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존 쿳시와 토니 모리슨의 책에 푹 빠져 살고 있다. 최근 문학동네에서 두 작가의 책들이 재출간되고 있어 반갑기만 하다. 물론 신간도 나오고 있는 중이고. 존 쿳시의 신간 연작인 헤수스 시리즈는 언제나 나올지 궁금하다. 이번에도 왕은철 교수가 번역을 맡을 지도 궁금하고.

 

지난 주에 만난 <마이클 K>에 이어, 공교롭게도 존 쿳시가 부커상을 받은 작품들부터 읽게 됐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먼저 읽기 시작했지만 지난 토요일밤에 차를 타고 나가 사온 <추락>이 너무 재밌어서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후순위로 밀렸다. 게다가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게 된 <포>를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는 바람에 또 밀릴 판이다. 작년에 이언 매큐언에 집중했다면 올해는 존 쿳시와 토니 모리슨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한국을 강타한 미투운동에 즈음해서 존 쿳시의 소설 <추락> 역시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52세 중년의 데이비드 루리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커뮤니케이션을 지도하는 교수다. 두 번의 이혼 경력을 가진 독신남은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정욕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소설의 처음부터 나이 어린 유부녀 소라야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 대상이 자신이 가르치는 멜라니 아이삭스로 향하게 되면서 루리 교수의 파멸은 어쩌면 예고된 수순인지도 모르겠다.

 

제자와 관계한 파렴치한 지식인으로 찍힌 루리는 어디에서고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다. 결국 동부 케이프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외동딸 루시에게도 도피를 감행한다. 온통 흑인 농부들에게 둘러쌓인 그곳에서 과연 그가 환영받는 존재일까? 물론 아니었다. 게다가 루시네 집에 거주하는 동안 3인조 강도들에게 습격을 받고 화상까지 입는 사건을 체험하면서 루리는 루시의 동료 페트루스를 비롯한 모든 것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다.

 

소설 <추락>은 1999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쿳시의 조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마침내 철폐되고,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정신적 공황 상태가 찾아왔다. 주종관계의 역전이라고나 할까. 구시대를 상징하는 백인 데이비드 루리 교수에게, 자신의 딸 루시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인남성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도대체 이 땅에 정의가 있는지 그는 묵묵한 어조로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백인들이 지배하던 시절에 역시 남아프리카에 정의가 있었는지 되묻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락>을 읽으면서 문득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과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자꾸만 연상됐다. 데이비드 루리는 멜라니와의 관계를 실수라고 변명하고, 속죄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명예는 실추했겠지만 그런대로 대학 사회에 잔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존심을 앞세운 루리는 사과나 변명 대신, 자신이 유죄라고 담담하게 인정하면서 해직을 감수한다. 물론 그가 충분한 벌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한 이들은 3개월 간의 동부 케이프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루리에게 린치를 아끼지 않는다.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미투운동의 여파를 보면서 과연 권위를 앞세워 자신의 욕정을 채운 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식의 처벌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업계에서 자신들의 사회적 명망이나 영향력이 이미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지도 모른 채, 변명에 여념이 없는 그들의 모습과 자신이 유죄라며 항소를 포기한 데이비드 루리의 그것은 과연 무슨 차이가 있을까.

 

확실히 <추락>은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대가가 독자들을 위해 쉽게 쓴 소설이다. 24개의 챕터로 구성된 소설은 캐릭터와 일련의 사건들로 구성된 내러티브가 그야말로 일품이다. 주인공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그가 추구하는 욕망에 대한 기술 그리고 주인공에 갑자기 닥친(어쩌면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던) 사건들이 연달아 벌어진다. 주인공 루리 교수만큼이나 혼란스러운 독자들은 과연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진다. 미니멀리즘 소설의 표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의 전개를 따라가는 건 정말 쉽지만, 그 안에서 존 쿳시 작가가 다루고 있는 이슈들은 절대 쉽지 않은 것들로 채워져 있다. 혼돈에 빠진 남아프리카 사회에 대한 저격을 필두로 해서, 역시 땅에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인간을 대변하는 루시의 생각들, 어쩔 수 없이 흑인들에 대한 지독한 편견을 가지고 그들과 공존해야 하는 데이비드 루리로 대변되는 구시대 인물들의 수난이 소설의 곳곳을 장식한다.

 

존 쿳시가 쓴 13개의 소설 중에 이제 겨우 세 개의 소설을 읽었다. 그럼 앞으로 10권이 남은 셈인가. 그의 데뷔작과 가장 최근의 나온 헤수스 시리즈 두 권만 빼고 국내에 모두 출간이 되었는데 노벨상 후광이 사라져 버리면서 존 쿳시의 책들도 시장에서 모두 사라져 버린 그런 느낌이다. 뒤늦게 그의 절판된 책을 구하려니 품도 많이 들지만, 또 헌책 사냥하는 재미도 나쁘지 않다. 나의 책읽기가 대개 뒷북 스타일이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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