)’다 라고 하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만주는 과거시험 응시자인 거자(擧子)라는 불안정한 처지 때문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얘기하고자 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1786년 2월 16일 눈이 내리고 으슬으슬했다. 저녁 무렵 눈발이 날리다 간혹 그쳤다.

과거 응시생이라는 명목을 취하지 않으면 한미한 딸깍발이로 손가락질을 받고, 조금 구두를 떼어 읽을 줄 아는 정도라면 촌학구라는 비웃음을 받으며, 가난하여 의지할 데 없으면 파락호라는 지목을 받는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칭호가 아닐 터이다. [p. 86]


라는 1786 년 2월 16일 일기는, 오늘날 우리가 계속해서 대학 입시에 실패한 장수생(長修生)에게 보내는 날 선 시선이 그 당시에도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1782년 2월 6일 일기에서


세 선비가 각자 자기가 잘하는 것을 이야기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나는 길흉을 점치고 미래를 헤아리며 기문둔갑(奇門遁甲)을 하는 데 능하오. 좋고 나쁜 일을 미리 알 수 있소.”

다른 한 사람은 말했다.

“나는 쇠로 된 활을 당겨 300걸음 밖의 과녁을 쏠 수 있소. 백발백중이라오.”

나머지 한 사람은 말했다.

“나는 병든 사람을 고쳐 줄 수 있소. 천만 가지 이상한 질병도 모두 그 자리에서 치료할 수 있단 말이오.”

그때 어떤 사람이 밖에서 들어오자 세 선비는 그에게 무엇을 잘하는지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다른 재주는 없고, 다만 과거 시험장에서 제한 시간 안에 답안을 작성하여 제출하는 것을 잘합니다.”

세 선비는 맥이 풀려 서로 돌아보다 이렇게 말했다.

“재주 있는 건 당신이구려. 우리는 아무 쓸모가 없소이다.” [p. 115]


라고 하여, 사람마다 타고난 재주가 다른데 그것을 무시하고 단 한 가지만 요구하는, 당시의 관리선발제도에 대해 풍자의 방식으로 비판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책을 보고 글을 읽는 것은 그저 작문을 익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십중팔구는 지식과 사고를 넓히고 품격을 온전하게 지키고 자신의 가능성을 펼쳐 나가기 위한 것일 뿐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저 읽고 보기만 한다면 대단히 무의미한 행동이 될 테니 아주 그만두어 버려도 괜찮다. [p. 257]


심지어 1784년 12월 13일 일기를 통해 지식과 사고를 넓히고 품격을 지키고 자신의 가능성을 펼치기 위함이 아니라면 독서인인 사대부라도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까지 한다.


거칠게나마 책을 엮고 글을 고르는 법을 터득했으니, 남이 건성으로 보는 것을 나는 깊이 응시하고, 남이 아무렇게나 버리는 것을 나는 때로 신중히 모은다. 그 가운데서 글의 정밀하고 오묘한 뜻을 이해할 수 있고, 책을 엮어 내는 데 기준이 되는 범례를 정할 수 있는 것이다. 나 혼자 생각으론, 이렇게 함으로써 수백 권의 새로운 총서(叢書)를 이루어 내고 경사자집(經史子集) 네 분야의 책들을 총망라하여, 천고의 역사를 포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한다면 살아 있는 동안 마음이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있게 되고 죽은 다음에는 이름을 남길 수 있으리니, 나의 이 삶을 헛되이 보내지 않게 될 것이다. [pp. 28~29]


공적인 저술로는 정돈되지 않은 <춘추합강>의 초고가 책 상자에 넘쳐나고, 사적인 저술로는 자잘한 글씨로 쓴 <흠영징류>가 한 권을 채웠다. <흠영징류>를 써서 나의 일생을 정리하고, <춘추합강>을 써서 만고의 역사를 살펴 검토했으면 한다. [p. 58]


또한, 1778년 10월 1일과 1780년 6월 21일의 일기에서 드러났듯이 그는 관리가 아니라 역사가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그를 ‘루저(Loser)’라고 여긴다. 이것은 그 당시만 아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누군가가 자신을 역사 연구가라고 소개하면 그것을 ‘백수’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더욱더 지도, 역사책, 여행에 집착하게 된 것이 아닐까?

<흠영>의 편역자인 김하라 교수는 유만주를 두고


유만주가 좋아하는 것 다섯 가지 가운데 지도와 역사책은 공간과 시간의 차원에서 자유를 얻게 해주는 도구로서 의미를 가진다. 좁고 복잡한 18세기 후반 조선의 서울이라는 국한된 시공간을 벗어나 더 넓은 세계를 거침없이 밟아 볼 수 있게 하고, 인간의 시간을 훌쩍 초월하여 천고의 역사를 투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지도와 역사책인 것이다.

‘여행이 편하다’고 한 것 역시 지도와 역사책을 좋아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행자가 되어 길 위에 선 순간 자유를 얻는 것이다.

안과 밖을 구분하고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는 도구인 주렴에 대한 애착은 무얼 의미할까? 아마도 자신의 고유성을 지킬 수 있는 내면 공간을 갈구하던 심적 상태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p. 44]


라고 평가한다.

어쩌면 유만주가 그렇게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일기를 통해 해명하려고 한 것도 세상이 요구하는 것과 자신이 바라는 것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갈등을 벗어나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우연히 벽에 걸린 지도를 보고 나도 모르게 세 번 빙그레 웃었다. 천하는 크다. 어찌 ‘나’라는 존재가 있다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 좁고 자질구레하고 하찮으며 구차한 하나의 모퉁이에서 금세 생겼다 소멸하는 존재임에랴. 누가 알아주겠는가. [p. 34]


라는 1785년 11월 21일의 일기처럼 자조적인 내용이 실리는 것도 그런 내적 갈등이 빚어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사실 <사기(史記)>를 남긴 사마천(司馬遷) 같은 비범한 역사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그저 역사책을 좋아하고 즐기는 평범한 양반에 불과하다는 괴리에서 오는 자괴감은 쉽게 해소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젊고 맡은 일이 없으며 주변에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없기에 더욱 이 것을 진지하고 깊게 고민한 것이 아닐까?


더구나 1783년 6월 27일 일기를 보면, 자신의 일기, <흠영>에 대한 자부심도 엿보인다. 


1783년 6월 27일

나는 글을 잘 쓰지 못하지만 나의 글은 <흠영>에 있고, 나는 시를 잘 쓰지 못하지만 나의 시는 <흠영>에 있으며, 나는 말을 잘 못하지만 나의 말은 <흠영>에 있다. 나는 하나의 땅에서 경제제민(經世濟民)하는 일을 할 수 없지만, 내가 어떤 땅에서 경세제민 하고자 한 것은 <흠영>에 있다. <흠영>이 없으면 나도 없다. [p. 60]


이처럼 자신의 일기 <흠영>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늘어놓은 유만주가 도달한 결론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여행을 편하게 느끼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여행은 일상에서의 탈출 혹은 일탈로 여겨진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끌어내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듯이, 조선시대에 ‘개인’이라는 근대성의 싹을 피어낸 유만주도 다방면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1783년 7월 11일 일기에서 토로했듯이 그가 행장(行裝)을 꾸려 여행 다니는 것을 편하게 여기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여행을 괴롭게 여기지만 나는 여행이 편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지자(知者)와 더불어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p. 41]


아쉽게도 유만주의 일기 <흠영>에서 엿보인 ‘개인’의 싹은 그가 서른넷에 요절하고, 또 주변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해 하나의 흐름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스러진 것 같다. 이런 싹들이 잘 자랐다면 한국의 근대도 조금 다른 결과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아쉽고 애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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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정에 결혼했다 Endless 2
한지수 지음 / &(앤드)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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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적 살인인가 우발적 사고인가? 


첫 번째 이야기, <미란다 원칙>에서는 어려서부터 소심한, 혈액형 ‘A’형의 남자가 나온다. 혈액형 때문일까? 아니면 공군에서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쥐좆’이라 불리던 트라우마 때문일까? ‘착하다’는 말을 귀에 닳도록 들은 ‘나’는 사람들의 기대(?)대로 사회복지사가 되어 복지관에 근무하게 된다.  그런데 나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던 녀석이 조직의 중간 보스가 되어 사회봉사 명령을 받고 복지관에 나타난다. 묘하게도 그 무렵 나는 내 혈액형이 ‘A’형이 아닌 ‘O’형임을 알게 되었다. 녀석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 ‘형님’이리고 불렀지만, 알 듯 모를 듯 기묘한 방법으로 여전히 나를 조롱한다. 지적 장애인들을 데리고 볼링장으로 사회 적응훈련을 나간 어느 날, 녀석은 다운증후군의 만성에 의해 용 문신을 공격받아 경추(頸椎)가 손상되어 죽게 된다.

그런데 만성은 나의 사주로 녀석을 공격했다는 말만 반복했다. 내가 한 것은 만성이 좋아하는 은주를 위해 뱀을 잡은 것을 보고, 칭찬하면서 잠자지 않는 용을 죽이고 황금 양털을 강탈한 이아손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뿐이다. 이것이 녀석을 죽이기 위한 사주였을까? 나는 재판에 앞서 단지 신화 이야기만 늘어놓고 미란다 원칙에 따라 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다. 녀석의 죽음은 계획적인 살인인가 우발적인 사고인가?



국내산 소가 아닌 한우가 되고 싶어


두 번째 이야기, <열대야에서 온 무지개>는 태국에서 회계사로 근무하다가 국제결혼을 통해‘재석’이라는 한국 남자와 살고 있는 사이란의 이야기다. TV 등 언론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이런 관계는 사실상 매매혼이다. 그렇다 보니 결혼 전에 생각한 조건과 다를 경우 부부간의 다툼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사이란이 산후 도우미로 태국 등 동남아에서 시집온 산모들을 도와주면서, 그들 대부분이 불행한 것을 볼 수 밖에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행복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니까.


같은 소고기야. 국내산이 있고, 한우가 있지. 그러니까 소를 수입해서 3년간 기르면 ‘국내산’이라고 표기할 수 있어. 하지만, 한우는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들에게만 ‘한우’ 라고 할 수 있는 거야.

~ 중략 ~

주민등록증을 발부 받고서 ‘사이란’이라는 국내산이 되었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결코 한우가 될 수 없다는 말이었다. [pp. 56~57]


수입해서 3년간 기르면 ‘수입소’에서 ‘국내산 소’가 되듯이, 헤어진 연인의 미래를 보았다는 이유로 사이란과의 국제결혼을 선택한 재석은 3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사이란에게 마음이 갔다.


이 단편은 ‘이번 결혼 기념일에는 무슨 선물을 할까?’ 묻는 재석의 질문에 사이란은 ‘한우를 낳고 싶어요’라는 고백을 하며 끝이 난다.

한우! 뚱딴지 같지만, 진짜가 되고 싶은 열망을 압축한 이 단어는 이주를 통해 정착민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꿈을 대변한다. 여기에서는 태국인 사이란의 이야기다. 하지만, 장소가 미국으로 바뀌면 철수나 영희의 이야기가 된다.



천사들의 도시, 오만한 자들의 교도소


세 번째 이야기, <천사들의 도시>는 <천사와 미모사>에서 제목을 변경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천사들의 도시(City of Angeles)’라는 뜻을 가진 필리핀의 앙겔레스(Lungsod ng Angeles)로 필리핀의 ‘소돔과 고모라’로 불려지기도 한다.


‘나’는 한국에서 완구를 수입하는 회사를 운영하다가 실패하고 고모가 사는 필리핀까지 밀려와 술집을 운영했다. 사실 술집을 운영했다는 말이 무색하게 며칠 만에 말아먹었지만. 이제는 ‘제임스’라는 이름으로 후배인 ‘장군’이 인수한 중고차 매장의 지사장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현지인들을 무시하고 국회의원이나 경찰서장 등과 어울리며 지역유지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필리핀에 체류하는 것은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지만 ‘워킹비자’없이 매장에 드나드는 것이 불법임에도 ‘떡값’으로 무마했고, 문제가 있는 가디언을 구타하고 해고하면서 마땅히 주어야 할 한 달치 월급도 주지 않았다. ‘워킹비자’를 해결해주겠다는 이민국 직원의 뒷조사를 해서 ‘괘심죄’마저 더했다.

이러니 이민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불법 체류자’로 구속될 수 밖에.


“억울해하지 말아요, 당신이 갇힌 곳은 오만한 자들의 교도소니까요. 때가 되면 다 나오게 되어 있어요. 물론 나도 거기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고요.” [p. 134]



자궁, 내 몸의 장기가 들려주는 이야기 


네 번째 이야기, <배꼽의 기원>은 자궁암에 걸린 자궁이 풀어내는 이야기다. 웹툰 <유미의 세포들>처럼 일종의 의인화 소설이랄까?


모든 사랑이 자기 자신을 담보로 하듯이, 내 안에 들어온 생명을 키우면서 늙어가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이었다. 그러나 이제 내게는 그 의무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당신에게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도 더 이상 할 수 없다. 잠시 후면 나는 당신으로부터 분리되어 비참하게 버려질 것이다.

~ 중략 ~

마취제로 인해 당신이 휩싸이게 될 무의식의 상태가 두려운가. 당신에게 내 주소를 다시 말해주어야겠다. 당신이 지금처럼 배꼽에 손목을 대고 아래를 향해 주먹을 쥐어보면, 바로 그 위치에 주먹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내가 있다. 횡격막 아래의 골반 안쪽에서 당신과 더불어 39년째 살아왔다.

나는 당신의 자궁이다. [p. 163]



공간의 공유, 일상의 배제


다섯 번째 이야기, <이불 개는 남자>에서 여관의 방을 공유하는 남녀가 나온다. 애인과 결별한 뒤 소설 공모전 준비를 핑계로 낮의 여관방을 빌리는 여자와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의학을 수련하면서 수면을 위해 밤의 여관방을 빌리는 남자의 기묘한 동거다. 메모를 통해 전달하는 여자의 요구사항을 묵묵이 들어주는 남자의 모습은 낯설지만 부부의 익숙한 일상을 보여주는 듯해서 신기했다.



‘나’의 정체성은 누가 결정짓는가

 

여섯 번째 이야기 <페르마타>에서 주인공 치과의사는 성공을 강요하는 어머니와 악착같이 돈 잘 버는 의사가 되길 바라는 아내에 의해 자신의 삶이 정해졌다.


백일장에서 장원하던 그에게 어머니는 의대와 법대 사이에서 양자택일하게 했고, 본인보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보이는 아내와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제 그는 릴레이 경주에서 사용되는 바통에 지나지 않았다. 엄마의 넓은 치마폭에서 아내의 당찬 손으로 넘겨진 그는, 또다시 아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쉴 새 없이 내달려야 했다. [p. 241]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닌 타인이 원하는 삶을 살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가치도 잃어버렸다. 늘 긴장할 수 밖에 없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항상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다 보니 주인공은 ‘공황장애’를 갖게 된다. 공황장애에서 벗어날 길은 있다. 하지만 이 출입구를 통해 공황장애에서 벗어나려면, ‘지금까지의 나’를 버려야 한다. 과연 주인공은 공황장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초현실주의 전시회와 여행사 직원 


일곱 번째 이야기, <나는 자정에 결혼했다>는 <자정의 결혼식>에서 제목을 변경한 작품이다. 저자에 따르면,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의 그림에 빠져있을 때 쓴 작품이라고 한다. 어쩌면 제목도 르네 마그리트의 <자정의 결혼>을 오마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이야기의 주된 내용은 여행사 직원 미스 오가 신혼부부에게 항공권을 인계하러 가는 도중 들린 초현실주의 전시회에서 보고 느낀 이상한 감각이다. 선입견 때문일까? 여성스러운 외모와는 달리 남성적인 제스처로, 성(性)정체성에 혼란이 온 듯한 미스 오의 이야기가 뭔가 초현실적으로 들리는 느낌이다.


어디선가 세찬 빗소리가 들려온다.

당신은 어느새 하얗고 통통한 누에가 되어, 나뭇잎을 갉아 먹고 있다. 사각사각. 끈끈이 같은 당신의 잎이 쉴 새 없이 오물거린다. 환형동물이 인간의 살 속으로 파고들듯이 당신의 몸짓은 필사적이다. 이미 무릎을 지나 고환을 차례로 먹어 치우더니, 심장을 파먹기 시작한다. 당신 몸은 쑥쑥 자라난다. 뇌수를 갉기 전에 당신은 잠시 고개를 든다. 그리고 몸통을 길게 한번 꿈틀거리고는 뇌수 속으로 들어간다. 잎은 순식간에 앙상한 잎맥만 남는다.

잠시 후, 거대한 나뭇잎 한 장이 쓰러진다. [p. 301]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저자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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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감각 - 아트 디렉터가 큐레이팅한 도시의 공간과 문화, 라이프 스타일
박주희 지음 / 다산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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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브랜드가 되다


건축가 서현은


“건축이 사람을 담는 그릇이라고 표현되는 것처럼 공간은 단지 바라 보기 위한 대상이 아니다.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과 생활 그리고 그 사회의 부대낌, 사회가 바라보는 미래의 모습을 담는 그릇이 된다. 이리하여 건축은 건축가가 공간으로 표현하는 시대정신이 되는 것1)


이라고 했다. 이를 도시 단위로 확장해보면, 그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 같은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장소와 건축의 분리를 통해 이루어진, ‘상품으로서의 건축’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라면 그 도시만의 고유한 감각을 얘기하기 어렵겠지만.


사람이 모여 ‘도시’라는 장소를 만들면, 그 도시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노래하게 된다. 사람으로 치면, ‘개성’을 갖게 된 셈이다. 이렇게 개성을 가진 도시는 ‘뉴요커’처럼 그 도시의 거주하는 사람들의 이미지도 만들어낸다. 즉, 도시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는 것이다.



뉴욕이라는 도시


이 책은 수 많은 도시 가운데 ‘뉴욕’이라는 도시를 선택했다. 그것은 아마 저자가 여행객이 아닌, 뉴욕에서 10년간을 보낸 ‘뉴요커’였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뉴욕의 감각>이라는 책은 공간, 예술, 문화, 맛을 테마로 뉴욕이라는 도시의 분위기를 소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장 공간, 사람을 끌어당기는 중력’에서는 ‘뉴욕’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를 만드는 장소들과 브랜드를 소개한다.


가장 먼저 소개된 하이라인 파크[2009]는 도시재생의 대표적인 사례로 유명하다.


하이라인 파크는 오래된 기찻길 위에 자연적으로 자라난 풀과 꽃을 인공적으로 덮지 않고 남겨둬 길과 어우러지게 설계했다. 그래서 보도가 반듯하지 않고 좁거나 길거나 넓은 자유로운 형태로 이어지며 풀이 무성한 곳도 있다. 그래서 하이라인 파크는 직선으로 걸을 수 없다. 곳곳에서 나타나는 풀과 꽃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보도와 높이가 비슷하기 때문에 시야를 방해하지 도 않는다. 자연스럽게 녹이 슨 갈색의 철길에 뿌리를 내린 꽃과 풀, 양쪽에 늘어선 개성 있는 건축물, 달리는 차를 바라보며 내 속도로 걸어갈 뿐이다. [p. 23]


‘뉴욕’하면 떠올리는 화려함을 만끽하고 싶다면, 2주에 한 번씩 바뀌는 쇼윈도를 통해 뉴욕 거리의 표정을 바꾼다는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1901]을 방문하면 된다.


이곳은 마치 잘 차려진 편집숍 같다. 품목별로 나눠진 공간에서는 브랜드에 상관 없이 맘에 드는 제품을 집어 비교해 볼 수 있다. 다른 백화점에서 이브닝 드레스를 사기 위해 온갖 브랜드 매장을 다 들어가 봐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면, 이곳에서는 이브닝 드레스가 큐레이팅된 공간에서 오직 이브닝 드레스만 여러 브랜드별로 비교해서 보고 구입할 수 있다.

쇼핑은 즐거운 일이지만, 물건 하나를 구입하기 위해 취향에 맞지 않는 곳까지 일일이 둘러보는 것은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버그도프 굿맨은 고객에게 합리적인 동선으로 편리함을 주고, 섬세한 큐레이팅으로 취향을 찾을 수 있게 돕는다.

~ 중략 ~

편집숍이라는 방식은 고객이 좀 더 주체적으로 제품을 찾고 구매하는 기쁨을 준다. 그것은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고 욕망을 실현하는 것과도 직결된다. 소비하는 인간의 본질적 욕구를 건드린 버그도프 굿맨의 전략은 결국 뉴요커를 매료시키는 데 완벽하게 맞아 들었다. 시간이 흘러도 누군가 계속 찾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정체되기보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발전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찾는 것이 중요하단 사실을 이곳을 보며 다시 한번 깨닫는다. [pp. 29~32]


미국의 전설적인 금융 황제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1913)이 모은 수집품을 전시한 모건 라이브러리 앤 뮤지엄[1906]은 어떤 의미에서는 돈 냄새가 물씬 풍기는 뉴욕을 보여준다


어쩌면 모건의 부와 명예는 미국이라서 지켜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과오는 티끌이 되고, 그의 돈으로 수집한 물건이 업적으로 기억되는 건 미국이 자본주의의 첨단을 걷는 나라여서 가능한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p. 43]


뮤지컬의 성지(聖地) 브로드웨이도 유명하지만, 최초의 흑인 수석 무용수 지명(2015)으로 다문화국가인 미국을 상징하는 듯한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1939]의 존재감도 뚜렷하다.


아메리칸 걸[1986]이라는 인형 가게는 찰스 슐츠(Charles Schulz, 1922~2000)의 만화  <피너츠(Peanuts)>을 떠올리게 한다. 평범한 흑인 아이 프랭클린 암스트롱(Franklin Armstrong)을 만화에 등장시켜 자연스럽게 편견을 깼던 것처럼, 다양한 인형을 통해 자연스럽게 다름을 존중하는 문화를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걸에는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인형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형이 있다. 휠체어를 탄 인형, 목발을 든 인형, 안내견과 함께 있는 인형도 있다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나와 다른 것에 어떠한 편견도 가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데 한몫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아메리칸’ 걸이라는 이름을 쓸 만한 자격이 있는 곳이다. 그러고 보면 미국은 이렇게 인형 가게에서도 ‘다름을 존중’하는 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사소하지만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평등의 문화가 다양성의 나라 미국을 만든 게 아닐까. [p. 92]



‘2장 예술, 시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는 아름다움’에서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단순히 졸부(猝富)처럼 돈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뉴욕을 대표하는 근현대미술의 메카인 ‘뉴욕 현대미술관’, 200만 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소장품을 가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중세 건축물 잔해를 조합해 만든 ‘클로이스터스 박물관’, 분리파(Secession)2)의 미술에 집중한 미술관인 ‘노이에 갤러리’, 오직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만 취급하는 ‘휘트니 미술관’, 타이타닉의 비극이 낳은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의 3대 갤러리라는 가고시안, 페이스, 데이비드 즈위너 등 곳곳에 예술 공간이 가득한 이 도시는 뉴요커들이 그림을 쉽게 접하고 감각과 안목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며, 파리만 예술의 도시가 아님을 상기시켜 준다.



‘3장 ‘문화, 다채로운 이야기 가득한 뉴요커의 일상’에서는 뉴욕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뉴요커의, 아니 뉴요커가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준다.


‘미국’하면 떠올리는 록펠러(Rockefeller) 가문은 뉴욕시의 수도세를 부담하는 등 사회 환원 사업으로 더 각광받고 있다. 석유왕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 1839~1937)의 며느리 애비 록펠러(Abby Rockefeller, 1874~1948)와 그녀의 두 친구에 의해 뉴욕 현대미술관이, 그의 손자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 1908~1979)가 기증한 3,000여 점의 작품을 토대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각각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존 D. 록펠러 본인도 시카고 대학(1890)과 록펠러 대학(1901)을 세우고, 세계 최대 규모의 자선 단체인 록펠러 재단(1913)을 설립했다.


부자만 기부하는 것은 아니다. ‘뉴욕의 허파’라는 센트럴 파크는 공공 공원이지만 개인의 기부와 기업의 후원을 통해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개인의 기부를 장려하기 위해 1만 달러를 기부하면 기부자가 원하는 문구를 동판에 새겨 벤치에 붙여주는 ‘어답트 벤치(Adopt A Bench)’라는 제도다. 이런 방식을 사용하기에 센트럴 파크는 산소를 공급하는 물리적인 ‘뉴욕의 허파’일 뿐 아니라, 다름이 차별로 변질되지 않고 ‘우리는 모두 뉴요커’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만드는 정신적인 ‘뉴욕의 허파’가 된 것이 아닐까?


록펠러가 싹 틔운 기부 문화는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어느 정도 부를 쌓으면 사회에 기부하는 것을 고소득자의 의무이자 명예라고 생각한다.

~ 중략 ~

일반 시민에게도 소액이나마 동네 체육관이나 학교에 기부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혀 있다. 모든 이들에게 생활화된 미국의 기부 문화는 그 자체가 나라의 가치를 높이는 브랜딩 전략이란 생각이 든다. 뉴욕에 사는 동안 도시 곳곳에 보이는 기부의 흔적들, 이를테면 시민들이 세운 미술관이나 박물관 같은 곳을 보면서 높은 시민 의식이 어떻게 도시의 문화를 꽃피우는지 볼 수 있었다.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현대미술관도 다 미국 시민들의 기부로 인해 만들어진 문화 공간이다. 어쩌면 기부와 나눔 문화는 세계적 찬사를 받는 글로벌 메가시티의 필수 요건이 아닐까. [p. 211]


뉴욕의 또 다른 특징은 보행자를 배려하는, 걷기 좋은 도시라는 점이다. 이런 특징은 심지어 범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 같은 경우, 은행 강도들이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고속도로 출구 또는 입구 가까이에 위치한 은행을 털고 바로 고속도로로 진입해서 경찰 헬기가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사라진다고 한다. 반면, 뉴욕의 은행 강도들은 자동차를 타고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코튼 요원은 교통 체계가 다르고, 보행자 친화적인 뉴욕의 도로에서는 다른 종류의 은행털이가 벌어진다고 지적했다. 뉴욕의 범죄자는 뛰거나 지하철을 타고 도망간다는 것이다.3)


뉴요커의 또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이 특정 요일에만 형성되는, 농산물 직거래 장터인 유니언스퀘어 파크의 ‘파머스 마켓(Farmer’s Market)’이다.


뉴욕시는 뉴욕으로부터 321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곳에서 생산된 농산물만 거래하도록 규정을 만들어놓았다. 반하는 과정에서 농작물들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올 수 있는 최대 거리가 321킬로미터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농산물들은 주로 뉴저지나 롱아일랜드, 메인 등 뉴욕 근교의 주에서 오며 무척 신선하다. 농부들은 중간 마진을 떼지 않은 채 농산물을 판매할 수 있어서 좋고, 구매자들은 원산지가 정확하고 건강한 채소나 과일을 눈으로 보고 사 갈 수 있으니 모두가 윈윈이다. 게다가 이동 거리를 제한함으로써 자연스레 탄소 배출도 줄일 수 있으니 이곳을 주로 찾는, 오가닉한 삶을 추구하며 자연 보호에 앞장서는 사람들에게도 뜻이 맞는 곳인 셈이다. [pp. 247~249]



‘4장 맛, 마음까지 열고 닫는 음식의 힘’에서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거주지 ‘뉴암스테르담’에서 출발한 뉴욕의 다양한 맛을 보여준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탈리아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밥보(Babbo)’,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굴[Oyster]의 도시였던 뉴욕의 흔적이 담긴 그랜드 센트럴 역의 ‘오이스터 바(Grand Central Oyster Bar)’, 샤오롱바오[小籠包]로 유명한 홍콩요리 전문점 ‘조스 상하이(Joe’s shanghai)’, 클래식한 스테이크의 정수를 보여주는 ‘피터 루거(Peter Luger Steak House)’, ‘뉴욕의 디저트’하면 떠오르는 치즈케이크를 파는 대표적인 가게인 ‘주니어스(Junior’s Restaurant & Bakery)’, 이탈리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의 이탈리아 식재료와 음식을 함께 파는 오픈 마켓인 ‘이틀리(Eataly NYC Flatiron)’ 등을 소개하고 있다.



 

1) 서현,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개정판), (효형출판, 2004), p. 248


2) 빈 분리파(Wiener Secession)로도 불린다. 1897년 빈(Wien)의 전시관인 퀸스틀러하우스(Kunstlerhaus)의 보수주의 성향에 불만을 가진 예술가들이 탈퇴하여 결성했다. 분리파의 주요인물로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 오스카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 등이 있다.


3) 제프 마노, <도둑의 도시 가이드>, 김주양 옮김, (열림원, 2018), p.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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