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인 소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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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을 다 읽고 나서야, 하라 료의 <내가 죽인 소녀>가 대단한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실 일본에서 출간된 지 20년 만에 출간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오래 걸렸나 싶었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출간이 되었다가 절판의 운명에 처했다가 이번 기회에 다시 독자들의 품에 들어오게 된 사연 있는 책이라는 사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죽인 소녀>는 불혹의 나이에 추리소설 작가로 등단하게 된 하라 료의 두 번째 작품으로 탐정 사와자키가 등장한다. 역시 하드보일드 작가답게 군더더기들은 죄다 빼 버리고 바로 사건의 핵심으로 주인공 사와자키와 독자들을 몰아넣는다. 우리나라에는 조금은 생소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 탐정이 이웃 일본과 미국에서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다.

탐정 사와자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로부터 전화를 받고 마카베 씨의 집을 찾는다. 그리고 그는 졸지에 마카베 씨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딸인 사야카의 유괴범으로 몰린다. 하지만 곧 사와자키는 유괴범의 지시대로 6천만 엔이라는 거금을 유괴범에게 전달하는 역을 맡게 된다. 도쿄의 거리를 누비며, 유괴범의 지시대로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던 중 오토바이 폭주족들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사와자키는 의식을 잃는다. 물론 그가 배달하고 있던 현금이 든 돈 가방도 사라져 버리고 만다.

자, 이제 사와자키는 자신이 어린이 유괴의 공범일지도 모른다는 경찰의 의심을 안은 채,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유괴범의 추적에 나서게 된다.

<내가 죽인 소녀>에서 하라 료는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심리묘사나 배경보다는 오로지 실제적인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가 가공했다는 지명들은 마치 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듯한 느낌을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도쿄 도심을 질주하는 사와자키의 블루버드 안에서, 그가 미행하는 골목길들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캐릭터 간의 대사 역시 일품이다. 불필요하게 장황한 대사 대신에 간결하면서도 갈등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 간의 의사전달과 감정묘사를 위한 짧은 대사들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역시 유괴 사건의 단서 제공에 있어서도, 독자들이 너무 좌절하지 않게 하면서 계속해서 작가의 사건전개를 따라 오게끔 하는 작법 역시 오랜 시간을 들여서 숙성시키는 하라 료 스타일다웠다.

하지만 역시 20년이라는 세월의 벽이 주는 괴리감이 곳곳에서 느껴지기도 했다. 가령 예를 들면 핸드폰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20년 전의 상황에서 누군가와 연락을 하기 위해서 사와자키는 공중전화를 이용해야만 했다. 다른 것도 아닌 그 공중전화가 일본 발전의 상징이라고까지 치켜세우다니.

아쉬웠던 점 중의 하나는 도쿄의 지명에 대해 조금 더 알았더라면 소설의 재미가 좀 더 와닿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신주쿠니 가쿠슈인이니 하는 지명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도리가 있나. 그리고 무언가 한 건 터뜨려 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결국 부도수표가 된 조직폭력단 세이와카이의 하시즈메와 사와자키의 과거로 인도해줄 와타나베 겐고의 그림자가 얼비치는 정도로 마무리된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대개 하드보일드 소설들이 그렇듯이 <내가 죽인 소녀> 역시 초반부 전개가 좀 어려웠다. 하지만 고 부분만 넘기면 재미가 배가되면서 일사천리로 흘러간다. 본격적으로 사와자키의 추적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느새 마지막 장에 다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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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의 귀환>을 리뷰해주세요
어린왕자의 귀환 - 신자유주의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
김태권 지음, 우석훈 / 돌베개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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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아주 오랜만에 만날 수가 있었다. 파주에 갔다가 어린이 청소년들이 즐겨 읽는 책들을 내는 전문 브랜드 비룡소 서점에서 <어린왕자>를 보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그리고 돌베개 출판사에서 김태권 작가와 우석훈 교수가 의기투합한 <어린왕자의 귀환>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서 아주 기대가 됐다. 사실 돌베개 블로그에 들러서 책이 나오기 전에 미리 웹툰으로 올려진 김태권의 작가의 그림을 보기도 했었다.

개인적으로 예전에 김태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김태권 작가의 <십자군이야기>를 통해 처음으로 그의 작품 세계와 만날 수가 있었다. 신자유주의와 구 부시 행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점철된 <십자군이야기>가 2권까지 밖에 나오지 않아서 아쉬워하고 있던 차에 <어린왕자의 귀환>은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그렇다 <어린왕자의 귀환>은 생텍쥐페리의 명작 <어린왕자>의 패러디 버전이다. 생텍쥐페리가 자신의 소설에서 소행성B612와 장미에 관심을 두었다면, 김태권 작가는 이 책에서 지난해 전 세계를 강타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신자유주의가 그동안 선전해 오던 ‘시장천국 불신지옥’의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유효한 아젠다가 아니라는 현실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21세기의 첫 십년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여전히 시효가 지나 버린 신자유주의 망령에 사로 잡혀 있다. 70년대 개발독재 시대에서나 통용이 가능하던 파이를 키워 분배를 하자는 파이론(論)이 여전히 득세를 하고 있고, 그 어느 때보다 고용불안이 심화되고 있으며, 도대체 해법이 보이지 않는 비정규직 문제와 날이 갈수록 그 격차가 벌어져 가는 빈부의 차이를 벌리는 소득분배의 문제들은 정말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개인적으로 어린왕자의 별을 망쳐 놓은 정체불명의 신자유주의 자본가를 찾아 나서는 우주여행에서 김태권 작가가 비정규직 왕자로 내세운 두 명의 캐릭터인 남수와 주영의 구한말 타임머신 여행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일제의 침탈이 가속화되어 가고 있던 백 년 전에 이미 반드시 국가가 수호해야 할 국가 기간산업인 전기사업을 민영화시키려는 시도가 미국과 미국 자본가에 의해 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

현 정부가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공기업 민영화의 폐해가 이미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구미선진국가들에서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었는지 뻔히 알면서도 그런 무리수를 두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가장 가까운 예로, 수년 전 미국 동부를 암흑천지로 만들었던 대규모 ‘블랙아웃’(정전) 사태도 극단적인 민영화로 인한 부작용의 한 예로 들 수가 있겠다. 아울러 오바마 정부에서도 모범 사례로 꼽고 있는 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에 자신들의 입맛대로 수정을 가하려고 하는 움직임 역시 김태권 작가와 우석훈 교수의 예리한 눈길을 피해가진 못하고 있었다.

김태권 작가의 패러디된 그림들이 어쩌면 이렇게 작금에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태들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옛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즐겨 쓰던 수법인 분할통치(divide and rule) 기법이 현재 쌍용자동차 사태에서 사측에서 구사하고 있는 노노대결 구조로 치환되고 있다는건 신문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만한 내용이었다. 일자리를 잃으면 사회적 안전장치의 부재로 인해 바로 극빈층으로 전락해 버리고, 심지어 일하고 있어도 일하는 빈곤층(working poor)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은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에 대해 우석훈 교수는 각 장마다 달려 있는 해제를 통해, 문제점에 대한 지적과 더불어 그에 대한 대안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미 자신의 저작들을 통해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기업의 육성과 대안 경제에 대해 설파해온 우석훈 교수는 승자독식의 무한경쟁이 판치는 시장자본주의보다는 공동체적인 삶에 보다 큰 가치를 둔 조화로운 삶의 가치를 설파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신자유주의 우주에서 살아남는’데 한결 도움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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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6
카를로 콜로디 지음, 김양미 옮김, 천은실 그림 / 인디고(글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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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돼서 다시 읽어 보고 싶은 세 권의 동화가 있었다. 아니 내가 동화라고 믿었던 책이라고 해야 할까.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그리고 다시 읽기 전까지 미처 작가도 몰랐던 <피노키오>.

이번에 인디고 출판사에서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의 6번째 시리즈로 당당하게 출간된 <피노키오>의 저자는 카를로 콜로디라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가라고 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거짓말을 하면 코가 커지는 나무인형 피노키오의 이야기가 몇 백 년은 됐을 거라고 어림짐작을 하고 있었는데 채 150년이 되지 않은 이야기라고 한다.

역시 동화답게 <피노키오>는 더말할 나위 없이 교훈적이다. 어른들을 말을 잘 듣고, 공부를 잘하라는 어른들의 시선으로 본 아이들의 모습에 대한 전형이라고나 할까? 아마 어린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보다 더 극악한 반어린이 정서를 다룬 책도 없을 것 같다. 모름지기 어린이들이라면, 공부보다는 밖에 나가 친구들과 뛰노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어른들을 말을 잘 듣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지극히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를 행간에서 읽으면서 마음이 갑갑해졌다. 확실히 어린이가 보는 피노키오와, 어른이 읽는 피노키오의 차이는 그렇게 엄청났다. 아마 21세기 사교육 광풍이 부는 대한민국에 어울리는, 이보다 더 ‘교훈’적이면서도 적합한 콘텐츠를 담은 고전동화도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보니 게으름을 피워서, 소가 되었다는 옛 설화는 이탈리아산 동화에서는 당나귀 버전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렇게 어린이들을 상대로 하는 스토리텔링의 내러티브에는 그런 유사성이 있는 걸까?

피노키오가 가진 금화를 500배로 뻥튀겨 주겠다는 고양이와 여우 듀엣의 유혹은 몇 년 전 중국펀드 광풍을 가져왔던 묻지마 투자의 패턴과 너무나 흡사했다. 감언이설에 속아 엄청난 수익을 위해 자신이 가진 전부를 투자했지만 피노키오에게 돌아온 것은 빈 손 뿐이었다. 피노키오 같은 얼간이에게도 자신이 가진 것을 뻥튀기 하고 싶다는 욕망이 존재한다는걸 작가는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피노키오>에는 다윈의 진화론에 근거한 유물론적 다위니즘의 그림자가 어려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피노키오는 제페토 할아버지가 만들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기원은 말하는 나무토막을 발견한 버찌 할아버지(안토니오)였다. 나면서부터 게으르고, 부모님(제페토 할아버지)의 말이라고는 정말 죽어라고 듣지 않는 피노키오가 편부 슬하에서 어머니의 사랑(파란 머리 요정)을 알게 되면서 개과천선하게 된다. 그리고 피노키오는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나무인형에서, 가난하고 병든 부모의 수발을 드는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조금 과장하면 유물론적 진화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어른이 돼서 <피노키오>를 읽으면서 내내 스탠리 큐브릭이 기획했지만,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 <A.I.> 생각이 떠올랐다. 어느 특정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 데이빗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그 소망의 중심에는 자신을 길러주던 어머니 모니카로부터의 사랑이 존재하고 있다. 영화에서 데이빗은 푸른 머리 요정에게 자신을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지만, 그의 꿈을 이루어주는건 터무니없게도 외계인이었다. 비록 단 하루긴 하지만 자신의 소원을 이루게 되는 데이빗의 그것과 카를로 콜로디가 창조해낸 멋진 캐릭터 피노키오의 꿈이 오버랩 되고 있었다.

확실히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말을 금과옥조로 삼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동화 <피노키오>의 상투적인 메시지 대신, 조금은 삐뚤어진 어른의 시각으로 보는 새로운 스타일의 <피노키오>와의 만남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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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른이 되어야 하는 피노키오의 노동윤리
    from Perspectivism 2011-02-18 01:13 
    스마트폰이 생긴 이후 전철에서 책을 읽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맥베스를 보다가 말고, 드라큘라를 보다가 말았지만 하나 끝까지 본 책이 있으니 바로 피노키오다. 고전을 '실제로' 읽어보면 만화, (위의 슈렉같은) 영화, 광고 등을 통해 각색된 몇 개의 장면들로만 기억하던 내용과 실제의 내용이 상당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피노키오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이야기,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생환한 이야기가 사실상..
 
 
 
<노년의 즐거움>을 리뷰해주세요
노년의 즐거움 - 은퇴 후 30년… 그 가슴 뛰는 삶의 시작!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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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앞으로 2050년이 되면 우리나라 인구의 40%를 65세 노인이 차지하게 되리라는 전망을 뉴스에서 보았다. 지금도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인구수가 점차 줄면서 슈퍼고령화사회로 진입하게 되리라는 전망이었다. 지금도 노인계층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데 과연 그 때가 되면 어떻게 될까?

이제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가운데, 일흔을 넘친 노친(老親)인 김열규 교수가 노년의 아름다움을 설파하는 책 <노년의 즐거움>을 내놨다. 확실히 학자답게, 노년의 삶에 대한 박학다식함으로 조금은 부정적인 우리들의 시각을 교정해 주면서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맞이하는 노년들의 삶에 대한 예찬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사실 노년의 삶은 청장년 시절에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었던 삶의 노련함이 꽃피우는 시절이라는 작가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세상살이를 하다 보니, 어느 정도는 살아봐야 알 수 있는 인생의 진리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젊음의 열정과 패기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진중하면서도 때로는 신산스러운 삶을 헤쳐온 이들만의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국문학과 민속학을 전공한 이답게, 우리네 선조들의 삶 속에 꽃핀 노년의 아름다움을 정감 있게 풀어 나간다. 특히 선비정신이 깃든 산수화나 서구 화가들의 작품세계를 통한 노장(老壯)에 찬미는 일품이다. 강희안 선생의 <고사관수도>에서 우리네 특유의 산수 속에 그야말로 녹아든 채, 산 속의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주인공 노친의 모습은 누구나 맞이하게 될 노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안처럼 다가온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중세의 격언처럼 과연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작가는 5금과 5권의 작은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각각 5개씩의 하지 마라와 하라로 구성된 이 5금과 5권 중에서 특히 노하지 마라와 관대하라는 특히 눈여겨 보아야할 항목이다. 그것은 마치 머리와 꼬리가 하나를 이루듯이 노하지 말고, 범사에 관대하라는 금언(金言)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책을 읽는 내내, 가슴 한편의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작가는 전문직에 종사를 해서 일흔 살이 넘도록 직업을 유지할 수가 있었지만 대개의 직업인들은 예순 정도면 일자리에서 퇴출되기 마련이 아니던가.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그네들의 심정을 작가는 톺아봤을까? 책의 말미에서 잠깐 노년의 버거운 삶에 대해 잠깐 언급했을 뿐, 오늘도 경제적 궁핍으로 시달리는 노년들의 삶의 현실에 대해서는 슬쩍 비껴나가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예전에 미국의 시골 우체국에 들렀었는데 나이 든 할아버지들이 창구에서 일하는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였다. 조금은 일이 서투르고, 늦어도 길에 늘어선 줄에서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노친들은 공동체에 봉사하는 일을 하면서 수입도 얻고 일하는 보람을 느끼는 한편, 같은 동네에 사는 이들과 호흡해 하는 작은 공동체적 삶이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우리네 일자리 나누기에 과연 노친들의 몫은 없는 걸까?

작가의 노년예찬에 딴죽을 걸 생각은 없다. 하지만 노년에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환과고독도 함께 하는 삶을 살기 마련인데, 조금 더 균형 잡힌 시선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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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집에 있을걸 - 떠나본 자만이 만끽할 수 있는 멋진 후회
케르스틴 기어 지음, 서유리 옮김 / 예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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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인기를 끌었던 광고에서처럼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고 했던가. 그렇다, 사실 여행은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고생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행이라는 매력을 포기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케르스틴 기어의 <그냥 집에 있을걸>은 바로 그 시점에서 출발한다. 일상의 단조로움을 떠나 삶에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 여행을 꿈꾸는 이들이 여행길에 나서게 되면서 체험하게 되는 다양하면서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만한 그런 흥미진진한 여행에세이들로 가득 차 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사실 여행 그 자체보다도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희열과 즐거움이 나중에 본 여행의 그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막상 여행길에 오르게 되면 오늘은 또 어디에서 잘까, 뭘 먹고 어디를 구경하러 가야 하나 그리고 낯선 음식들이 주는 불편함이 두려워지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그에 대한 반대급부가 여행의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여행에 대해 보여 주는 스펙트럼은, 여행을 하게 되면 느끼게 되는 그 수많은 포비아(공포증)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예측 불허의 날씨, 화장실문제, 우연한 로맨스, 인터넷에서 과대포장된 선전과는 상이한 숙소 그리고 현지 언어 사용에 이르기까지 일탈을 꿈꾸는 나그네들의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냥 집에 있을걸>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었던 에피소드는 철저한 환경보호론자인 옛 친구 크리스 가족의 방문기였다. 환경보호와 생태계 보존이라는 대의에는 공감하지만, 지나치게 자신들의 주장을 강요하면서 작가와 남편 프랑크에게 홈스테이 하는 동안 민폐를 끼치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오염의 주범인 문명의 이기들이 주는 편리함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직접적으로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를 하지 않는다는 그런 피상적인 회피에 안도감을 느꼈던 건 아닐까?

케르스틴 기어는 역시 어쩔 수 없는 서구출신의 여행자일 수밖에 없었나 보다. 특히 서구인의 시선으로 보는 여행지에 대한 선입견이 눈에 밟혔다. 예를 들어 인도여행을 같이 하자는 친구의 제안에 대해 자기가 굳이 비싼 돈을 들여 신성한 소가 사는 저개발 국가를 여행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글에서는 서구인들의 뿌리 깊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편견이 느껴지기도 했다. 동시에 프라다 모조가방을 원하는 그들의 이중성이란!

역시 여행지에서 벌어지는 불의의 사고에 대한 작가의 지적도 예사롭지 않다. 작가 자신이 여행 도중에 맹장 수술을 받았지만, 정작 여행자보험 처리를 하지 못해서 낭패를 당하는 이야기에서는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타인도 예외일 수는 없겠구나 싶었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양동이를 화장실 대용으로 쓸 수도 있어야 한다는 작가의 지론을 뒷받침해 주기 위한 에피소드 소개 역시 인상적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을 읽으면서 판에 박힌 듯한 직장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그네들의 삶이 부러웠다. 도대체 얼마나 여행을 많이 하기에, 평소에 만나기 힘든 지인들을 다른 나라에까지 가서 만날 수가 있는지. 알프스로 스키를 타러 가고, 그리스의 가족호텔로 휴가를 보내기 위해 떠나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우리가 인근의 대형마트를 찾는 것처럼 쉬운 일처럼 느껴졌다. 고작 해야 1년에 일주일 남짓한 휴가를 감지덕지하게 생각하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독일 출신인 케르스틴 기어의 독일식 유머는 아무래도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와의 공간적 거리만큼이나 낯설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그네들의 유머의 구조가 우리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글을 읽으면서 작가의 조금은 까칠해 보이는 유머들이 잘 와 닿지 않기도 했다.

요즘 휴가철을 맞아 공정여행의 실천에 대한 뉴스들이 눈에 띄고 있다. 단순하게 여행지를 찾아 잠시 동안 실컷 먹고 마시고 즐기는 여행이 아닌, 우리가 찾은 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이들과 건전한 소통을 통해 소비의 여행이 아닌 관계의 여행을 하자는 멋진 주장이 마음에 들었다. 이번 여름에 어디로 휴가를 떠날진 모르겠지만 그런 공정여행을 할 수 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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