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이야기 1 - 아버지의 시대
리쿤우, 필리프 오티에 지음, 한선예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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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중국 윈난 출신 리쿤우 작가의 <중국인 이야기> 합권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냉큼 도서관에 가서 첫 번째 권을 빌려 왔다. 아쉽게도 1권만 나오고 나머지 권이 나오지 않고 있다가 이참에 통으로 나온 모양이다. 지난 달부터 계속해서 중국 관계 서적들을 섭렵하고 있는 중인데 어쩌면 올봄 독서의 궤적이 중국을 향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대학 시절 역사를 전공해서 그런진 몰라도, 역사책 읽는 속도가 소설 보다 더 빠르다는 건 안 비밀. 특히나 중국사에 대해서는 더더욱.


월초에 술 먹고 나서 책을 잃어 버리는 바람에 독서 슬럼프에 빠졌었는데 알라딘에 책 사러 가서 서서 읽은 <중쇄 미정>과 리쿤우 작가의 <중국인 이야기>로 완전히 독서 슬럼프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역시 책읽기 슬럼프 탈출의 가장 좋은 방법은 만화 읽기가 아닐까 싶다.


서두가 길었다. 리쿤우 작가는 3년 전에 <내 가족의 역사>라는 그래픽노블로 처음 만났었다. 이번 <중국인 이야기>에서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방 세대인 작가 샤오리가 직접 겪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중국 남부 윈난성 쿤밍 출신으로, 아버지는 공산당 서기 출신 혁명가로 자본계급 부르주아를 경멸하는 골수 혁명당원이었다. 작가는 직접적으로 독재자 마오쩌둥을 비난하지 않고, 혁명 초기에 모든 인민이 우러러 보던 지도자의 영락성쇠를 있는 그대로 조명하고 있다.


제국주의 국가 영국과 미국을 따라 잡기 위해 모든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쇠붙이를 공출하는 장면은 이미 지난달에 읽은 옌롄커 선생의 <사서>에서 이미 접해서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쥐를 박멸하고, 파리와 모기 그리고 벼룩, 이와 전쟁을 벌이는 장면은 우리나라 유신 시절 새마을운동을 떠올리기도 했다. 인민을 동원하는 독재는 그런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걸까. 모두가 알다시피 그냥 약진도 아닌 대약진을 표방한 운동은 파멸적 기근으로 농촌과 도시 모두에 파멸적 결과를 불러왔다. 중국 역사상 최악의 장기간에 걸친 대기근으로 수를 파악할 수 없는 이들이 굶어 죽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수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의 귀중한 역사 유산들이 생산성 향상을 위해 파괴되는 참상을 작가는 재현해냈다. 오랜 세월, 착취와 억압 그리고 수탈을 견딘 인민에게 자유와 평등을 약속했던 혁명의 결과가 고작 기아와 죽음 뿐이었다니 허탈할 따름이다.


하지만 진짜 비극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조반유리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내세워 연이은 실정으로 권위가 약화되어 가고 있던 마오쩌둥은 십대 홍위병들을 동원한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전통 가치들은 모조리 파괴하기에 이른다. 극중에서 샤오리는 빼어난 그림 그리기 실력을 발휘해서 홍위병의 일원으로 인민의 적으로 규정된 이들은 공격하는데 앞장섰었던 참담한 사실을 고백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학교 교장으로 복무하던 이들이 고깔모자를 쓰고, 자신을 비판하는 글판을 목에 걸고 조리돌림을 당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것도 자신의 제자들 앞에서. 이런 비정상적인 사태가 마오쩌뚱이 죽은 1976년까지 진행되면서 중국의 역사발전의 추는 미래가 아닌 퇴행적으로 진화되었고, 거의 한 세대에 대한 교육이 후퇴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한편, 열혈 공산당원이었던 아버지 라오리 집안이 지주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밝혀지면서 아버지 역시 무사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재교육 수용소에 갇히고, 가족들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재난의 시기를 피할 수가 있었다. 1972년 인민해방군에 선전화가로 지원한 샤오리는 4년 뒤, 마오쩌둥이 죽었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한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실감한다.

리쿤우 작가의 멋진 그래픽노블을 통해 아직까지도 중국에서는 위대한 영도자로 추앙받는 마오쩌둥의 실체를 다시 만나볼 수가 있었다. 우선 리쿤우 작가의 그림 스타일은 유럽 스타일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시나이로 작업을 맡은 필리프 오티에 덕분일까? 왠지 서구인이 그린 중국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당대에 대한 좀 더 생생하고 디테일한 르포르타주를 원했지만, 모두의 뇌리에서 지우고 싶은 어두운 과거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라는 민감한 주제라 그런지 그런 디테일까지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을까.


문화대혁명이라는 친위쿠데타를 통해 인민들 간에 서로 믿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고, 오직 모든 권력을 독재자에게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집권연장에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이미 혁명공약은 폐기되었고 수년에 걸친 전쟁으로 피폐해진 삶을 역전시키기에는 지도부의 능력과 대내외적 조건들은 역부족이었다.


1부 <아버지의 시대>에서 국공내전의 승리 이후 격동의 시절을 다뤘다면 나머지 2, 3부에서는 아마도 개혁개방를 시대를 그릴 것 같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숙청당한 덩샤오핑과 류사오치 그리고 천윈 그 중에서도 특히 작은 거인이라 불리며 오늘날의 신중국을 만든 덩샤오핑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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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쇄 미정 - 말단 편집자의 하루하루
가와사키 쇼헤이 지음, 김연한 옮김 / 그리조아(GRIJOA)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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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북스에서 나온 출판물 <중쇄를 찍자>를 먼저 읽고 싶었는데 후발 주자인 <중쇄 미정>을 읽게 됐다. 연초 서적유통 업계의 송인서적 부도 사태로 도서유통을 의뢰했던 중소 출판사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는 뉴스를 들은 게 불과 얼마 되지 않은 느낌이다. 난마처럼 얽힌 출판업계의 관행 문제에서부터 시작해서, 무엇보다 이제는 더 이상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세태로 출판계의 불황 행진은 단군 이래 계속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도 책을 꾸역꾸역 읽는 동지들이 있는가 하면 활자 대신 모바일의 신세계에 빠져 책을 멀리 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다. <중쇄 미정>의 저자 가와사키 쇼헤이 씨는 일본 가상의 표류사라는 작은 출판사를 바탕으로 출판계를 다룬 멋진 스토리텔링을 보여준다.

 

마감에 쫓기는 편집자의 일상에서부터 시작해서, 오탈자 없는 책은 없다며 신출내기 편집자를 위로하는 편집장, 마작에 빠진 저자로부터 원고를 받아 내기 위해 마작판에 직접 뛰어 들어 손해를 만회하는 실력을 보여 주는 주인공의 모험담이 쉴 새 없이 전개된다. 역시 극화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재미도 있으면서 또 출판강국이라는 바다 건너 이웃 나라에서 소규모 출판사들이 거의 하루에 한 개씩 무너져 가는 현실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수십만권씩 팔리는 베스트셀러를 취급하는 대형 출판사는 문제가 없겠지만, 권종을 늘리고 변덕스러운 독자들의 취향에 맞는 책을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 자신이 독자라는 입장에서 책을 만들고 싶다는 편집자들의 고군분투가 아주 실감나게 그려졌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편집자란 무엇일까? 가장 저렴한 비용의 문화생활을 위한 소재를 공급하기 위한 산업전사일까? 아니면 책의 창조자라고 할 수 있는 저자와 소비자인 독자를 연결하는 중매쟁이라고 해야 할까. <중쇄 미정>을 읽으면서 다양한 상상을 해보게 된다. 계속되는 출판계의 불황을 도서정가제 탓으로 돌리기도 하는 것 같은데 독서 및 출판강국 일본에서는 전면적인 형태의 도서정가제가 실시되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온라인 서점을 중심으로 해서 자행되고 있는 도서할인율 때문에 할인을 처음부터 고려한 거품이 책 가격에 형성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책 가격이 비싸니 도서관이나 중고서점을 이용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 아닌가. 사실 책 본연의 목적이 독서에 있다면 굳이 소장하지 않아도 읽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닐까? 물론 책이 가진 여러 가지 특성 중에 지질감이 느껴지는 물성과 소장에 도달하게 된다면 또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말이다.

 

일본 출판계의 또다른 특징이라고 한다면, 두 개 정도의 도서유통사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책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책의 유통을 위해서는 책을 전국에 뿌릴 도서유통사의 마음에 드는 것도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루키 같은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의 경우는 다르겠지만, 군소출판사들 같은 경우는 열심히 만든 책 샘플을 가지고 심판의 날에 앞서 배급수량을 판정받는 게 향후 이어질 중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작은 출판사일수록 중쇄를 찍어야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만큼 책이 잘 팔린다는 말이겠지. 전국에 최소한 2,000명의 든든한 후원자들만 있다면 얼마든지 책을 만들겠다는 그들의 결기가 남다르게 들렸다. 어느 출판사 사장님은 예전에 술자리에서 전국 2,000개 도서관에서 납본할 수만 있다면 꼭 찍고 싶은 책이 있다고 말하셨지 아마.

 

기획회의에서 잘 팔릴 책을 만드는 게 중요하냐 아니면 편집자들이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드는 게 중요하냐는 논의를 보면서, 어쩌다 걸리는 베스트셀러 책을 발판으로 삼아 안 팔리지지만 소수의 독자를 위한 책을 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한 어느 편집자의 말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게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김밥이나 짜장면만 먹는다고 생각해 보시라 얼마나 답답한가. 가끔은 파스타도 먹고 삼겹살도 먹어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긴 또 누군 그걸 주식으로 삼을 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출판사도 사업을 영위해야 하고 이익이 중요하기 때문에 분기 말 결산을 앞두고 표류사 직원들이 한 데 모여 배틀 로열을 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보너스를 지급하라는 주장과 유급휴가를 보장하라는 요청이 난무하고, 책을 더 팔아먹기 위해 이벤트도 하고 영업력을 강화하라는 장면을 보니 세상사는 건 어디나 다 똑같구나 싶어졌다. 물론 그들은 문화사업의 최전선에서 우리 독자를 위해 대신 싸우는 전사들이라는 점이 다를 뿐.

 

배틀 로열이 끝나고 연이은 적자 때문에 도산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돈 많이 받는다며 편집장이 사표를 날릴 쯤, 갑자기 등장한 싸장님이 자신이 가진 산을 팔아 손해를 벌충하겠다며 나선다. 멋진 싸장님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만화 같은 설정이 아닐 수 없겠지만. 뭐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아무리 출판업계를 다룬 만화라지만, 만화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지난 화요일날 회식 때 들고 다니던 책도 잃어버리고 잠시 책읽기 슬럼프에 빠졌었는데, <중쇄 미정>으로 본궤도에 올랐으면 하는 그런 바램이다. <중쇄를 찍자>도 읽고 싶은데 타이밍이 좀 엇갈렸다. 이제 진짜 봄이다, 책읽기에 더욱 매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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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털 같은 나날
류전윈 지음, 김영철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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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모두 세 권의 중국 소설을 읽었다. 한국 소설보다는 영미소설을 주로 읽는 편인데, 간만에 중국 소설을 읽다 보니 색다른 재미에 빠져 자그마치 세 권이나 읽게 됐다. 세 권 모두 처음으로 만나는 옌롄커와 류전윈 작가의 책들로 가독성이 뛰어나서 바로 바로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이 책은 중국문학 번역의 일가를 이룬 김태성 씨 대신 김영철 씨의 번역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류전윈 작가의 책이라고 했던가. 황석영 선생이 극찬했다는 띠지가 눈에 띄었다.


<닭털 같은 나날>은 동명의 소설과 <기관> 그리고 <1942년을 돌아보다> 이렇게 세편의 중편소설을 한데 묶은 소설집이다. 첫 번째 주자로 등장한 표제작 <닭털 같은 나날>은 출근 전 두부를 사야 하고, 근근히 살아가는 우리네 삶과 별다를 게 없는 처지의 주인공 린의 가정사를 다루고 있다. 육아전쟁을 치러야 하는 우리의 현세태를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많은 공감이 갔다. 출산과 육아 모두 개인의 책임이 되는 세상에, 인구절벽이 눈앞에 있다며 호들갑을 떨면서도 정작 지난 10년 동안 엄청난 비용을 출산장려에 사용했지만 별무소용이라는 뉴스가 떠올랐다. 취업, 주거비용 등 모든 삶의 지표가 바닥을 치는 현실세계에서 자력으로 아이를 낳고 기르라는 구호가 허망할 따름이다.


대처에 자리 잡은 린에게 극성스러운 각다귀 떼처럼 달려드는 고향 사람들을 대접해야 하는 암묵적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주목을 끈다. 합리적 관계보다는 연줄에 인연을 대는 시스템적 문제라고나 할까. 병에 걸려 도움을 받을까하는 심정으로 고향 은사도 비슷한 사정으로 주인공을 찾지만, 아내 리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체면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다. 무서운 속도로 후진 사회주의 국가에서 시장경제를 도입한 개발도상국으로 발전했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관계의 파괴가 부산물로 떡하니 자리잡고 있더라는 류전윈 작가 나름의 비판이라고 해야 할까. 붕괴된 공동체주의를 대신한 소가족 중심 이기주의 발호가 엿보였다.


아내와 협력해서 아이 돌보기에 게으른 가정부를 비난하는 장면, 아내의 이직을 위해 인맥을 동원해서 청탁을 넣었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하고, 아이 유아원 입학을 위해 전전긍긍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가 앙숙이었던 이웃의 도움으로 간신히 원하는 유아원에 들어갔지만 그것 역시 다른 꿍꿍이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찝찝해 하는 주인공의 심리묘사가 어쩌면 그렇게 우리네 그것을 적확하게 겨냥하고 있는지 놀랄 지경이었다. 그것은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한편으로는 여전히 모두에게 공평무사한 시스템 대신 고놈의 “꽌시”에 좌우되고 있는 중국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냈다고나 할까.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유효한 ‘관계’에 얽힌 이야기들이 새삼스럽지 않았다.


다음 주자인 <기관>에서는 좀 더 사회주의/공산주의 중국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직장에 종사하고 있는 일단의 인물들이 잇따라 등장한다. 사건의 발단은 장의 부국장 승진이었다. 파벌에 의해 간부가 될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장이 파벌 다툼에 의해 어부지리로 승진하게 되자, 원래 있던 부처에서 승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보이지 않는 사투가 벌어진다. 느닷없는 차오 여사와 스캔들로 낙마할 위기에 처한 장 부국장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고, 승진을 위해 잠시나마 감정을 감추고 합종연횡 하는 장면이 마치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전국시대에 펼쳐지는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뒤에서는 뒷담화로 열을 올리기도 하지만, 또 앞에서는 비굴한 모습을 보이며 날카로운 발톱을 감추고 아부하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스물아홉 살 먹은 린의 직장생활 적응기는 헬조선에 사는 우리 청년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어 더 공감이 갔다. 입사 초기, 치기 어린 청년처럼 행동하던 린은 직장 생활 4년 만에 비로소 자신이 직장에서 보여준 태도로는 도저히 승진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다. 그가 승진에 목을 매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보다 나은 주거공간의 확보다. 평사원 입장에서는 타인과 함께 사는 합거를 해야 했는데, 거의 생지옥 같은 합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라면 남들은 먹다 남은 배 껍질을 치우는 허드레 청소부터 시작해서, 장 부국장의 이삿날 전심전력으로 하는 노동도 마다하지 않을 태세다. 생존을 위해 기본적 존엄마저도 부정하게 만드는 냉혹한 사회주의 평가 시스템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당원이 되기 위해 차오 여사에게 아부도 마다하지 않지만, 역효과만 내고 승진과 입당이 연달아 거절되는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보잘 것 없는 감투와 주거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직장에서 벌어지는 요지경 같은 암투에 대한 디테일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마지막 작품인 <1942년을 돌아보다>는 유사 기록문학 같은 르포르타쥬 형식의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세 소설 중에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1942년,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표현으로는 민국 31년 류전윈 작가의 고향 허난성에는 기록적인 가뭄과 메뚜기떼의 습격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 기아가 발생했다. 무려 3,0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잠정적 기아피해자였고 그 중에 1/10에 해당하는 300만명이 기아사태로 숨졌다. 당시의 참상은 <타임>지 특파원이었던 테오도르 화이트 기자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렇다면 당시 중국의 지배자이자 기아사태를 해결하지는 못해도 완화시킬수 있는 장제스 위원장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애석하게도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조국에 대한 걱정과 항일전을 이끌어야 할 장 위원장에게 기아사태는 모든 것에 우선한 과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각급 단위에서 상신된 보고는 가볍게 무시됐다. 한 마디로 말해 과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설상가상으로 기아에 시달리는 허난성 농민들에게 부과된 현물세와 군량에 대한 경감조치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아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기아 난민이 되고, 도처에 널린 시신이 개에게 뜯어 먹히는 장면과 참혹한 실상에 대한 기사가 외신기자에 의해 세계로 타전돼도 실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지도자는 충칭 황산에 있는 안락한 거처에서 “맛있는 커피”를 즐기고 있었노라고 저자는 증언한다. 웃기는 일화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사건이 미국 언론에 의해 공개되었을 당시 미국을 방문 중이던 장제스 위원장의 부인 쑹메이링 여사는 타임지에 연락해서 이렇게 해괴한 사건을 보도한 화이트 기자를 해고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것은 미국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도 불가능한 일이었노라고 작가는 첨언한다.


이렇게 국가의 기반이 되는 백성들을 돌보지 못한 정부에 충성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질문에 대해 허난성 농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들을 침략한 일본군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다고 기록한다. 국가에 충성된 자로 굶어 죽느냐 아니면 매국노로 살아남느냐에 대한 갈림길에서 선택은 뻔하지 않은가. 허난성을 침공한 6만의 일본군을 도와,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30만명에 달하는 자국 군대의 무장해제를 실시했다. 한편 부패한 장제스 정권에 대한 작가의 비난은 역설적으로 해방 이후, 마오 정부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다른 소설인 <핸드폰> 주인공 옌셔우이의 어머니도 마오쩌둥이 지휘했던 대약진운동 시기에 아사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비록 제국주의자들의 지배에서 해방됐다고 해도, 민생고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는 것이다. 위정자들의 잘못된 정책과 집행 때문에 수많은 인민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들이 어떤 책임을 졌던가?


“굶어 죽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대체 언제를 말하는 게냐?” (191쪽)


르포르타쥬의 저자가 사건의 취재를 위해 자신의 할머니에게 기아 사태에 묻는 말에 답한 할머니의 말이다. 중국 소시민들의 집단기억 속에 존재하는 기아사태란 특별할 것이 없다는 투로 들린다. 제국주의에 대한 위대한 농민혁명의 성취라는 공산당의 선전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민국 31년의 기아사태가 마지막이었다면 좋으련만, 사회주의 국가 시절에도 기아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대기근이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라는 표현에 절절하게 공감할 수가 있었다. 장제스 위원장을 조종해서 기아사태를 막아내는데 성공한 것을 자랑하는 서방외신기자들에 대해서도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않지만, 나름 그들의 공헌에 대해서도 공정한 내리는데 인색하지 않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받아들이라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따름이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류전윈 작가의 소설들은 기대 이상의 아우라를 품고 있었다. 이웃나라에서 치열한 현실세계를 외면한 허무맹랑한 신변잡기류의 작품들이 범람하는 시절의 문학가들 보다 훨씬 뛰어난 신사실주의로 무장하고, 경제적 불이익이나 판금조치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매서운 비판의 필력을 구사하는 이들이야말로 짝퉁천지 짱꼴라의 나라 중국의 희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서 있는 작가 류전윈의 작품활동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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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블레이드 러너 2019>가 나왔다. 하지만 스필버그의 <E.T.>에 열광하던 대중들은 아무도 리들리 스콧의 이 우울하기 짝이 없는 영화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대로 잊혀지는가 했던 <블레이드 러너>는 오랜 시간이 지나 재평가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저주 받은 싸이파이 영화 걸작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주인공 릭 데커드 역할을 맡은 해리슨 포드는 <스타워즈> 프랜차이즈와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인디애너 존스>로 일약 스타 반열에 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영화계 주류 입장에서 볼 때, 신참내기였을 뿐이다. 영화의 배경은 사시사철 화창한 날씨의 라라랜드 로스 앤젤레스가 아닌 미래의 우울하기 짝이 없는 항상 스모그로 가득하고 비가 내리는 디스토피아 로스 앤젤레스다.

 

인류는 타이렐 코포레이션에서 거의 인간과 유사하게 만들어진 안드로이드 넥서스 6 시리즈를 이용해서 인간이 갈 수 없는 외계 행성 개척에 나선다. 인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이 아닌 스스로 사유할 수 있고 감정까지 가진 이 안드로이드들을 레플리컨트라 불렀다. 신체적으로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진 레플리컨트들의 반란으로 곤욕을 치른 인간들은 지구별에 이들이 들어오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했다. 그것은 마치 성경 속에 등장하는 에덴 동상에서 쫓겨난 인간들과 같은 신세라고나 할까. 그들을 찾아 제거하는 것을 처형(execution)이라고 부르지 않고 은퇴(retirement)라고 불렀던가. 게다가 인간처럼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일단의 레플리컨트들은 생명연장을 위해 지구에 잠입해 자신들을 창조한 타이렐 코포레이션에 침투를 기도한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4년 뿐이다.

 

전직 경찰 데커드에게 지구에 은밀하게 침투한 레플리컨트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영화 오프닝에 등장한 첫 번째 레플리컨트 레온을 필두로 해서, 전투형 레플리컨트 로이 배티(룻거 하우어 분), 프리스(대릴 한나 분)와 조라가 그 타겟이다. 오프닝에서 레플리컨트인지 아닌지 밝히는 보이트캄프 테스트 시연 중에 레온은 심문자 홀든을 총으로 쏘고 탈출한다. 한편, 데커드는 타이렐 코포레이션의 수장 엘든 타이렐 박사의 조수 레이철(션 영 분)에게 역시 같은 보이트캄프 테스트를 한 결과, 기억이 이식된 실험적 레플리컨트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녀가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는 레플리컨트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레온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질문이 필요했다.

 

데커드의 아파트를 찾아온 레이철은 자신의 과거 사진을 데커드에게 보여 주며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지만, 그 사진은 타이렐의 조카 사진이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며 그녀를 절망에 빠뜨린다. 한편, 로이 배티와 레온은 레플리컨트 안구제조 기술자 JF 시배스천이 타이렐 회장과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은밀하게 다른 레플리컨트 프리스를 이용해서 신뢰를 얻는다.

 

레온의 아파트에서 증거를 찾던 데커드는 조라의 인조 뱀껍질 사진을 발견하고 그녀가 스트립클럽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조라를 찾아 은퇴시킨다. 상사인 브라이언트로부터 데커드는 타이렐 코포레이션에서 사라진 레이철 역시 은퇴시키라는 명령을 받는다. 레이철을 군중 속에서 찾아낸 데커드는 순간 레온의 공격을 받고, 레이철은 데커드가 떨어뜨린 총으로 레온을 ‘은퇴’시킨다.

 

로비 배티는 시배스천의 아파트를 찾아 프리스에게 나머지 동료 레플리컨트들이 모두 죽었다고 알리고, 시배스천과 함께 타이렐 회장의 펜트하우스를 찾는다.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 달라는 단도직입적 요구에 타이렐 회장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하고 그 역시 로이 배티의 손에 죽음을 맞는다. 4년의 라이프스팬 연장을 위해 많은 연구를 했는지 로이 배티는 다양한 가설을 제시하고, 타이렐 박사는 하나하나 반론으로 피조물의 요구를 좌절시킨다. 직접 화면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시배스천 역시 로이 배티에게 죽었다는 보고를 데커드는 무전으로 전해 듣는다. 시배스천의 아파트를 찾은 데커드를 시배스천이 수집해 놓았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마네킹들 가운데 매복해 있던 프리스가 공격하고, 데커드는 프리스마저 영화의 무대에서 은퇴시킨다. 레저용 레플리컨트인 프리스에게조차 쩔쩔 매는 데커드에게 개프는 솜씨가 대단하다고 칭찬하는데, 과연 칭찬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여전히 로스 앤젤레스에서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로이 배티와 데커드의 마지막 대결이 펼쳐진다.

 

로이 배티와 나머지 레플리컨트들이 타이렐 박사에게 원하는 건 단 하나다. 바로 생명연장, more life. 그런데 안드로이드를 만든 인간에게도 그런 능력은 없다. 인간 자체가 유한한 존재이지 않은가. 유한한 존재가 창조한 피조물이 유한할 수밖에 없다는 건 너무나 당위의 문제가 아닌가. 더 살고 싶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안드로이드의 욕망 앞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꿈꾸는가?>을 원작으로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소설도 읽어 봤지만, 영화의 이미지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1980년대 이 저주 받은 걸작에는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이 산재해 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보이는 안드로이드가 지닌 인간성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서, 지나친 난개발로 인한 환경 재앙, 다양하게 차용된 신화적 구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예의 숨은 코드들을 찾는 데서부터 어쩌면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신화가 시작된 건 아닐까.

 

우선 데커드가 은퇴시키는 레플리컨트들은 모두 여자다. 전직 경찰인 데커드는 레온이나 로이 배티 같은 강력한 남성 전투형 레플리컨트의 적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를 따라 다니며 감시 혹은 조종하는 역할을 맡은 개프가 남기는 오리가미가 상장하는 면모들을 고려해볼 때, 데커드 역시 레플리컨트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레이철이 인간의 기억이 이식된 최신형 실험 레플리컨트라면, 데커드는 레플리컨트를 은퇴시키기 위해 개발된 진화된 레플리컨트가 아니었을까. 로이 배티가 자신을 창조한 타이렐 박사를 만나 수명을 늘려 달라고 협박하는 장면과 자신의 창조주를 결국 죽음이 이르게 하는 과정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킨다. 창조주의 역할은 창조에 그치고, 그 창조에 역행하는 소멸의 몫은 결국 피조물의 담당이라는 상징이려나.

 

데커드 역시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만약 그가 레플리컨트라면), 진짜 레플리컨트 레이철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역설은 또 어떻게 설명한 것인가. 타인의 기억까지 이식된 안드로이드를 만들 수 있다는 상상력은 또 어디서 유래한 걸까. 진짜 같은 가짜가 진짜를 대신한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낯설지도 않지만. <블레이드 러너>에 등장하는 안드로이드들은 처음에는 인간을 모델로 해서 만들었지만, 갈수록 기쁨, 분노, 좌절 같은 감정들을 개발할 수 있는 걸작품이라는 설명이 등장한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안드로이드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데커드에게 레플리컨트 사냥을 의뢰한 캡인 브라이언은 처음에 6명의 레플리컨트들이 우주선을 탈취해서 지구에 잠입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은퇴 순으로 보자면, 생명연장을 위해 타이렐 코포레이션에 침투하다가 감전사한 한 명을 제외하고 조라, 레온, 프리스 그리고 로이 배티가 차례로 죽음을 맞는다. 그렇다면 다른 한 명의 레플리컨트는 어디로 간거지? 브리핑할 적에도 다른 한 명에 대해서는 아예 정보도 제공되지 않는다. 그래서 혹자들은 남은 한 명의 레플리컨트가 데커드라는 가설을 세우기도 했다. 기억도 이식(임플랜트)이 되는 마당에, 데커드를 만드는 건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을까. 물론 2049년까지 그가 살아 남았으니 레플리컨트가 아니라는 반증이 되려나.

 

그리고 자그마치 3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영화의 마지막에서 불투명한 미래 속으로 레이철과 함께 도주를 감행했던 데커드가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새로운 파트너 라이언 고슬링과 함께 2049년의 로스 앤젤레스를 배경으로 한다. 신비하면서도 음울한 배경을 고조시키는 음악은 프리퀄에서 신디사이저의 제왕 반젤리스의 배턴을 이어 받아 아이슬랜드 출신 요한 요한슨이 맡았다고 한다. 트레일러에 나온 부분만 듣고서 혹시 반젤리스가 아닌가 싶었지만 유사했지만 다른 작곡가가 맡은 모양이다. 전작에서 연출을 맡았던 리들리 스콧이 총제작을 맡았고, 캐나다 출신 감독 드니 빌뇌브가 시퀄의 연출을 맡았다. 지난 여름부터 촬영에 들어갔고, 8월 25일에는 헝가리 오리고 스튜디오 현장에서 구조물 해체 중에 건설 노동자가 죽는 사고가 발생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촬영은 11월에 헝가리에서 완료됐고, 12월부터 로스 앤젤레스에서 편집 중에 있다는 뉴스다.

 

2008년에 시퀄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관계자에 따르면, 내러티브는 레플리컨트들이 활약했던 외계 미개척지에 대한 부분과 타이렐 회장이 죽은 뒤 벌어진 일 등에 대해 다뤄질 예정이라고 했지만 여전히 내용은 어떤지 베일에 가려져 있는 현실이다. 드디어 공개된 트레일러를 보면, 라이언 고슬링이 해리슨 포드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버려진 건물 외벽에 한글로 “행운”이라는 말이 씌여 있어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한국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 단어가 가진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그 행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영화 개봉은 2017년 10월 6일, 앞으로 221일 남았다.

 

[뱀다리] <블레이드 러너>가 우리나라에 처음 비디오로 출시되었을 때, 제목이 <서기 2019>이었다고 한다. 흥미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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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28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21일이라... 지금은 한참 멀었지만, 시간이 금방 가게 되면 어느덧 영화 개봉일이 다가올 거예요. ㅎㅎㅎ
 
사서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옌롄커 작가의 <사서>를 읽었다. 적잖은 분량에 조금 버겁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지만 읽기 시작하니 기우였다는 게 드러났다. 2월 동안 중국 당대 작가들의 책을 섭렵하다 보니 내공이 쌓여서 그런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기를 다룬 <사서>가 그다지 낯설지 않았고, 특히나 원래 중국 사서와 다른 구성의 <하늘의 아이>, <죄인록>, <옛길> 그리고 <시시포스의 신화> 네 편 이야기로 구성된 옌롄커판 <사서>는 가독성이 뛰어났다. 다만 후반의 등장하는 살인적인 기아와 추위의 공포에서 살아남기 위해 위신구 지식인들이 벌이는 쉬르리얼리즘 행각은 읽기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작가는 서문에서 그동안 자신의 스타일과 반대되는 작법으로 <사서>를 썼다고 밝히고 있다. 내용 때문인지 아마 중국 본토에서는 아예 출판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금서는 아니고, 출판사가 알아서 출판을 거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 창세기를 떠올리는 시작으로 우선 르포르타주에 가까운 소설 <사서>는 하늘의 아이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총 127명의 지식인들이 거주하게 된 99번째 위신구를 다스리는 아이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과의 내전을 끝낸 신중국 시대에 태어난 새로운 세대를 지칭하는 표현이 아닐까. 마오쩌둥은 홍위병을 동원한 친위쿠데타로 자신에게 반감을 품은 구세대를 축출하고, 권력유지를 위해 새로운 세대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했다. 중국 공산당이 혁명 과정에서 외쳤던 자유, 평등, 민주주의는 오로지 권력쟁취를 위한 공허한 구호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지식인들을 옥죄는 족쇄는 풀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다.

 

구체제를 상징하는 지식인 계급인 작가, 학자, 교수, 연구원, 음악 그리고 종교를 필두로 한 일단의 무리들이 옌롄커 작가 고향인 황허 언저리 위신구에 배치되었다. 사상과 노동개조를 통해 하늘의 아이가 주는 다섯 개의 오각별을 받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지식인들은 전혀 지식인답지 않은 행동을 일삼는다. 소설 <사서>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는 위신구에 갇힌 이들은 모두 죄인이라고 가정하고 그들의 행태를 고발하는 죄인록을 작성한다. 당과 상부에 반대하는 모든 적대행동을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서 작성하면 그 부상으로 종이꽃이나 오각별을 부여 받는 밀고자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한다. 하지만, 그의 이런 행동에 반감을 품은 동료 ‘죄인’들의 테러로 그동안의 노력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작가의 위신구 탈출은 없었던 일이 되고 만다.

 

아이를 필두로 한 위신구 대표들은 생산성 향상경쟁에 나서 경작지에 할당된 생산량을 엄청나게 초과하는 양을 생산하겠노라고 공언한다. 진짜 생산량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상부에 보고하는 양이 중요할 뿐인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한 옌롄커식 비판이라고 해야 할까. 설상가상으로 생산량 증대경쟁에 강철 제련 붐이 불면서, 강철 생산을 위한 또다른 경쟁이 불붙는다. 모든 쇠붙이들이 공출되어 용광로 속으로 들어간다. 이렇다할 쇠붙이를 구할 수 없게 되자, 미래의 작물 생산을 위한 필수 농기구를 제외한 모든 쇠붙이들이 수거된다. 99위신구에서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다른 위신구를 능가하는 강철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위신구 소속 죄인들이 오각별을 쟁취해서 위신구에서 탈출을 꿈꾼다면, 한 번도 대처에 나가본 적이 없는 아이는 죄인들을 닦달해서 초과 생산량 혹은 특별한 생산물을 가지고 성도에 나갈 꿈을 꾼다. 그 와중에 죄인들이 획득한 별들이 기록된 아이의 숙소에 불타면서 99위신구는 다시 한 번 대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작가는 콩알만 한 크기의 밀알을 생산하겠다고 외진 곳을 찾아 자신의 피로 밀재배에 나선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책을 잠시 덮어 두기도 했다. 동시에 동료들을 고발하는 내용의 죄인록과는 다른 내용의 옛길을 저술하기 시작한다. 전자가 밀고의 기록일하고 한다면, 후자는 진실에 대한 기록이라고 해야 할까. 오로지 글을 써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인 작가의 이중적 행적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비극의 시대에 살아남은 이들의 변명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비극은 이제 시작이다. 강철 제련을 위해 전국의 나무들이 베어져 용광로를 달구기 위해 사용되자, 가뭄과 홍수가 연이어 발생했다. 인재 때문에 발생한 자연재해로 위신구에 사는 죄인들에 대한 식량배급이 점점 줄어든다.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현실을 무시한 중공업 위주 정책으로 대약진운동 기간 발생한 대규모 기아사태의 단면을 옌롄커 작가는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쓰고 있다. 굶주림과 추위로 잇따라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인육을 먹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그야말로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혹한 현실이다.

 

그 와중에 음악은 다른 위신구 군인에게 성을 팔아 생존을 도모한다. 작가를 사랑한 음악이 몰래 그를 위해 마련한 볶은 콩과 만터우를 훔쳐 먹는 작가의 모습에서 비루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현실세계에서는 무능했지만 밀고와 도둑질로 자신의 연명에는 능했던 지식인의 초상을 엿볼 수가 있었다. 매춘으로 연명하던 음악 역시 참혹한 죽음을 맞게 된다. 그전에 한사코 성모 마리아의 초상에 대한 모욕을 거부하던 종교 역시 혹독한 굶주림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배신하는 행위를 마다하지 않게 된다. 개체의 생존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 앞에 한없이 나약한 존재로 추락하는 지식인들의 모습을 옌롄커 작가는 냉정하게 그려냈다.

 

옌롄커 작가는 마지막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무한한 고통의 시간 가운데 환경에 적응하게 되는 시시포스에 참혹한 수용소 생활을 견뎌낸 지식인들의 모습을 투영시킨다. 고통에 무감각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다만 어떤 선택을 하는가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린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옛길>과 <죄인록> 사이에서 번뇌하는 작가의 그림자는 옌롄커 자신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고통의 시간이 지나갔다고 해서, 고통과 현실의 비극을 외면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던 이들에 대한 화해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어떤 리뷰를 보니 옌롄커가 역사를 팔고 있다는 혹평을 읽었다. 우리에게 그렇게 청산되지 않은 영사를 옌롄커처럼 일관되게 다루면서 파는 작가가 있었던가. 엄정한 역사의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그처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면, 역사를 문학으로 파는 게 무엇이 문제냐고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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