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마릴린 - 이지민 장편소설
이지민 지음 / 그책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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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세기의 스타 마릴린 먼로와 처음으로 만난건 아주 오래 전, 주말의 명화 <뜨거운 것이 좋아>(Some Like It Hot, 1959)를 통해서였다. 어설픈 남장을 한 토니 커티스와 멍청한 금발(dumb blonde) 역할의 능청스러운 연기를 해내는 금발의 마릴린 먼로가 나오는 그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아무도 완벽하지 않아.”(Nobody's perfect.) 그리고 그녀가 한국전이 끝난 다음 해인 1954년 2월 한국을 찾았다는 사실은 아주 오래 뒤에 알게 됐다.

<나와 마릴린>의 작가 이지민 씨는 두 장의 사진에서 이 소설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전쟁 당시 유엔군과 북한 포로 사이에서 통역을 하던 여자 통역사의 사진과 한국을 방문한 마릴린 먼로의 사진이 그것이었다. 분명 한국말을 하지 못할 마릴린에게 통역사가 필요했을 것이고, 가능하면 남자보다는 여자가 제격이었을 것이다. 아마 이런 식으로 작가는 캐릭터 개발을 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해방 전후의 공간에, 전쟁이라는 시간적 배경이 지원해 주고 있으니 정말 입체적이면서도 다양한 변신이 가능한 주인공을 만들어내기에 용이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그렇게 탄생한 ‘나’의 이름은 앨리스 J. Kim, 그녀의 한국이름은 김애순이다. 확실한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있었을 법한 인물을 하나 내세운 다음, 나머지는 작가적 상상력으로 채우는 고전적인 작법이 동원된다. 소설의 시작은 한국전에 참전한 마릴린 먼로의 포스터를 애절하게 간구하는 어느 미군 G.I.의 편지로 시작된다.

당시 이미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이 되어 버린 야구스타 조 디마지오와 두 번째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차 일본에 와 있던 마릴린 먼로. 그녀가 미군 위문 협회(USO)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의 수레바퀴는 돌아가기 시작한다. 주인공 앨리스는 미군 부대의 타이피스트로 일하고 있지만, 전쟁 중의 트라우마로 인한 발작을 하곤 해서 이웃으로부터 양공주나 미친 여자로 간주되고 있다.

이지민 작가는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플래시백 기법으로 도대체 과거의 앨리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미 식민지시대 신여성답게 일본유학을 하며 미술을 배운 주인공은 해방 후 귀국해서 일제통치하의 한국에서 관료를 지낸 삼촌의 빽으로 취업하게 된다. 그리고 시작되는 앨리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적인 첫 사랑과 그에 따른 배신 그리고 음모의 소용돌이가 그야말로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한다.

정말 상상도 못했던 마릴린 먼로의 깜짝방문에 열광하는 미군들의 발작적인 함성이 어찌나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는지, 근래 아이돌 스타들의 팬덤은 저리가라 할 정도였다. 하긴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 같이 처절한 사투를 경험한 이들에게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할리우드 스타의 위문공연은 만지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신기루처럼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전쟁과 학살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것이야말로 존재적 가치가 있다는 신념으로 앨리스는 자신에게 닥친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오지만, 여전히 자신을 괴롭히는 원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바로 그 불행의 클라이맥스에서, 앨리스는 만인의 연인 마릴린 먼로와 아슬아슬하게 교차하는 접점을 이룬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움으로 구원을 얻는다.

예전에 영화포스터를 보면, 그 영화에서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의 대부분을 읽어낼 수 있다고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 논리를 책에도 적용을 하자면, 책의 표지 역시 비슷한 기능을 하지 않을까. <나와 마릴린>의 표지를 장식한 주인공 앨리스는 하룻밤 새의 고통과 번뇌로 하얗게 새어 버린 머리를 맥주로 염색을 하고 자신의 불행의 비밀을 담은 노란편지를 들고 있다. 아울러 그녀 뒤로 펼쳐지는 만다라 같은 문양들은 고뇌의 본질로 독자들을 이끌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팩션이라는 장르는 독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장르일진 몰라도, 작가들에게는 곤욕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차라리 있는 사실 그대로를 기술하는 것이라면 또 몰라도, 팩트를 기반으로 해서 픽션을 가미해서 독자들을 홀릴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건 마치 거리의 마술사가 저글링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너무 넘치지도, 그렇다고 해서 부족하지도 않은 중용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이야기의 동력을 유지하기란 참으로 난망한 과제가 아니던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나와 마릴린>은 절묘하게 팩트와 픽션의 균형을 맞추면서, 책읽는 재미까지 있는 수작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반세기 전에 우리나라를 찾은 당대의 슈퍼스타 마릴린 먼로가 좀 더 살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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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자걸스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37
김혜정 지음 / 비룡소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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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은 온통 걸들 천지처럼 보인다. 텔레비전에서는 무한걸스가, 그리고 음악계에서는 수많은 걸그룹들이 명멸을 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소설계에도 걸들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게 되니 이름하야, <닌자걸스>라고 하는 책이 나왔다. 작년 가을쯤에 청소년서적 전문 브랜드인 비룡소에서 출간된 <하이킹걸즈>라는 책으로 나의 관심을 끌었던 김혜정 작가의 ‘걸스’ 시리즈 그 두 번째다.

전작에서 두 명의 소녀들과 실크로드로 독자들을 초대했던 김혜정 작가는 이번에는 언제나처럼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이 난무하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 고등학교로 시선을 돌린다. 아니 하나의 주제를 관통하는 가운데, 다른 소재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해야 하나.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뼈를 깎아 만든 캐릭들을 세상에 풀어 놓는다. 주인공들은 모두 17살 난 정상적 삶의 궤도에서 조금은 이탈해 있는 인물들이다. 하긴 그 정상이라는 잣대 자체가 기성세대의 것이겠지만.

어느새 불어난 체중을 감당하지 못한 채, 여전히 탤런트를 꿈꾸는 화자인 고은비/고뚱땡 혹은 릴라 불리는 ‘나’는 오늘도 오디션에 도전을 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처참하며, 그녀의 배는 여전히 ‘헝그리’하고 엄마의 극성은 하늘을 찌른다. 그녀의 친구로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는 꽃미남 킬러 나지형, 키가 작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이소울 그리고 샤랄라 공주 역할의 백혜지가 <닌자걸스>의 주인공들이다.

작가는 나(고은비)의 입을 빌려 차례로 주인공들을 등장시키면서, 그들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와 몰입을 차분하게 유도해낸다. 그리고 하이틴을 주인공으로 삼은 성장소설답게 다이내믹한 전개 속도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군더더기들은 제외하고, 내달리는 모습이 멋졌다. 다이어트, 시험에 대한 압박, 과외 등 보통 십대 청소년들이 가지고 있는 일상의 이야기들이 담담하게 나열된다. 소설의 핵심갈등의 중심에는 모란여고 심화반인 모란반이 우뚝하게 버티고 서 있다.

대학진학율과 학습효과를 극대화시키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모란반은 차별과 서열화의 상징인 동시에, 들어가지 못한 학생들에게는 박탈감과 들어간 학생들에게는 상대적 우월감을 심어주는 매개체로 작동하고 있다. 물론 주인공 고은비에게는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연기에 대한 장애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을 옥죄는 과외를 통해, 우리는 하나라는 연대의식을 고취하게 된 나머지 세 명의 소녀들은 고은비 일병 구하기에 분연히 나선다. 그만큼 동지를 아끼는 순수한 마음으로? 아니면 제각각의 꿍꿍이가 있어서?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세상에 외치는 그 순간만큼은 절박하면서도 순수한 소망들이 독자들에게 전달되고 있었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야말로 <닌자걸스> 최고의 명장면이다. 이젠 진부해져 버린 표현이긴 하지만, 다시 한 번 감동의 도가니탕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덮으면서,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우리의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꿈을 펼쳐 보지도 못한 채 획일화된 교육이라는 틀에 갇혀 신음하고 있는지 그 이유가 참 궁금했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부모님들까지도 일류대학병과 ‘남들이 하니까’라는 마술 같은 주문에 헤어 나올 수가 없는 걸까? 그래도 그 여린 소녀들의 세상을 향한 외침에서 작은 희망을 엿볼 수가 있었다. 그들의 세상과의 소통을 위한 작은 노력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Go, Ninja Girl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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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프로젝트
박세라 지음 / Media2.0(미디어 2.0)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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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에서 꽤 오래 살아 봤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의 주체할 수 없는 역마살은 주기적으로 도지곤 한다. 책이나 혹은 잡지, 아니면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에서 매력적인 곳들을 보면 ‘아, 나도 저기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한 석 달쯤 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만, 경제적이거나 혹은 시간적 이유로 해서 실천에 옮기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하지만 <런던 프로젝트>의 작가 박세라 씨는 분연히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런던으로 떠났다. 솔직히 그녀가 왜 런던에 갔는가에 대해서 분명 책의 초반에서 읽었을 텐데, 그건 다 까먹고 말미에 가서 목적이 “낭비”였다라는 낱말에 왜 이렇게 꽂혔는지 모르겠다. 다시 한 번 부럽다, 그렇게 낭비할 수 있다는 여유가.

살면서 유럽에 두 번 갔었는데, 사실 영국과 런던은 한 번도 나의 목적지가 아니었다. 왠지 대륙과 동떨어진 채 나 홀로 유로(Euro)도 거부하고 파운드화를 쓰는 고집쟁이들의 나라가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 <런던 프로젝트>를 통해 본 바에 의하면 그런 나의 생각들이 모두 고정관념이고, 편견이었다고 자수해야할 것 같다.

작가가 그리는 입헌군주제를 택하고 있는 영국은 공화제 국가인 대륙의 프랑스와 독일과는 또 다른 맛이 배어 있었다. 기품이라고나 할까? 책의 곳곳에서 여왕에 대한 이야기들과 프린세스 다이애나 그리고 왕실납품이라는 낱말들이 확실히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왕국이라는 이미지들을 독자들에게 전달해 주고 있었다. 왕을 모시고 사는 이들의 심리는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불쑥 들었다.

확실히 남성과는 여성 특유의 세심하면서도 주변의 사물들에 대한 빼어난 관찰력이 돋보이는 글과 사진들이 인상적이었다. 매주 마다 <이 주의 낭비 결산>이란 코너를 만들어서, 나라면 한 번 받아 보고 내버렸을 영수증이나 클럽이나 혹은 각종 이벤트들을 선전하는 플라이어들을 곱게 모아 찍은 사진들을 통해 자신의 ‘낭비들’(물론 긍정의 뜻이다!)로 꾸며지는 알찬 삶들을 소개한다. 이 기발한 아이디어란!!!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좋은 장점으로 꼽고 싶은 점은 바로 다양성이다. 열린 마음으로 주변의 모든 것들과 소통하는 가운데(물론 쇼핑도 빠지지 않는다, 아마 남자들이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이런저런 재밌는 에피소드들과 정말 화려하면서도 멋진 런던의 이모저모를 다룬 이미지들을 요소요소에 잘 배치해주고 있다. 특히 작가도 런던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꼽았던 픽토그램도 빠질 수가 없다.

런던에 거주를 하면서 주말마다 바지런히 다닌 주말여행을 통해 영국 교외에 멋진 관광지와 만나는 즐거움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휴일 마켓에 어워드 리본으로 무장하고 나가, 현지인들과 부대끼는 삶의 스케치 역시 높이 평가할만하다. 그러니까 순전한 관광객의 시선이 아닌 비록 임시적이긴 하지만 체류자로서의 여유라고나 할까? 아마 짧은 여행을 하는 이들은 절대 짚어낼 수 없는 런던의 숨은 볼거리들과 할거리들 그리고 먹거리들의 향연이 조근조근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그녀가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다양성은 마치 양날의 칼처럼 책으로의 몰입을 막는 훼방꾼 같기도 하다. 왜 15주나 되는 이야기들을 읽으면서도 패턴에 적응을 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아직 가보지 못하거나 경험부족으로 인한 관심도의 저하 탓일까? 작가의 마켓 입성기가 좀 더 궁금했었는데 살짝 맛보기만 보여 준 것 같아 많이 아쉬웠다.

<런던 프로젝트>를 읽으면서 영화 <노팅 힐>과 <러브 액츄얼리>이 이 책과 참 궁합이 맞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들을 보고 나면 아마 책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책에 나오는 것만으로 부족한 독자들이라면, 작가가 아주 친절하고 꼼꼼하게 적어 놓은 인터넷 사이트들을 직접 방문해 보는 것도 간접적으로나마 런던을 체험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세계화에는 반대하지만, 이렇게 지구촌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엮는 세계화라면 대찬성이다. 참 그거 아나? 영국에는 캔커피가 없다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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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날>을 리뷰해주세요.
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강경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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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년 11월 1일의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런 간단한 질문으로 <운명의 책>은 시작된다. 가톨릭 국가 포르투갈의 축일이었던 만성절 오전 9시 30분 경에 시작된 대지진의 여파로 인해, 해일과 화재가 덮친 세계제국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고 만다. 이 사건은 그냥 인류사에 흔히 등장하는 하나의 대재앙으로 기록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니콜라스 시라디는 중세에서 근대로, 신의 세계에서 합리적 사고가 지배하는 이성의 세계로의 극적 전환이 이루어진 사건으로 리스본 대지진을 바라보고 있다.

한 때 이웃 에스파냐와 더불어 전 세계를 주름잡던 해상왕국 포르투갈 왕국은 세계 각처의 식민지로부터 무한대로 유입되는 금과 다이아몬드 그리고 노예들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식민지로부터의 수탈경제에만 의존하느라 라이벌 국가들인 영국과 네덜란드처럼 안정적인 자국 산업 건설에는 미처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예수회와 보수적인 귀족들의 교권주의로 인해 계몽철학 사조가 전 유럽을 휩쓰는 동안에도 여전히 포르투갈은 중세적 시대정신을 고집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이교도들인 유대인들을 박해하고, 학살하면서 국가경제를 이끌어나갈 상인과 지식인 계층의 다수를 차지하는 유대인들이 경쟁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포르투갈은 개혁추진을 위한 인적 자원들을 내쫓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에 정착하게 된 유명한 포르투갈 출신 유대인 중의 한 명이 바로 스피노자라고 했던가.

이런 시대적 상황을 바탕으로 해서 18세기 중반 리스본을 강타한 대지진의 여파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물론 인적 물적 피해는 둘째 치고, 근대 유럽 역사에서 이런 자연재해는 전무후무했다. 정치적인 고려도 한몫을 했지만 인본주의적인 차원에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포르투갈의 재난 대책에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이런 국가적 위기를 새로운 시대로 도약을 위한 결정적 기회로 본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포르투갈의 총리로 위기극복에 앞장 선 카르발류였다.

리스본 대지진이 타락한 포르투갈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재앙이라는 예수회 출신 사제들의 공세에 분연히 맞서, 자연재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카르발류는 대대적인 리스본 재건공사에 나서게 된다. 물론 그 바탕에는 신권주의에 사로잡혀 종교재판소의 무소불위한 권력이 작동하고 있던 중세적 포르투갈을 근대국가로 탈바꿈시키겠다는 총리 카르발류의 의지와 국왕 주제 1세의 적극적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브라질로 대변되는 식민지들로부터의 유입되는 물적 토대가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고금을 망라하고, 돈 없이 되는 일이 있었던가.

물론 카르발류의 이런 개혁에 반동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회 소속의 사제들과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구귀족들의 반대는 리스본 재건과 국가개조에 걸림돌이었다. 그 결과, 카르발류는 국왕 주제 1세로부터 부여 받은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해서 반대파들을 제압해 나가면서, 식민지에서 산출된 부를 바탕으로 근대국가 포르투갈 건설에 나서게 된다.

작가 니콜라스 시라디는 참 다양한 각도에서 리스본 대지진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인간의 구원과 사랑을 강조하는 기존의 가톨릭 신학 시스템이 1만 명에서 6만 명에 달하는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된 대재앙에 이성적인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아울러 당시 많은 철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인간의 존재가치와 낙관주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이런 대재앙을 근대국가 건설의 호기로 삼아, 근대적인 상하수도 설비와 도로망을 갖춘 새로운 리스본을 만드는 과정을 작가는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근대로의 이행에 있어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교육 분야의 개혁과 인재양성도 빠뜨리지 않고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연초에 읽었던 주제 사라마구의 <수도원의 비망록>이 바로 떠올랐다. 포르투갈의 전제군주 주앙 5세가 야심차게 건립한 마프타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발타자르와 블리문다의 러브 스토리의 배경이 바로 예의 18세기 포르투갈이지 않았던가. 이 책은 <운명의 날>에서 언급이 되지 않는다. 대신 당시 프랑스 출신의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리스본 대지진의 모티브를 따서 자신의 소설 <캉디드>에 에피소드로 사용했다고 한다. 아마 이 두 책을 읽으면, <운명의 날>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기에 일어난 중대한 사건에 대한 작가의 뛰어난 혜안과 다양한 분야에서의 해석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는데, 아직도 쓰나미와 허리케인 카트리나 같은 자연재해들에 대한 미숙한 대처와 사후처리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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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에이지 3:공룡시대 - Ice Age 3: Dawn of the Dinosaur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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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개인적으로 3D 애니메이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 한 번 만들어 본 경험 탓일까? 물론 거의 습작이긴 했지만 모델링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델에 애니메이션을 주고 렌더링 그리고 포스트프로덕션 등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스토리도 만만치 않았지 아마?

20세기 폭스 사에서 꾸준하게 나오고 있는 <아이스 에이지>(빙하시대) 3편이 나왔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나오나 싶었는데, 부제에 달린 것처럼 공룡이 나온단다. 아이들에게 공룡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이 왜 그렇게 매력적인 걸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여튼 대단한 시리즈다. 




언제나 그렇듯이 다람쥐 스크랫의 에피소드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도토리를 찾아 나섰다가 우연하게 예쁜 날다람쥐 스크레티와 도토리를 두고 사투를 벌이게 된다. 이 귀여운 녀석들이 아웅다웅 다툼을 벌이는 모습이란 정말!

이번에도 역시 매니와 엘리 맘모스 부부와 우리의 말썽꾸러기이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수다꾼 나무늘보 시드, 사납지만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 호랑이 디에고, 조연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주머니쥐 크래쉬와 에디 그리고 송곳니가 아주 인상적인 다람쥐 스크랫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아이스 에이지>를 빛내 주었던 애니메이션 스타들이 총출동한다.

1편과 2편은 하도 오래 전에 봐서 기억이 잘 나는데, 3편에서의 키워드를 골라 보라고 한다면 아마 가족애와 역시나 진한 우정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출산을 앞둔 엘리와 매니 부부는 태어날 주니어를 위해 놀이동산도 준비하고 부모가 될 준비에 분주하다. 너무나 안락하고 평화롭지만 따분한 삶에 지친 디에고는 친구들을 뒤로 하고 떠난다는 선언을 한다. 한편 나무늘보 시드는 우연한 기회에 알 세 개를 구하게 되고 애지중지하며 친구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기도 부모가 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그런데 그 알의 주인이 누군지 아나? 바로 티라노사우르스(이하 티렉스로 호칭)다! 자기 자식들을(?) 잃은 엄마 티렉스는 분노에 차서 시드네 마을에 들어선다. 새끼 티렉스들을 보호하려고 하다가 결국 시드마저 엄마 티렉스에게 잡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자, 이제 시드의 친구들이 행동에 나설 타이밍이 아니던가. 위험천만한 정글을 지나, 죽음의 계곡과 용암폭포를 거쳐 말썽쟁이 시드를 찾아 나선다. 점점 더 진정한 우정이 휘발해 버리는 세상에 역시 관계와 우정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20세기 폭스 사는 친절하게도 알려 주고 있다. 그런 우정을 찾아볼 수가 없으니 영화로라도 대리만족하라는 계언일까? 





항상 시리즈마다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하는 <아이스 에이지> 시리즈에서 이번에도 역시 빠지지 않고 멋들어진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건 바로 캡틴 잭 스패로우를 연상시키는 이미지의 외눈박이 족제비 벅이다. 영국 출신 배우 사이먼 페그가 보이스를 맡아 영국식 악센트로 다른 녀석들에 비해 훨씬 더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하 공룡세계를 휘잡고 있는 알비노 수코미무스 “루디”에게 오른쪽 눈을 잃는 대신 녀석의 이빨을 하나 얻어 칼로 삼아 가지고 다니는 외로운 캐릭터다. 매니와 디에고 일행을 식충식물로부터 구해내고, 길라잡이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는 그야말로 감초 같은 녀석이다. 물론 말미에 시드 구출에 있어서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애니메이션 영화들은 하나 같이 교훈적인 내용들을 필히 담고 있다. 정상적인 가족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시드와 디에고 같은) 외톨이들도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선 두발 벗고 나서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3D 애니메이션 기법의 발전은 하루가 다르게 놀라워져서, 이젠 정말 실사 영화는 저리가라할 정도의 디테일까지도 가능하게 된 것 같다. 예전에는 보통 동물들의 털 묘사가 참 어려웠었는데,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는 것을 장면에서마다 느낄 수가 있다. 리플렉션과 그림자 같은건 두말할 것도 없다.

확실히 좋은 장편 애니메이션이 되기 위해서는 기승전결의 멋들어진 구조를 제대로 갖춘 스토리라인의 필요하다는 것을 이번 <아이스 에이지> 3탄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전후로 해서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이야기 구조가 절로 아하~하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기발한 아이디어들로 가득 차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재밌으면서도 멋진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첫 번째로 스크랫과 섹시 날다람쥐 스크레티가 도토리를 사이에 두고 격렬한 탱고를 추는 장면 하나, 두 번째로는 족제비 벅이 크래쉬와 에디를 데리고 익룡을 잡아채서 시드 구조에 나서는 공중전 장면이다. 지난 2탄에서 수중전의 묘미를 보여 주었다면 이번 3탄에서는 업그레이드된 공중전의 재미가 쏠쏠치 않다.

촌철살인의 유머로 가득 무장한 <아이스 에이지>의 빙하시대를 보면서 이 무더운 여름날을 보내는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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