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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마릴린 - 이지민 장편소설
이지민 지음 / 그책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내가 세기의 스타 마릴린 먼로와 처음으로 만난건 아주 오래 전, 주말의 명화 <뜨거운 것이 좋아>(Some Like It Hot, 1959)를 통해서였다. 어설픈 남장을 한 토니 커티스와 멍청한 금발(dumb blonde) 역할의 능청스러운 연기를 해내는 금발의 마릴린 먼로가 나오는 그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아무도 완벽하지 않아.”(Nobody's perfect.) 그리고 그녀가 한국전이 끝난 다음 해인 1954년 2월 한국을 찾았다는 사실은 아주 오래 뒤에 알게 됐다.
<나와 마릴린>의 작가 이지민 씨는 두 장의 사진에서 이 소설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전쟁 당시 유엔군과 북한 포로 사이에서 통역을 하던 여자 통역사의 사진과 한국을 방문한 마릴린 먼로의 사진이 그것이었다. 분명 한국말을 하지 못할 마릴린에게 통역사가 필요했을 것이고, 가능하면 남자보다는 여자가 제격이었을 것이다. 아마 이런 식으로 작가는 캐릭터 개발을 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해방 전후의 공간에, 전쟁이라는 시간적 배경이 지원해 주고 있으니 정말 입체적이면서도 다양한 변신이 가능한 주인공을 만들어내기에 용이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그렇게 탄생한 ‘나’의 이름은 앨리스 J. Kim, 그녀의 한국이름은 김애순이다. 확실한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있었을 법한 인물을 하나 내세운 다음, 나머지는 작가적 상상력으로 채우는 고전적인 작법이 동원된다. 소설의 시작은 한국전에 참전한 마릴린 먼로의 포스터를 애절하게 간구하는 어느 미군 G.I.의 편지로 시작된다.
당시 이미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이 되어 버린 야구스타 조 디마지오와 두 번째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차 일본에 와 있던 마릴린 먼로. 그녀가 미군 위문 협회(USO)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의 수레바퀴는 돌아가기 시작한다. 주인공 앨리스는 미군 부대의 타이피스트로 일하고 있지만, 전쟁 중의 트라우마로 인한 발작을 하곤 해서 이웃으로부터 양공주나 미친 여자로 간주되고 있다.
이지민 작가는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플래시백 기법으로 도대체 과거의 앨리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미 식민지시대 신여성답게 일본유학을 하며 미술을 배운 주인공은 해방 후 귀국해서 일제통치하의 한국에서 관료를 지낸 삼촌의 빽으로 취업하게 된다. 그리고 시작되는 앨리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적인 첫 사랑과 그에 따른 배신 그리고 음모의 소용돌이가 그야말로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한다.
정말 상상도 못했던 마릴린 먼로의 깜짝방문에 열광하는 미군들의 발작적인 함성이 어찌나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는지, 근래 아이돌 스타들의 팬덤은 저리가라 할 정도였다. 하긴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 같이 처절한 사투를 경험한 이들에게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할리우드 스타의 위문공연은 만지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신기루처럼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전쟁과 학살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것이야말로 존재적 가치가 있다는 신념으로 앨리스는 자신에게 닥친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오지만, 여전히 자신을 괴롭히는 원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바로 그 불행의 클라이맥스에서, 앨리스는 만인의 연인 마릴린 먼로와 아슬아슬하게 교차하는 접점을 이룬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움으로 구원을 얻는다.
예전에 영화포스터를 보면, 그 영화에서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의 대부분을 읽어낼 수 있다고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 논리를 책에도 적용을 하자면, 책의 표지 역시 비슷한 기능을 하지 않을까. <나와 마릴린>의 표지를 장식한 주인공 앨리스는 하룻밤 새의 고통과 번뇌로 하얗게 새어 버린 머리를 맥주로 염색을 하고 자신의 불행의 비밀을 담은 노란편지를 들고 있다. 아울러 그녀 뒤로 펼쳐지는 만다라 같은 문양들은 고뇌의 본질로 독자들을 이끌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팩션이라는 장르는 독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장르일진 몰라도, 작가들에게는 곤욕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차라리 있는 사실 그대로를 기술하는 것이라면 또 몰라도, 팩트를 기반으로 해서 픽션을 가미해서 독자들을 홀릴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건 마치 거리의 마술사가 저글링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너무 넘치지도, 그렇다고 해서 부족하지도 않은 중용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이야기의 동력을 유지하기란 참으로 난망한 과제가 아니던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나와 마릴린>은 절묘하게 팩트와 픽션의 균형을 맞추면서, 책읽는 재미까지 있는 수작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반세기 전에 우리나라를 찾은 당대의 슈퍼스타 마릴린 먼로가 좀 더 살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