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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집에 있을걸 - 떠나본 자만이 만끽할 수 있는 멋진 후회
케르스틴 기어 지음, 서유리 옮김 / 예담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한동안 인기를 끌었던 광고에서처럼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고 했던가. 그렇다, 사실 여행은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고생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행이라는 매력을 포기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케르스틴 기어의 <그냥 집에 있을걸>은 바로 그 시점에서 출발한다. 일상의 단조로움을 떠나 삶에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 여행을 꿈꾸는 이들이 여행길에 나서게 되면서 체험하게 되는 다양하면서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만한 그런 흥미진진한 여행에세이들로 가득 차 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사실 여행 그 자체보다도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희열과 즐거움이 나중에 본 여행의 그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막상 여행길에 오르게 되면 오늘은 또 어디에서 잘까, 뭘 먹고 어디를 구경하러 가야 하나 그리고 낯선 음식들이 주는 불편함이 두려워지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그에 대한 반대급부가 여행의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여행에 대해 보여 주는 스펙트럼은, 여행을 하게 되면 느끼게 되는 그 수많은 포비아(공포증)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예측 불허의 날씨, 화장실문제, 우연한 로맨스, 인터넷에서 과대포장된 선전과는 상이한 숙소 그리고 현지 언어 사용에 이르기까지 일탈을 꿈꾸는 나그네들의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냥 집에 있을걸>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었던 에피소드는 철저한 환경보호론자인 옛 친구 크리스 가족의 방문기였다. 환경보호와 생태계 보존이라는 대의에는 공감하지만, 지나치게 자신들의 주장을 강요하면서 작가와 남편 프랑크에게 홈스테이 하는 동안 민폐를 끼치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오염의 주범인 문명의 이기들이 주는 편리함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직접적으로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를 하지 않는다는 그런 피상적인 회피에 안도감을 느꼈던 건 아닐까?
케르스틴 기어는 역시 어쩔 수 없는 서구출신의 여행자일 수밖에 없었나 보다. 특히 서구인의 시선으로 보는 여행지에 대한 선입견이 눈에 밟혔다. 예를 들어 인도여행을 같이 하자는 친구의 제안에 대해 자기가 굳이 비싼 돈을 들여 신성한 소가 사는 저개발 국가를 여행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글에서는 서구인들의 뿌리 깊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편견이 느껴지기도 했다. 동시에 프라다 모조가방을 원하는 그들의 이중성이란!
역시 여행지에서 벌어지는 불의의 사고에 대한 작가의 지적도 예사롭지 않다. 작가 자신이 여행 도중에 맹장 수술을 받았지만, 정작 여행자보험 처리를 하지 못해서 낭패를 당하는 이야기에서는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타인도 예외일 수는 없겠구나 싶었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양동이를 화장실 대용으로 쓸 수도 있어야 한다는 작가의 지론을 뒷받침해 주기 위한 에피소드 소개 역시 인상적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을 읽으면서 판에 박힌 듯한 직장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그네들의 삶이 부러웠다. 도대체 얼마나 여행을 많이 하기에, 평소에 만나기 힘든 지인들을 다른 나라에까지 가서 만날 수가 있는지. 알프스로 스키를 타러 가고, 그리스의 가족호텔로 휴가를 보내기 위해 떠나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우리가 인근의 대형마트를 찾는 것처럼 쉬운 일처럼 느껴졌다. 고작 해야 1년에 일주일 남짓한 휴가를 감지덕지하게 생각하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독일 출신인 케르스틴 기어의 독일식 유머는 아무래도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와의 공간적 거리만큼이나 낯설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그네들의 유머의 구조가 우리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글을 읽으면서 작가의 조금은 까칠해 보이는 유머들이 잘 와 닿지 않기도 했다.
요즘 휴가철을 맞아 공정여행의 실천에 대한 뉴스들이 눈에 띄고 있다. 단순하게 여행지를 찾아 잠시 동안 실컷 먹고 마시고 즐기는 여행이 아닌, 우리가 찾은 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이들과 건전한 소통을 통해 소비의 여행이 아닌 관계의 여행을 하자는 멋진 주장이 마음에 들었다. 이번 여름에 어디로 휴가를 떠날진 모르겠지만 그런 공정여행을 할 수 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