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스크랩 - 1980년대를 추억하며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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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게 8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를 들라고 한다면 주저 하지 않고 마이클 잭슨을 꼽을 것이다. 모두가 다 아는 1982년 말에 발표된 그의 전설적인 앨범 <스릴러>는 미국 내에서만 3,000만장이 팔린 메가 히트 앨범이었다. 그런데, 코널 대학 출신의 휴이 루이스가 이끄는 밴드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는 2014년을 사는 사람 중에 모르는 이가 더 많을 것 같다. 이제는 세계적인 대작가가 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크랩>에는 그런 1980년대 소위 정크시대를 그리는 회상으로 가득하다.

 

우선,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에서 신인작가에 지나지 않았던 하루키는 미국 내 가십을 주로 다루는 잡지들인 <피플>과 <배너티 페어>를 비롯해서 <뉴욕 타임즈>, <뉴요커> 같은 다양한 소스를 통해 자신의 밥줄인 글거리를 찾아낸다. 바로 위에 등장하는 마이클 잭슨만 하더라도, 진짜를 보기 원하는 팬들을 위해 프로모터들이 미국 전역에서 마이클 잭슨을 닮은 흑인 청년을 선발해서 지방 쇼 무대에 올렸다고 한다. 그들이 진짜 마이클 잭슨처럼 노래를 부를 리는 만무하고, 립싱크로 춤만 제대로 춰도 하루 일당으로 300달러나 벌었다고 하니 놀랄 지경이다. 이런 요지경 속의 삶을 하루키는 정확하게 포착해낸다.

 

<스크랩>의 특징은 미소의 냉전 대결이 극한으로 치닫던 1984년에 개최된 LA 올림픽에 대한 하루키의 심드렁함으로 대변된다. 그가 예전부터 달리기를 좋아하는 마라톤 팬이라는 건 알았지만, 정작 올림픽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하고서도 딱히 관심 없어하는 “쿨”함이라니. 하긴 오늘날의 하루키라면 그래도 누가 뭐라고 그러겠냐만 초짜 작가 시절에도 그럴 수 있다니, 그의 배짱이 놀랍기만 하다. 보통 그런 배짱은 일가(一家)를 이룬 다음에 하는 게 아니었던가.

 

하루키의 관심 분야는 정말 다양하다. 1980년대 새로 등장한 질병인 헤르페스를 필두로 해서, ‘미스터 악터버’로 알려진 레지 잭슨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미국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지나가는 이들에게 손 인사를 하는 낙에 산다는 고물상 부자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다양하다. 그리고 보니 이제는 영화업계나 정치판에서 거물이 된 “터미네이터” 아널드 슈워제네거도 등장하는구나. 이미 그 시절에 부자였던 슈워제네거가 영화에 출연한 건 단지 취미였다는 말에 그만 깜짝 놀라기도 했다.

 

달콤한 팝송 “Top of the World"의 주인공 카렌 카펜터가 가수 시절 내내 오빠에게 콤플렉스로 시달렸다는 점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사실 어떤 건 딱히 관심도 없는 부분이었는데, 역시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하루키는 사실의 표면 밑에 숨겨 있는 핵심을 집어내는데 역시나 탁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하루키의 열혈 팬은 아니면서도, 그의 책을 꾸역꾸역 읽어대고 있다.

 

<미국의 송어낚시>로 유명한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아직 그의 대표작을 읽어 보지 못했지만, 그의 이름은 알고 있었는데 그가 일본에서도 널리 읽혔다는 건 또 처음 알았다. 하루키의 글을 읽다가 브라우티건의 죽음과 선배 작가 헤밍웨이의 그것이 비슷한 건 또 왜일까하는 궁금증에 도달하기도 했다. 좋지 않은 선례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법일까 싶기도 하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철도와 의료 민영화 이슈가 뜨거운데,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는 교정 시설(교도소)까지도 이미 정크시대에 사설화가 이뤄진 모양이다. 이미 그 시절(66만 명)로부터 30년 정도가 지났는데 지금 교정시설에 수감된 죄수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그들에게 소용되는 연간 비용이 평균 14,400달러라고 하는데 비용절감 차원에서 관영(?) 교도소보다 훨씬 더 적게 비용이 드는 사기업 형태의 교도소가 늘어나는 것도 시장원리에 맞을 진 모르겠지만, 도덕과 윤리적으로 맞는 것인지 하루키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사는 우리 지구별이지만, 운석사냥꾼이 다 있는 줄 몰랐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가해자였던 전직 나치들의 뒤를 쫓는 나치 헌터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남미의 볼리비아에서 숨어 살던 “리옹의 도살자” 클라우스 바르비를 추격해서 잡아낸 이야기도 짜릿했다. 유명 영화 <러브 스토리>의 저자 에릭 시걸이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독자나 비평가들로부터 경의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인상적이었다. 후배 작가 하루키의 두 가지나 이뤘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냐는 따끔한 지적도 멋지다.

 

서두에 등장한 휴이 루이스의 근황이 궁금해서 위키피디아를 통해 그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봤다. 나도 한 때, 무척이나 좋아하던 가수라 그런지 하루키의 글이 자극이 됐다. 유명 대학을 졸업한 엔지니어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로큰롤 음악을 하기 위해 늦깎이 록가수로 데뷔해서 우리나이로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활동 중인 그의 모습이 반가웠다. 뭐 이런 게 삶 아니겠냐고 묻고 싶다. 에너지가 넘치고, 무언가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정크시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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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필요 없다. 왕의 귀환이다.
아, 그리고 보니 내가 <언더 더 돔>을 다 읽었던가? 아마 1권과 2권만 읽고 세 번째 권은 읽지 못했지 싶다. 나와 미스터리의 제왕 스티븐 킹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리고 2013년 여름, 왕이 다시 돌아왔다(우리나라에는 겨울에 도착했다).
원서로는 283쪽, 전작에 비해 확실히 가볍다(번역판은 400쪽이 넘어가는구나, 얏호 뻥튀기). 제왕이 오랫동안 구상해왔다는 놀이동산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모태로 한 여름 소설 <조이랜드>가 그렇게 탄생했다.

 

80년대를 주름 잡았던 <13일의 금요일> 시리즈에서처럼 열기에 휩싸여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 발산을 하지 못해 방황하던 청소년들을 정체불명의 몬스터가 습격하는 슬래셔물의 패턴을 스티븐 킹은 그대로 차용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황금가지에서 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믿고 읽는 월터 컨이 쓴 뉴욕타임즈 리뷰를 찾아봤다. 쇼킹까지는 아닐지라도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라고 해야 할까. 대학 2학년 선배가 캠프 파이어에서 마쉬멜로우를 구워 먹으며 신입생에게 들려주는 그런 정체를 알 수 없는 야릇한 이야기들. 아마 우리네도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을까.

 

리뷰에 따르면, 소설 <조이랜드>에는 빼어난 플롯이나 가공할만한 악당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특징이란다. 다만, 긴장감을 유발하는 ‘크리피네스(creepiness)’가 줄기차게 등장할 뿐.

 

주인공 데빈 존스는 소설가를 꿈꾸었지만, 잡지 기고가가 되어 순수했던 70년대(정화하게 말하면 1973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해)를 회고한다. 당시 그는 예민한 성품의 숫총각으로 애인과 결별하고, 노스캐롤라이나의 호러 하우스 <조이랜드>에서 알바를 뛰게 된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조이랜드에서 수년 전, 린다 그레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살해되었고, 그녀의 유령이 이 놀이동산에 출몰한다. 어때 흥미롭지 않은가? 그리고 실연의 상처를 지닌 데빈은 필연적으로 린다 그레이의 유령에 강박증을 느끼게 된다는 뭐 그런 내용이다.

 

예전에 심리학 수업에서 아이들이 가장 무서워 하는 포비아 중의 하나가 바로 clownphobia라는 말을 듣고 좀 놀란 적이 있다. 놀이동산에서 삐에로 분장이나 동물탈을 쓰고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캐릭터들을 오히려 아이들이 무서워 하다니. 스티븐 킹은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장소에서도 오싹한 스릴러가 벌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선보인다. 하긴 옛날 초등학교 시절, 공동묘지 위에 학교에 세워졌다는 학교괴담 정도는 이제 가소롭기까지 하지만. 그 위에 이제 막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으로 접어드는 과도기에 선 청년을 얹은 성장소설, 뭐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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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5 - 사자심왕 리처드의 반격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5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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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기게 연재와 출간을 이어가고 있는 김태권 작가의 <십자군 이야기> 그 다섯 번째 편을 오늘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도서관에 읽을 만한 책이 없다는 생각은 나의 착각이었나 보다.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도, 또 다른 작가의 생각을 빌어 읽는 것도 하나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천 년 전 서사는 다채롭게 각색되기 마련인데, 지난 천년 이슬람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살라딘의 명성은 김태권 작가의 책에서도 여전히 빛난다. 이미 전편에서 장기와 누레딘의 뒤를 이어 마침내 시리아와 이집트로 나뉜 이슬람 세계를 통일하고, 성지 예루살렘 회복에 나선 살라딘은 히틴 전투에서 십자군 정예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그들의 오랜 숙원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물론, 이슬람군의 군사적 성공은 성지 실함이라는 서방 세계의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번에는 잉글랜드, 프랑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군주들이 직접 십자군 원정에 나서게 된다.

 

 

김태권 작가는 이번 편의 상당 부분을 살라딘의 호적수로 등장하는 사자심왕 리처드에게 할애하고 있다. 프랑스왕 루이 7세의 왕비이자 아키텐의 상속녀였던 엘레오노르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와 재혼해서 낳은 아들이 바로 중세 기사의 전형으로 불리는 리처드였다. 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보인 리처드는 그 중에서도 특히 최고의 전사로 추앙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아버지와의 내전도 마다하지 않는 불같은 성미로 치열한 왕위 계승 다툼 끝에 왕위에 오른 사자심왕은 바로 성지 회복의 기치를 내걸고 원정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기사는 바로 리처드왕 시대에 잉글랜드에 살던 유대인에 대한 박해였다. 고대 이래 뿌리 깊은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리처드 시대에 잉글랜드에서 폭발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여기까지 딱 절반으로 잡고, 다시 무대를 예루살렘으로 돌려 히틴 전투의 대승을 바탕으로 마침내 예루살렘을 프랑크 족의 손아귀에서 탈환한 살라딘이 서방인 들에게 어떻게 관용을 베풀었는지 김태권 작가는 공을 들여 기술한다. 아무리 적으로 싸우는 사이였지만, 명예를 존중하는 기사에게는 관용을 베풀었고 샤티용의 르노 같은 파렴치한 싸움꾼에게는 그런 관용을 허용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중세 기사도의 전범을 살라딘이 보여 주었노라고. 그리고 다시 한 번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그야말로 꽃미남으로 등장한 이블린의 발리앙이 40대 중반의 남자였다는 점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뛰어난 전사 발리앙도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살라딘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만다. 발리앙처럼 살라딘의 앞에서는 모두가 기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했지만, 이교도와의 약속 따위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유권해석으로 스스로의 명예를 실추한 기사들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꼬집는 것도 작가는 잊지 않는다.

 

원정길에 사이프러스에 들러 결혼식도 올린 리처드는 마침내 팔레스타인 땅에 상륙해서 서방 최고의 전사답게 자신의 싸움꾼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오죽했으면, 김태권 작가가 리처드를 일본 만화 북두신권에 등장하는 주인공 켄시로에 대입했을까. 이슬람 수비대가 지키던 아크레 공방전을 승리로 이끈 리처드는 길고 지루한 협상 끝에 항복한 무슬림을 모두 학살하는, 살라딘의 관용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무슬림을 충격으로 몰아 넣는다.

 

아무래도 3차 십자군 원정의 주인공이 리처드이다 보니 다른 두 명의 지휘관인 필리프 2세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에 대한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느낌이다. 3장 <예루살렘의 장> 초반에 나오는 십자권 원정로를 보면 잉글랜드군과 프랑스군은 바닷길로 진격한 반면, 프리드리히는 육로로 통해 동로마제국을 거쳐 소아시아로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리처드도 앙숙이긴 하지만, 필리프 2세와 잘만 협상을 하면 프랑스 영토를 거쳐 손쉽게 진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필리프 2세는 중무장한 잉글랜드 군대를 자신의 영지에 들여 놓는 그런 도박을 하고 싶지 않았겠지. 리처드가 잉글랜드에서 아버지 헨리 2세를 상대로 치른 내전을 생각해보더라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김태권 작가는 기존의 십자군 원정의 기술에 비대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는 자세가 돋보였다. 뒤에 실린 도움을 받은 책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나도 읽은 아민 말루프의 책이 눈길을 끌었다. 타리크 알리의 <술탄 살라딘>은 나도 한 번 읽어 보고 싶은 책이다. 역사 기술과 연구가 서양에 치중되다 보니 십자군 원정을 보는 시각 역시, 그네들의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단점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점이 마음에 든다. 고문서와 문헌을 참조해서 무기와 복식 등등의 세밀한 점까지 신경 쓴 점도 멋지다. 당대에 그렇게 기록을 남기고 그림을 그렸던 중세인들이 자신들의 작품이 천년 뒤에 이런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될 줄 알았을까 궁금하다.

 

오래 기간 연재한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가 이제 6권을 마지막으로 완간된다고 한다. 한 때 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작가의 다음 번 창작 오딧세이는 무엇이 될지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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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계곡 모중석 스릴러 클럽 35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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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손과 발이 얼어붙는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독일 출신의 작가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지옥계곡>을 읽으면서 바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작가가 되기 전에 다양한 직업군을 체험했다는 빙켈만의 다양한 직업 중에서도 특히 택시운전을 하며 영수증에 필사를 했다는 소개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작품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빙켈만은 숱한 퇴고와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현지답사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그야말로 손과 머리로만 글 쓰는 작가가 아니라 자신의 발로 밟은 체험을 바탕으로 글쓰는 작가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결과가 이 빼어난 추리소설 <지옥계곡>의 탄생이었다.

 

<지옥계곡>의 원본 소설의 구성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지옥계곡>에는 주인공 로만 예거의 활동을 추적하는 백색 페이지와 누군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아프간 참전군인(아마도 미군으로 추정되는)의 독백이 담긴 잿빛 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역시 시작은 강렬한 충격 요법이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 지대에 위치한 험준한 추크슈피체 등반에 나선 무모한 산악인을 구조하러 나선 산악구조대원 로만 예거는 우연하게 지옥계곡 밑으로 투신하려는 젊은 여성과 조우하게 된다. 그녀를 구하려는 예거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살려는 의지가 없었던 그녀는 그의 구원의 손길을 거부한다.

 

베테랑 산악구조요원 로만 예거는 지옥계곡으로 투신한 젊은 여성의 이름이 라우라 바이더로 아우크스부르크에 사는 최첨단 의료기기 재벌 바이더 집안의 외동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 차례차례 라우라의 친구들이 등장하면서 지난 여름 있었던 과거사에 대한 희미한 조명이 비치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빙켈만은 두 가지 전략을 취한다. 하나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라우라가 무엇 때문에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가를 캐내는 작업과 분명히 그녀의 죽음에 관련된 독백하는 참전 병사의 정체에 초점을 맞춘다. 전자가 관계와 소통에 대한 복잡한 통찰을 요구하고 있다면, 반면에 후자는 다분히 개연적인 사건발생에 방점을 찍는다. 개인적으로 전자를 높이 평가하지만, 후자의 경우 책을 읽는 내내 당위성이 좀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한편 잿빛 페이지를 맡은 남자의 독백을 읽는 순간, 독자는 그가 이 사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어떤 시간에 그리고 무슨 연관으로 라우라가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녀의 5인조 그룹에 그가 끼어들고, 결국에 가선 되돌릴 수 없는 관계의 균열을 초래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추리소설의 공식에 충실하게 아끼는 딸의 죽음에 비통한 아버지 바이더 씨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사설탐정을 고용한다. 왜 부자들은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 대신 아내에게까지 숨기며 은밀하게 사건에 접근하는 사설탐정을 애호하는 걸까? 주인공 로만 예거가 라우라의 지기 마라 란다우를 통해 사실에 접근해 가는 동안, 라우라의 다른 친구들을 겨냥한 연쇄살인이 발생하면서 소설 <지옥계곡>은 하이라이트로 치닫기 시작한다.

 

빙켈만은 <지옥계곡>에서 주인공을 위협하는 악당으로 21세기 미드가 개발한 최고의 캐릭터 싸이코패스를 채택했다. 아프간 전쟁 참전 군인으로 아프간 반군의 포로가 되어 사지에서 살아난 경험의 트라우마까지 가진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을 갖춘 안티 히어로로써 그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눈 덮인 추크슈피체 산에서 유감없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한다. 그런 반면,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로만 예거 역시 베테랑 산악구조요원으로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알 수 없는 전문 산악장비를 다루며 산다람쥐 같이 산을 오르내리며 치열한 추격전을 시전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런 조건을 배경으로 해서 해발 3,000미터 고지의 알프스 산악을 오르며 수많은 퇴고를 거듭한 빙켈만은 어긋난 응답 없는 사랑이라는 마지막 흥미 요소를 가미해서 비극의 재구성에 성공했다. 그야말로 구성과 전개에 있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의 전개에 온전하게 몰입할 수 있었고, 결말의 이중 반전과 간결하면서도 깔끔한 마무리는 기대 이상이었다.

 

빙켈만이 그리는 관계상실의 연쇄반응 연대기는 인상적이었다.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사업가의 이미지를 가진 완벽해 보이는 아버지는 실상은 아내와 딸과의 소통에는 실패한 가장이었고, 평생을 함께 하리라고 생각한 친구들에게 배신당한 라우라의 마지막 선택은 비극이었다. 바이더 씨의 막대한 재산도 결국 그들의 행복을 담보하지 못했다. 자신의 삶에 충실해 보이는 로만 예거 역시 자신의 산에 대한 사랑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전 여자 친구와의 불통 그리고 자신이 구하지 못한 라우라의 죽음이 가져온 상실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사건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주변인들마저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 물론 점증하는 공포의 확장이라는 차원에서 작가의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처음 만난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지옥계곡>은 확실히 새로운 종류의 스릴러 체험이었다. 설원을 무대로 해서 펼쳐지는 백색의 공포는 그야말로 손발을 얼어붙게 할 정도였으니까. 과연 빙켈만이 선사하는 공포의 연쇄반응이 그의 다음 작품에서도 여전히 유효한지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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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트로츠키
타리크 알리 지음, 정연복 옮김, 필 에반스 그림 / 책벌레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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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처럼 자주 들르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타리크 알리의 <석류나무 그늘 아래서>를 보다가 혹시 그의 다른 저작이 있을까 싶어서 검색을 해봤다. 그랬더니 컴퓨터 검색기가 바로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란 책을 토해냈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책이었는데, 역시 만화여서 그런지 금세 다 읽었다.

 

어쩌면 만화라는 장르가 주는 편안함 때문이었을까? 사실 기대한 그림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 많았음에도 부담 없이 대할 수가 있었다. 만화의 주인공 트로츠키 최대 정적이었던 구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격하운동으로 영구혁명론을 주창한 트로츠키주의는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기피대상 1호였던 모양이다. 마오 쩌둥과 흐루시초프 모두 서로를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비난했던 걸 떠올리면 말이다.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슈타인(레온 트로츠키의 본명) 짜르 체제가 막바지로 치닫던 19세기 끝자락에 당시 개발붐이 일던 우크라이나 지방의 부유한 유대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재력을 바탕으로 고등교육을 받으며 비교적 유복한 삶을 산 모양이다. 훗날 뛰어난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로 활동하기 전인 이 시절만 해도 사회주의와는 담을 쌓고 산 모양이다. 오히려 다른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처럼 농노해방이 되었지만 여전히 비참한 현실 속에 살던 러시아 노동자 농민의 현실에 주목한 현실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런 현실에 대한 자각이 그를 불세출의 혁명가로 변신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트로츠키는 당시 러시아의 비참한 현실에 눈뜬 다른 지식인들처럼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짜르의 비밀경찰에게 체포돼 트로츠키는 시베리아에서 4년간의 유형생활을 경험한다. 시베리아에서 탈출한 그는 1902, 영국 런던에 체류 중이던 레닌과 만나 비로소 자신의 특별한 재능인 선전술을 개발하여 본격적인 엘리트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다.

 

타리크 알리는 러일전쟁(피의 일요일 사건)과 제1차 세계대전(10월 혁명)의 과정에서 소비에트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을 통해 러시아 혁명가들이 앞으로 어떤 국가 체제를 수립하려고 했는가에 대한 고증을 이 만화를 통해 보여준다. 다수의 혁명가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해서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짜르 전제정 하의 장군들을 포섭하는 방법도 고려했으나 트로츠키는 이에 반대하는 선견지명을 보여주기도 했다. 부르주아와의 합종 대신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된 혁명 역량에 집중해야 한다는 고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면 이단시했을 역사 발전 법칙 대신 러시아 고유의 혁명론을 주창해 다른 볼셰키비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10월혁명과 연이은 백군과의 내전에서 군사인민위원으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트로츠키는 혁명의 상징이었던 레닌에 버금가는 위상을 얻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가 당면한 문제의 원인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반봉건제 폐지와 농민 해방, 공화국 건설 그리고 소수 민족의 자결권 등을 골자로 한 체제 개혁을 주창했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된 혁명 세력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정을 거쳐 사회주의 혁명에 도달해야 한다. 그리고 러시아 같은 후진적인 시스템으로 혁명의 완료를 희망할 수 없기에 국제적 사회주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이 트로츠키 영구혁명론의 요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주창한 영구혁명론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의 사회주의 운동이 민족주의 운동의 부상으로 소멸되면서 공동전선은 유명무실화되고 만다.

 

레닌 사후, 소비에트 권력을 한 손에 쥐게된 스탈린은 자신의 정적들을 차례차례 제거하면서 민중의 계급의식을 왜곡하고, 독재권력을 수립한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트로츠키는 당내 좌익 세력을 규합해서 스탈린에 대항해 보지만, 비밀경찰을 앞세운 스탈린은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 같은 유력 당인사들을 자신의 편으로 영입해서 최대 정적이자 혁명 영웅인 트로츠키 비방전에 나선다. 완벽하게 새로운 체제 하에서 관료시스템으로 정비한 스탈린의 공세 앞에 결국 트로츠키는 모든 권력을 박탈당하고, 망명길에 나서게 된다. 히틀러의 국가회주의(나치즘)와 맞수 스탈린의 공산주의가 본격적으로 맞붙기 1년 전인 1940년 트로츠키는 망명지 멕시코에서 암살자에 의해 최후를 맞게 된다.

 

이 만화를 통해 피상적이나마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 삶의 궤적을 쫓을 수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 혹은 러시아혁명에 대해 공부하거나 관련된 책을 읽어보지 못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대략적이나마 훑어본 것으로 만족해야지 싶다. 20세기 초의 활발했던 세계를 변혁시키고자 했던 사회주의 운동이 전쟁이란 광기 속에서 소멸하게 되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사적 유물론에 근거한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법칙을 모든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논쟁도 흥미를 끈다. 혁명의 대의를 위해 모든 분파주의는 배척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분열할 수밖에 없었던 혁명가 그룹 내의 갈등 역시 인상적이었다.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를 저술한 타리크 알리는 책의 많은 부분을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삼부작에 빚지고 있는데, 기회가 된다면 필맥 출판사에서 출간된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를 읽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리우스가 그린 만화들은 이제 찾아볼 수 없게 된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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