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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털 같은 나날
류전윈 지음, 김영철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지난 주말 모두 세 권의 중국 소설을 읽었다. 한국 소설보다는 영미소설을 주로 읽는 편인데, 간만에 중국 소설을 읽다 보니 색다른 재미에 빠져 자그마치 세 권이나 읽게 됐다. 세 권 모두 처음으로 만나는 옌롄커와 류전윈 작가의 책들로 가독성이 뛰어나서 바로 바로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이 책은 중국문학 번역의 일가를 이룬 김태성 씨 대신 김영철 씨의 번역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류전윈 작가의 책이라고 했던가. 황석영 선생이 극찬했다는 띠지가 눈에 띄었다.
<닭털 같은 나날>은 동명의 소설과 <기관> 그리고 <1942년을 돌아보다> 이렇게 세편의 중편소설을 한데 묶은 소설집이다. 첫 번째 주자로 등장한 표제작 <닭털 같은 나날>은 출근 전 두부를 사야 하고, 근근히 살아가는 우리네 삶과 별다를 게 없는 처지의 주인공 린의 가정사를 다루고 있다. 육아전쟁을 치러야 하는 우리의 현세태를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많은 공감이 갔다. 출산과 육아 모두 개인의 책임이 되는 세상에, 인구절벽이 눈앞에 있다며 호들갑을 떨면서도 정작 지난 10년 동안 엄청난 비용을 출산장려에 사용했지만 별무소용이라는 뉴스가 떠올랐다. 취업, 주거비용 등 모든 삶의 지표가 바닥을 치는 현실세계에서 자력으로 아이를 낳고 기르라는 구호가 허망할 따름이다.
대처에 자리 잡은 린에게 극성스러운 각다귀 떼처럼 달려드는 고향 사람들을 대접해야 하는 암묵적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주목을 끈다. 합리적 관계보다는 연줄에 인연을 대는 시스템적 문제라고나 할까. 병에 걸려 도움을 받을까하는 심정으로 고향 은사도 비슷한 사정으로 주인공을 찾지만, 아내 리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체면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다. 무서운 속도로 후진 사회주의 국가에서 시장경제를 도입한 개발도상국으로 발전했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관계의 파괴가 부산물로 떡하니 자리잡고 있더라는 류전윈 작가 나름의 비판이라고 해야 할까. 붕괴된 공동체주의를 대신한 소가족 중심 이기주의 발호가 엿보였다.
아내와 협력해서 아이 돌보기에 게으른 가정부를 비난하는 장면, 아내의 이직을 위해 인맥을 동원해서 청탁을 넣었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하고, 아이 유아원 입학을 위해 전전긍긍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가 앙숙이었던 이웃의 도움으로 간신히 원하는 유아원에 들어갔지만 그것 역시 다른 꿍꿍이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찝찝해 하는 주인공의 심리묘사가 어쩌면 그렇게 우리네 그것을 적확하게 겨냥하고 있는지 놀랄 지경이었다. 그것은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한편으로는 여전히 모두에게 공평무사한 시스템 대신 고놈의 “꽌시”에 좌우되고 있는 중국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냈다고나 할까.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유효한 ‘관계’에 얽힌 이야기들이 새삼스럽지 않았다.
다음 주자인 <기관>에서는 좀 더 사회주의/공산주의 중국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직장에 종사하고 있는 일단의 인물들이 잇따라 등장한다. 사건의 발단은 장의 부국장 승진이었다. 파벌에 의해 간부가 될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장이 파벌 다툼에 의해 어부지리로 승진하게 되자, 원래 있던 부처에서 승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보이지 않는 사투가 벌어진다. 느닷없는 차오 여사와 스캔들로 낙마할 위기에 처한 장 부국장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고, 승진을 위해 잠시나마 감정을 감추고 합종연횡 하는 장면이 마치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전국시대에 펼쳐지는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뒤에서는 뒷담화로 열을 올리기도 하지만, 또 앞에서는 비굴한 모습을 보이며 날카로운 발톱을 감추고 아부하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스물아홉 살 먹은 린의 직장생활 적응기는 헬조선에 사는 우리 청년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어 더 공감이 갔다. 입사 초기, 치기 어린 청년처럼 행동하던 린은 직장 생활 4년 만에 비로소 자신이 직장에서 보여준 태도로는 도저히 승진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다. 그가 승진에 목을 매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보다 나은 주거공간의 확보다. 평사원 입장에서는 타인과 함께 사는 합거를 해야 했는데, 거의 생지옥 같은 합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라면 남들은 먹다 남은 배 껍질을 치우는 허드레 청소부터 시작해서, 장 부국장의 이삿날 전심전력으로 하는 노동도 마다하지 않을 태세다. 생존을 위해 기본적 존엄마저도 부정하게 만드는 냉혹한 사회주의 평가 시스템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당원이 되기 위해 차오 여사에게 아부도 마다하지 않지만, 역효과만 내고 승진과 입당이 연달아 거절되는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보잘 것 없는 감투와 주거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직장에서 벌어지는 요지경 같은 암투에 대한 디테일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마지막 작품인 <1942년을 돌아보다>는 유사 기록문학 같은 르포르타쥬 형식의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세 소설 중에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1942년,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표현으로는 민국 31년 류전윈 작가의 고향 허난성에는 기록적인 가뭄과 메뚜기떼의 습격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 기아가 발생했다. 무려 3,0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잠정적 기아피해자였고 그 중에 1/10에 해당하는 300만명이 기아사태로 숨졌다. 당시의 참상은 <타임>지 특파원이었던 테오도르 화이트 기자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렇다면 당시 중국의 지배자이자 기아사태를 해결하지는 못해도 완화시킬수 있는 장제스 위원장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애석하게도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조국에 대한 걱정과 항일전을 이끌어야 할 장 위원장에게 기아사태는 모든 것에 우선한 과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각급 단위에서 상신된 보고는 가볍게 무시됐다. 한 마디로 말해 과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설상가상으로 기아에 시달리는 허난성 농민들에게 부과된 현물세와 군량에 대한 경감조치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아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기아 난민이 되고, 도처에 널린 시신이 개에게 뜯어 먹히는 장면과 참혹한 실상에 대한 기사가 외신기자에 의해 세계로 타전돼도 실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지도자는 충칭 황산에 있는 안락한 거처에서 “맛있는 커피”를 즐기고 있었노라고 저자는 증언한다. 웃기는 일화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사건이 미국 언론에 의해 공개되었을 당시 미국을 방문 중이던 장제스 위원장의 부인 쑹메이링 여사는 타임지에 연락해서 이렇게 해괴한 사건을 보도한 화이트 기자를 해고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것은 미국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도 불가능한 일이었노라고 작가는 첨언한다.
이렇게 국가의 기반이 되는 백성들을 돌보지 못한 정부에 충성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질문에 대해 허난성 농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들을 침략한 일본군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다고 기록한다. 국가에 충성된 자로 굶어 죽느냐 아니면 매국노로 살아남느냐에 대한 갈림길에서 선택은 뻔하지 않은가. 허난성을 침공한 6만의 일본군을 도와,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30만명에 달하는 자국 군대의 무장해제를 실시했다. 한편 부패한 장제스 정권에 대한 작가의 비난은 역설적으로 해방 이후, 마오 정부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다른 소설인 <핸드폰> 주인공 옌셔우이의 어머니도 마오쩌둥이 지휘했던 대약진운동 시기에 아사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비록 제국주의자들의 지배에서 해방됐다고 해도, 민생고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는 것이다. 위정자들의 잘못된 정책과 집행 때문에 수많은 인민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들이 어떤 책임을 졌던가?
“굶어 죽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대체 언제를 말하는 게냐?” (191쪽)
르포르타쥬의 저자가 사건의 취재를 위해 자신의 할머니에게 기아 사태에 묻는 말에 답한 할머니의 말이다. 중국 소시민들의 집단기억 속에 존재하는 기아사태란 특별할 것이 없다는 투로 들린다. 제국주의에 대한 위대한 농민혁명의 성취라는 공산당의 선전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민국 31년의 기아사태가 마지막이었다면 좋으련만, 사회주의 국가 시절에도 기아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대기근이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라는 표현에 절절하게 공감할 수가 있었다. 장제스 위원장을 조종해서 기아사태를 막아내는데 성공한 것을 자랑하는 서방외신기자들에 대해서도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않지만, 나름 그들의 공헌에 대해서도 공정한 내리는데 인색하지 않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받아들이라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따름이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류전윈 작가의 소설들은 기대 이상의 아우라를 품고 있었다. 이웃나라에서 치열한 현실세계를 외면한 허무맹랑한 신변잡기류의 작품들이 범람하는 시절의 문학가들 보다 훨씬 뛰어난 신사실주의로 무장하고, 경제적 불이익이나 판금조치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매서운 비판의 필력을 구사하는 이들이야말로 짝퉁천지 짱꼴라의 나라 중국의 희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서 있는 작가 류전윈의 작품활동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