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여인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이 시중에 풀리기 전에 예판으로 구입을 했다.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 사이에 헤밍웨이와 엑스쿨투라 시리즈 때문에 한 달이나 지나서 마저 읽을 수가 있었다. 신경숙 작가가 8년 만에 새로 낸 단편선이라고 했던가. 후기를 보니 발표하기 위해서 쓴 글이 아니라, 스스로의 위안과 치유를 위해 쓴 글이라는 말이 참 인상 깊게 다가왔다. 작가의 내밀한 세계를 엿보는 ‘피핑 탐’(peeping Tom)이 된 기분이랄까. 독자보다 한 수 위인 작가와의 공공연한 공모다.

 

지난 토요일 독서모임에 가는 길에 오후에 팬 사인회가 있다고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 읽지도 않은 책을 들고 나섰다. 첫 번째 인스톨은 솔직히 그다지 인상 깊게 다가오지 않아서인지 책에 온전하게 몰입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 것 같다. 기대했던 독서모임도 팬 사인회도 어긋났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만난 <모르는 여인들>의 다른 인스톨은 정말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단편을 읽다 보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한 가지 있다. 보통, 단편선에 실린 단편 중에서 제목을 정하기 마련인데 왜 신경숙 작가는 맨 끝에 실린 <모르는 여인들>을 타이틀로 정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마치 미로 속을 헤매듯, 마지막 인스톨을 만나기 전까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맨 끝에서 독자를 기다리고 있던 작가의 후기와 만나기 전까지도. 나와 함께 이렇게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선물이자 그들이 나누는 삶의 총합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야말로 이 책의 핵심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모르는 여인들>의 베스트는 <그가 지금 풀숲에서>라고 생각한다. 이 단편의 서사는 교통사고를 당해 꼼짝없게 된 주인공이 풀숲에 누워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으로 시작된다. 잘 나가는 온라인 쇼핑몰 기획자인 주인공은 어려서 홀로 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건강이야말로 남편이 없는 가정에서 자식들을 지키기 위한 홀로 남은 어머니의 최후의 보루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건강에 대한 강박증을 보인다. 자식들이야 그렇다 치고, 주인공과 결혼한 아내에게 이 억센 시어머니의 존재는 과연 어땠을까. 바로 그 지점에서 갈등의 분절이 시작된다.

 

초반에 주인공의 파경에 대한 설정이 잠깐 소개된다. 어머니의 과거와 주인공의 파경이라는 두 소재가 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이야기는 흥미를 띠기 시작한다. 거기에 아내의 외계인손증후군(alien hand syndrome)이라는 의학적 증상이 추가되면서 <그가 지금 풀숲에서>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문득 오래 전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SF 소설에서 접했던 통제할 수 없는 왼손에 대한 글이 생각났다. 신경숙 작가도 베르베르의 책을 읽었던 걸까? 기시감을 지울 수가 없다. 하도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외계인손증후군에 대한 기사를 다 찾아보았다. 이게 실제로 존재하는 질병인가 하는 마음에. 그리고 최근에 영국 BBC를 통해 소개된 똑같은 이름의 증후군의 실체와 대면할 수 있었다. 놀랍군!

 

http://www.bbc.co.uk/news/uk-12225163

 

(외계인손증후군의 실제 BBC 방송 사례)

 

상실의 시대에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작가는 시대의 우울과 슬픔을 노련하게 제시한다. 주인공의 플래식백을 읽으며 독자는 이미 왜 아내에게 외계인손증후군이라는 기상천외한 질환이 생겼는지에 대해 대충이나마 파악하고 있지만, 주인공은 미처 모르고 있다. 이런 현실세계에서의 어이없는 괴리야말로 실존적 외로움을 극대화하는 장치다. 소설집에 맨 끝에 실린 <모르는 여인들>에서도 이런 반복은 계속된다.

 

20년 전에 헤어진 옛 연인으로부터 넘겨받은 노트를 읽으며 주인공은 옛사랑의 부인이 남긴 행적을 뒤쫓는다. 공교롭게도 자신의 현재 남편도 수술을 받고 입원 중이다. 상처와 회복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재활을 앞둔 마당에 불쑥 나타나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는 남자에게 그녀가 느낀 감정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소설 속의 화자는 다 외롭고, 아프고, 슬프다고 속삭인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감정을 보듬어 줄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니었을까? 나도 속상하고 외롭단다, 그러니 나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주렴.

 

작가의 희망회복 프로젝트의 첫 번째 목표가 감정의 순화였다면, 두 번째는 육체의 회복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정상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섭생을 해야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경숙 작가는 바로 그 지점에 주목한다. 실연을 당해 야채 삶은 물 밖에 넘기지 못하는 사람도, 흉악한 살인범에게 온 가족을 잃은 외톨박이도 모두 먹어야 이 슬픔을 극복할 수가 있다. 바로 그 순간에 작가는 감칠맛이 도는 앵두화채로, 새벽에 거둔 파란배추국으로, 또는 멀리 프랑크푸르트 린덴바움(보리수) 특산의 새콤한 사과술로 독자를 위로한다. 김훈 작가에게 이런 디테일을 기대할 수 있을까? 천부당만부당이다. 오직 그녀였기에 가능한 일일 게다.

 

<모르는 여인들>은 나에게 참으로 롤러코스터 같은 독서의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어떤 때는 지나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실망감으로, 때로는 이렇게 멋질 수가 하는 경이로움으로 또 혀 안 가득 고여 오는 엄마표 밥상에 대한 허기의 전주곡으로 각인됐다. 삶의 어느 순간, 관계 때문에 심신이 허전한 이들에게 이렇게 시원한 앵두화채 같은 모르는 인연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선사해 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절대강자 - 이외수의 인생 정면 대결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동안 이외수 선생의 감성 에세이 몇 편을 봐왔다. 그리고 아직 본격적인 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구나. 어쩌면 그래서 선생의 글은 모두 에세이만 있는 줄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리고 몇 년 전에 텔레비전 시트콤에서 본 게 전부라고나 할까. 리뷰 쓰기에 앞서 파워 트리터리안라는 말에 과연 팔로어 수가 얼마나 되는지 찾아 봤다. 오늘 자(2012년 1월 22일)로 선생의 트위터 팔로어는 모두 1,173,544명이었다. 대단하다, 대단해.

 

이외수 선생은 자신의 트위터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화천을 지역기반으로 하는 감성소설가라고 소개한다. 기존에 만났던 책에서도 그랬지만, 이번의 <절대강자>에서도 선생은 그야말로 촌철살인의 미학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선생의 글은 그야말로 종횡무진 우리 삶의 곳곳을 송곳처럼 예리하게 파고든다. 권력화된 외모 지상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외모가 아닌 마음을 보라는 주문은 역시나 선생답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 비가 오나 해가 뜨나 그렇게 술을 사랑하던 선생은 급기야 알코올중독에까지 이르셨었나 보다. 그래서 선생은 술을 끊을 게 아니라, 술만 마시면 무시로 튀어 나오는 개를 끊으란다. 선생의 이런 유머에 웃음이 빵빵 터진다. 그리고 글쟁이의 글을 읽을 때, 행간을 주목하라는 주문도 이어진다. 개그맨이 웃음이라는 코드를 위해 혼신을 노력을 다한다면, 글쟁이의 승부는 어떤 것일지 말하지도 않아도 잘 알리라. 글쟁이가 구사하는 행간의 미학이라, 견지망월(見指忘月)의 고사가 새삼스럽다. 아마 트위터로 세상과 소통하면서, 본의 아니라 치고받으면서 생긴 생채기의 추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자신의 치부까지도 유려한 글감으로 승화시키는 선생의 작법에 그만 깔깔거리던 웃음을 멈추게 된다. 종교인에 대해서도 선생은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하나님, 하느님이니 하는 호칭이 무엇이 중요하냐고 종교인들에게 묻는다. 인간의 구원이라는 종교의 근원적이면서도 본질적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는가 그대여. 이렇게 짧은 잠언을 통해 이외수 선생은 우리의 감성을 한껏 자극한다. 선생의 말마따나 지구별에 불시착하여 반세기하고도 15년을 살아온 글쟁이의 내공이 그야말로 물에 오른 느낌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독서와 책에 투자하는 시간과 비용이 기대이하라는 기사를 접할 수가 있었다. 하긴 스마트폰 2,000만 시대에 구닥다리처럼 보이는 책과 씨름하는 게 쿨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선생은 그렇게 책 읽지 않은 세대에게 반찬 없이 밥먹는 꼴이라는 비유를 들이댄다.

 

이외수 선생의 감성 에세이 <절대강자>의 타이틀을 보면서 김미화 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황상민 교수가 최근 <나는 꼼수다>로 화제가 되고 있는 김어준 총수의 심리 세계를 분석한 대담이 문득 떠올랐다. 언뜻 보기에는 수염과 무성한 털로 마초 그 자체의 이미지로 무장한 김 총수의 내면세계는 그가 겉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과 정반대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과연 현실 세계에서 “절대강자”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래서 새삼 책의 제목 옆에 곁다리로 붙어 있는 “이외수의 인생 정면 대결법”이라는 부제가 눈에 들어온다. 나도 선생처럼 당당하고 의연하게 인생과 정면 대결하고 싶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상아와 새튼이 - 한국 최초 법의학자 문국진이 들려주는 사건 현장 이야기
문국진 지음 / 알마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래도 이 책 이야기는 제목에 나오는 두 단어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해야할 것 같다.

 

지상아 : 산모의 자궁 내에서 사망한 지 오래된 태아

새튼이 : 어린 아이의 미라

 

<지상아와 새튼이>는 우리나라에서 저명한 법의학자이자 의사평론가이신 문국진 선생이 사건 현장에서 자신이 직접 체험하거나 혹은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 모음집이다. 사실 동화 주인공 같아 보이는 책 제목이 내 예상과는 다른 뜻이어서 조금 놀랐다.

 

개인적으로 법의학에 대해 관심이 많지만 역시나 체계적인 공부를 하지 않은 이로서 그저 미디어나 책을 통해 만나는 정도가 전부였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종종 보는 CSI(Crime Scene Investigation), 악을 응징하는 시리얼킬러 덱스터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일 출신의 법의학자 마크 베네케의 저작 정도가 전부다. 이런 루트가 모두 해외의 사례를 다룬 것이라면, 문국진 선생의 글은 우리나라에서 과거 혹은 현재진행형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변별점을 가진다.

 

모든 사건은 흔적을 남긴다는 유명한 법칙에 따라 범죄 현장을 보존해야 한다는 건 상식이다. DNA 대조 같은 과학적 수사방식이 도입되기 전에 이미 이런 혜안을 제시한 이가 바로 19세기에 등장한 프랑스의 저명한 법의학자 에드몽 로카르라고 한다. 모든 범죄자는 사법기관에 체포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완전 범죄를 꿈꾼다. 이 글을 쓰다가 문득 궁금해진 것이 과연 사건사고 중에서 미결로 처리되는 것이 얼마나 될까 하는 점이다. 아마 꽤 많은 미결 사건들이 있다고 하는 걸 들어보면, 아마도 완전범죄에 성공해 법망을 빠져 나간 이들의 수가 제법 되지 않을까 싶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범죄 현장 보존과 현장검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아무리 완벽한 범죄라고 하지만, 어딘가에 범인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구멍이 나 있기 마련일 것이다. 바로 그런 빈틈을 문국진 선생 같은 법의학자가 메우는 것이다. 마크 베네케의 글에서는 사체에 꼬이는 벌레들로 사망 시간을 추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읽으면서 놀랐었는데, 문국진 선생의 글에서는 그 이상의 놀라운 일들을 접할 수가 있었다. 가령 예를 들어 살해된 뒤 물에 던져진 것인지 아니면 익사한 건지 사체 내의 플랑크톤을 분석해서 사인을 밝힐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한편 문국진 선생의 글이 딱딱해 보이는 법의학적 분석만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벌어질 수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의 수가 도출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메밀껍질 때문에 과민성 쇼크사를 하기도 하고, 사인을 밝히기 위한 부검을 혐오하는 피해자 가족에게 법의학자가 봉변을 당하기도 하며, 김치에 있는 성분 때문에 각성제 복용자로 오해 받기도 하는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이 차고 넘친다.

 

문국진 선생의 <지상아와 새튼이>를 통해 미스터리한 범죄를 해결하는 법의학의 명쾌한 해답은 물론이고, 각종 사건 사고를 통한 우리 사회의 여러 단면을 간접 체험할 수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복잡하고 어려운 법의학에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는 개론서로 백점이다. 그런 점에서 전문적인 분야를 직접 체험하고 오랫동안 연구한 분들의 성과를 높이 사고 싶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2-01-19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의학이라는 분야는... 다소 생소하네요. 책 이름 듣고 저도 동화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글을 읽다보니까 조금 섬뜩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끌리기도 하네요. (흐흐~) 몰랐던 분야에 대해 첫걸음을 내딛는 방법으로 책만한 것이 없는 것 같아요!
 
주크박스의 철학-히트곡 엑스쿨투라 2
페테르 센디 지음, 고혜선.윤철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주크박스와 관련된 개인적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다. 오래전 자주 들르던 맥줏집이 하나 있었다. 좋아하는 야구 경기를 매일 저녁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맥주 값이 싸서 자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구석에 있던 요상한 기계와 만났다. 말로만 듣던 주크박스였다. 바텐더에게 잔돈을 바꿔다가 알파벳과 숫자 조합으로 된 좋아하는 곡을 듣는 그런 시스템이었다. 이제는 어디 가도 볼 수 없는 사라진 공룡 같은 존재였다고 해야 할까. 신기한 마음에 내가 좋아하는 가수인 프린스의 을 꾹꾹 눌러서 듣고 있는데, 주인장이 그 노래가 마음에 안 드는지 홱 바꿔 버리는 게 아닌가. 주크박스와 관련된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다.

 

문학동네에서 엑스쿨투라라는 새로운 인문서적 시리즈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페테르 센디의 <주크박스의 철학-히트곡>은 거리의 상가에서 그리고 이동하는 대중교통 수단에서 곁에 선 이의 아이폰에서 무시로 들을 수 있는 “히트곡”(tube)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시도한다. 그렇지 않아도, 케이팝이 휩쓸고 있는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흐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팬으로 고급예술이라기보다는 하위문화로 취급받는 대중음악에 대한 철학자이자 전문 음악이론가의 연구가 내심 반가웠다.

 

서론에서 페테르 센디는 히트곡에는 우리의 귀에 착 달라붙는 ‘귀벌레’ 같은 바이러스가 있으며 동시에 일종의 철학적 존엄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맙소사! 시작부터 예상을 뛰어 넘는다. 히트곡의 개념과 논리를 규명하기 위해 진부함과 특이함이라는 요소를 도입하기도 한다. 한편, 프랑스 출신의 이 철학자는 대중음악에 대한 분석에서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입장을 견지한다. 마르크스의 사유를 빌어 센디는 인간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물신성과 비의성(秘義性)을 가진 ‘사물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히트곡을 “대중예술과 키치”의 영역 속으로 내몬다.

 

한편, 페테르 센디에 앞서 대중음악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가한 이가 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은 몇 세대 전에 이미 우리가 현재 대량생산되어 어디서나 즐기고 있는 케이팝의 전위대이자 롤모델 소녀시대의 훅송으로 변신한 후렴구의 비의성에 철학적 담론을 덧씌운다. 아티스트가 아닌 엔터테이너로 거대자본과 기획으로 양성된 케이팝 아이돌 가수의 히트곡에는 페테르 센디가 언급하는 ‘영혼’(pysche)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우리는 저렴하고 얼마든지 복제와 대체가 가능한 자본예술의 힘으로 만들어진 ‘키치’스러운 음악에 포위되어 있지 않은가.

 

작가는 정신분석학의 알레고리를 이용해서 대중가요 히트곡의 본질을 분석한다. 히트곡에 담긴 ‘말’의 이면에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구현과 갈망이라는 서로 상충하는 그야말로 탄탈로스의 목마름이 있다고 페테르 센디는 쓰고 있다. 그가 실례로 든 <말, 말, 말>의 달리다와 알랭 들롱 버전을 들으니, 거의 강박 수준으로 변조된 반복 서사의 위력을 곧바로 느낄 수가 있었다. 기표와 기의로 경이롭게 교차하는 “말”(parole)이 그전 그런 멜로디 위에서 펼치는 언어의 향연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작가가 시도하는 히트곡(tube)의 외연 확대는 음악 자체뿐만 아니라, 키르케고르의 대중극(솔직히 이 부분의 변주와 반복에 대한 작가의 서술은 이해하기 정말 어렵다)과 영화에까지 도달한다. 프리츠 랑 감독의 전설적인 명화 에 등장하는 <페르귄트>의 운명적인 곡조는 물론이고 알랭 레네 감독의 <우리는 그 노래를 알고 있다>까지. 그야말로 키치스러운 “그저 그런 곡조”에 포위되어 쾌락적 소비에 탐닉하는 대중의 현실계 재현이라고 부르고 싶다.

 

지난주에 정말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그 친구는 나에 대한 추억의 일성으로 크리스 드버그의 “The Lady in Red”를 꼽았다. 학업에 찌들려 있던 그 시절, 크리스 드버그의 그 노래는 그야말로 귀벌레처럼 나의 귀에 기생하고 있었나 보다. 누군가에게 내 내밀한 자아의 한 부분이 대중음악이라는 진부함을 관통해서 특이함으로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각자의 소리 바이러스를 간직한 채 우리는 오늘도 스산한 도시의 밤거리를 배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전에 만화가 김태권 씨가 라틴어를 배운다는 말을 듣고서 부러워한 적이 있다. 그 이유 중의 첫 번째는 비록 죽은 언어지만, 서양 문화의 원류를 직접 대할 수 있는 라틴어를 배우고 있다는 아카데믹한 이유와 두 번째로는 라틴어를 배우는데 투자할 수 있는 넉넉한 시간이 부러웠다. 그런데 그런 라틴어도 아니고 희랍어라니. 고대희랍어는 라틴어 이전의 언어가 아니었던가. 희랍어를 배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원전으로 읽을 수 있다니, 상상만 해도 즐겁다. 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에는 희랍어를 가르치는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와 그 남자에게 희랍어를 배우는 세상의 소리를 잃은 어느 여자의 이야기다.

 

이렇게 <희랍어 시간>의 리뷰를 한 달 전에 쓰기 시작했다. 어떤 책이든 책을 막 읽고 나서 생생한 기억이 가시기 전에 리뷰를 썼어야 했는데 자그마치 책을 다 읽고 나서 한 달도 넘어서 마무리 짓기에 나섰다.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배짱이 아닐 수 없다. 굳이 한참 뒤 리뷰의 좋은 점을 찾는다면, 모두 휘발해 버리고 남은 그 책에 대한 강렬한 잔상 정도라고 해야 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로버트 드 니로와 마틴 스코시즈의 듀엣의 <택시 드라이버>가 연상됐다. 불면에 시달리며, 도시의 불빛 사이로 미끄러지듯이 택시를 모는 주인공 트래비스. 등장인물에게서 떼어낼 수 없었던 바로 그 외로움이 <희랍어 시간>의 두 주인공에게도 그대로 느껴졌다. 여자 주인공이 그 많은 언어 중에 희랍어를 배우려고 했지? 이제는 그런 소소한 기억마저 희미하지만 남자 희랍어 강사가 갑자기 날아든 새와 부딪혀 안경이 부서지고 여자의 도움을 받게 되는 장면은 조각도로 한땀한땀 정성스레 새긴 판화처럼 기억에 생생하다.

 

신체적으로 무언가를 상실하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독자는 절로 고개를 끄덕인다. 두 개의 깊은 상실의 골짜기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는 과연 어떤 결말을 작가가 예비하고 있는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기대하고 있던 내러티브 대신 그 자리에 섬세하면서도 탐미적인 묘사가 파고들기 시작한다. 여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순간을 작가는 뛰어난 촬영감독처럼 잡아낸다. 그야말로 책에 밑줄을 죽죽 긋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매순간 떠오른 감정의 메모를 하지 못한 게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게 휘발된 감정의 부스러기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여자의 삶을 어머니의 사망, 이혼 그리고 아이의 양육권 송사의 과정으로 갈무리한 점도 인상적이다. 심리치료와 불면증까지 더해지면서 독자는 여자의 현재 상황에 대한 파악을 끝낸다. 그렇게 시작된 소설의 곳곳에서 주인공이 구사하는 언어와 작가가 시전하는 문장의 치열한 사투가 이어진다. 소설 <희랍어 시간>은 독자의 감정선을 무시로 자극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임의적 감정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땅에 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남자의 운명에 대한 서사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 때문에 한 동안 소멸의 이데아에 대한 환영과 잠잠하던 외로움에 대한 그윽한 파문이 일었었다. 아주 그윽하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