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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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즘 존 쿳시와 토니 모리슨의 책에 푹 빠져 살고 있다. 최근 문학동네에서 두 작가의 책들이 재출간되고 있어 반갑기만 하다. 물론 신간도 나오고 있는 중이고. 존 쿳시의 신간 연작인 헤수스 시리즈는 언제나 나올지 궁금하다. 이번에도 왕은철 교수가 번역을 맡을 지도 궁금하고.

 

지난 주에 만난 <마이클 K>에 이어, 공교롭게도 존 쿳시가 부커상을 받은 작품들부터 읽게 됐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먼저 읽기 시작했지만 지난 토요일밤에 차를 타고 나가 사온 <추락>이 너무 재밌어서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후순위로 밀렸다. 게다가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게 된 <포>를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는 바람에 또 밀릴 판이다. 작년에 이언 매큐언에 집중했다면 올해는 존 쿳시와 토니 모리슨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한국을 강타한 미투운동에 즈음해서 존 쿳시의 소설 <추락> 역시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52세 중년의 데이비드 루리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커뮤니케이션을 지도하는 교수다. 두 번의 이혼 경력을 가진 독신남은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정욕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소설의 처음부터 나이 어린 유부녀 소라야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 대상이 자신이 가르치는 멜라니 아이삭스로 향하게 되면서 루리 교수의 파멸은 어쩌면 예고된 수순인지도 모르겠다.

 

제자와 관계한 파렴치한 지식인으로 찍힌 루리는 어디에서고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다. 결국 동부 케이프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외동딸 루시에게도 도피를 감행한다. 온통 흑인 농부들에게 둘러쌓인 그곳에서 과연 그가 환영받는 존재일까? 물론 아니었다. 게다가 루시네 집에 거주하는 동안 3인조 강도들에게 습격을 받고 화상까지 입는 사건을 체험하면서 루리는 루시의 동료 페트루스를 비롯한 모든 것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다.

 

소설 <추락>은 1999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쿳시의 조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마침내 철폐되고,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정신적 공황 상태가 찾아왔다. 주종관계의 역전이라고나 할까. 구시대를 상징하는 백인 데이비드 루리 교수에게, 자신의 딸 루시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인남성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도대체 이 땅에 정의가 있는지 그는 묵묵한 어조로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백인들이 지배하던 시절에 역시 남아프리카에 정의가 있었는지 되묻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락>을 읽으면서 문득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과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자꾸만 연상됐다. 데이비드 루리는 멜라니와의 관계를 실수라고 변명하고, 속죄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명예는 실추했겠지만 그런대로 대학 사회에 잔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존심을 앞세운 루리는 사과나 변명 대신, 자신이 유죄라고 담담하게 인정하면서 해직을 감수한다. 물론 그가 충분한 벌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한 이들은 3개월 간의 동부 케이프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루리에게 린치를 아끼지 않는다.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미투운동의 여파를 보면서 과연 권위를 앞세워 자신의 욕정을 채운 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식의 처벌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업계에서 자신들의 사회적 명망이나 영향력이 이미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지도 모른 채, 변명에 여념이 없는 그들의 모습과 자신이 유죄라며 항소를 포기한 데이비드 루리의 그것은 과연 무슨 차이가 있을까.

 

확실히 <추락>은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대가가 독자들을 위해 쉽게 쓴 소설이다. 24개의 챕터로 구성된 소설은 캐릭터와 일련의 사건들로 구성된 내러티브가 그야말로 일품이다. 주인공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그가 추구하는 욕망에 대한 기술 그리고 주인공에 갑자기 닥친(어쩌면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던) 사건들이 연달아 벌어진다. 주인공 루리 교수만큼이나 혼란스러운 독자들은 과연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진다. 미니멀리즘 소설의 표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의 전개를 따라가는 건 정말 쉽지만, 그 안에서 존 쿳시 작가가 다루고 있는 이슈들은 절대 쉽지 않은 것들로 채워져 있다. 혼돈에 빠진 남아프리카 사회에 대한 저격을 필두로 해서, 역시 땅에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인간을 대변하는 루시의 생각들, 어쩔 수 없이 흑인들에 대한 지독한 편견을 가지고 그들과 공존해야 하는 데이비드 루리로 대변되는 구시대 인물들의 수난이 소설의 곳곳을 장식한다.

 

존 쿳시가 쓴 13개의 소설 중에 이제 겨우 세 개의 소설을 읽었다. 그럼 앞으로 10권이 남은 셈인가. 그의 데뷔작과 가장 최근의 나온 헤수스 시리즈 두 권만 빼고 국내에 모두 출간이 되었는데 노벨상 후광이 사라져 버리면서 존 쿳시의 책들도 시장에서 모두 사라져 버린 그런 느낌이다. 뒤늦게 그의 절판된 책을 구하려니 품도 많이 들지만, 또 헌책 사냥하는 재미도 나쁘지 않다. 나의 책읽기가 대개 뒷북 스타일이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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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라
토니 모리슨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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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왜 내가 이제야 토니 모리슨을 읽게 되었는가. 지난주에 만난 <지하철에서 책 읽는 여자>에 등장한 토니 모리슨의 <술라>를 보고 바로 온라인 서점에 주문장을 날렸고 지난 수요일 책이 도착했다. 그리고 한창 읽고 있던 존 쿳시의 <마이클 K>를 다 마치고, 바로 <술라>를 읽기 시작했다. 1973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에 발표된 대가의 두 번째 소설이라고 하는데, 대가의 작품은 시절이 흘러도 여전히 고고한 묵향을 풍기고 있었다.

 

미국 오하이오 주 메달리언의 보텀(Bottom)이라고 불리는 계곡에 흑인들이 모여 살았다는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한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전선에 파견된 섀드랙이 바로 곁에서 전우가 산산조각이 나 죽는 모습을 보고 고향에 돌아와서 내면이 파괴된 채로 살아가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같은 흑인들은 물론이고 백인에게 그야말로 깽판을 쳐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고 했던가.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시절 이야기다. 그런 그가 전국자살일(National Suicide Day)를 정한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소설 <술라>의 진짜 주인공들은 술라 매 피스와 넬 라이트다. 서로 상반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그녀들의 이야기 속으로 토니 모리슨은 독자를 안내한다. 넬의 엄마 헐린 라이트는 보수적 성향을 가진 여성이다. 헐린은 어린 딸 넬을 데리고 할머니가 병에 걸리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남부여행길에 나서게 된다. 두 모녀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극심한 남부여행 도중에 치욕적인 경험을 한다.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미국에서 흑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들의 태생적 권리를 얻게 되었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해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넬의 집안환경이 그렇다면, 술라의 케이스는 좀 더 복잡하다. 피스 집안의 여걸 에바 할머니는 자신과 아이들을 내버리고 도망친 남편 보이보이가 부재한 가운데, 자신의 아이들을 키우는 사투를 벌인다. 자신의 그 아름다운 다리 한 짝과 맞바꿈으로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피스 집안이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술라의 외삼촌 플럼은 섀드랙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상흔으로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에바가 제대로 먹지 못해 변비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하던 아이의 항문을 손으로 파내던 그 젊은 엄마였단 말인가. 보텀 공동체의 여성들을 온통 적으로 만들었던 술라의 엄마 해나 역시 불이 붙어 죽고 만다. 그렇다면 그 장면을 본 술라의 삶은 과연 어땠을까?

 

넬은 모든 여성들이 선망하는 주드 그린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면서 절친한 친구 술라와의 관계에서 빠져 나간다. 그렇게 십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넬이 전업주부로 변신했자면, 술라는 대처로 나가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의 온갖 것을 경험하고 마침내 고향으로 귀향한다. 고향에 돌아와서 그녀가 처음 한 일은, 할머니 에바를 요양원에 보낸 일이다. 그리고 그녀의 엄마 해나보다 한술 더 떠 마을의 모든 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한다. 사랑하는 감정도 없이 말이다. 문제는 넬의 남편 주드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두 친구 간의 우정에 금이 쩍쩍 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우정이라는 도덕적 기준에서 본다면 술라는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훗날 그녀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마을 공동체 사람들은 하나 같이 기뻐해 마지않았다. 마을의 소문난 창녀가 죽었어도, 그녀들은 맨발로 달려 나가다시피 해서 도움을 주었는데 왜 술라에게는 그렇게 매몰찬 대접을 했던 것일까. 성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자유로웠던 영혼이었던 이단아 술라 피스를 그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암묵적인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힌 일원에 대한 징벌이 얼마나 가혹한지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술라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공동체의 공공의 적이 사라짐으로써, 공허한 감정들을 양산해 내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에바 피스의 예를 들어 자신의 나이든 부모들을 양심의 가책에 못이겨 부양하지 않았던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자유연애를 즐기던 술라에게 자신들의 연인 혹은 남편을 빼앗길까봐 노심초사하던 여자들은 또 어떤가. 넬과 술라, 해나 그리고 에바 피스에 이르는 등장인물에 대한 선 굵은 심리묘사는 정말 탁월했다.

 

그렇게 소설의 2/3 지점까지는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술라가 갑작스럽게 죽은 뒤부터는 이야기의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초보작가(1973년 당시) 내러티브 구성에 있어 뒷심이 빠진 게 아닐까 싶었다.

 

어쨌든 처음 만난 토니 모리슨의 작품은 일단 분량에서 읽기에 부담이 없어서 좋았다. 간결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전개와 구성 그리고 술라와 에바 피스 같이 강단 있는 성격의 캐릭터의 창조력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제 오늘 산 신간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부터 토니 모리슨을 역순으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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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책 읽는 여자
크리스틴 페레플뢰리 지음, 최정수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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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독서가들은 모두 몽상가들이다.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그 무언가를 향해 달려 나가는 몽상가라는 생각이 크리스틴 페레플뢰리의 <지하철에서 책 읽는 여자>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책에 대해 기대를 많이 했던 것 같다. 분량도 적고, 무엇보다 책에 관련된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리고 지하철에서 책 읽던 여자가 무슨 재미난 이야기-아무래도 로맨스에 관한 것일 것이다-를 기대했건만 그런 건 없었다. 어쩌면 프랑스 소설 특유의 그런 맥락이 뚝뚝 끊어지는 스타일이 꾸준하게 책 읽기를 방해한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동안에 로버트 크레이스의 책들을 두 권이나 읽느라 상대적으로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로버트 크레이스의 신간이 재밌긴 했다.

 

부동산 사무소에서 그냥저냥 하루를 보내는 쥘리에트, 책 전달자 두목 급에 해당하는 솔리망, 그의 딸 자이드, 지하철에서 이탈리아 어로 된 요리책을 읽던 실비아 할머니 그리고 역시 지하철에서 곤충에 대한 책을 읽던 레오니다스가 엮어내는 책에 대한 이야기는 좀 심심했다. 무언가 좀 더 스펙터클한 스토리를 기대한 게 문제였을까. 평범한 소시민이 책의 세계에 돌입해 들어가는 과정이 낯설게 느껴졌다. 적어도 쥘리에트는 할머니가 물려 주신 유산으로 구입한 아파트 덕분에 주거에 대한 걱정은 없었으니까, 솔리망의 뒤를 이어 ‘무한 도서 협회’ 그리고 그의 딸 자이드까지 보살피게 되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었다. 아, 직장인의 로망이여.

 

저자 크리스틴 페레플뢰리는 정처 없이 부유하는 상념들로 고민하는 주인공 쥘리에트의 내적 갈등을 탁월하게 풀어낸다. 우리는 삶 가운데 정말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면서 살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고 살지 않는가. 그냥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산다고 하면 너무 슬프지 않을까. 아마도 그럴 때, 책이야말로 최고의 위안이 될 거라는 상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쥘리에트는 솔리망이 심장 수술 중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좌절하지 않고 번듯하게 무한 도서 협회 두목으로 자신의 일을 꾸준하게 해나갈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솔리망의 딸 자이드를 이란의 시라즈에서 살던 난민이자 그녀의 어머니 피루제에게 데려다 준 후, 만나게 된 노란미니버스를 끌어다가 이동식 전달자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다. 그렇지 삶의 순간들은 모두가 결정의 순간이다. 자신의 집을 세준 다음, 그 비용을 바탕으로 ‘옐로 서브마린(Y.S.)'의 연료를 채우고, 장거리 이동 중에 필요한 비상식량과 잡화들을 산 다음, 보무도 당당하게 잿빛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그녀가 길 위에서 책을 한 가득 실은 버스를 달리며 만나게 될 인연 아니 운명들의 이야기가 문득 궁금해졌다. 적어도 책을 사랑하는 이들과의 만남이라면 밤을 세워서라도 할 이야기들이 많을 테니까 말이다.

 

확실히 <지하철에서 책 읽는 여자>의 줄거리는 몽상적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우리네 현실에서도 만날 수 있는 오가와 이토의 <달팽이 식당> 그리고 토니 모리슨의 <술라>(이 책은 바로 어제 주문했다) 같은 책들이 주는 현실성에 퍼뜩 눈이 떠졌다. 아, 그렇지 나는 책 읽는 사람이었지. 곳곳에서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이지 못한 이물감에 다소 생소해지는 그런 느낌이 드는 독서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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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0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0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0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몽키스 레인코트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전행선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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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무래도 로버트 크레이스 작가의 팬이 된 모양이다. 지금까지 아마 세 권의 그가 쓴 미스터리를 읽었는데 작가의 데뷔작인 <몽키스 레인코트>를 읽고 판가름이 나 버렸다. 지난 주에 신간 <서스펙트>를 읽고 나서, 2월달에 사두었던 <몽키스 레인코트>를 읽기 시작했다. 정말 의미 있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장준하 선생의 <돌베개>도 마다하고 이 책부터 다 읽게 됐다 어젯밤에. 새벽까지 책을 읽느라 몸은 피곤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더 재미에 가속도가 붙어서 도저히 고만 읽을 수가 없더라.

 

자칭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설 탐정이라고 자부하는 전직 육군 특수부대 출신 엘비스 콜과 전직 경찰이자 묵묵하기로 소문난 남자 조 파이크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평가하고 싶다. 아무래도 할리우드 바닥에서 극본가로 다년간 활동한 경험이 놀라운 데뷔작의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로버트 크레이스가 구사하는 문장은 간결하다. 그건 마치 한 편의 텔레비전 범죄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당연히 속도감도 탑재되어 있다. 다만 첫 소설이니 만큼 세련된 점이 아쉽긴 한데, 그런 점들은 후속작에서 개선되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자, 이제 본격적인 <몽키스 레인코트>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 올해 35세의 주인공 엘비스 콜은 39세 전업주부 엘렌 랭의 사건 의뢰를 받는다. 경찰이 개입되는 건 싫으니, 우리와는 달리 사설 탐정 서비스가 공인된 미국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만 비용이 든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사건 수수료는 별도의 청구를 빼고 2,000달러. 30년 전의 물가를 고려한다면 적은 돈은 아닌 것 같다. 엘렌 랭은 실종된 자신의 남편 모트와 9살난 아들 페리를 찾아 달라고 한다.

 

사건 초반에는 할리우드에서 제작자로 활동하던 바람난 남편이 아들을 데리고 잠적한 단순 사건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능한 탐정 엘비스 콜이 사건의 본질에 접근할수록 쉽지 않은 미션이라는 점이 속속 들어난다. 모트가 지역에서 투우사 출신의 이름난 범죄조직 두목인 돔(도밍고) 가르시아 두란이 아끼는 마약을 훔쳐 달아났다고 추정된다. 두란 패밀리는 잃어버린 마약을 찾기 위해 랭 씨네 집을 뒤집어엎고, 아이를 납치하는 짓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놈들이다. 미스터 두란에게 끌려간 엘비스 콜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도 않은 마약을 내놓으라는 협박을 당한다. 이거 점점 이야기가 꼬이기 시작하는걸. 천하의 엘비스도 거물 범죄조직을 상대하기가 버거워 보인다. 신뢰하는 동료 조 파이크도 등장하지만, 쉽지 않은 대결이 전개된다. 물론 그 와중에 두 건의 로맨스인 듯, 로맨스 같지 않은 메이크아웃(make out)도 거칠게 등장한다. 이런 부분이 약간 세련되지 않은 부분이라고 해야 할까.

 

경찰의 도움 따위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두 마리의 외로운 늑대 엘비스 콜과 조 파이크는 나름의 무장을 갖추고, 할리우드 람보 스타일로 두란 패밀리와의 최후의 대결에 나선다.

 

무엇이 30년 전의 <몽키스 레인코트>가 지금도 여전히 흥미진진한 소설적 아우라를 풍기게 만들었을까. 우선 현재 진행형인 엘비스 콜과 조 파이크 듀오의 끈쩍한 브로맨스가 그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엘비스 콜이 시니컬한 유머를 담당하고 있다면, 그 반대에서 조 파이크는 침묵 가운데 동료와 그의 의뢰인을 호위하고 거친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둘은 불사신 같은 존재들이 아니다. 때로는 범죄조직원들에게 두들겨 맞기도 하고, 부러지고 깨지고를 반복한다. 심지어 최후의 대결에서 조 파이크는 총에 맞기도 하지 않던가. 그들도 인간이기에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다만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신념대로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다.

 

그렇다고 해서 엘비스 콜이 막무가내인 것만은 아니라고 로버트 크레이스 작가는 매력적인 엘렌의 친구 재닛 그리고 엘렌과 차례로 관계를 갖는 장면으로 이에 대해 항변한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들이 좀 소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뭐 30년 전에는 의뢰인과의 로맨스가 그런대로 받아 들여졌나 싶기도 하다. 지금은 아무도 모를 (존 쿠거) 멜런캠프의 이름이 소설에 등장하는 순간, 아 나도 옛날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멜런캠프와 브루스 스프링스틴 같이 한 시대를 상징하는 미국 문화 아이콘을 절묘하게 다루는 점에서 로버트 크레이스가 대중들의 코드를 잘 읽는 작가라는 점을 엿볼 수가 있었다.

 

내가 다음에 만나보고 싶은 엘비스 콜/조 파이크의 작품은 바로 <L.A. 레퀴엠>이다. 이 책은 아무래도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지 않을까 싶다. 아, 참고로 이 걸출한 소설의 제목 <몽키스 레인코트>는 바쇼의 하이쿠에 나오는 ‘원숭이도 도롱이가 필요하다’는 싯구에서 차용했다고 한다. 여전히 소설의 어떤 내용과 문맥이 맞아 떨어지는 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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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8-03-21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을 읽고 엘비스 콜 보다 조 파이크가 좋았어요.
뭐랄까, 인간적인 따스함~^^

레삭매냐 2018-03-21 20:11   좋아요 0 | URL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

어쩜 이렇게 멋들어진 콤비를 만들어내
울궈 먹는지 모르겠습니다.

조 파이크 단독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
도 있다고 하네요. 도서관에서 급하게
<라 레퀴엠> 빌려 왔는데 먼저 읽어야
하는 책 때문에 후순위로 밀려 버렸네요...
 
서스펙트 버티고 시리즈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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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다. 다른 말이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지난 1월달에 <마지막 탐정>으로 로버트 크레이스의 작품과 두 번째로 만났는데 엘비스 콜과 조 파이크 듀엣과는 또다른 주인공이 등장하는 <서스펙트>는 정말 대단했다. 아무래도 이 작가의 팬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이미 그의 데뷔작인 <몽키스 레인코트>도 수배해 두었는데 시간이 나는 대로 읽을 계획이다.

 

소설은 로버트 크레이스가 주로 활동하는 미국 LA가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된다. 소설 지분의 절반을 차지하는 저먼 셰퍼드 매기와 그의 무리이자 알파였던 피트가 급조 폭발물(IED)로 크게 다치고 죽는 장면으로 프롤로그의 시작을 알린다. 그 다음에는 LA의 모처에서 순찰 중이던 주인공 스콧 제임스 순경과 그의 파트너 스테파니 앤더스가 다섯 명의 괴한들의 총격을 받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총기의 천국 미국이 도대체 총기규제에 나서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늘도 학교에서 교사가 총기에 대한 안전교육을 하던 중에 오발 사고로 수업 참관 중이던 학생의 목에 총탄이 박히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하지 않은가. 이런 사고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바라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AK-47까지 동원한 무시무시한 총격으로 파트너를 잃은 스콧 제임스는 극복할 수 없는 상실감으로 지독한 PTSD에 시달린다. 밤마다 악몽을 꾸는 건 물론이고,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으로 죽어간 파트너 스테파니에 대한 생각 때문에 총격 때문에 입은 부상으로 후유증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LAPD 경찰직을 그만 두는 대신, 스콧은 LAPD 산하 K-9에 배속되어 도미닉 릴랜드 경사 휘하에서 경찰견을 다루는 핸들러 임무에 자원한다. 그렇게 스콧과 매기는 훈련장에서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어느 누구에게도 믿음이 가지 않는 존재들(suspect)이 뭉친 것이다.

 

생전 개를 키워 보지 않은 스콧은 처음부터 릴랜드의 마음에 전혀 안드는 고집센 개자식(!!!)이었지만 매기와 함께 24시간을 보내면서 차츰 치유의 시간을 갖게 된다. 아마 그건 상대방인 매기에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자신의 사건을 맡았던 멜론 형사와의 불화로 사건에서 배제된 스콧은 멜론 형사가 은퇴한 다음, 새로 사건을 맡은 버드 오르소 형사 그리고 조이스 카울리 형사와 팀을 이루면서 과거의 기억 속에 잠재된 희미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숨겨진 사건의 전모를 추격하기 시작한다.

 

사실 소설의 전반적인 줄거리는 어쩌면 밋밋해 보인다. 아무런 단서도, 목격자도 없는 사건을 매기의 후각만에 의지해서 실낱 같은 단서들을 기초로 해서 세운 희박한 재구성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경찰이었던 스콧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반드시 풀어야 하는 숙제가 있었다. 두 번 다시 파트너를 져버려서는 안된다는 자신과의 약속, 매기와의 짠한 관계 형성을 통해 그녀의 알파가 된 스콧에게 매기는 그야말로 충성을 다한다. 알파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안위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로버트 크레이스는 단순하게 복잡해 보이는 사건을 풀어 나가는 데만 신경을 쓴 게 아니라, 공통적으로 상실이라는 PTSD를 지닌 인간과 개의 상화작용을 내러티브에 녹여 내는데 상당한 공을 들인다. K-9에서 신출내기로 상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초짜 경관에서 스콧이 배짱 두둑한 개자식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도 흥미롭다. 일종의 통과의례라고나 할까. 내부 배신 때문에 누구를 믿어야 하고, 믿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도 하나의 클리셰이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인상적이었다. 후반에 자신의 사건을 맡았던 멜론 형사를 찾아가 사과하는 장면도 사나이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인정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성인의 모습이 아닐까.

 

스콧이 파고든 사건의 이면에는 국제적 다이아몬드 밀수의 실체가 숨어 있었고, 이제는 충격적일 것도 없는 내부자들의 고약한 모의의 존재였다. 내부의 악당들은 스콧이 꽂는 표적마다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한다. 후반으로 갈수록 과연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예상과 추측으로 흥분되기 시작한다. 이 양반, 확실하게 재밌는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결말 부분에 포진한 마지막 대결은 정말 최고였다. 독자를 점층적으로 클라이맥스로 모든 신경을 몰입하게 만든 다음, 한 방에 해결하는 수완은 정말 대단했다. 미스터리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하는 게 아닌가.

 

사나이는 그의 파트너를 죽게 놔두지 않는 법이다 (417쪽)

 

넷플릭스나 훌루에서 로버트 크레이스의 이런 이야기들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물론 영화로 만들어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책의 뒷면에 나온 대로 로버트 크레이스가 ‘최고의 미스터리 작가’라는 데이비드 발다치의 의견에 격하게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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