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정에 결혼했다 Endless 2
한지수 지음 / &(앤드)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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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적 살인인가 우발적 사고인가? 


첫 번째 이야기, <미란다 원칙>에서는 어려서부터 소심한, 혈액형 ‘A’형의 남자가 나온다. 혈액형 때문일까? 아니면 공군에서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쥐좆’이라 불리던 트라우마 때문일까? ‘착하다’는 말을 귀에 닳도록 들은 ‘나’는 사람들의 기대(?)대로 사회복지사가 되어 복지관에 근무하게 된다.  그런데 나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던 녀석이 조직의 중간 보스가 되어 사회봉사 명령을 받고 복지관에 나타난다. 묘하게도 그 무렵 나는 내 혈액형이 ‘A’형이 아닌 ‘O’형임을 알게 되었다. 녀석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 ‘형님’이리고 불렀지만, 알 듯 모를 듯 기묘한 방법으로 여전히 나를 조롱한다. 지적 장애인들을 데리고 볼링장으로 사회 적응훈련을 나간 어느 날, 녀석은 다운증후군의 만성에 의해 용 문신을 공격받아 경추(頸椎)가 손상되어 죽게 된다.

그런데 만성은 나의 사주로 녀석을 공격했다는 말만 반복했다. 내가 한 것은 만성이 좋아하는 은주를 위해 뱀을 잡은 것을 보고, 칭찬하면서 잠자지 않는 용을 죽이고 황금 양털을 강탈한 이아손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뿐이다. 이것이 녀석을 죽이기 위한 사주였을까? 나는 재판에 앞서 단지 신화 이야기만 늘어놓고 미란다 원칙에 따라 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다. 녀석의 죽음은 계획적인 살인인가 우발적인 사고인가?



국내산 소가 아닌 한우가 되고 싶어


두 번째 이야기, <열대야에서 온 무지개>는 태국에서 회계사로 근무하다가 국제결혼을 통해‘재석’이라는 한국 남자와 살고 있는 사이란의 이야기다. TV 등 언론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이런 관계는 사실상 매매혼이다. 그렇다 보니 결혼 전에 생각한 조건과 다를 경우 부부간의 다툼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사이란이 산후 도우미로 태국 등 동남아에서 시집온 산모들을 도와주면서, 그들 대부분이 불행한 것을 볼 수 밖에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행복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니까.


같은 소고기야. 국내산이 있고, 한우가 있지. 그러니까 소를 수입해서 3년간 기르면 ‘국내산’이라고 표기할 수 있어. 하지만, 한우는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들에게만 ‘한우’ 라고 할 수 있는 거야.

~ 중략 ~

주민등록증을 발부 받고서 ‘사이란’이라는 국내산이 되었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결코 한우가 될 수 없다는 말이었다. [pp. 56~57]


수입해서 3년간 기르면 ‘수입소’에서 ‘국내산 소’가 되듯이, 헤어진 연인의 미래를 보았다는 이유로 사이란과의 국제결혼을 선택한 재석은 3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사이란에게 마음이 갔다.


이 단편은 ‘이번 결혼 기념일에는 무슨 선물을 할까?’ 묻는 재석의 질문에 사이란은 ‘한우를 낳고 싶어요’라는 고백을 하며 끝이 난다.

한우! 뚱딴지 같지만, 진짜가 되고 싶은 열망을 압축한 이 단어는 이주를 통해 정착민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꿈을 대변한다. 여기에서는 태국인 사이란의 이야기다. 하지만, 장소가 미국으로 바뀌면 철수나 영희의 이야기가 된다.



천사들의 도시, 오만한 자들의 교도소


세 번째 이야기, <천사들의 도시>는 <천사와 미모사>에서 제목을 변경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천사들의 도시(City of Angeles)’라는 뜻을 가진 필리핀의 앙겔레스(Lungsod ng Angeles)로 필리핀의 ‘소돔과 고모라’로 불려지기도 한다.


‘나’는 한국에서 완구를 수입하는 회사를 운영하다가 실패하고 고모가 사는 필리핀까지 밀려와 술집을 운영했다. 사실 술집을 운영했다는 말이 무색하게 며칠 만에 말아먹었지만. 이제는 ‘제임스’라는 이름으로 후배인 ‘장군’이 인수한 중고차 매장의 지사장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현지인들을 무시하고 국회의원이나 경찰서장 등과 어울리며 지역유지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필리핀에 체류하는 것은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지만 ‘워킹비자’없이 매장에 드나드는 것이 불법임에도 ‘떡값’으로 무마했고, 문제가 있는 가디언을 구타하고 해고하면서 마땅히 주어야 할 한 달치 월급도 주지 않았다. ‘워킹비자’를 해결해주겠다는 이민국 직원의 뒷조사를 해서 ‘괘심죄’마저 더했다.

이러니 이민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불법 체류자’로 구속될 수 밖에.


“억울해하지 말아요, 당신이 갇힌 곳은 오만한 자들의 교도소니까요. 때가 되면 다 나오게 되어 있어요. 물론 나도 거기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고요.” [p. 134]



자궁, 내 몸의 장기가 들려주는 이야기 


네 번째 이야기, <배꼽의 기원>은 자궁암에 걸린 자궁이 풀어내는 이야기다. 웹툰 <유미의 세포들>처럼 일종의 의인화 소설이랄까?


모든 사랑이 자기 자신을 담보로 하듯이, 내 안에 들어온 생명을 키우면서 늙어가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이었다. 그러나 이제 내게는 그 의무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당신에게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도 더 이상 할 수 없다. 잠시 후면 나는 당신으로부터 분리되어 비참하게 버려질 것이다.

~ 중략 ~

마취제로 인해 당신이 휩싸이게 될 무의식의 상태가 두려운가. 당신에게 내 주소를 다시 말해주어야겠다. 당신이 지금처럼 배꼽에 손목을 대고 아래를 향해 주먹을 쥐어보면, 바로 그 위치에 주먹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내가 있다. 횡격막 아래의 골반 안쪽에서 당신과 더불어 39년째 살아왔다.

나는 당신의 자궁이다. [p. 163]



공간의 공유, 일상의 배제


다섯 번째 이야기, <이불 개는 남자>에서 여관의 방을 공유하는 남녀가 나온다. 애인과 결별한 뒤 소설 공모전 준비를 핑계로 낮의 여관방을 빌리는 여자와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의학을 수련하면서 수면을 위해 밤의 여관방을 빌리는 남자의 기묘한 동거다. 메모를 통해 전달하는 여자의 요구사항을 묵묵이 들어주는 남자의 모습은 낯설지만 부부의 익숙한 일상을 보여주는 듯해서 신기했다.



‘나’의 정체성은 누가 결정짓는가

 

여섯 번째 이야기 <페르마타>에서 주인공 치과의사는 성공을 강요하는 어머니와 악착같이 돈 잘 버는 의사가 되길 바라는 아내에 의해 자신의 삶이 정해졌다.


백일장에서 장원하던 그에게 어머니는 의대와 법대 사이에서 양자택일하게 했고, 본인보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보이는 아내와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제 그는 릴레이 경주에서 사용되는 바통에 지나지 않았다. 엄마의 넓은 치마폭에서 아내의 당찬 손으로 넘겨진 그는, 또다시 아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쉴 새 없이 내달려야 했다. [p. 241]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닌 타인이 원하는 삶을 살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가치도 잃어버렸다. 늘 긴장할 수 밖에 없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항상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다 보니 주인공은 ‘공황장애’를 갖게 된다. 공황장애에서 벗어날 길은 있다. 하지만 이 출입구를 통해 공황장애에서 벗어나려면, ‘지금까지의 나’를 버려야 한다. 과연 주인공은 공황장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초현실주의 전시회와 여행사 직원 


일곱 번째 이야기, <나는 자정에 결혼했다>는 <자정의 결혼식>에서 제목을 변경한 작품이다. 저자에 따르면,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의 그림에 빠져있을 때 쓴 작품이라고 한다. 어쩌면 제목도 르네 마그리트의 <자정의 결혼>을 오마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이야기의 주된 내용은 여행사 직원 미스 오가 신혼부부에게 항공권을 인계하러 가는 도중 들린 초현실주의 전시회에서 보고 느낀 이상한 감각이다. 선입견 때문일까? 여성스러운 외모와는 달리 남성적인 제스처로, 성(性)정체성에 혼란이 온 듯한 미스 오의 이야기가 뭔가 초현실적으로 들리는 느낌이다.


어디선가 세찬 빗소리가 들려온다.

당신은 어느새 하얗고 통통한 누에가 되어, 나뭇잎을 갉아 먹고 있다. 사각사각. 끈끈이 같은 당신의 잎이 쉴 새 없이 오물거린다. 환형동물이 인간의 살 속으로 파고들듯이 당신의 몸짓은 필사적이다. 이미 무릎을 지나 고환을 차례로 먹어 치우더니, 심장을 파먹기 시작한다. 당신 몸은 쑥쑥 자라난다. 뇌수를 갉기 전에 당신은 잠시 고개를 든다. 그리고 몸통을 길게 한번 꿈틀거리고는 뇌수 속으로 들어간다. 잎은 순식간에 앙상한 잎맥만 남는다.

잠시 후, 거대한 나뭇잎 한 장이 쓰러진다. [p. 301]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저자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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