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쓰임 - 사소한 일상도 콘텐츠로 만드는 마케터의 감각
생각노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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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캐의 시대

 

국민 MC’라는 방송인 유재석이 있다. 그는 <놀면 뭐 하니?>라는 프로그램에서 트로트 가수인 ‘유산슬’, 뉴트로 댄스그룹 싹쓰리 맴버 ‘유두래곤’ 등 다양한 부캐로도 활동하며 소위 ‘부캐의 시대’를 열었다. 이는 어떻게 보면 하나의 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 가지고 있는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꼼수라고 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하나의 아이돌 그룹에 속하는 이라면, 해당 그룹이 추구하는 바에 어긋나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펼쳐 보이기는 어렵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래퍼나 탁월한 춤꾼이라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조직에 속하게 되면 내 관점 혹은 내 생각을 온전히 드러내기가 어렵다.

 

아마 IT 마케터라는, 이 책의 저자 ‘생각노트’도 그런 딜레마를 경험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다른 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체념하기 쉬울 텐데, 저자는 본업에서의 아쉬움을 ‘생각노트’라는 필명으로 블로그에 올렸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혹시 ‘관심종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노트’는 철저하게 익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마치 쾌걸 조로나 배트맨 같은 히어로들이 가면을 쓰는 것처럼.

 

 

[생각의 쓰임]의 구성

 

이 책, <생각의 쓰임>은 크게 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생각을 담는 그릇, 생각노트’은 저자가 ‘생각노트’라는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계기, 사소한 생각을 콘텐츠로 만든 사례 등을 얘기하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뱉고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볼 수 있는

새로운 자아가 필요했다.

사람들에게 나의 관점과 생각을

자유롭게 전달하고 나누는 ‘나’다운 것들이 쌓이며

생각노트가 되었다. [p. 17]

 

‘2장 사소한 생각을 찾아보는 콘텐츠로 만들기’에서 생각노트라는 블로그를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3장 생각의 재료를 모으는 인풋 루틴’에서 기록의 재료가 되는 인풋 소스를 어떻게 소화하는지를, 저자가 좋아하는 유형인 활자 콘텐츠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세상의 모든 콘텐츠를 다 보고,

다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에

모든 순간을 남기려던 때가 있었다.

콘텐츠 강박은 심한 피로감을 남겼고,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맞는 핏(fit)이었다. [p. 189]

 

 

마케터는 어떻게 아이디어를 뽑아내는가

 

세상에는 수많은 블로거들이 있다. 따라서 블로그에 글을 쓰는 행위만으로 주목 받기는 어렵다. 하지만 저자의 경우에는 본업인 마케터의 관점을 접목해 분석적, 전문적인 글을 썼기 때문에 남들과 차별화된 콘텐츠가 되었다. 학부시절 타과의 전공 수업을 들어본 이라면 알겠지만,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해당 수업을 강의하는 이나 듣는 이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줄 수 있다. 그만큼 ‘차별화’는 대체하기 어려울수록 더 큰, 나만의 무기로 작용한다.

 

저자에 따르면 블로그를 시작한 이유는 단순하다.             

 

생각노트를 시작한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은 바람 때문이었다. 늦은 시간,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공간, 내 영역, 내 방을 갖고 싶다.”

심적으로 느껴지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pp. 17~18]

 

어떻게 보면 사소한 일상을 기록하는 수많은 블로거들과 차이가 없을 듯한 시작이었지만,  ‘생각노트’는 그가 좋아하는 브랜드와 공간, 서비스를 기록하는 ‘혼자만의’ 마케팅 기록을 다른 사람들이 찾아보는 콘텐츠로 만들어나갔다.

 

사소한 일상이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물론 이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에 그치면, 그것은 일기장에 쓴 일기처럼 사적(私的)인 것에 머문다.  하지만 여기에 나의 질문과 해석이 더해져서 나의 관점이 담긴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콘텐츠의 본질은 해당 콘텐츠를 만든, 당신의 질문과 해석이 담겨있는가 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콘텐츠라면, 당신이 써 내려간 콘텐츠가 쌓여 나갈수록 당신의 포토폴리오는 강력해지고 풍부해질 것이다.

 

나의 생각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기록 생활’은 포토폴리오가 된다. 어쩌면 진짜 나를 설명해주는 포토폴리오가 될 수 있다. 회사에서의 프로젝트는 나의 힘만으로 되는 경우가 적다. ~ 그런 점에서 나의 ‘기록 생활’은 순수한 나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나의 역량이 어디까지인지를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점점 더 이직 제안 메일이 잦은 주기로 여러 회사에서 오는 걸 보면, 이렇게 생각하는 회사가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반갑다. 본업과 부캐가 서로를 기르는 생활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p. 81]

 

코로나로 인해 언택트의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여기에 공유나 공유경제에 대한 논의도 늘어나고 있다. 때문에 ‘생각노트’가 말하는 ‘생각, 기록, 공유’는 더욱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생각노트 브랜드를 시작하며 정했던 세 가지 핵심 운영 원칙이 있다. 바로 생각, 기록, 공유이다. ‘치밀하게 생각하고, 꼼꼼하게 기록해서,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과 나누자’는 지금까지 생각노트를 운영하며 지켜온 나름의 철학이다.

그 중에서도 사적[私的]인 생각이 콘텐츠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공유다. 나의 생각과 기록을 나 혼자 가지고 있으면 콘텐츠라고 할 수 없다. 뭐가 됐든 세상에 내놓아야 콘텐츠가 될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나눠야 콘텐츠가 될 수 있다. [pp. 63~64]

 

생각노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생각, 기록, 공유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그 길의 끝에 성공이 있을지, 실패가 있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길을 걷기 시작하면 또 하나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옛 말대로, ‘시작이 반이다.’

 

이 리뷰는 위즈덤하우스로부터 받은 책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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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로보로스
임성순 지음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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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제목, ‘우로보로스’는 “꼬리를 삼키는 자’' 라는 뜻으로 연금술에서 꼬리를 먹는 뱀, 혹은 용의 문양을 가리키는 단어(로) 영원함, 완전함, 불사를 상징한다. ~ 중략 ~ 네트워크 이론에서 우로보로스 효과는 어떤 사건의 순환적이고 본질적인 잠식 효과를 의미한다. 어떤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한 최선의 시도가 오히려 의도치 못한 결과를 이끌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 경우 일종의 아이러니와 자기 소멸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일반적인 실패와는 다른, 최악으로 전락해가는 나선을 의미한다.” [p. 2]

 

첫 번째 글인 ‘PROLOG’는 마치 중세 수도원에서 서고를 정리하는 이의 수기(手記)같은 느낌이 든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떠오르는 이야기라고나 할까?

 

두 번째 글인 ‘Q&A’는 대학의 양자역학에 대한 교양 과목의 마지막 강의를 묘사하고 있다.

 

세 번째 글인 ‘아톰’에는 로봇이 인간의 자리를 대체하고, 소수의 성공한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간들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상현실로 도피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곳에서는 “일을 하지 않아도 기본수당은 나왔지만 기본수당은 일정 비율 이상 가상 화폐로 환전할 수 없었다. 한때 기본 수당 전부를 가상 세계에 쏟아 부어 결국 현실의 몸이 죽어 버리는 과몰입 아사 사건이 (현실보다 가상현실을 더 중시하는) 이계인들 사이에 번번했고, 정부에서는 최소한의 육체를 유지하는 기본 생활비를 정해 가상 화폐로의 환전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올해는 하루에 한 번 현실로 강제 로그아웃 시키는 법안이 통과됐다”[pp. 75~76]

뿐만 아니라 인간을 위해 일자리 할당을 법제화했지만, 법의 의도와 달리 인간은 로봇도 하지 않는 더럽고, 힘들고, 부가가치 없는 일만 했다. 남겨진 일이 그 모양이니 당연히 인간들은 더더욱 노동을 기피했고 그 결과 노동수당이 만들어졌다. 어떤 형태든 노동을 하는 이들은 임금과 별도로 정부로부터 받는 기본수당의 두 배를 추가로 받을 수 있었다. 로봇을 많이 고용하는 기업에서 내는 로봇세로 지급하는 수당이었다. 하지만 이런 법조차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본수당에 만족했고, 젊은이들은 일을 할 바에는 이계라 불리는 가상 세계의 삶을 택했다.” [p. 81]

이처럼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모호한 탓인지, 영화 <맨인블랙>처럼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거나 보았을 경우 요원에 의해 기억이 지워진다.

 

네 번째 글인 ‘지도에 대한 열정’은 제국 전체의 지도제작을 명령 받은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점차 이 책이 단편모음집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각 글이 그 자체로 완결성을 띠고 있고, 서로 다른 시대를 다루고 있으니……. 어쩌면 서로 다른 시공간에 걸친 여섯 개의 스토리로 구성된,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처럼 구성된 것일 수도 있겠다.

 

다섯 번째 글인 ‘스트럭쳐’는 빅뱅 직후를 재현하는 실험 전후로 연구소 조정팀 팀장의 심리를 다루고 있다. 인공출산 1세대이기에 ‘나’의 복제아를 자연출산하여 자신을 증명하려고 시도하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친숙했다. 어쩌면 부모들은 자식의 성공을 통해 자신의 삶이 실패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닐까.

 

여섯 번째 글인 ‘ROLLBACK’은 지금까지 현실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가상현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 첫 번째 글인 ‘PROLOG’와의 연결고리를 드러낸다.

 

일곱 번째 글인 ‘함수’는 다섯 번째 글인 ‘스트럭쳐’와 이어진다. 기계의 손에서 나고 자란 ‘나’는 자연출산으로 얻은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랐다. 첫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다 그렇듯이.

안드로이드가 오기 전까지 나는 늘 수면 부족 상태였고, 아이는 원하는 걸 알지 못하는 엄마 탓에 계속 울어야 했다. 육아휴직 기간이었지만 집 안은 말리는 젖병과 쌓여 가는 일회용 기저귀 쓰레기, 아이의 밀린 빨래로 엉망이었다. 그 모든 혼돈을 육아 안드로이드는 도착한 지 두 시간 만에 해결했다. 나는 구원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가장 놀랐던 건 안드로이드가 아이와 정서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안드로이드는 나보다 아이에게 잘 웃고 더 다정했다. 아이가 원하는 건 즉각 알아채서, 아이가 태어난 지 몇 달 만에야 원하는 걸 즉각 해결해 주면 거의 울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동안에 사람과 같은 체온이 됐다. 차가운 로봇이라는 내 기억은 편견일 뿐이었다. 육아 안드로이드가 온 후로 나만큼이나 아이도 행복해 보였다. 감정은 인간 고유의 것이므로 안드로이드 손에 자라는 것은 정서 발달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내 믿음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안드로이드의 감정은 가짜였고, 그것을 보여 주는 리액션들도 그저 치밀한 알고리즘으로 계산된 결과일 뿐이었다. 그러나 가짜도 충분히 그럴듯하면 형편없는 진짜보다 낫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보육 안드로이드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자괴감 느끼실 필요 없어요. 부모는 처음이신 거잖아요. 다들 처음에는 서툴기 마련이죠."

보육 안드로이드가 돌아간 직후 나는 구매 신청을 하고 있었다. 부모로서 완패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기계의 손에서 자란 나는 아이를 어떻게 대하고 아이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조차 로봇에게 배웠다.” [pp. 173~174]

 

여덟 번째 글인 ‘인터뷰’는 강인공지능 로봇과 연구소의 이사장의 인터뷰를 다루는데, 마치 사람과 사람의 인터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또한 가상현실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짐을 암시하는 것일까?

 

아홉 번째 글인 ‘바다’는 일곱 번째 글인 ‘함수’와 이어진다. 초기 우주를 재현하려는 실험은 시공간의 굴절을 가져왔고, ‘나’는 유한한 닫힌 공간, 즉 다른 위상공간에 빠져들었다. 재난의 현장을 빠져나가려는 노력 끝에 ‘나’는 주임으로 알고 있던 존재와 만났다. 그리고 그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무기력하게 종말을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가상 현실을 통해 일상을 유지할 것인지 선택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 선택의 결과가 그려져 있다.

 

솔직히 다 읽어봐도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현대 물리학 이론을 엮어 ‘인간은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같은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 같다는 느낌만 들 뿐. 나중에 다시 읽으면 지금처럼 각 글마다 요약하는 것보다는 나은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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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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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의 조숙한 천재


저자는 <추사 김정희>에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이하 추사’)의 일생을 각 시기별로 나눠, 당대(當代)의 시류(時流)와 추사의 학문 및 예술세계를 하나하나 들려준다.


먼저, 추사는 명문가인 경주(慶州) 김씨(金氏) 출신으로, 영조의 사위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의 양자인 김이주(, 1730~1797)의 손자다. 동시에 아들이 없는 백부(伯父) 김노영(金魯永, 1747~1797)의 양자(養子)이기에, 왕가와 이어지는 종손(宗孫)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여섯 살 때 쓴 <입춘첩>을 보고 북학파의 거두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15)가 제자로 삼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추사는 거만하고 고집스러운”[p. 174]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젊어서부터 청()나라를 오가면 그곳의 명사(名士)들과 교류를 하다 보니 좋게 보면 국제적인 감각을, 나쁘게 보면 청()나라 문화에 기울어진 모습도 드러냈던 것으로 보인다.

첫 연경행(燕京行)에서 돌아오기 전, 그가 읊었다는 이별시가

나는 변방에서 태어나 참으로 비루해서[我生九夷眞可鄙]

중원 선비 사귐 맺음 너무도 부끄럽다[多媿結交中原士]” [p. 78]라고 시작되는 것은 그 일면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물론 추사만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도 미국 갔단 온 지식인들이 말끝마다 미국은 그렇지 않다며 남을 면박 주며 잘난 체하곤 했는데, 그런 오만과 치기가 추사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추사는 그런 식으로 남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고, 간혹 그것이 심하여 사람들로부터 미움도 받았다”[p. 73]. 어쩌면 향토색이 짙은 예술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도 선진국의 물을 먹은 젊은 천재였기에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제자인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8~1893)에게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모두 그림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그들의 화첩에 전하는 것은 한갓 안목만 혼란하게 할 뿐이니 결코 들춰보지 않도록 하게”[p. 230]라고 언급하면서 비친, 18세기의 진경 산수화[정선]와 남종 문인화[심사정]에 대한 평가도 그런 분위기가 엿보인다. 그가 제주로 귀양가는 길에 남긴, 향토색이 짙고 독자적인 서체를 추구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나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의 글씨에 대한 일화도 그렇다.



연경행(燕京行), 국제적인 안목(眼目)을 갖추다


추사가 국제적인 안목을 갖추게 된 계기는 연경행이었다. 1809년 친부(親父)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이 동지사(冬至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부사(副使)로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에 가게 되자 추사는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따라가서 청()나라의 대학자인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운대(芸臺) 완원(阮元, 1764~1849) 등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추사는 옹방강과의 만남으로 보담재(寶覃齋)라는 당호를, 완원과의 만남으로 완당(阮堂)이라는 아호를 갖게” [pp. 67~68] 될 만큼, 그 두 사람은 추사의 평생 스승이 되었다.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추사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지었는데, 여기는 그는 학문하는 방도는 굳이 한()나라, ()나라로 나눌 필요 없이, 심기(心氣)를 고르게 하고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하면서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 자세로 나아감이 옳다”[p. 107]고 단언했다. , “한나라 유학은 훈고학이고 송나라 유학은 성리학이라 하여 그 정신과 방법이 다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깊이 따져보면 다를 것이 없다는” [p. 107]는 내용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을 주장했다.

이를 보면, 훗날 청()나라 경학(經學)과 고증학(考證學)을 연구하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 隣, 1879~1948] 추사를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는 추사 김정희이다”[p. 45]라고 평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



제주 유배, 한 단계 성숙하기 위한 시련


1830년 생부인 김노경이 모함으로 유배되고, 이어 1840년에는 추사 본인도 모함을 받아 제주도 유배길에 오른다. 이 제주 유배는 추사의 인생과 글에서 매우 큰 변곡점으로 작용했다.

먼저, 환재(桓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7) 완당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 1555~1636)에 뜻을 두었고, 중세에는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아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蘇東坡, 1037~1101)와 미불(, 1051~1107)을 따르면서 더욱 굳세고 힘차지더니 (…) 드디어는 구양순(歐陽詢, 557~641)의 신수를 얻게 되었다.

만면에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구속 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 대가들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되니 신()이 오는 듯, ()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했다.” [p. 346]라고 말했듯이 추사는 추사체를 완성했다. 그래서 마치 정()-() –()의 과정을 밟는 것처럼, 추사체가 완성되는 과정을 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그려준 세한도(歲寒圖)’는 추사가 추구한 예술의 경지인 불계공졸(不計工拙; 잘되고 못되고가 가려지지 않는다)’을 이룬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동시에 이 세한도는 고졸한 풍경의 집 한 채와 그 좌우에서 대칭을 이루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그림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추사의 글씨까지 하나로 봐야 하는, 학문과 예술의 일치를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나 더하자면, 제주 귀양이라는 시련은 추사를 한층 성숙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8 3개월의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가는 길에 해남 대둔사에서 자신이 쓴 현판을 떼어내고 이광사의 대웅보전현판을 다시 달라고 했다는 일화나 이삼만의 묘비문을 써주었다는 전설은 이를 보여주는 얘기들이다.


추사의 삶에는 제주도 해배(解配)이후 8년의 시간이 더 있다. 그 기간 중에는 북청으로의 유배도 있었지만, 그의 학문과 예술에 영향을 주는 큰 굴곡은 더 이상 없었다고 느꼈다. 아마도 추사가 <논어>에서 말하는 마음 속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心所欲不踰矩]”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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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 - 어슬렁어슬렁 누비고 다닌 미술 여행기
류동현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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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행을 가는가

 

과거 많은 이들이 이용했던 패키지 여행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쉽게 낯선 곳으로 떠날 수 있게 해주었다. 덕분에 여행을 낯선 곳에서 사진 몇 장 찍고, 이국적인 음식을 먹고, 낯선 상품을 사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도 생겨났다. 그래서 “여행이라는 것이 어느 지역에 대한 ‘눈도장’, ‘발도장’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나 역사, 영화, 소설, 에세이 등을 통한 간접 체험도 의미가 있지 않느냐고. 꼭 그곳까지 고생하며 갈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 그곳에 가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곳에 찾아가는 시간과 공간의 세세한 과정 속에서 얻는 무엇인가가, 도착해서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발로 그 땅을 디디면서 얻을 수 있는 무엇인가가,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p. 428]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여행을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행을 간다고 해도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할 지가 중요하다. 물론 발길 닿는 데로 돌아다니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라는 이도 있겠지만, 시간과 비용의 제한을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발길 닿는 데로 떠나는 방랑이 아닌 다음에야 여행의 장소를 정할 때는 자신의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은 것, 다양한 경험 등이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책, 영화, 음악 등이 여행의 행선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영화를 본 후 여행지에 대한 동경이 생기곤 했다.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보고 사막의 별을 보겠다고 이틀간 벤을 타고 가는 고생을 하고 <인디아나 존스>를 보고 요르단의 페트라를 찾은 것은 모두 영화가 나에게 준 여행의 ‘동인(動因)’이었다.” [p. 218]

 

 

왜 이탈리아인가?

 

그렇다면 수많은 나라 중에 왜 이탈리아일까?

저자에 따르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면 아마 어렸을 때 본 영화 <시네마 천국>과 고등학교 시절에 본 <인디아나 존스>가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할 것이다. ~ 중략 ~ 결정타는 고등학교 때 본 <인디아나 존스>였다. 베네치아의 도서관에서 벌어지는 모험을 시작으로 성배를 찾아 나선 여정에 홀딱 빠져버린 나는 아예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하고자 대학에 진학했다. 이후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볼 때마다 ‘그곳에 가고 싶다’는 바람이 더욱 커졌다. <투스카니의 태양>, <잉글리시 페이션트>, <스타 만들기>, <레터스 투 줄리엣> 등 수많은 이탈리아 배경의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그곳의 깊은 역사 속 찬란한 예술과 문화를 배우면서 그 바람을 조금씩 현실로 끌어내게 되었다.” [p. 12]

즉, <인디아나 존스>라는 영화가 계기가 되어 저자는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을 보면서 이탈리아의 깊은 매력에 흠뻑 빠져들어, 어쩌다 보니 이탈리아를 기회가 될 때마다 방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로 정한 것이 아닐까?

 

 

예술 작품과 함께 여행하다

 

이 책은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로마, 나폴리, 시칠리아 여섯 도시, 6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주변의 작은 도시들로 작은 목차를 이루고 있다. 예들 들면, 1부에서는 베네치아와 그 주변의 파도바, 베로나, 라벤나와 같은 도시를 소개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탈리아의 35개 도시의 삶과 역사, 예술, 문화, 자연을 얘기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저자의 여행기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  구체적으로는  이 영화에 도서관으로 등장한 베네치아의 산바르나바 성당이 첫 방문지로 등장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산바르나바 성당

출처: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 p. 31

 

이어지는 장소는 리알토 다리로 다리 자체에 얽힌 사연과 더불어 이를 배경으로 그린 비토레 카르파초(Vittore Carpaccio, 1460~1527)의 <성십자가의 기적>이라는 작품을 소개한다.

 

비토레 카르파초의 <성십자가의 기적>

출처: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 p. 20

 

리알토 다리

출처: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 p. 21

 

 

나만의 스토리를 꿈꾸며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라는 이탈리아 여행기는 절반은 해당 지역과 관련된 영화나 그림, 건축물 등의 소개와 함께 직접 그 장소를 둘러본 감상으로, 나머지 절반은 풍경과 예술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왜 이렇게 꾸몄을까?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을 처음 구상할 때는 이탈리아의 예술과 풍경 사진이 어우러진, 이미지 중심의 책으로 꾸미고자 했으나, 결국 다양한 그림과 깊고 넓은 이탈리아의 예술신(scene)은 이미지뿐 아니라 에세이로도 풀어낼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를 둘러본다는 것은 그림과 풍경과 글이 제 나름의 역할을 발휘해야 하는 ‘광활한’ 인문학적 세계였다” [p. 13]고 했다.

아마도 그래서 저자도 이탈리아를 여러 차례 방문했고, 같은 곳을 여러 번 갔는데도 항상 새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무릇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서로 다른 풍경 속에서도 하나의 이야기가 나오고 하나의 풍경 속에서도 수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 [p. 13]라고 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야만 자기만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나도 저자처럼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고 싶다. 지금은 여행을 떠날 수 없지만,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아니 종식되지 않더라도 잠잠해지면, 나도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저자처럼 여행지의 역사, 예술 등을 아울러서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날이 어서 오기를 간절히 또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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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깊이 - 공간탐구자와 함께 걷는 세계 건축 기행
정태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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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매력

 

진료실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일생을 살아야 하는 치과 의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일상과는 다른 곳을 찾아 떠나게 되었고 사람들과 함께 관광지, 유적지, 맛집을 다니다가 혼자서 떠날 용기가 생기자 도시의 뒷골목을 다니면서 도시와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주어진 삶을 따라 살며 박사 학위를 받고 개원의로 자리 잡은 후 처음 혼자서 무언가를 결정한 것이 건축 공부였다처음에는 건축에 관한 책을 읽다가 점차 빠져들어 건축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pp. 5~6]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의 직업의 하나로 간주되는 치과의사가 건축가라는 길을 걷게 된 이유다.

 

특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그 분야를 공부하는 것은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취미’라면 몰라도 ‘직업’, 즉 인생의 진로를 변경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건축’이 어떤 매력이 있기에 저자는 그런 선택을 했을까?

저자에 따르면 “건축을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탄생시키는 것” [p. 9]이라고 한다.

우리가 그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도록 저자는 무주의 종합운동장에 있는 그늘막을 예로 든다. “무주의 종합운동장은 건축가 정기용의 애정이 담긴 프로젝트이다. 종합운동장의 햇빛 아래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관람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등나무를 심어 그늘막을 만드는 것은 간단하고 단순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무주 종합운동장 같은 그늘막은 없다. 이것이야말로 건축가가 어떻게 사회를 바라보고 고민하고 애정을 가져야  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되는 프로젝트이다.” [p. 163]

이처럼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보려는 건축가의 고민 자체가 건축설계 과정 안에 포함되어 있다. 미술관을 설계할 때는 미술관의 사회적 역할을 찾고, 공동주택을 설계할 때는 주거에 관해 연구하면서 현재 사회의 상황과 문제점들을 찾게 된다. 바로 그것이 건축가라는 직업의 장점이다.” [p. 9]

아마도 이것이 저자가 의사에서 건축가로 인생의 길을 바꾼 이유가 아닐까?

 

 

건축 공간을 읽는 다섯 가지 인문학 키워드

 

건축은 유홍준 교수가 말한 것처럼 아는 만큼 보이는 대표적인 분야다. 그렇기에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랜드마크나 명소가 아닌 곳은 여행을 가더라도 몰라서 지나치기 쉽다. 예를 들면, 바르셀로나에 간다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La Sagrada Familia, 이하 ‘성가족 성당’)처럼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Cornet; 1852~1926)의 작품들을 보기에 바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여기에 아는 자의 도리를 지켜 몇 마디 덧붙여준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바르셀로나에 간다고 하면 나는 무얼 보러 갈 건지 물어볼 것이다. 당신이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를 보러 간다고 하면 나는 거기엔 엔릭 미라예스(Enric Miralles)가 있다고, 그리고 바르셀로나 외곽 히로나(Girona)로 가면 RCR 건축사무소(RCR Arquitectes)가 설계한 레 콜스 레스토랑(Les Cols Restaurant)을 즐길 수 있다고 알려줄 것이다.” [p. 10]

 

하지만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그저 사진 몇 장만 늘릴 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친절하게 가이드를 제시한다. 즉, 이 책에서 나는 내가 관심을 둔 건축물과 도시 공간을  현대 건축에서  주요한 다섯 가지 논점으로 구분했다.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로 대표되는  현대사회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건축, 현상학(Phenomenology)으로 대표되는 지각과 체험의  공간, 새로운 유형의 구조주의적(structuralism) 네트워크로서의 건축 공간, 자연을 모방한  바이오미미크리(Biomiomicry)와 복잡계 이론에 기초한 건축, 스케일(Scale)에 따라 건축에서 부터 시작해 도시와 사람의 삶으로 확장되면서 다른 곳과 차이가 나는  독특한 도시  여행이  그것이다.” [p. 7]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 번째 키워드는 도시 속에서 묘지나 성당, 도서관, 문화시설 같은 ‘비일상’을 만들어내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다. 미셸 푸코가 사용한 개념인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에 존재하면서도 다른 일상의 장소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새롭게 환기시키는 장소, 즉 실제로 위치를 갖지만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일종의 현실화된 유토피아” [p. 16]다.

예를 들면,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종묘는 “순간의 현재가 거대한 과거가 되는 서울 종묘는 엄숙한 공간을 위해 중앙을 비워내고 바닥을 돌로 채웠다” [p. 18]고 한다. 또 다른 묘역인 베를린 시내에 있는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의 홀로코스트 추모기념관은 “노출 콘크리트라는 재료 자체로 엄숙함과 두려움이 깃들게 했고, 관의 형상을 반복함과 함께 날카로운 모서리를 만듦으로써 역사의 엄정함을 보여주고 있다.” [p. 18]

 

피터 아이젠만의 홀로코스트 추모기념관

출처: <도시의 깊이>, p. 25

 

이렇게 “우리는 상상의 유토피아가 각종 사회 공간의 한계를 위반하는 헤테로토피아로 현실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균열을 통해 바깥 공간을 다시 바라보게 되며, 이곳들을 보며 새로운 현실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된다.

현대사회의 도시와 건축은 나무와 돌과 벽돌과 유리를 가지고 바닥과 기둥과 지붕을 만드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새로운 사회와 자연현상을 면밀하고 섬세하게 관찰하여 인간과 사회와 자연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서 새로운 인공의 대지와 건축물을 만들고 그 결과로 자연인지 건축물인지 알 수 없는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결국 현대 건축물은 지금까지 없었던 다양한 헤테로토피아를 만들고 사회에 드러내어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사회 문제를 환기하고 고민하게 하는 작업일 것이다.” [p. 17]

 

두 번째 키워드는 현상학(Phenomenology)이다. “현상학은 우리의 의식에서 드러나는 현상 자체를 기술하고 분석하는 철학” [p. 80]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상학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과 관련된 매개체(로) 주로 빛이나 색 같은 시각적인 정보를 이용” [p. 81]하기에 현상학을 건축에 적용시킨 결과 빛, 색과 향기, 물과 유리 등으로 오감(五感)을 극대화하는 공간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일본 서쪽의 작은 도시 가나자와[金澤]의 오래된 전통 찻집 거리인 히가시 차야 거리(ひがし 茶屋 街, Higashi Chaya District)를 다니다 보면 황금의 거리라 불릴 만한 곳을 경험할 수 있다. 일본 금박 장식 산업을 독점했던 탓에 아직도 그 명성이 남아 있다. 그 중 하쿠자 히카리구라(箔座 ひかり藏, Hakuza Hikarigura)는 가게 내부에 있는 작은 아트리움 한쪽 벽 전체가 금박으로 마감되어 있다. 처음에는 금색 칠이라고 생각했는데 전체가 다 금박이란다. 그래서인지 금빛이 햇빛을 받아 은은하면서도 화려하게 뿜어져 나온다. 금은 보통 장식품이나 장신구같이 일정한 형태로 만들어지므로 금이라는 재료 자체보다는 형태로 인지된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건축물 외벽, 즉 외부의 벽체라는 특정한 형태가 없는 면 전체를 덮은 금을 보는 것이다. 빛이 없어도 빛날 것 같은 재료가 금인데 햇빛을 직접 받아서 반사하는 금빛을 보는 경험은 세상 어디에서도 해볼 수 없을 경험이다이곳의 금빛은 과할 정도로 농축된 금빛이 아니라 우아하고 기품 있는 금빛이다” [pp. 99~100]

 

하쿠자 히카리구라(箔座 ひかり藏)

출처: <도시의 깊이>, p. 101

 

또 다른 예로는 “스위스 대표 건축가인 피터 줌터(Peter Zumthor)가 설계한 쾰른의 콜룸바 박물관(이 있다)오래된 폐허 위에 설계된 박물관은 그 지층 아래에 있는 역사를 오롯이 떠안고 있어야 하는 숙명인데 내부 공간을 벽돌로 막고 한쪽 벽에 벽돌을 느슨하게 쌓아 햇빛과 바람과 그림자를 끌어들여서 상상하기 어려운 공간을 만들었다.

오래된 역사의 한 부분인 로마 시대 유적지 위에 현대 건축 양식의 박물관을 지으면서 내부 바닥은 유적지를 그대로 보존하고 그 위에 지그재그 형태의 동선을 넣고 외부에서 벽돌 벽의 틈새로 빛을 비춰서 마치 유적지를 탐사하는 듯한 분위기를 극대화하여 도시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컴퓨터나 가상 현실을 이용하여 지식을 전달하려는 최첨단 문화 공간임을 자랑하는 여타 박물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 [pp. 101~102]

 

피터 줌터의 콜룸바 박물관

출처: <도시의 깊이>, p. 102

 

이처럼, “건축에서 현상학적 공간을 만드는 매체로는 단연코 빛이 최고다. 밝음과 어두움을 이용하여 극적인 공간을 연출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현상학적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이용되는 것이 현대 건축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건축 재료인 유리 그리고 자연에서 가져온 수(水)공간이다. 유리와 물의 특징을 이용해 공간을 투명하게 만들고 주변 환경을 비추고  굴절시키고 반사시켜서 기존의 관념을 깨는 뒤집힌 공간을 만드는 건축가들의 작품을  대하면 저절로 그들이 창조한 공간에 빠져들게 된다” [p. 06]

 

세 번째 키워드는 현대 건축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구조주의(Structuralism)로, “기존의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벗어나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 병 같이 공간의 관계를 찾는 위상기하학은 현대 건축의 새로운 유형이다. (이렇게 위상기하학이 건축에 적용된 결과) 건축적 관통, 보이드, 폴딩, 대지건축 등 기존 건축에서 나타나지 않은 디자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p. 153]

 

건축적 관통의 예로는 램 콜하스의 카사 다 뮤지카

출처: <도시의 깊이>, p. 156

 

보이드의 예로는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아모레퍼시픽 본사

출처: <도시의 깊이>, p. 158

21.06.20 추가

제대로 된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진을 보려면 <월간 스페이스> 18년 8월호에 실린 임성훈의 "아모레퍼시픽 사옥 - 데이비드 치퍼필드 아키텍츠"(https://vmspace.com/project/project_view.html?base_seq=MjM0)을 참조.

 

대지건축의 예로는 오사카의 넥스트 21

출처: <도시의 깊이>, p. 164

 

네 번째 키워드는 자연을 모방한 건축설계인 바이오미미크리(Biomiomicry)로, 구조주의와 현상학적 공간을 구현하려던 현대 건축의 한계를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디자인적 요소, 생물학적 특징 등을 연구 및 모방을 통해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재닌 베뉴스(Janine Benyus, 1957)에 의해 이 개념이 처음 도입되었으며, 일본 건축의 메타볼리즘도 여기에 해당한다. 즉, “1960년대 일본 건축은 메타볼리즘으로 대표되는데 생물의 신진대사를 변화와 성장을 계속하는 건축과 사회라는 의미로 차용했다. 건축의 관점에서 보면 정적인 건축이 아니라 변화에 대응하는 동적인 활동을 통해 부분을 새롭게 만들어나간다는 것이다.” [p. 193]

 

다섯 번째 키워드는 건축물로부터 시작해 도시와 사람의 삶으로 확장되는 스케일(Scale)로, 랜드마크, 즉 “도시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란 건축물의 스케일을 도시의 스케일로까지 확장하여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의 확장은 스케일을 동반한다” [p. 232]고 한다.

 

 

어떤 건축이 좋은 공간을 만드는가, 도시를 바라보는 건축가의 고민

 

현대 사회의 건축이 나아갈 방향은 어디일까?

먼저, 저자는 ‘장소성’과 ‘맥락’을 고려하는 건축 공간으로서 포르투갈 포르투에 있는 일명 ‘바닷가 수영장’인 레싸 수영장(Leca Swimming Pools)을 소개하며 “한국에 있는 국제 규격의 실내수영장이나 리조트의 워터파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 p. 138]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레싸 수영장은 바닷가의 일부 공간을 적절하게 막고 최소한만 손을 대 자연스럽게 물을 가두어 만든 천연이자 인공 수영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축 건물에 방해된다고 오래된 나무를 자르거나 옮기는 것이 당연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공간이 어색하거나 이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연에 순응하고 그것을 적절히 이용하는, 즉 주변의 맥락을 고려하는 건축물의 아름다움은 대체되기 어렵다. 이러한 건축물의 대표적인 것이 한국 전통 건축이다. 그래서 저자도 “내가 아는 한 한국 전통 건축의 가장 큰 장점은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까래도 완벽한 직선이 아니고 구부러져 있는 상태 그대로 사용한다. 그 결과 고졸미가 나타난다. 한국에서 온 나에게 포르투의 천연 수영장은 마치 조선 시대 전통 주택을 먼발치에서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p. 138]고 말하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텐마크 국립 아쿠아리움 전철역 인근의 지하도도 떠올릴 수 있다. “덴마크 국립 아쿠아리움 전철역에서 내려 길을 건너려고 지하도로 들어갔다. 상쾌한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단순한 지하 통로인데 반대쪽 입구에서 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빛은 천창에서 내려온 것처럼 콘크리트 바닥과 주변을 비추고 있다. 그리고 벽에 경쾌한 디자인의 파란색 의자가 놓여 있다. 한눈에 봐도 디자인을 신경 쓴 것이 티가 났다. 이런 곳까지 디자인한다는 것이 놀랍다. 이곳 지하도는 기능적인 공간으로만 치부해 파고 뚫고 어두우면 조명 넣고 보기 싫다고 하면 벽화 그려 넣고 위험하다고 하면 CCTV를 달아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다. 자연과 공간과 디자인과 기능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도록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서 조화롭게 만들었다. 이런 체계적인 문제의식과 고민을 통해 종합적인 결정을 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능력일 것이리라.” [p. 167]

 

다음으로는 건축 재료와 디자인을 편견 없이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돼야 한다. 예들 들면, 스페인의 톨레도에서 사용하는 코르텐강(Cor-ten Steel)을 들 수 있다. 코르텐강의 갈색은 새로운 재료임에도 오래된 듯한 인상을 주며 산화되면서 재료가 갖는 시간성이 짙어진다. 그러나 관리가 불편해 우리나라에서는 선호하지 않는데, 톨레도에서는 화단의 경계 등에 코르텐강을 사용해 오래된 도시를 해치지 않으면서 세련된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 밖에도 저자는 공공디자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엘 크레꼬 박물관(Museo El Creco) 근처에 삼각형 형태의 작은 외부 광장이 있다. 마을의 작은 자투리 공공 공간에 나무 데크를 이용하여 낮은 계단을 만들어놓은 것이 전부다. 그런데 그 경계와 재료로 인하여 주민들과 관광객들은 편하게 주저앉아 쉬거나 심지어 누워서 해바라기를 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며 보낸다. 공공 디자인은 항상 결과가 명확히 나오고 티가 나야 실적으로 인정되는데 그런 부담 갖지 않고 진정 사람들이 원하는 작은 관심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공공 디자인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p. 235]

 

인증샷을 날리기 위한 관광의 대상, 나아가 건축물이나 도시 공간을 보이는 즐기는 것도 여행의 방법이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건축이 아닌 그런 공간을 삶과 사회와 연결시켜 볼 줄 아는 안목을 갖추는 것이 이 책의 제목 그대로 <도시의 깊이>를 엿볼 수 있게 해주리라 생각한다. 분명히  “건축을 배우는 제일 좋은 방법은 안도 다다오(安藤 忠雄, Ando Tadao, 1941~ )가 했던 것처럼 실제 건축 작품을 살펴보고 만지고 느끼는 것” [p. 6]이다. 하지만 강요된 언텍트 시대에 이런 책을 통해 도시와 공간의 깊이를 볼 수 있는 혹은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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