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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4월
평점 :
옌롄커 작가의 <사서>를 읽었다. 적잖은 분량에 조금 버겁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지만 읽기 시작하니 기우였다는 게 드러났다. 2월 동안 중국 당대 작가들의 책을 섭렵하다 보니 내공이 쌓여서 그런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기를 다룬 <사서>가 그다지 낯설지 않았고, 특히나 원래 중국 사서와 다른 구성의 <하늘의 아이>, <죄인록>, <옛길> 그리고 <시시포스의 신화> 네 편 이야기로 구성된 옌롄커판 <사서>는 가독성이 뛰어났다. 다만 후반의 등장하는 살인적인 기아와 추위의 공포에서 살아남기 위해 위신구 지식인들이 벌이는 쉬르리얼리즘 행각은 읽기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작가는 서문에서 그동안 자신의 스타일과 반대되는 작법으로 <사서>를 썼다고 밝히고 있다. 내용 때문인지 아마 중국 본토에서는 아예 출판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금서는 아니고, 출판사가 알아서 출판을 거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 창세기를 떠올리는 시작으로 우선 르포르타주에 가까운 소설 <사서>는 하늘의 아이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총 127명의 지식인들이 거주하게 된 99번째 위신구를 다스리는 아이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과의 내전을 끝낸 신중국 시대에 태어난 새로운 세대를 지칭하는 표현이 아닐까. 마오쩌둥은 홍위병을 동원한 친위쿠데타로 자신에게 반감을 품은 구세대를 축출하고, 권력유지를 위해 새로운 세대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했다. 중국 공산당이 혁명 과정에서 외쳤던 자유, 평등, 민주주의는 오로지 권력쟁취를 위한 공허한 구호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지식인들을 옥죄는 족쇄는 풀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다.
구체제를 상징하는 지식인 계급인 작가, 학자, 교수, 연구원, 음악 그리고 종교를 필두로 한 일단의 무리들이 옌롄커 작가 고향인 황허 언저리 위신구에 배치되었다. 사상과 노동개조를 통해 하늘의 아이가 주는 다섯 개의 오각별을 받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지식인들은 전혀 지식인답지 않은 행동을 일삼는다. 소설 <사서>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는 위신구에 갇힌 이들은 모두 죄인이라고 가정하고 그들의 행태를 고발하는 죄인록을 작성한다. 당과 상부에 반대하는 모든 적대행동을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서 작성하면 그 부상으로 종이꽃이나 오각별을 부여 받는 밀고자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한다. 하지만, 그의 이런 행동에 반감을 품은 동료 ‘죄인’들의 테러로 그동안의 노력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작가의 위신구 탈출은 없었던 일이 되고 만다.
아이를 필두로 한 위신구 대표들은 생산성 향상경쟁에 나서 경작지에 할당된 생산량을 엄청나게 초과하는 양을 생산하겠노라고 공언한다. 진짜 생산량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상부에 보고하는 양이 중요할 뿐인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한 옌롄커식 비판이라고 해야 할까. 설상가상으로 생산량 증대경쟁에 강철 제련 붐이 불면서, 강철 생산을 위한 또다른 경쟁이 불붙는다. 모든 쇠붙이들이 공출되어 용광로 속으로 들어간다. 이렇다할 쇠붙이를 구할 수 없게 되자, 미래의 작물 생산을 위한 필수 농기구를 제외한 모든 쇠붙이들이 수거된다. 99위신구에서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다른 위신구를 능가하는 강철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위신구 소속 죄인들이 오각별을 쟁취해서 위신구에서 탈출을 꿈꾼다면, 한 번도 대처에 나가본 적이 없는 아이는 죄인들을 닦달해서 초과 생산량 혹은 특별한 생산물을 가지고 성도에 나갈 꿈을 꾼다. 그 와중에 죄인들이 획득한 별들이 기록된 아이의 숙소에 불타면서 99위신구는 다시 한 번 대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작가는 콩알만 한 크기의 밀알을 생산하겠다고 외진 곳을 찾아 자신의 피로 밀재배에 나선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책을 잠시 덮어 두기도 했다. 동시에 동료들을 고발하는 내용의 죄인록과는 다른 내용의 옛길을 저술하기 시작한다. 전자가 밀고의 기록일하고 한다면, 후자는 진실에 대한 기록이라고 해야 할까. 오로지 글을 써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인 작가의 이중적 행적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비극의 시대에 살아남은 이들의 변명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비극은 이제 시작이다. 강철 제련을 위해 전국의 나무들이 베어져 용광로를 달구기 위해 사용되자, 가뭄과 홍수가 연이어 발생했다. 인재 때문에 발생한 자연재해로 위신구에 사는 죄인들에 대한 식량배급이 점점 줄어든다.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현실을 무시한 중공업 위주 정책으로 대약진운동 기간 발생한 대규모 기아사태의 단면을 옌롄커 작가는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쓰고 있다. 굶주림과 추위로 잇따라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인육을 먹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그야말로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혹한 현실이다.
그 와중에 음악은 다른 위신구 군인에게 성을 팔아 생존을 도모한다. 작가를 사랑한 음악이 몰래 그를 위해 마련한 볶은 콩과 만터우를 훔쳐 먹는 작가의 모습에서 비루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현실세계에서는 무능했지만 밀고와 도둑질로 자신의 연명에는 능했던 지식인의 초상을 엿볼 수가 있었다. 매춘으로 연명하던 음악 역시 참혹한 죽음을 맞게 된다. 그전에 한사코 성모 마리아의 초상에 대한 모욕을 거부하던 종교 역시 혹독한 굶주림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배신하는 행위를 마다하지 않게 된다. 개체의 생존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 앞에 한없이 나약한 존재로 추락하는 지식인들의 모습을 옌롄커 작가는 냉정하게 그려냈다.
옌롄커 작가는 마지막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무한한 고통의 시간 가운데 환경에 적응하게 되는 시시포스에 참혹한 수용소 생활을 견뎌낸 지식인들의 모습을 투영시킨다. 고통에 무감각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다만 어떤 선택을 하는가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린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옛길>과 <죄인록> 사이에서 번뇌하는 작가의 그림자는 옌롄커 자신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고통의 시간이 지나갔다고 해서, 고통과 현실의 비극을 외면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던 이들에 대한 화해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어떤 리뷰를 보니 옌롄커가 역사를 팔고 있다는 혹평을 읽었다. 우리에게 그렇게 청산되지 않은 영사를 옌롄커처럼 일관되게 다루면서 파는 작가가 있었던가. 엄정한 역사의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그처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면, 역사를 문학으로 파는 게 무엇이 문제냐고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