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계곡 모중석 스릴러 클럽 35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손과 발이 얼어붙는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독일 출신의 작가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지옥계곡>을 읽으면서 바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작가가 되기 전에 다양한 직업군을 체험했다는 빙켈만의 다양한 직업 중에서도 특히 택시운전을 하며 영수증에 필사를 했다는 소개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작품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빙켈만은 숱한 퇴고와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현지답사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그야말로 손과 머리로만 글 쓰는 작가가 아니라 자신의 발로 밟은 체험을 바탕으로 글쓰는 작가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결과가 이 빼어난 추리소설 <지옥계곡>의 탄생이었다.

 

<지옥계곡>의 원본 소설의 구성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지옥계곡>에는 주인공 로만 예거의 활동을 추적하는 백색 페이지와 누군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아프간 참전군인(아마도 미군으로 추정되는)의 독백이 담긴 잿빛 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역시 시작은 강렬한 충격 요법이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 지대에 위치한 험준한 추크슈피체 등반에 나선 무모한 산악인을 구조하러 나선 산악구조대원 로만 예거는 우연하게 지옥계곡 밑으로 투신하려는 젊은 여성과 조우하게 된다. 그녀를 구하려는 예거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살려는 의지가 없었던 그녀는 그의 구원의 손길을 거부한다.

 

베테랑 산악구조요원 로만 예거는 지옥계곡으로 투신한 젊은 여성의 이름이 라우라 바이더로 아우크스부르크에 사는 최첨단 의료기기 재벌 바이더 집안의 외동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 차례차례 라우라의 친구들이 등장하면서 지난 여름 있었던 과거사에 대한 희미한 조명이 비치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빙켈만은 두 가지 전략을 취한다. 하나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라우라가 무엇 때문에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가를 캐내는 작업과 분명히 그녀의 죽음에 관련된 독백하는 참전 병사의 정체에 초점을 맞춘다. 전자가 관계와 소통에 대한 복잡한 통찰을 요구하고 있다면, 반면에 후자는 다분히 개연적인 사건발생에 방점을 찍는다. 개인적으로 전자를 높이 평가하지만, 후자의 경우 책을 읽는 내내 당위성이 좀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한편 잿빛 페이지를 맡은 남자의 독백을 읽는 순간, 독자는 그가 이 사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어떤 시간에 그리고 무슨 연관으로 라우라가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녀의 5인조 그룹에 그가 끼어들고, 결국에 가선 되돌릴 수 없는 관계의 균열을 초래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추리소설의 공식에 충실하게 아끼는 딸의 죽음에 비통한 아버지 바이더 씨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사설탐정을 고용한다. 왜 부자들은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 대신 아내에게까지 숨기며 은밀하게 사건에 접근하는 사설탐정을 애호하는 걸까? 주인공 로만 예거가 라우라의 지기 마라 란다우를 통해 사실에 접근해 가는 동안, 라우라의 다른 친구들을 겨냥한 연쇄살인이 발생하면서 소설 <지옥계곡>은 하이라이트로 치닫기 시작한다.

 

빙켈만은 <지옥계곡>에서 주인공을 위협하는 악당으로 21세기 미드가 개발한 최고의 캐릭터 싸이코패스를 채택했다. 아프간 전쟁 참전 군인으로 아프간 반군의 포로가 되어 사지에서 살아난 경험의 트라우마까지 가진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을 갖춘 안티 히어로로써 그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눈 덮인 추크슈피체 산에서 유감없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한다. 그런 반면,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로만 예거 역시 베테랑 산악구조요원으로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알 수 없는 전문 산악장비를 다루며 산다람쥐 같이 산을 오르내리며 치열한 추격전을 시전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런 조건을 배경으로 해서 해발 3,000미터 고지의 알프스 산악을 오르며 수많은 퇴고를 거듭한 빙켈만은 어긋난 응답 없는 사랑이라는 마지막 흥미 요소를 가미해서 비극의 재구성에 성공했다. 그야말로 구성과 전개에 있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의 전개에 온전하게 몰입할 수 있었고, 결말의 이중 반전과 간결하면서도 깔끔한 마무리는 기대 이상이었다.

 

빙켈만이 그리는 관계상실의 연쇄반응 연대기는 인상적이었다.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사업가의 이미지를 가진 완벽해 보이는 아버지는 실상은 아내와 딸과의 소통에는 실패한 가장이었고, 평생을 함께 하리라고 생각한 친구들에게 배신당한 라우라의 마지막 선택은 비극이었다. 바이더 씨의 막대한 재산도 결국 그들의 행복을 담보하지 못했다. 자신의 삶에 충실해 보이는 로만 예거 역시 자신의 산에 대한 사랑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전 여자 친구와의 불통 그리고 자신이 구하지 못한 라우라의 죽음이 가져온 상실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사건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주변인들마저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 물론 점증하는 공포의 확장이라는 차원에서 작가의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처음 만난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지옥계곡>은 확실히 새로운 종류의 스릴러 체험이었다. 설원을 무대로 해서 펼쳐지는 백색의 공포는 그야말로 손발을 얼어붙게 할 정도였으니까. 과연 빙켈만이 선사하는 공포의 연쇄반응이 그의 다음 작품에서도 여전히 유효한지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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