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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잃어버린 프로이트
브루노 베텔하임 지음, 정채연 옮김 / 북하이브(타임북스) / 2021년 11월
평점 :
왜 프로이트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가 생겨났을까?
어떤 이유로 시작했든 누군가를 연구한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상을 긍정적으로 혹은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게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당신이 잃어버린 프로이트>를 쓴 저자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이하 ‘프로이트’)를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보다 따뜻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먼저 저자가 프로이트를 보는 시각을 살펴보자.
프로이트 저작의 영역본들은 중요한 부분을 심각하게 오해석하고, 프로이트라는 사람뿐만 아니라 심리분석에 대해서도 잘못된 결론을 내리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p. 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역본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저자에 따르면 크게 2가지다. 첫 번째는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이 프로이트 생전에 프로이트에게 수용 혹은 허용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영어 표준번역본의 편집장이 생전에 프로이트의 인정을 받아 그의 저작을 몇 권 번역했던 사람이고, 그의 딸이자 후계자인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 1895~1982, 이하 ‘안나’)가 그 영역본의 공동편집자라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자기자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평생 고군분투했다. 그는 우리가 스스로를 이해하게 된다면, 더는 알지 못하는 힘에 얽매여 불만족스럽거나 끔찍하기까지 한 삶을 살지 않게 됨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거나 우리 스스로를 해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p. 33]
그렇다면 도대체 독일어 원본과 영어 번역본의 차이가 뭐기에 저자가 이렇게까지 나서는 것일까?
프로이트 저작의 영역본들은 원본에 스며있는 심리분석의 본질인 인본주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p. 18]
다시 말해, 영역본은
프로이트가 독자 자신과 인간의 내면 세계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것과 달리, 추상적 개념을 사용하여 오히려 독자가 자신의 무의식으로부터 거리를 두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영역본이 말하는 심리분석은 다른 이에게 적용하는 지적 구성체계 같은 것이 되었다. 그 영향으로 심리분석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심리분석을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고, 스스로의 무의식을 비롯해 내부에 있는 가장 인간적인,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모든 것에 접근하지 않으려고 하게 되었다. [p. 20]
개념에 대한 재해석을 통한 프로이트 다시 읽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는 상징적이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저작에서 사용한 모든 은유와 같이, 이 용어도 풍부한 관계성과 연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명시적인, 또 암묵적으로 나타나는 은유를 담고 있기에 다양한 수준에서 의미를 가진다. 프로이트는 이 용어를 통해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개념까지 생생하게 나타내고자 했다. 내가 만난 많은 학생들이 그랬듯,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단순히 소년이 자신의 아버지라 알고 있는 남성을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라 알고 있는 여성을 얻기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는 신화에 담긴 의미를 빼고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킨 것이다. 오이디푸스나 라이오스를 죽이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집을 떠나 방랑을 시작한 이유는 자신의 친부모라고 생각한 사람들을 스스로 해치는 일이 불가능하도록 자신을 그곳에서 떼어놓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번역된 개념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부친살해 소망과 근친상간 소망을 갖는 것에 대한 아동의 불안과 죄책감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 중략 ~
오이디푸스는 부모에게 거절당했기 때문에 이런 비극적인 행동을 했다. 이를 뒤집어보면, 어떤 아동도 부모 모두가 거절하지 않는 한 오이디푸스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오이디푸스적 소망과 오이디푸스적 죄책감의 관계에 관한 프로이트의 생각은 우리의 성격을 형성하는 갈등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만약 아버지가 갓난아기인 우리를 실제로 죽이려 했다면, 그를 죽이고 싶다는 소망에 죄책감을 느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만약 어머니가 실제로 우리를 버렸다면, 어머니의 사랑을 되찾아 영원히 독점적인 사랑을 소유하고자 하는 소망에 죄책감을 느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 부모에 대한 사랑, 부모를 보호하고자 하는 의식적인 소망만이 부모를 향한 부정적이고 성적인 감정을 억압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pp. 42~44]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은 우리가 스스로의 무의식을 자각해야 한다는 경고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면, 삶에서 길을 잃었을 때, 아버지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길을 막고 섰을 때에도 통제되지 않은 분노와 좌절 속에서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을 자각할 수 있다면 오이디푸스처럼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무의식에게 잠식당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p. 45]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아동의 오이디푸스적인 소망과 불안이 아동에 대한 부모의 감정과 대응관계에 있다는 심리분석적 발견의 기반이다. [p. 50]
한마디로 고장난명(孤掌難鳴), 즉 한 손으로 박수칠 수 없다[Nobody can clap with one hand]는 얘기다.
뿐만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번역자들은 프로이트가 빈번하게 사용하는 영혼(die Seele)에 대한 언급을 누락하거나 그가 오직 인간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만 한 것처럼 번역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다양한 곳에서 ‘영혼의 구조(die Strukturdes sellischen Apparats)’와 ‘영혼의 조직(die seelische Organisation)’에 관해 말했다. 이 용어는 거의 언제나 ‘정신구조’ 혹은 ‘정신조직’으로 번역된다. 이는 특히 잘못된 번역이다. 독일에서 Seele와 seelisch는 오늘날 미국인이 쓰는 영혼(soul)보다 더욱 명확하게 영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번역자들이 영혼을 대체하여 사용한 ‘정신(mental)’이라는 단어는 geistig라는 독일어와 같은 말이다. 이는 ‘마음의(mind)’ 혹은 ‘지성의’라는 뜻이다. 만일 프로이트가 영혼이 아닌 geistig를 의미하고자 했다면 굳이 다른 단어를 썼을 이유가 없다. [p. 102]
이는 영역본에 심리분석을 포함한 정신분석학을 과학적 방법을 통해 입증 가능한, 과학 그 중에서도 의학의 한 전문분야로 보고자 하는 입장이 반영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프로이트의 다른 글에도 이런 부분이 잘 나타나 있다.
프로이트는 <심리분석 개요>의 초기 원고인 <심리분석 입문강의>에서 “심리분석은 영혼과학에 헌정된 심리학의 일부이다”라고 말했다. 프로이트에게 심리학은 광범위한 분야이면서 영혼과학의 부분이다. 그리고 심리분석은 영혼과학의 특수 분과이다. 이보다 더 심리분석이 본질적으로 인간의 영혼과 관련되어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진술을 생각해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표준판은 이를 “심리분석은 심리과학의 정신과학 중 한 부분이다”라고 번역했다. [pp. 106~107]
프로이트의 <심리치료>라는 논문의 경우에도
독일어 원본 해석 | 영어 번역본 해석 |
‘프시케’는 그리스어이며 독일어 번역은 ‘영혼’이다. 이런 이유로 심리치료는 ‘영혼의 치료’를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이는 심리치료가 의미하는 것이 영혼에 발생한 병리적 현상을 치료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심리치료의 의미가 아니다. 심리치료는 영혼으로부터의 치료, 영혼에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장애를 치료하는 것을 말한다. [p. 104] | ‘프시케’는 그리스어이며 ‘마음’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심리치료’는 ‘정신치료’를 의미한다. 그런 이유로 이 용어는 ‘정신적 삶에서의 병적인 현상의 치료’로 정의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심리치료의 의미가 아니다. ‘심리치료’는 오히려 마음 속에서 시작하는 치료를 가리키며, (정신이든 신체장애이든) 치료는 인간 마음에 우선적이고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방법을 뜻한다. [p. 105] |
이런 식으로 아예 엉뚱하게 번역한 것은 아니지만, 의역(意譯)의 과정에서 원래 프로이트가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뉘앙스를 풍기게 해서 잘못된 해석을 유도했다는 얘기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심리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몇 개의 오역을 바로잡고, 프로이트가 얼마나 인간적인 사람이었는지 보여주고자 했다고 한다.
독일어도 모르고 원서도 보지 않았기에 저자의 주장이 옳은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오역 부분은 그럴싸하게 들렸다.
하지만 나와 저자가 ‘인간적인 사람’에 대한 관념이 다른 것일까? 저자에게는 아쉽게도 나는 프로이트가 인간적인 사람이었다는 부분은 그렇게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 이 리뷰는 북하이브로부터 받은 책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