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입 크기의 프랑스 역사 - 혁명과 전쟁, 그리고 미식 이야기
스테판 에노.제니 미첼 지음, 임지연 옮김 / 북스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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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입 크기의 프랑스 역사: 혁명과 전쟁, 그리고 미식 이야기(A Bite-Sized History of France: Delicious, Gastronomic Tales of Revolution, War, and Enlightenment)>는 프랑스의 여러 음식과 그에 관한 역사 등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은 ‘예술을 사랑하는 프랑스 치즈 장수’를 자처하는 스테판 에노(Stephane Henaut)가 마음 편히 치즈를 가져오기 위해, 미국인 아내인 제니 미첼(Jeni Mitchell)에게 치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음식과 와인, 더 넓게는 먹고 마시고 농사짓고 포도를 재배하는 일체의 관습은 프랑스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은 프랑스라는 국가가 그렇듯 시대의 전쟁과 혁명, 전염병과 침략, 발명과 계몽을 통해 진화해왔고, 좋든 나쁘든 그 과정에서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p. 9]

 

그래서일까? 저자는 음식을 통해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자칫하면 ‘순혈(純血)’주의자 혹은 ‘국수(國粹)’주의자에게 이용되기 좋다.

 

불행히도 음식을 매개로 프랑스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행위는 1990년대 이후 프랑스 극우파가 선호하는 전술이 되었고, 지난 10년 동안 주류 정치에도 스며들었다.

중략 ~

프랑스인이 되려면 프랑스 사람들처럼 먹고 마셔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프랑스 역사를 살펴보면 프랑스 미식 전통이 전 세계의 맛과 관습이 혼합된 결과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포도밭은 로마인이 전해준 것이며, 유명한 페이스트리는 오스트리아의 선물이다. 터키로부터의 멋진 수입품, 커피가 없었다면 카페의 탄생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초콜릿? 멕시코에서 수입되었다. 프로방스 요리?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토마토 없는 프로방스 요리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순혈의’ 정통 프랑스 요리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사실상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앞으로 밝혀내도록 하겠다. [p. 10]

 

그렇기에 저자도 이 책에서 사실상 ‘순수한 프랑스 미식’은 없다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저자는 프랑스의 풍부한 음식 문화가 침략과 전쟁, 정복, 식민지화의 결과였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프랑스 요리 또한 획일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는 다양한 지역색 덕분만은 아니다. 긴 역사를 탐구한 결과 우리는 외국 요리가 프랑스 미식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음을 밝혀냈다. 와인과 리큐어, 페이스트리와 초콜릿, 그리고 프로방스의 맛 등 프랑스를 대표한다고 믿었던 많은 요소가 프랑스가 원조가 아닌 수 세기에 걸쳐 유입되어 서서히 흡수된 것이었다. 외국에서 수입된 이러한 요소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침략과 정복, 식민지화의 결과였기 때문에 그 유입과정은 실제보다 더 순화되어 묘사되었다. 이 중 식민지 정복의 영향은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온 식민지 요리가 현재도 프랑스 미식에 서서히 동화되는 과정에 있으므로 결과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pp. 426~427]

 

예컨대 초콜릿과 같은 경우 프랑스를 대표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에도 프랑스인들이 매년 약 7kg을 소비할 만큼 즐긴다. 하지만, 여전히 착취와 어쩌면 폭력을 통해 생산되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 대다수가 현대의 초콜릿이 끔찍한 식민지 건설과 대량 학살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겠지만, 서아프리카 카카오 생산 과정에서의 착취를 강조하는 지속적인 캠페인 덕분에 초콜릿 무역을 둘러싼 현재의 논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전 세계 카카오의 60퍼센트 이상이 가나와 코트디부아르, 이 두 나라에서 생산된다. 많은 카카오 농장 일꾼들이 일당 1달러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카카오 농장에서 일하는 아동이 200만 명이 넘는다고 추정되는데 일부는 이웃 나라에서 인신매매된 아이들이다. [p. 178]

 

 

이와 함께 음식의 다양한 역할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다. 요리와 식재료는 식생활 습관 혹은 방식을 통해 계층 간의 차이를 공고히 하는 수단이기도 했고,

 

사회 계층 간 차이는 음식을 통해서도 점점 더 공고해졌다. 봉건 시대에는 상류층과 하류층의 식습관 차이가 매우 컸다. 음식은 단순한 계급의 상징 이상의 의미를 지니면서 다른 계급에 대한 한 계급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정 음식이 고귀함과 건강함을 상징하기 때문에 다른 음식은 비천하고 건강에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고, 이에 따라 그 특정 음식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높은 지위를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귀결되었다. [pp. 66~67]

 

귀족들이 구운 고기를 먹는 동안 농민들은 채소를 찾아 헤맸다. 적어도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루이 14세가 채소를 더욱 고급 재료의 반열에 올려놓기 전까진 말이다. 이국적인 향신료와 설탕은 비교적 최근까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으며, 심지어 포위전과 전쟁 중에도 부유층은 계속 별미를 즐겼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인데, 비단 프랑스만의 일은 아니다.

중략 ~

즉,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 사회를 갈라놓는 분열과 불평등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준다. 특정 지역이나 시대의 음식과 관련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관습인 ‘식생활 방식(foodways)’을 조사함으로써 사회에서 누가 가장 많은 권력을 쥐고 있는지, 그들이 어떤 가치를 우선하는지, 어떻게 자신들의 높은 지위를 유지하는지 등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다. [pp. 424~425]

 

외교 수단이기도 했다.

 

탈레랑은 프랑스 대사와 외무 장관을 지내면서 프랑스 문화와 미식을 최대한 활용해 경쟁자를 이기고, 잠재적 동맹국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으며,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처럼 보이도록 교묘하게 타협을 끌어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소프트 파워’라고 부르는 것의 완벽한 실천자였으며, 적어도 17세기 중반 이래 유럽에서 가장 세련되었다는 프랑스 요리의 명성을 활용해 중요한 국익을 추구했다. 그는 유럽 정치를 재편할 협상을 위해 빈 회의에 참석하고자 출발하면서 “폐하, 지시 말씀보다 소스팬이 더 필요합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p. 276]

 

이처럼 음식을 매개로 프랑스 역사의 어두운 이면까지 들여다본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프랑스의 다채로운 음식과 역사, 문화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덧붙여 누군가가 한국의 음식과 역사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시선으로 글을 쓴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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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의 거의 모든 것 - 시와 해설로 읽는 신화 인문학 고전 아틀리에 2
최기재 지음 / 인간사랑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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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전 해설서가 필요한가

 

고전 해설서가 필요한 이유는 그 시대의 지식인이 당연하게 여겼던 것[세계관, 배경지식 등]과 현대의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도 “이 책을 읽기 전에”에서

 

이 책은 <일리아스>원전 번역본 읽기 도움서이다. <일리아스>를 읽기 전에 이 책을 읽으면 본문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호메로스를 읽은 후에 이 책을 읽으면 방대한 이야기를 체계화하여 이해할 수 있다. 바쁜 이들은 이 책만 읽어도 <일리아스>의 윤곽을 알 수 있다.

원전 번역본 <일리아스>는 방대한 분량, 낯섦, 신화, 수많은 에피소드 등으로 읽기 쉽지 않다. 10년 전쟁 중 4일의 전쟁 이야기로는 <일리아스>의 전후 맥락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전쟁의 원인도 나오지 않고 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관한 서술도 없다. 누구나 아는 트로이아 목마를 서사 속에서 찾을 수 없다. 왜 신들이 편을 나누어 인간을 돕고 응원하는지도 알 수 없다. 더구나 서양 문화권이 아닌 우리에게는 기본적인 배경지식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일리아스>가 서양 인문학의 출발이라고 하는데 막상 실제로 읽으려면 기본 배경지식이 부족하여 읽기가 어렵다. 이를 위해 <일리아스>의 이전과 이후, 그리고 신화와 비극 등 관련 내용을 담은 도움서가 필요하다. [p. 21]

 

라고 말하고 있다.

 

 

[일리아스의 거의 모든 것]은

 

제1장 [일리아스]를 읽기 위한 준비’에서는 서사시 <일리아스>의 가치와 이를 읽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고전은 원전 또는 원전 번역본을 먼저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줄어들고, 스마트폰 등 다른 매체의 이용으로 독서율(책을 읽는 사람의 비율)도, 독서량도 줄어드는 상황1)에서 얼마나 유효한 주장인지 의문이 간다. 게다가 블링키스트(Blinkist) 같은 책 요약 서비스가 흑자 전환2)할 만큼 요약본 혹은 발췌본 읽기가 성행하는 것을 보면, 고전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것 같지않다. 오히려 서양 고전의 경우에는 기본 배경지식 문제로 더 진입장벽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원전 내지 원전 완역본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원본에 없던 것을 구성하여 넣거나 있는 것을 삭제하는  번역자가 자신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평역(評譯)이나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한 해설서를 선택하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글은 원저자가 아닌 해당 글을 쓴 이의 시각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제2장 [일리아스] 이전 이야기’는 <일리아스>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서술한다.

 

고대 헬라스 서사시는 트로이아 서사시권과 테바이 서사시권으로 나누어진다. 트로이아 서사시권은 트로이아 함락 이야기이고, 테바이 서시시권은 오이디푸스 이야기이다.

중략 ~

트로이아 서시시권 서사시는 총 8편이다. <퀴프리아>는 파리스 심판에서 아카이오이족 연합군의 트로이아 도착 이야기이다.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 이야기이며, <아이티오피스>는 아킬레우스가 아마조네스 여왕 펜테실레이아, 아이티오페스 왕 멤논을 죽이고 파리스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이야기이다. <소(小) 일리아스>는 오뒷세우스와 아이아스의 무구 재판 이야기, <일로오스의 함락>은 오뒷세우스의 목마로 트로이아를 함락한 이야기, <귀향>은 오뒷세우스를 제외한 아카이오이족 장수들의 귀국 이야기, <오뒷세이아>는 오뒷세이아의 귀국 이야기, <텔레고노스>는 오뒷세우스가 아들 텔레고노스에게 살해되는 이야기이다. 이 중에 온전하게 전해오는 서사시는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이다. [pp. 34~35]

 

굳이 따지자면 제2장은 트로이아 전쟁의 발단과 초기 부분을 다루는 <퀴프리아>의 내용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의 원인이 된 황금사과와 파리스의 재판, 아프로디테의 뜻에 따라 트로이아로 가는 헬레네, 아카이오이족 연합군이 트로이아를 공격하기까지 과정 등을 언급한다.

 

제3장 [일리아스] 날짜별 서사의 전개’에서는 24권으로 구성된 <일리아스>의 서사를 날짜별로 소개한다.

 

제4장 [일리아스]의 뒷이야기, 트로이아 함락’은 아킬레우스의 죽음을 다루는 <아이티오피스>, 아킬레우스의 갑옷 소유권 다툼과 아킬레우스의 사촌 아이아스의 자살을 다루는 <소(小) 일리아스>, 유명한 트로이아의 멸망을 다루는 <일로오스의 함락>에 해당한다.

 

제5장 [일리아스]의 뒷이야기, 영웅들의 귀향’은 승자인 아카이오이족 영웅들의 귀향을 다룬다.

 

승자인 아카이오이족에서 행복한 자는 없다. 아킬레우스, 아이아스 등 영웅은 죽는다. 귀향 후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아내에게 살해당한다. 신들의 노여움으로 영웅들의 여인들은 바람이 나고 영웅들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다. 오뒷세우스는 10년의 어려운 귀향 후 자신의 자식에게 죽는다.

전쟁은 신에 대한 거역이다. 그 결과 전쟁에 참여한 자들 중 행복한 이를 찾을 수 없다. 호메로스는 전쟁이 신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하면서 처참한 묘사를 통해 우리에게 역설한다. [pp. 246~247]

 

 

저자의 해설을 보면, <일리아스>가 전쟁에 참여한 영웅들의 몰락을 통해 반전(反戰)을 노래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 덧붙이자면, 본인이 아닌 조상 때문에 파멸하는 경우를 보면, 헬라스 문화권도 ‘조상의 음덕(蔭德)’을 의식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6장 [일리아스] 깊이 읽기’에는 헬라스에 문명이 생겼을 때부터 마케도니아 왕국의 멸망까지의 간략한 역사, 트로이아 전쟁에서 각 진영으로 나뉜 헬라스의 신(神)들의 소개, <일리아스>의 구조에 대한 해설, 트로이아 왕가의 계보 등이 실려있다.

 

제7장 [일리아스]의 영향과 평가’는 헬라스가 세계에 끼친 영향과 [일리아스]가 가지는 시대적 한계 등을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다.

 

제8장 [일리아스]외 다른 서사시들’에서는 <길가메시 서사시>, <라마야나>, <아이네이스>, <에다>, <니벨룽의 노래>, <동명왕편> 등 세계의 서사시를 소개하고 있다.

 

제9장 [일리아스]의 종합적 이해’는 [일리아스]가 고대 헬라스인들의 인간에 대한 보고서라고 주장하며, [일리아스]의 주제, [일리아스] 속 신화에 대한 해석 등을 다루고 있다.

 

 

[일리아스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아쉬움

 

어느 여성 국회의원이 남자처럼 살았다.

베니스 상인의 포셔처럼

십이야의 바이올라처럼

남장 여성이다.

벗기면 그대로인 것을

고대 올림픽 경기는 먼저 알아

경기 선수는 나체이다.

경기는 공평해야 하므로

똑같이 지닌 몸으로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겨루어야 정당하다. [p. 97]

 

이 책에 종종 삽입된 저자의 시(詩)는 신선하면서도 진부한 사족(蛇足) 같은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각 단락을 시(詩)로 시작하는 것은 신선하지만, 동시에 고대 소설에서 내용을 함축하는 짧은 글로 장절(章節)을 시작하는 것을 연상케 한다.

예컨대 유명한 <홍루몽>의 경우 제1회를

 

진사은은 꿈길에서 통령보옥 처음보고[甄士隱夢幻識通寶 ]

가우촌은 불우할 때 한 여인을 알았다네[賈雨村風塵懷閨秀]3)

 

라고 시작한다.

 

굳이 이런 부분을 넣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수록된 다양하고 풍부한 정보는 제목 그래도 <일리아스>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서양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지식이 부족한 이에게는 <일리아스> 독해를 위한 좋은 가이드북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옥의 티

 

p. 21

이 책은 <일리아스>원전 번역본 읽기 도움서이다. <일리아스>를 읽기 전에 이 책을 읽으면 본문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호메로스를 읽은 후에 이 책을 읽으면 방대한 이야기를 체계화하여 이해할 수 있다. 바쁜 이들은 이 책만 읽어도 <일리아스>의 윤곽을 알 수 있다. ⇒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문맥상 사람 이름인 호메로스가 아닌 ‘호메로스의 저서 전체’ 혹은 <일리아스>를 의미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느 쪽이든 명확하게 표기하는 것이 읽고 이해하기 좋을 듯하다.

 

p. 418

<일리아스>는 고대 희랍인들의 오랫동안 누적된 인간에 대한 보고서이다. ~ 헬라스인들은 아킬레우스의 방패에 그려진 삶을 꿈꾸지만 그 방패를 내세우면서 죽는 존재이다. ⇒ 희랍인 혹은 헬라스인 어느 한 쪽으로 통일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 리뷰는 도서출판 인간사랑으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1) 이은정, “지난해 국민 독서량 ‘뚝’… 2년 전보다 성인 3권, 학생 6.6권 ↓”, <연합뉴스> 2022.01.14. 참고로 성인의 독서율은 2011년 73.7%에서 2021년 46.9%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2) 김상희, “짧게 즐기는 시대… 책도 줄여본다”, <머니투데이> 2023.01.29

3) 조설근(曹雪芹)/고악(高顎), <홍루몽> 1, 최용철/고민희 옮김, (나남, 2009), p.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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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 - 역사 따라 살펴보는 경성 근대건축
이영천 지음 / 루아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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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공관, 건축과정과 건축의도

 

‘1장 서로를 경계하며 우후죽순 밀려드는 외국 공관들’에서는 개항과 함께 세워진 외국 공관들을 다루고 있다.

서양의 공관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은 미국의 공사관으로 지금은 주한미국대사관저 부속 시설로 사용 중이라고 한다. 이어 영국도 한옥을 매입, 공사관을 건립했는데, 현재까지도 대사관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와 벨기에의 공관은 그 흔적이 남아있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공관은 이들과 달리 세월의 흐름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러시아는 1890년 한성 내 최초의 서구식 공사관을 정동 언덕에 세웠다. 당시 한성에서 제일가는 서구식 건축물이었던 이 건물은 한국전쟁 시기에 폭격으로 거의 허물어져서 현재는 3층짜리 전망탑 하나만 남아있다.

 

1981년 전망탑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지하에 폭 45센티미터, 길이 20.3미터짜리 통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경운궁과 러시아공사관을 잇던 비밀 통로로 추정되고 있다. 이 작은 통로에 꺼져가는 촛불 같던 나라의 위급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보인다. [p. 37]

 

저자의 말처럼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몸부림치던 조선의 모습이 엿보이는 듯하다.

 

반면 벨기에는 1901년 체결된 ‘조백수호통상조약(朝白修好通商條約)’의 내용이 오로지 상업 활동에 관한 규정 일색이었고, 그들이 설치한 공관도 오직 시장 개척에 상응하는 영사 업무만을 위한 영사관이었던 것에 드러나 있듯이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를 추구했다.

 

고종이 승하하고 3.1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1919년, 벨기에는 10배 이상의 막대한 차익을 남기고 영사관 건물을 일본 요코하마 생명보험사에 팔아 넘긴다. 일본인 상권이 명동과 충무로를 점령한 뒤였고, 한성 상권의 패권을 두고 종로와 맞설 때였다. 벨기에영사관이 있던 곳은 곧 식민도시 경성의 핵심 상권으로 성장한다. [p. 53]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의 선교와 건축

 

‘2장 순교하는 가톨릭, 병원과 학교를 앞세운 개신교’에서는 성당과 신학교로 대표되는 선교에 치중한 가톨릭과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으로 대표되는 계몽과 근대화에 치중한 개신교의 건축물을 조명한다.

 

가톨릭은 교회 부지로 가급적 높은 언덕을 선호한다. 가톨릭 교리를 표현하는 대상물로서 권위를 드러내고 어느 장소에서든 잘 보이도록 함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거두려는 의도다. 또 주변에 순교성지가 있어 가톨릭과 인연이 깊은 곳이라면 선호도는 배가된다. 이는 통례적으로 인정되어온 가톨릭 전통으로, 한성에서는 종현(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의 입지가 대표적이다. [p. 70]

 

신학교는 1891년 5월 정초를 놓고, 코스트 신부의 설계와 청나라 기술자의 시공으로 1892년 6월 25일 축성된다. 이 신학교가 조선 최초의 성직자 양성소 ‘용산신학교’다. 이를 소(小)신학교라 불렀는데, 이 학교는 1928년 혜화동으로 이전한다. 그 후 건물은 성직자 휴양소와 주교관으로 사용되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1960년대에 철거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대(大)신학교 교사는 소신학교 인근에 1911년에 건축되어 일제가 강제로 폐쇄하는 1942년까지 그 역할을 이어갔다. 건물은 잠시 공백기를 거쳐 1944년부터 성모병원 분원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덕에 온전히 존치될 수 있었다. 1956년 성심수녀회가 설립되면서 건물을 인수했고, 수녀원과 사무소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성심기념관으로 쓰고 있다. [p. 71]

 

주로 대한해협을 통과하는 루트로 유입된 감리교와 장로교가 조선에서는 개신교의 주류를 형성한다. 따라서 서울에 지어진 정동교회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교회 건축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때 미국에서 주류를 이룬 교회 건축은 적절한 부속시설을 지닌 반형식주의 로마네스크 복고양식이었다. [p. 97]

 

 

경운궁의 중건(重建)과 근대국가로의 전환 노력

 

‘3장 근대화를 향한 몸부림, 경운궁 중건과 서양관’에서는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경운궁의 확장, 중건(重建)을 중심으로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위한 노력을 다룬다. 수옥헌(漱玉軒), 정관헌(靜觀軒)석조전(石造殿) 등 양관(洋館)이라는 이름의 경운궁에 들어선 서양식 건축물은 대한제국의 노력과 좌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경운궁 수리와 더불어 진행된 가로(街路) 정비와 근대적 도시공원인 탑골공원의 건립도 마찬가지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한 직후부터 경운궁을 중심에 두면서 나라를 근대국가로 다시 세우겠다는 구상을 실행에 옮긴다. 가장 먼저 경운궁 수리에 착수하고 이와 더불어 가로(街路) 정비와 근대적 도시공원 건립을 시작한다. 곧 도시재정비 사업이다. 이는 온건개화파로 알려진 박정양과 이채현의 노력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고종은 이를 통해 부강한 영세 중립국가 수립을 꿈꾼 것이다. [pp. 101~102]

 

가로가 정비되자 한성은 몰라보게 바뀌었다. 불결함이 급격히 줄어들고 옹색해 보이던 생활 환경은 활기를 띠었다. 아울러 상업도 보다 활발해졌는데, 모두 가로 정비에 따른 부수 효과였다. 넓은 도로는 산책하기에 맞춤이었고, 가게는 많은 물건을 진열해 장사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넓혀진 도로에는 가로등이 밤을 밝혔다. 가로 정비는 단순히 도로 폭을 넓히고 깨끗하게 정돈하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도로망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는데, 이는 정궁으로 삼고자 한 경운궁을 중심에 둔 도시 공간구조 개편의 일환이었다. 고종은 개선문을 중심으로 한 파리의 가로망처럼, 경운궁을 중심에 두어 권위를 드러내려는 방사형 가로망을 꿈꾼 것이다. 이는 한 지점에서 각 가로의 움직임을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이점을 갖춘 체계다. 방사형을 선택한 이유는 정세상 일본을 경계하려는 포석으로 읽힌다. [pp. 105~106]

 

 

일제의 침략 첨병들

 

‘4장 침략의 첨병으로서 우리를 옥죈 기구들’에서는 용산역과 용산기지, 종로경찰서 등 파출소 및 주재소, 서대문형무소, 경성재판소처럼 침략의 첨병으로 기능했던 건축물들을 소개한다.

 

일제는 ‘한일의정서’ 제4조에 의거해 1904~1906년 기간에 용산 땅 992만 제곱미터(약 300만평)을 평당 30전에 강제로 징발한다. 한반도 지배와 대륙 침략을 위한 군사기지 및 철도 용지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pp. 156~158]

 

용산에 주둔하던 조선군사령부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침략의 첨병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군부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인력과 물자를 갈취해 보급하는 실질적 지휘소 역할을 맡는다. 한반도에도 적용된 국가총동원법을 근거로 노동력과 물자, 자금과 물가, 시설과 사업, 출판과 언론을 통제하고 식량을 공출해가는 전시통제체제를 시행한 것이다. 여기에 청년들을 징병해 전장으로 내몰았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징용으로 노동력을 착취했다. 또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끌어다 위안소를 차리기까지 한다. [pp.164~165]

 

 

식민 지배공간 창출을 위한 건물들

 

‘5장 치밀한 흉계로 경성을 장악한 통치기구들’에서는 4장과 비슷하면서도 다소 다른, 조선 신궁, 조선총독부 청사, 경성부청 청사처럼 일제의 통치기구를 위한 건축물을 언급한다.

 

일제는 1916년까지 조선인을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따라서 조선인에 대한 정신적 동화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1916년 이후에야 비로소 조선인을 정신적 동화 대상으로 삼은 것인데, 그 해 일제는 기존 남산대신궁을 정식 신사인 ‘경성신사’로 격상하는 조치를 발표한다.

이런 배경에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이식과 한반도가 일제 영토임을 종교적으로 합리화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국가 신토가 건립될 때까지 임시 변통 역할을 경성신사에 맡기려는 조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 경성신사 신직이 반발하고 나선다. 야만에 가까운 조선인이 일본 신 앞에서 자기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된다는 데에 대한 불만이었다. 일선동조론이란 정신 동화정책이 현실에서는 구호에 불과했던 셈이다. 이는 종교적 자유와 황실에 대한 충성 의무 사이에 일어난 대립이자, 국가 신토가 갖는 자체 모순이기도 하다. [pp. 201~202]

 

1907년 일본 왕사제 다이쇼[大正]의 방문을 계기로 숭례문 양측 성곽을 없앤 것을 시작으로 도성 성곽이 본격적으로 파괴된다. 1908년경에는 일본인들이 한일 공동공원을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남산 서북서 자락의 약 100만 제곱미터(약 30만 2500평) 땅을 차입하겠다고 청원한다. 이에 송병준 등 친일파 관료들이 앞장서서 그 땅을 무상으로 일본인에게 영구 대여한다. 옛 남산식물원에서 3호 터널에 이르는 공간이다. 이 땅을 차지한 일제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이곳은 둘로 분리된 일본인 중심지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남산 기슭의 진고개와 왜성대 일대 그리고 군사용 조차장이었던 용산역과 군사기지로 조성 중이던 용산기지를 잇는 결절점이었던 것이다. 일제는 1908년 봄 공원 조성에 착수해 2년 만인 1910년 5월 29일 성대한 개원식을 치른다. 이 행사에 200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고종은 이를 기념해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는 이름을 친필로 하사하기까지 한다. [pp. 208~209]

 

 

철도, 근대화로 위장된 침략

 

‘6장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철마로 밀려온 근대’에서는 근대화라고 하면 떠올리는 철도 부설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다툼을 돌아보고,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이자 대규모 조차장(操車場)였던 용산역, 중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사 및 물류 배후기지로 조성하던 수색 조차장 등에 관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일제는 일찍부터 경부선에 눈독을 들였고, 자기들 마음대로 조선 강토를 활보하며 불법을 자행하고 있었다. 일본 밀정은 이미 1885년부터 4년에 걸쳐 전 국토를 돌아다니며 지리와 인문 정보, 경제 현황, 교통 등을 은밀히 조사한 바 있다. 또 사냥꾼으로 가장한 철도 기술자가 일제의 비호 아래 경부선 철도 예정지를 답사하고 측량한 뒤 1892년 보고서와 도면을 일본 정부에 제출한 사례도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한반도 침략이 자행된 1894년과 1899년, 1900년, 1901년 등 네 차례에 걸쳐 보완 조사를 시행했다. 그리고 일제는 실질적으로 전 국민을 동원하다시피 해서 1901년 6월 25일 반관반민의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중략 ~

러일전쟁이 임박하자 일제는 ‘경부선 철도 완성은 한 척 전투함을 만드는 것보다, 한 개 사단 병력을 증설하는 것보다 더 우위에 서는 일’이라며 1903년 12워 28일 ‘속성명령’으로 일 년 내 완공을 밀어붙인다. 이런 만행으로 철도가 지나는 곳 주변에 사는 민중들만 골병이 들었다. 땅과 물자는 물론, 노동력마저 착취당했기 때문이다. 고향을 버리고 유리걸식하는 이들도 속출했다. 광무 정권은 토지대금 마련에 허덕이면서 일본은행에 빚까지 진다. 러일전쟁을 위한 통과 시설로서 경부선은 그렇게 한국인의 뼈와 살을 발라 태어난 것이다. [pp. 247~248]

 

 

실패로 끝난 근대화 이식 실험

 

‘7장 이식된 근대화의 길 위에서’는 근대국가를 향한 조선의 노력을 살핀다. 신무기 제조를 담당하는 기기국(機器局), 국립의료원 제중원(濟衆院), 최초의 근대 서양식 의과대학인 의학교, 내부(內部) 직할의 국립 병원인 광제원(廣濟院), 전신선의 설치와 연결을 꾀한 조선전보총국(朝鮮電報總局) 등은 근대 문물의 도입을 통해 힘을 키우려 했던 조선의 몸부림을 보여준다.

 

김윤식은 현실을 올곧게 직시했다. 나라 재정은 몹시 열악했고, 내부 분열과 외세의 참견, 간섭이 극심했기에 대포나 군함 같은 대형 무기를 제조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다. 이에 장차 만들어질 기기국 규모를 염두에 두고 급하게 전략을 수정한다. 유학생들이 당장 이룰 수 있는 기술부터 익히도록 조치한 것이다. 손기술로 만들 수 있는 탄약이나 화약, 소총 같은 작은 무기 제조에 학습 역점을 두었다. 어느 정도 학습이 되면 얼마 남지 않은 유학생들을 조기에 귀국시키고, 따로 기계를 사들여 국(局)을 설치한 다음 신무기를 제조할 생각이었다. 원대한 꿈을 꾸며 69명의 유학생을 데리고 떠난 지 불과 일 년 남짓이었다. [p. 271]

 

 

이 책에 소개된 각각의 건축물에는 정치적인 또는 경제적인 배경이 세세히 녹아 들어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목적 없이 만들어진 건축물은 없다’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단순히 건축물이 담당했던 기능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건축물의 입지에서부터 건축 재료, 건축 형상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은 치밀한 계산을 통한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각각의 건축물을 세웠다.

그렇기에 가슴 아픈 역사가 담겨있으니까, 무조건 철거해서 지워버리자고 하는 것은 스스로 단순한 사고방식을 지녔다고 자랑하는 것에 불과하다.

 

치욕적이고 끔찍한 역사를 전하는 문화재들은 한때 없애야 할 대상으로 인식됐다. 1995년 철거된 ‘조선총독부 청사’가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문화재의 가치에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다. 내부적으로는 힘이 없으면 다시 이런 일을 당할 수 있음을 상기시킬 수 있다. 가해자의 악행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유물이 되기도 한다. 일제 관련 유물은 침략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의 최근 행태를 반박하는 증거다. 유대인들이 나치의 홀로코스트 관련 문화재를 적극적으로 보호, 활용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동아대 건축학과 김기수 교수는 “네거티브 문화재는 아픈 역사를 드러내 재연되지 않도록 경계를 삼기 위해 활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1)

 

우리의 근대 건축물들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근대 건축물들이 아직 가치평가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보전하고, 그 공간에 담겨있는 기억을 복원하며 앞 세대, 그리고 해당 건축물과 소통을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아가 박물관의 수장고(收藏庫)에 보관되어 있는 것처럼 박제화하여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공간을 활용하고 내용을 채우면서 새로운 가치를 계속해서 담아내는 방식으로 전통을 계승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마 저자도 이를 위해 서울의 근대 건축물을 대상으로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라는 책을 쓴 것이 아닐까?

 

1) 강구열, “기억해야 할 치욕의 흔적… 대한민국 역사의 ‘빛과 그림자’”, <세계일보>, 201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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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 피아니스트 백혜선의 인생수업
백혜선 지음 / 다산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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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이 아니라 인생 3기를 앞둔 출사표

 

나는 교과서에 나오는 클래식은 알아도 우리시대의 클래식을 잘 모른다. 기껏해야 피아니스트 백건우, 정명훈 남매, 그러니까 ‘정 트리오’ 정도나 알까? 그래서 나는 백혜선(1965~ )이라는 피아니스트가 낯설다. 그런데 우리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일본 사이타마현 문화예술재단이 선정한 ‘현존하는 세계 100대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에 그녀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궁금증이 생겼다.

 

서울 예원학교 2학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건반 위의 철학자’로 불리는 러셀 셔먼과 변화정 부부의 가르침을 받았다. 1989년 월리엄 카펠 국제 콩쿠르 1위를 시작으로, 1990년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 1991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등에서 입상하여 국내에서는 “콩쿠르 여제”로 통했고, 1994년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1위 없는 3위라는 성적으로 한국인 최초로 상위 입상을 하면서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수상 직후 서울대 음대 사상 최연소 교수로 임용되었으나, 10년 후 서울대 교수직을 박차고 미국으로 떠났다.

중략 ~

미국 클리블랜드 음악원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는 모교이자 미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음악 대학인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저자 소개를 보면, 백혜선은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아직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현역 연주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번쯤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기분으로 자신의 성공담을 쏟아내고픈 유혹을 받지 않았을까?

 

그런데 저자는 다른 선택을 했다. 과거의 영광을 회고하는 대신, 실패담을 되씹으며 인생 3기를 향해 출사표를 던지기로 한 것이다. 인생 3기라고 해서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 인생을 어릴 적 피아노를 접하고부터 미국에 건너간 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입상하기까지를 제 1기, 최연소로 서울대 음대 교수에 임용되고 나서 겪은 부침부터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어렸던 아들딸이 성장하고 선생이자 연주자로 다시 선 지금까지를 제 2기, 그리고 앞으로 맞닥뜨릴 시기를 제 3기라고 구분한 것이다.

 

 

첫 좌절, 수영

 

백혜선이 처음 열정과 재능을 느낀 분야는 수영, 그 중에서도 자유형이었다.

 

내가 단출하게나마 스스로의 재능을 처음 발견한 영역은 수영이었다.

중략 ~

나의 재능이라고 한다면 다른 아이들보다 신체 조건이 유리하다는 정도였던 것 같다. 물이 무섭지도 않았는지 몸으로 물살을 가를 때의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 느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또래에 비해 월등히 큰 키 덕분이었을까. 나는 비슷한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또래 아이들보다 조금 앞서 있었다. 운동 신경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라도 물속에만 있으면 칭찬 세례가 연거푸 이어졌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pp. 21~22]

 

열세 살이 되던 해에는 경북 신기록을 세울 정도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가 서울 전지훈련을 가서 만난, 최윤정은 그녀와 달리 타고난 천재였다. 얼마 후 소년 체전에서 만난 최윤정은 그녀에게 반짝이는 천재의 꽁무니를 멀찍이서 뒤쫓는 범인의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보다 좋은 신체조건과 수영장에서 살다시피 하는 노력으로도 타고난 천재를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이다.

 

 

피아노 콩쿠르, 영광과 좌절

 

1989년에는 월리엄 카펠 콩쿠르에 나가 1위에 오르면서 국제 문대에 화려하게 데뷔했고, 1990년에는 여섯 명의 결선 진출자에 드는 것만도 대단한 영예인 리즈 콩쿠르에서 5위를 했다. 또 1991년에는 벨기에에서 열리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연속 스무 시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양의 연습을 강행한 끝에 4위를 차지하기까지 했다.

백혜선은 콩쿠르에 나가기만 하면 무조건 된다’는 부러움과 질투 섞인 말이 국내의 젊은 음악인들에게 떠돌았다. [p. 73]

 

콩쿠르 여제”라는 별명을 스스로도 당연하게 여기며 나간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는 그녀에게 또 한 차례의 좌절을 안겼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1993년 6월에 미국에서 가장 큰 콩쿠르인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 나갔다. 평소보다 적은 수라고 할 수 있는 사십에서 오십 명의 연주자만을 추려 참가시켰는데, 그 중에서도 강력한 후보인 예닐곱 명에게는 특별히 취재를 위한 카메라와 작가가 하나씩 따라다녔다. 콩쿠르 측에서 ‘이 사람은 분명히 입상할 것’이라고 예상한 참가자들이 대상이었고, 거기엔 물론 나도 포함됐다.

중략 ~

만약 혜선 백이 떨어지면 난 이번 콩쿠르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그 이상한 일이 정말로 벌어지고 말았다. 본선 1차 실격. 내 평생 1차에서 떨어진 콩쿠르는 처음이었다. [pp. 73~74]

 

또다시 좌절한 그녀는 앞날을 냉정한 판단해보고, 미국 장거리 전화회사 MCI에 영업직으로 들어갔다. 영업직도 천성에 맞았을까? 두 달 만에 매니저 승진 제안을 받을 정도로 능력과 실적을 인정받았다.

그 때, 그녀의 은사인 변화경에게서 연락이 왔다.

 

콩쿠르 준비는 하고 있고?”

매니저 승진 소식까지 전하지는 않더라도 솔직한 마음을 전할 차례 같았다.

선생님, 저는 피아노는 포기했어요. 음악으로 돈 벌고 사는 건 제가 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차이콥스키는 나가봐야 되지 않겠니?” [p. 77]

 

고민 끝에 그녀는 그녀가 참가할 수 있는 마지막 콩쿠르인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 지원했다. 여기에서 1위 없는 공동 3위에 입상하면서 다시 피아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인 3역의 좌절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나는 서울대를 종착역으로 여기거나 실제로 그렇게 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

학생이고 교수고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서울대라는 결과에 운과 배경과 실력이 어떠한 비중으로 작용하였는지 헷갈려 하는 이들이 많았고, 교수들 역시 주변에 에헴 하며 으스대지만 내실은 텅 빈 이들이 많았다. 잠깐 머리에 쓸 감투를 너무 눌러써서 감투가 곧 자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긴, 십 년이면 나도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고 내 것이 아닌 자리였다. [p. 238]

 

학교에서 아무리 젊은 연주자를 위해 편의를 봐준다고 해도 직장은 직장이었다. 서울대 교수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가르침에 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주에 가르치는 시간이 서른 시간을 넘어서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연주자로서 존재할 수 없었다. [p. 251]

 

결국, 교육자, 연주자, 엄마로서 1인 3역을 수행하기가 너무 힘들었고, 또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고 여긴 백혜선은 서울대 교수 자리를 박차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때의 경험 탓일까? 그녀는 교수직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손열음, 김선욱 같은 젊은 연주자들의 용기와 능력이 부러워하는 말도 남겼다.

 

교수가 되어 십 년 정도 지나면 어느덧 연주자로서의 빛을 잃어, 대중들에게조차 연주자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교수를 함으로써 안정을 얻되 자칫 연주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몸소 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아프게 깨달은 그 사실을 이들은 어떻게 미리 알았을까? [p. 254]

 

 

교육자로서의 벽, 러셀 셔먼

 

콩쿠르와 서울대 교수의 간판을 벗어버리고 그녀가 다시 교수가 된 것은 2013년이다. 8년 만에 다시 교수가 된 것이다.

 

참된 스승은 자신이 아는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보게 해주는 사람이라고. 오랫동안 선생님의 모습을 지켜봐 왔고 이제는 스스로 가르치는 일을 오래 해오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가르치는 것보다 학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한다는 선생의 일이 몇 배는 어렵다는 것을. 셔먼 선생님처럼 가르치는 사람에게 그만한 실력이 없다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셔먼 선생님은 희생하지 않는 연주자였다. 말하자면, 가르침으로 인해 자신의 연습과 연주가 희생되는 것을 한 치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혼자서 음악에 대해 생각하기로 엄격하게 정해둔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레슨 시간에는 ‘학생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파악하기 위해 온 초점이 학생에게만 맞춰져 있었다. [pp. 255~ 256]

 

학생에게 가장 좋은 스승이란 ‘저렇게 되고 싶은 사람’이다. 셔먼 선생님은 그 기준에 완전히 부합하면서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기까지 했다. 그분은 ‘저렇게 되고 싶지만 도저히 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p. 257]

 

백혜선이 교육자의 길을 걸으면서 스승인 ‘러셀 셔먼’이라는 벽에 좌절했을지도 모른다. ‘저렇게 되고 싶지만 도저히 될 수 없는 사람’을 아는 것만으로도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녀는 한 걸음 더 나가기 위해 노력했고, 또 노력하고 있다.

여러 차례 좌절을 겪으면서도 계속 나아가는 그녀도 누군가에게 ‘저렇게 되고 싶지만 도저히 될 수 없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다산북스’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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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 한줄기 희망의 빛으로 세상을 지어라
안도 다다오 지음, 이규원 옮김, 김광현 감수 / 안그라픽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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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다다오[安藤忠雄]

 

일본 건축의 대중화를 이끈, 일본 3세대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1941~ ]는 여러 모로 유명하다. 일단 그의 이력이 특이하다. 프로복싱 선수 출신이라는 경력이나 고졸이라는 학력 모두 일반적인 건축가와 다르다. 거기에 그는 건축을 독학했다. 그렇기에 ‘빛과 콘크리트의 건축가’라는 이명(異名)을 지닌 세계적인 건축가로 우뚝 선 현재, 그의 삶은 밑바닥에서 정상에 오른 입지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첫 자서전,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보면 뭔가 건축가로 성공할 수 있는 비법 혹은 자신의 성공담이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군다나 이 책을 고희(古稀)를 앞둔 시점에 내놓았으니 그런 생각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부정한다.

 

화려한 성공담이 아니다. 쓰러졌다 일어서기를 거듭해 온 이 무뚝뚝한 자전을 읽고 한국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인생에 용기를 가져준다면 좋겠다. [p. 5]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그림자

 

안도 다다오는 독학으로 건축을 배우는 과정에서 근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가 ‘빛과 콘크리트의 건축가’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건축은 유리와 노출 콘크리트를 많이 사용하지만 ‘물’이나 ‘빛’ 같은 자연적 요소와의 융합을 꾀함으로써, 간결하고 단순하지만 차갑지 않은 느낌을 받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콘크리트를 사용하되, 그 안의 공간에 존재하는 인간을 배려하는 건축을 추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인간을 배려했다는 것과 인간이 생활하기 편리하다는 것은 동의어가 아니다. 예를 들어, 그의 처녀작인 ‘스미요시 나가야[住吉の長屋]’(1976)은 그가 일관적으로 추구하는 노출 콘크리트를 소재로 간결하고 독창적인 건축 공간에 자연을 끌어들이는 경향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는 내부 중앙에 하늘을 향해 개방된 중정(中庭)이 배치되어 있어 하늘과 바람, 빛이 자연스럽게 드나들어, 도시 안에서 자연을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게 설계되었다. 하지만, 그 대신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좁은 집의 1/3을 차지하는, 지붕 없는 중정(中庭)때문에, 비가 오는 날이면 서재에서 마루로 가는 동안 우산을 써야 하는 등 일상 생활에 있어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스미요시 나가야[住吉の長屋]

출처: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p. 89

 

건축 설계의 목적이란 합리적이고 경제성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쾌적한 건물을 짓는 것이다. 닫힌 실내에서 숨죽이고 사는 것과 다소 불편하더라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연과 호흡 할 수 있는 생활 중에 어느 쪽이 더 ‘쾌적’할까. 이것을 결정 할 수 있는 것은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다. 일상생활과 가치관의 문제까지 살펴서 궁리한다면 건축의 가능성은 더욱 넓어지며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다. 사람의 몸과 마음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 [p. 335] 

 

관점의 차이겠지만, 내가 살아가야 하는 생활공간이라면, 나는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은 안도 다다오의 ‘쾌적한 건물’보다 생활하기 편리한 건물을 선택할 것이다. 미술관, 박물관 같은 공공시설이나 교회, 성당, 절 같은 종교시설 같은 경우라면 몰라도 굳이 몸과 마음을 쉬는 공간인 생활공간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투쟁적인 건축가가 되기까지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일본사회에서 학연이나 혈연 등 아무런 배경 없이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은 맨바닥에 헤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연히 안도 다다오가 뭔가 시작해도 거의 대부분은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어쩌면 1%의 가능성도 사치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성공했다. 그의 성공은 기성의 개념과 고정관념, 경제적인 제약 등 어려움을 감수하고도 도전을 멈추지 않은 결과다. 그래서 그를 ‘가장 투쟁적인 건축가’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이 자서전,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의 성공담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령 나의 이력에서 뭔가를 찾아낸다면, 아마 그것은 뛰어난 예술가적 자질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뭔가 있다면 가혹한 현실에 직면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강인하게 살아남으려고 분투하는 타고난 완강함일 것이다.

자기 삶에서 '빛'을 구하고자 한다면 먼저 눈앞에 있는 힘겨운 현실이라는 '그늘'을 제대로 직시하고 그것을 뛰어 넘기 위해 용기 있게 전진할 일이다.

정보화가 발달하고 고도로 관리되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늘 볕이 드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략 ~

무엇이 인생의 행복인지는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참된 행복은 적어도 빛 속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빛을 멀리 가늠하고 그것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몰입의 시간 속에 충실한 삶이 있다고 본다.

빛과 그늘. 이것이 건축 세계에서 40년을 살아오면서 체험으로 배운 나 나름의 인생관이다. [pp. 417~419]

 

 

노출 콘크리트가 그의 전부는 아니다.

 

그가 처음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한 것은 가성비가 좋은 재료이자 공법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70년대 내가 노출 콘크리트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도 미학적 의도에서만은 아니었다. 벽 안팎을 단번에 마감할 수 있는 노출 콘크리트는 제한된 예산과 대지에서 최대한 커다란 공간을 확보하고 싶다는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비용도 저렴한 해결책이었기 때문이다. [p. 170]

 

하지만 안도 다다오는 노출 콘크리트에서 다른 의미를 찾았다.

 

노출 콘크리트 공법은 공장에서 품질 관리를 할 수 없는 현장 작업’이기 때문에 조건 여하에 따라 마감의 질이 크게 달라진다는 난점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재미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콘크리트라고 해도 르 코르뷔지에의 라투레트수도원 같은 강력하고 거친 표현도 있고, 칸의 킴벨미술관 같은 단정한 표현도 있다. 즉, 건축가의 생각을 표정으로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재료라는 것이다. [pp. 170~171]

 

그렇다고 그가 노출 콘크리트에만 집착한 것은 아니었다. 외국인들이 서양식 주택을 짓고 모여 살던, 고베의 주택가에 위치한 ‘로즈 가든’(1977)은 노출 콘크리트를 배제한 작품이다. 이 건축물은 다소 의외일지도 모르지만, 거리 보존과 주변과의 조화를 위해, 벽돌 벽과 합각지붕 디자인이라는 이진칸[異人館]1) 고유의 이미지를 계승하고 있다.

 

로즈 가든

출처: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p. 129

 

또한 안도 다다오는 도큐토요코선[東急東橫線]의 시부야역[谷驛](2008)에 지하 깊은 곳까지 빛과 바람이 들어오는 보이드(void2))를 ‘달걀’ 모양의 껍데기로 둘러싼 지중선(地中船)의 형태를 제안했다. 이 ‘달걀’에 덮인 원룸형 역사를 지하 공간의 채광, 통풍, 방습을 위해 설치된 통로 드라이 에어리어와 연결하고, 달걀’ 껍데기의 재료로 일반 콘크리트가 아니라 안에 빈 공간이 있는 GRC(Glass fiber Reinforced Concrete)를 채택하여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환기가 가능한 ‘자연 환기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런 점에서 환경파괴적인 노출 콘크리트가 대표하는 이미지와 달리 그가 환경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민해왔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경제의 세기[20C]’에서 ‘환경의 세기[21C]’로의 전환을 고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도큐토요코선[東急東橫線]의 시부야역[谷驛]


출처: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p. 328

 

아마도 이런 모습 때문에 책 날개에

 

생각의 자유를 잃지 않는 열정을 청춘이라 한다면 그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의 방법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청춘을 살고 있다.

 

라고 얘기한 것 같다.

여전히 청춘인 안도 다다오의 열정에 경의를 표하며 이만 그의 자서전을 덮어야겠다.

 

1) 이진칸[異人館]은 막말(幕末)부터 메이지[明治]시대에 걸쳐 일본으로 온 서양인이 살았던 서양풍의 집

2) 보이드(void)는 사람이 출입할 수 있는, 비어 있는 공간 혹은 오픈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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