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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트로츠키
타리크 알리 지음, 정연복 옮김, 필 에반스 그림 / 책벌레 / 2002년 1월
평점 :
품절
습관처럼 자주 들르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타리크 알리의 <석류나무 그늘 아래서>를 보다가 혹시 그의 다른 저작이 있을까 싶어서 검색을 해봤다. 그랬더니 컴퓨터 검색기가 바로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란 책을 토해냈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책이었는데, 역시 만화여서 그런지 금세 다 읽었다.
어쩌면 만화라는 장르가 주는 편안함 때문이었을까? 사실 기대한 그림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 많았음에도 부담 없이 대할 수가 있었다. 만화의 주인공 트로츠키 최대 정적이었던 구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격하운동으로 영구혁명론을 주창한 트로츠키주의는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기피대상 1호였던 모양이다. 마오 쩌둥과 흐루시초프 모두 서로를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비난했던 걸 떠올리면 말이다.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슈타인(레온 트로츠키의 본명) 짜르 체제가 막바지로 치닫던 19세기 끝자락에 당시 개발붐이 일던 우크라이나 지방의 부유한 유대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재력을 바탕으로 고등교육을 받으며 비교적 유복한 삶을 산 모양이다. 훗날 뛰어난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로 활동하기 전인 이 시절만 해도 사회주의와는 담을 쌓고 산 모양이다. 오히려 다른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처럼 농노해방이 되었지만 여전히 비참한 현실 속에 살던 러시아 노동자 농민의 현실에 주목한 현실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런 현실에 대한 자각이 그를 불세출의 혁명가로 변신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트로츠키는 당시 러시아의 비참한 현실에 눈뜬 다른 지식인들처럼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짜르의 비밀경찰에게 체포돼 트로츠키는 시베리아에서 4년간의 유형생활을 경험한다. 시베리아에서 탈출한 그는 1902년, 영국 런던에 체류 중이던 레닌과 만나 비로소 자신의 특별한 재능인 선전술을 개발하여 본격적인 엘리트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다.
타리크 알리는 러일전쟁(피의 일요일 사건)과 제1차 세계대전(10월 혁명)의 과정에서 소비에트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을 통해 러시아 혁명가들이 앞으로 어떤 국가 체제를 수립하려고 했는가에 대한 고증을 이 만화를 통해 보여준다. 다수의 혁명가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해서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짜르 전제정 하의 장군들을 포섭하는 방법도 고려했으나 트로츠키는 이에 반대하는 선견지명을 보여주기도 했다. 부르주아와의 합종 대신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된 혁명 역량에 집중해야 한다는 고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면 이단시했을 역사 발전 법칙 대신 러시아 고유의 혁명론을 주창해 다른 볼셰키비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10월혁명과 연이은 백군과의 내전에서 군사인민위원으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트로츠키는 혁명의 상징이었던 레닌에 버금가는 위상을 얻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가 당면한 문제의 원인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반봉건제 폐지와 농민 해방, 공화국 건설 그리고 소수 민족의 자결권 등을 골자로 한 체제 개혁을 주창했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된 혁명 세력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정을 거쳐 사회주의 혁명에 도달해야 한다. 그리고 러시아 같은 후진적인 시스템으로 혁명의 완료를 희망할 수 없기에 국제적 사회주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이 트로츠키 영구혁명론의 요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주창한 영구혁명론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의 사회주의 운동이 민족주의 운동의 부상으로 소멸되면서 공동전선은 유명무실화되고 만다.
레닌 사후, 소비에트 권력을 한 손에 쥐게된 스탈린은 자신의 정적들을 차례차례 제거하면서 민중의 계급의식을 왜곡하고, 독재권력을 수립한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트로츠키는 당내 좌익 세력을 규합해서 스탈린에 대항해 보지만, 비밀경찰을 앞세운 스탈린은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 같은 유력 당인사들을 자신의 편으로 영입해서 최대 정적이자 혁명 영웅인 트로츠키 비방전에 나선다. 완벽하게 새로운 체제 하에서 관료시스템으로 정비한 스탈린의 공세 앞에 결국 트로츠키는 모든 권력을 박탈당하고, 망명길에 나서게 된다. 히틀러의 국가회주의(나치즘)와 맞수 스탈린의 공산주의가 본격적으로 맞붙기 1년 전인 1940년 트로츠키는 망명지 멕시코에서 암살자에 의해 최후를 맞게 된다.
이 만화를 통해 피상적이나마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 삶의 궤적을 쫓을 수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 혹은 러시아혁명에 대해 공부하거나 관련된 책을 읽어보지 못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대략적이나마 훑어본 것으로 만족해야지 싶다. 20세기 초의 활발했던 세계를 변혁시키고자 했던 사회주의 운동이 전쟁이란 광기 속에서 소멸하게 되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사적 유물론에 근거한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법칙을 모든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논쟁도 흥미를 끈다. 혁명의 대의를 위해 모든 분파주의는 배척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분열할 수밖에 없었던 혁명가 그룹 내의 갈등 역시 인상적이었다.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를 저술한 타리크 알리는 책의 많은 부분을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삼부작에 빚지고 있는데, 기회가 된다면 필맥 출판사에서 출간된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를 읽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리우스가 그린 만화들은 이제 찾아볼 수 없게 된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