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들 을유세계문학전집 101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김태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주말에는 스위스 출신 작가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신간 <망자들>을 읽었다. 일본 가무극인 노에서 따온 조()-()-()3단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왜 느닷없이 독일어 작가가 일본 가무극 타령이냐고. 그건 소설을 만나 보시면 바로 알 수 있다.

 

1930년대 초, 동서양의 독일과 일본은 제각각 다른 스타일의 파시즘 국가로 변신 중이었다. 전자가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즘, 국가사회주의 스타일이었다면, 일본은 만주사변으로 중국 동북부를 침공하고 탈아입구라는 메이지 유신 이래 구호를 들고 아시아의 패자가 되겠다는 군국주의 파시즘이 대세였다.

 

베른 출신 에밀 네겔리는 영화감독이다. 당대를 주름잡던 프리츠 랑이나 무르나우 혹은 에이젠슈타인에 버금가는 그런 영상감각을 가진 유망주로 등장한다. 그리고 독재자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소설 <망자들>에는 제목처럼 사방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소설의 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사는 일본에서는 셋푸쿠(할복)하는 사무라이를 몰래 촬영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극와 극은 항상 서로 어떤 동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유년 시절, 천재소년이었던 역사적으로 만주국의 요괴였던 아다마스는 제국의 선전물 제작과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다른 영화 선진국이었던 독일에 영화 전문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한다. 아다마스는 어쩌면 독일 자본과 기획으로 양성된 파시스트였는지도 모르겠다. 크리스티안 크라흐트는 실존 인물을 기묘하게 비트는 방식으로 소설에 긴장감을 잔뜩 불어 넣는다.

 

우파(UFA, 처음에는 나치 우파 영화사로 잠깐 착각했었다) 영화사의 후겐베르크는 실력 있지만 해외로 파견하는데 전혀 부담이 없는 에밀 네겔리를 선택해서 일본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 산업에는 막대한 자본이 든다. 한 마디로 영화를 만들기 위한 기술력과 기획은 어떻게 해볼 수 있지만, 그 영화를 실제로 만들기 위해서는 돈이 든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과 예술의 접목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셀룰로이드 추축은 착착 현실화되어 간다.

 

물론 후반의 비극적 전개를 위한 부비트랩을 조심스레 설치하는 것도 작가는 잊지 않는다. 우매한 독자는 작가의 그런 세심한 설정보다는 일본 군국주의자들과는 전혀 정서가 맞지 않는 찰스 채플린이 등장하고, 네겔리의 독일 애인 이다가 참석한 자리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시베리아 출병을 의미하는 북진론과 남방의 천연자원을 얻기 위한 남진론이 대결하는 대화에 더 관심이 갔다. 당시 일본 제국의 주력이었던 만주의 관동군은 소련을 주적으로 상정해서 전쟁에 대비하다가, 결국 해군이 중심이 된 남방작전으로 수정되면서 동남아 정글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지 않았던가.

 

사실 노의 1막에 해당하는 조()에서는 지루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가 느릿하게 흘러가는 걸까. 하지만 2막인 하()에서는 비로소 흥미진진한 서사가 등장하고 달리기 시작한다. 찰스 채플린 호위에 나선 무뚝뚝한 표정의 일본 장교가 딸 아이에게 줄 채플린에게 사인을 아다마스에게 요청하는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엘리트 청년으로 성장한 아다마스가 사소한 복수에 집착했고, 방화범이기도 했다는 점은 그의 천재성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마지막 규()는 진짜 비극의 재현이자 일본을 방문한 가이진(外人) 네겔리의 부서진 영혼이 어떻게 타격받았는지를 마치 카메라의 필름 롤이 도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으로 중계된다.

 

크라흐트 작가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그리고 흑백필름에서 컬러필름으로 넘어가는 영화의 역사적 순간을 포착해낸다. <동경 이야기(Tokyo Story)>의 대가 오즈 야스지로는 이미 1930년대에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이었던 모양이다. 굳이 영화의 미적 아우라를 해치는 사운드트랙이 필요한가라는 시네마틱 질문에 대해서는 그 시절 영화에 대한 지식의 부족으로 더 할 말이 없을 듯 싶다. 흑백 필름으로도 영화의 미적 영상미를 재현해 내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이런 영화적 난제들까지 크라흐트가 의도적으로 커버했다면, 소설에 둘러져 있던 완벽한 소설이라는 띠지는 전혀 과대광고가 아닐 것이다.

 

우파 영화사의 유일신 후겐베르크는 유대계 지식인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와 로테 아이스너에게 포섭된 네겔리에게 일본으로 건너 가 동양적 야만성을 포착하라고 지시한다. 서구 제국주의적 사고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재능 있는 감독은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꼭두각시가 되어 하라는 대로 영화를 만들 계획은 눈곱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야말로 아티스트로서 자존감을 지키고 싶어서였을까? 후반으로 갈수록 소설은 사실 대신 죽음이 다양하게 얽힌 변주곡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크라흐트의 <망자들>은 가이진이 바라 본 정적인 일본 문화에 대한 시선, 독일과 일본 두 제국이 경쟁하듯이 영화를 이용한 선전전에 나서게 되는 일련의 과정 그리고 부유하는 죽음에 대한 사유들로 복잡한 그런 소설이었다. 엔딩에 등장하는 덧없는 죽음 역시 겉보기에 화려한 할리우드의 삶을 좇는 부나방 같은 그런 게 아니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엔딩 하나는 정말 화끈했다. 이제 읽다 만 크라흐트의 <제국>을 다시 펼쳐 들어야 할 시간인가.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랜드 호텔 대산세계문학총서 145
비키 바움 지음, 박광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그렇게 오래 읽을 만한 책도 아닌데 수차례나 시도한 끝에 마침내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이번에도 중간에 다른 책들을 만나느라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한 5일 정도 걸린 것 같다. 그전에 138쪽 정도를 읽다 말았는데, 그 부분부터 소설이 흥미진진해지더라. 후반으로 갈수록 재밌어지는 그런 느낌. 중고로 산 줄 알았는데 새 책으로 샀나 보다. 산 지 2년만에 읽을 거였으면 중고로도 만날 수 있었는데 아까비.

 

오스트리아 빈 출신 유대인이었던 비키 바움은 생전에 수많은 작품들을 발표했지만, 국내에 현재 구할 수 있는 책은 <그랜드 호텔> 뿐이다. 1929년에 발표된 책으로 이미 두 번이나 영화화되기도 했고, 브로드웨이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1920년대 경제공황이 닥치기 전, 흥청거리던 호황 시절 베를린의 유명한 <그랜드 호텔>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한다. 내가 보기에 그랜드 호텔은 갖가지 욕망이 충돌하는 그런 공간이다. 욕망의 공간을 채우는 건, 끓어오르는 다양한 욕망의 주인공들일 수밖에 없다.

 

1차 세계대전에서 수류탄 부상으로 얼굴의 반쪽이 날아간 오터른슐라크 박사는 그랜드 호텔의 터줏대감이다. 그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소위 후진 객실에 머물면서 자신을 찾는 사람이나 편지가 없냐고 항상 묻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그는 프로이센 제2제국 시절의 영화를 대표하는 선수가 아닐까 싶다.

 

다음 주자는 프레더스도르프 출신 경리 보조 오토 크링엘라인이다. 지난 20년 동안, 장작 비용을 아끼기 위해 아침마다 아내를 위해 장작을 패온 사나이. 그는 이제 죽을 병(위암?)에 걸려, 27년간의 작소니아 방직회사 경리일을 때려치우고, 얼마 안 되는 유산을 가지고 공화국으로 변신한 새로운 국가의 수도 베를린에서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달려왔다. 문제는 일만 하는 개미 같은 사나이다 보니, 즐기는 방법을 하나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비키 바움 작가는 그런 크링엘라인을 위해 몰락한 남작 가문 출신의 한량 가이거른을 준비시켜 놓았으니 말이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게 흘러가는 거지. 유흥의 순간을 고대하는 크링엘라인에게 오터른슐라크 박사의 진중한 발레 공연 초대나 인생은 결국 모두가 빈 껍질 같다는 현학적인 충고보다 젊은 가이거른 남작이 제안하는 아찔하게 과속으로 달리는 드라이브, 자신의 내면을 강화시켜 준 과소비 그리고 베를린 상공을 질주하는 곡예비행이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홍일점으로 배치된 러시아 출신 발레리나 그루진스카야는 자신의 진가를 몰라주는 베를린 공연에 회의를 느낀다. 공연가들은 모름지기 관객들의 박수의 힘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닌가. 중년의 발레리나는 어느 날 밤, 자신의 방에 침입한 젊고 멋쟁이 남작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삶의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 그리고 불타는 연애 감정에 힘입어 그전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퍼포먼스를 보여 주게 된다. 어쩌면 비키 바움 작가는 원효대사의 유심론을 알고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모든 건 내 마음 먹기에 달렸노라는 유심론의 정수를 예리하게 파고든다. 문제는 그루진스카야의 새로운 연인이 된 멋쟁이 가이거른 남작이 사실은 그녀의 50만 마르크짜리 진주를 노리고 그녀의 객실에 숨어든 도둑이라는 점만 빼고는.

 

바로 삶이야말로 이런 아이러니의 연속이라는 걸 저자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평생 정직하게 살아왔다는 크링엘라인의 직속상사 프라이징 총회장은 또 어떤가. 순전히 마누라 잘 만난 덕에 부르주아 계급으로 수직상승한 졸부는 켐니츠 사와의 합병을 위해 영국 회사와의 협상이 결렬됐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짓 정보를 흘리면서 계약을 성사시키지 않았던가. 그의 그런 일탈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속기르 위해 고용된 매력적인 여성 플람2와 바람을 피우면서 파멸로 치닫기 시작한다.

 

홀연히 등장해서 프라이징 총회장의 심기를 건드리는 역할을 자처하게 된 미스터 크링엘라인의 활약도 주목할 만하다. 겉보기에는 점잖은 부르주아 신사처럼 보이는 프라이징이 사실은 돈 밖에 모르는 속물이고, 직원들의 안위 따위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악당이라는 사실을 그의 새로운 고용된 애인 플람2에 앞에서 가감 없이 까발리는 쾌거도 선사해준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인물이 바로 크링엘라인일 수밖에 없었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숙명 때문에 절박하게 새로운 삶의 행복을 추구하게 되었지만, 가이거른 남작의 도움으로 하루 동안 자신의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돈을 펑펑 써대면서 자존감을 회복하는데 성공한 전직 경리 보조 아저씨는 평소라면 앞에서 굽실거릴 처지의 상사에게 지난 27년 동안 가슴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모조리 포탄으로 쏘아 올린다. 아 진심으로 통쾌하구나. 그리고 총회장은 감방으로, 총회장의 새로운 애인을 가로챈 중년 사나이는 영국으로 출발한다.

 

하나 아쉬운 점은 크링엘라인이 위기의 순간, 자신을 도와준 오터른슐라크 박사에게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자신의 새로운 행복을 위해 출발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런데 그 또한 삶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배은망덕의 한 부분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너무 깔끔하다면, 그게 또 이상한 점이 아닐까.

 

결말로 갈수록 지나치게 극적이라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지난 2년을 묵혀서 읽은 책답게 세 번 정도 같은 부분들을 다시 읽다 보니 부드럽게 잘 익혀진 스테이크를 씹는 그런 기분이랄까. 세계적 유명 호텔을 배경으로 해서 벌어지는 인간 욕망의 소용돌이 한마당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타비아호의 소년, 얀 사계절 1318 문고 48
라헐 판 코에이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며칠 전에 주경철 교수님의 <일요일의 역사가>를 읽었다. 예전에 서경식 교수의 <내 서재 속 고전>을 읽고 나서 한참을 서 교수님이 소개한 책들을 읽겠다고 책을 구하러 다니던 생각이 났다.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을 필두로 해서 가토 슈이치의 <양의 노래>, 나탈리아 긴즈부르그의 책 등 정말 다양하게도 모았었다. 물론 아직도 국내에 소개된 책이 없기도 하지만. 책사냥꾼에게 어떤 점에서 보면 하나의 미션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 책에 소개된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의 아메리카 인디오에 대한 기록도 보고 싶은데, 역시나 절판된 책이라 구할 수가 없구나.

 

시작부터 여느 때처럼 삼천포로 맹렬하게 달려 가는구나.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주 교수님의 책 역시 어쩌면 나에게 그런 열망을 다시 피어오르게 했을 수도 있겠지만, 집에 사놓은 책이 원체 많고, 그놈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어딜 나다닐 수가 없으니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일요일의 역사가>에도 등장한 바타비아호 사건을 소설화한 라헐 판 코에이의 <바타비아호의 소년, >을 주문했고 밤새워서 다 읽었다.

 

사계절 출판사 청소년 시리즈로 나온 모양인데, 일단 가독성이 매우 뛰어나다. 그전에 사전 정보를 알고 있어서 그런 진 몰라도 읽는데 가속이 휙휙 붙더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타령을 하다가 결국 새벽 두시까지 다 읽고 잠이 들 수가 있었다. 자수하자면 도중에 살짝 졸기도 했었다.

 

소설의 주인공 얀 벰멜은 16세 소년으로 전적으로 작가가 만들어낸 캐릭터다. 위트레흐트 상인의 장남이었던 얀은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자신이 서자라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계모에 의해 바로 내쳐진다. 계모에 대한 클리셰이는 문학에서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게 좀 불만이다. 암스테르담으로 빌헬름의 도제가 되어 갔지만, 가난과 굶주림으로 얀은 탈출을 도모한다.

 

1628년 당시에 네덜란드가 개척한 동방의 식민지 바타비아(지금의 인도네시아 자바)는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었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이들은 모두 동방으로 건너가 한몫 챙기기를 꿈꿨다. 아무런 기술도 없고 무일푼의 얀에게도 바타비아는 이상향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 동방으로 출항하게 될 동인도회사의 바타비아호는 당시 최첨단 범선으로 360여명의 사람들과 4,000만 유로에 달하는 재화를 싣고 향신료 무역을 향해 출발을 앞두고 있었다.

 

얀은 바타비아 선단의 부상인 예로니무스 코르넬리스와 5년 계약을 맺고 선실 사환의 신분으로 동방행에 나선다. 그리고 희망봉을 돌아 서부 162964일 서부 오스트레일리아 해안에 암초를 만나 난파하기까지가 소설의 1부에 해당한다. 나머지 진짜 비극은 2부에서 시작된다.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바타비아의 무덤을 창조해낸 약제사 출신 코르넬리스는 재세례파 출신 이단자로 <일요일의 역사가>에서 소개된다. 그는 이미 바타비아호가 난파되기 전부터, 선상 반란을 꾸미고 있었다. 대상인 프란시스코 펠사에르트와 야콥스 선장이 구조를 위해 떠난 뒤, 선단의 선임자로 최고 권력을 쟁취한 코르넬리스의 악행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문명사회 출신으로 오로지 생존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물과 식량을 아끼기 위해, 필요없다고 생각되는 병자, 아이들 그리고 여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한다. 그것도 자신에게 충성 맹세를 한 이들에게 사주를 해서 서로를 죽이게 만들었다. 바로 우리의 주인공 얀도 살아남기 위해 코르넬리스가 주도한 살인게임에 참여했고, 다른 동료들처럼 죄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린다.

 

도대체 이게 야만이 아니라면 무엇이 야만이란 말인가. 공존을 위해 서로 협동하고 상부상조하는 대신, 내가 살기 위해 타인을 배제하는 잔혹한 방식을 정당화하는 코르넬리스의 왜곡된 사고도 비극에 한몫했던 게 아닐까. 신이 있다면,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곧바로 응징했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신도 자신의 행위를 용인한 것이다 식의 자기합리화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대자연이라는 야만 앞에서 유럽식 교육과 예절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라헐 판 코에이 작가는 상당히 순화시켜서 표현을 했지만, 아마 실상은 더 끔찍하지 않았을까.

 

포로가 된 코르넬리스에 이어 지휘자가 된 발터 로스가 이끄는 반란군은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마지막 전쟁에 나선다. 위기에 순간, 펠사에르트가 선도하는 구조대가 등장하면서 바타비아호의 비극은 종료된다. 처음부터 코르넬리스의 음모를 파악한 얀은 숱한 고민을 하지만, 일개 사환의 말을 들어줄 리가 없다는 판단 때문에 결국 코르넬리스 무리에 가담했고, 심문과 고문을 거쳐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는다. 다만 감형되어 발터와 함께 오지에 유배형에 처해진다. 다소 동화 같은 결말이지만 바타비아호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소년 얀의 절박한 처지를 알게 된 코르넬리스는 선실을 드나드는 얀을 이용해서 대상인과 선장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해서 사람들을 조종했다. 타인이 모르는 정보는 그렇게 악용되었다. 코르넬리스에게 코가 꿴 사람들은 차례 차례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버렸다. 고민하는 영혼 얀은 코르넬리스의 명령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대신,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어느 사람이 그런 고민을 하지 않겠는가. 저자는 실제로 벌어진 광란의 잔혹한 카니발 대신 끝없이 고민하고 사유하는 개인의 영혼에 방점을 찍는다. 나라면 과연 코르넬리스의 어처구니 없는 명령을 거부하고, 단호하게 맞설 배짱이 있었을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바타비아호의 소년, >을 읽고 났더니 동일한 사건을 다룬 넌픽션인 마이크 대쉬의 <미친 항해>도 읽고 싶어졌다. 또 그의 다른 저작인 <튤립, 그 아름다움과 투기의 역사>. 세상엔 정말 내가 모르는 책도, 읽어 보고 싶은 책들이 천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요일의 역사가 - 주경철의 역사 산책
주경철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때 역사학도였다. 그래서 지금도 소설보다도 역사책을 소설보다 더 빨리 읽는다. 소설 다음으로 아마 많이 읽는 게 역사 장르가 아닐까 싶다. 이번에도 예전에 사두었던 주경철 교수의 <일요일의 역사가>를 다니엘 켈만의 소설을 읽자마자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반나절 만에 다 읽었다. 이제 완전 독서 슬럼프 탈출인가.

 

처음에 책을 받았을 때, 그 유명한 프리울리 사람 메노키오에 대한 이야기부터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두 11개의 역사 에세이가 담겨 있는데 그리고 나선 나머지 10개는 읽지 않았던 거지. 그러다 이번에 나머지도 모두 다 읽었다.

 

중세 이탈리아 프리울리 지방의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는 어떻게 그렇게 독자적인 생각을 발전시켰을까? 열 권 남짓한 책을 읽고서 당대 지식인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사제들과 이단재판에서 벌인 설전 기록은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저자는 메노키오 재판을 엘리트 위주의 문자 문화와 일반 대중의 구술 문화의 충돌로 해석한다. 한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해서 누구나 다 그런 사유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 일개 농부에 지나지 않는 메노키오가 오묘한 기독교 교리에 대해 독자적인 해석을 했다는 점만으로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미시사 <치즈와 구더기>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에 대한 재해석도 흥미롭다. 오래 전에 사둔 단턴이 그린 18세기 인쇄 직공들의 잔혹한 고양이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그런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원전을 다시 한 번 읽어야지 싶기도 하다. 인쇄 길드의 장인들 역시 직인을 거쳐 부르주아 계급에 입성하는데 성공했지만, 정부의 규제 때문에 장인들의 수가 오히려 줄어들면서 직인들의 수는 늘어났지만 장인들을 더 이상 배출할 수 없는 시스템이 되어 버렸다.

 

장기간에 걸친 노동과 불공정한 보수에 불만은 품은 도제들은 주인이 기르는 고양이에게 앙심을 품고 기묘한 전략으로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고양이들에게 풀기 시작한다. 한편, 다른 장에서 고양이는 중세 마녀들의 상징으로도 등장하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애꿎은 고양이들이 축제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총에 맞기도 하고, 자루에 넣어져 화형당하기도 했다나. 현대 동물애호가들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겠지만 말이다. 단턴은 가치 전복의 해방구였던 카니발이 서구 사회에서 일부 긍정적인 요소로 작동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나탈리 데이비스는 카니발을 통해 전복의 권력을 맛본 여성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시대변화에 주역으로 활동했다는 점도 예리하게 짚어낸다.

 

개인적으로 천형과 시심에 시달리는 저자의 글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은 아즈테카 그러니까 지금의 멕시코의 인신 공양 제의에 대한 글이었다. <세계를 재다>에서도 등장했던 자그마치 2만 명이나 되는 이들을 인신공양으로 희생했다는 이야기를 바로 직전에 읽어서인지 정말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구대륙에서 일만 년 이상 동떨어진 채, 독자적인 문화를 개발해온 라틴 아메리카 인디오들의 문화에 대한 현대적 비판은 합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메리카 인디오들에게 에너지의 순환은 무엇보다 중요한 개념이었고, 태양이 인간의 피를 원하기 때문에 에너지 순환과 공급을 위해 전쟁(꽃의 전쟁)에서 획득한 포로들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인신 공양이 일반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서구사회에 알려진 대로 선한 야만인의 개념과는 정반대의 그것이 아닌가.

 

에스파나 출신 군인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테카를 정복한 후, 신대륙에 파도처럼 밀려든 에스파냐 출신 선교사들에게 그런 이교도적 신앙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이단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가톨릭 선교사들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인디오들의 조상 대대로 믿어온 종교적 이미지와 묘하게 겹쳐지는 사실을 간파했다. 보수적 스콜라 철학자들이라면 펄쩍 뛸 일이겠지만, 신앙의 전파를 위해 선교사들은 이교적 색채를 허용하였고 인디오들은 기존의 인신 공양 제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충실한 교도들로 신앙의 트랜스포메이션을 감행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아니 현대에 들어와서는 오히려 그 역전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하지 않던가. 성 과달루페의 성모상도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저자는 전한다.

 

돈 후안이 문학적 상상력의 발산이라고 한다면, 이탈리아 출신 카사노바는 희대의 엽색가로 명성을 날린 계몽시대 자유인이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이 벌어지기 이전, 앙시앵 레짐 시절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은 바로 말 잘하는 그런 화술가였다. 장신에 직접 옷을 만들어 입을 줄도 아는 카사노바는 요즘 말로 하면 아마 슈퍼핵인싸가 아니었나 싶다. 악당 같은 이미지의 돈 후안과 달리 카사노바는 122명에 달하는 애인에게 두루 사랑을 받았던 모양이다. 여기서 이달에 만난 피에트로 아레티노가 저술한 <음란한 소네트>에 나오는 기묘한 자세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왜 이렇게 반갑던지. 이런 맛에 책을 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정력제로 유명한 굴을 연인들이 서로 입으로 주고받는 장면에서는 오래 전 영화 <나이 하프 위크>가 연상되기도 했다. 이미 수백 년 전부터 하던 사랑놀이였구만 그것은.

 

콩고자유국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름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군주 자신의 사유 식민지를 만들어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한 착취를 일삼은 군주로 등장하는 레오폴드 2세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1830년대에 비로소 나라 같은 모양새를 갖추게 된 후발 제국주의 국가 벨기에는 이미 영국과 프랑스가 다 갈라 먹은 검은 황금의 대륙 아프리카에서 뒤늦게 뛰어든 벨기에의 군주 레오폴드 2세는 교묘한 외교술을 동원해서, 노예 제도에 반대한다며 콩고 강 유역의 땅들을 집어삼킨다. 그리고 자국의 76배에 달하는 거대한 콩고를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식민지에서 얻은 상아, 그리고 무엇보다 산업혁명의 결과 수요가 폭발한 천연고무를 얻기 위해 레오폴드의 지휘 아래 벨기에는 군대까지 동원한 잔혹한 수탈에 나서게 된다. 얼마 안되는 천연고무를 얻기 위해 원주민들의 가족들을 볼모로 잡고 재규어와 낙상으로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천연고무 채취를 강요했다. 이 악당 군주는 그야말로 양의 탈을 뒤집어 쓴 악당의 전형 같은 인물이었다. 이런 벨기에의 과거를 알고 있다면 그 나라 사람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뭐 이런 식의 드립은 날리지 않겠지. 최근 어느 예능에서도 비슷한 지적을 본 것 같다.

 

흥미진진한 열한 개의 이야기 다발을 <홀로코스트>로 끝내면서, 저자는 어떤 방식으로도 도저히 재현 불가능한 역사적 진실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일요일의 역사스토리를 마무리한다. 역사의 고수가 풀어 주는 역사 해석이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역사는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는데, 새로운 시대를 맞아 주류 담론을 대신할 새로운 해석을 추구하는 일반 대중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저자의 발상에 전적으로 공감을 표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심오한 내공을 먼저 쌓아야겠지만 말이다.

 

[뱀다리] 바타비아 호의 조난 사건을 다룬 소설을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의 저자 라헐 판 코에이가 썼다고 한다. 왜 갠춘해 보이는 책들은 하나 같이 절판의 운명인지 모르겠다. 또다시 책사냥꾼을 본능이 꿈틀거린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이 2020-03-23 1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완전 보물이죠? 전 여행 다니는 동안 읽었는데 풍경 안 보고 책만 읽는다고 친구한테 엄청 한소리 들었던 기억 나요. 근데 내용은 벌써 가물가물거리네요, 아 보잘 것 없는 기억력 ㅠㅠ

레삭매냐 2020-03-23 18:56   좋아요 0 | URL
기대를 하지 않고 만난 책인데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었네요 그것도
단숨에!

여행 대신 책이라, 대단하십니다 ~~

초록별 2020-03-24 0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학도가 말씀해주시니 킵 해두었습니다. 감사드려요.

레삭매냐 2020-03-24 07:27   좋아요 0 | URL
무늬만 역사 학도였습니다...
 
세계를 재다
다니엘 켈만 지음, 박계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 책들도 꾸준하게 사들이고 있지만, 근래 들어서는 예전에 사둔 책들을 주로 읽고 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필두로 해서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이어 독일 출신 작가 다니엘 켈만의 <세계를 재다>도 읽었다. 책이 누렇게 변색이 됐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12년 전에 이 책을 샀단 말인가. 돈 주고 산 책은 반드시 읽는다.

 

오래 전, 수학을 전공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가우스에 대한 칭찬이 대단했다. 수학의 천재라고 했던가. 원체 수하고는 친하지가 않다 보니 그냥 그러려니 싶었다. 하지만 다니엘 켈만이 소환해낸 가우스 그리고 훔볼트는 18세기 슈퍼스타 같은 그런 존재였다고 한다. 참고로 수학의 3대 천재는 아르키메스와 뉴턴 그리고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설마 만화 가우스전자에도 영감을 준 건 아니겠지)라고 한다.

 

이 두 명의 지식인 슈퍼스타가 1828년 어느 학회 모임에서 만난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그들의 신분만큼이나 가우스와 훔볼트는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렸다. 전자는 오만한 천재의 전형을 보여 주면서 자신의 학문적 근거지였던 괴팅겐을 떠나지 않고 책상머리에서 수를 가지고 놀면서 세계의 본질을 추구했다. 반면,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의 훔볼트 남작은 자신이 직접 본 것만 신봉하는 독일식 경험주의의 화신과도 존재였다. 그런 점에서 훔볼트는 당대 세계인의 전형과도 같았던 인물이 아니었나 추정해 본다.

 

수학자로 출발해서 천문학자 그리고 토지 측량업자로 변신을 거듭한 가우스는 돈이 필요했다. 계속해서 연구를 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도 청년 학자는 돈이 필요했다. 대개의 서생들과는 달리 자신의 후원자를 압박해서 두 개의 교수직을 유지하게 해달라고 생떼를 쓰기도 하고, 토지 측량 사업을 실시하면서 이재에 힘쓰기도 한다. 가우스 같은 천재에게 세상은 너무 쉽게 보였던 게 아닐까. 물론 그런 천재 수학자에게도 자식 농사는 쉽지 않은 임무였다.

 

자신의 전문 분야인 수학이나 천문학에서 그의 실력이 어떨지 몰라도, 연애사업에서는 젬병이었던 모양이다. 첫 번째 부인 요하나에게 편지로 청혼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아내와의 첫날밤에도 갑자기 떠오른 공식을 적기 위해 책상으로 달려가는 그런 남자에게 무엇을 기대한단 말인가. 가우스는 자신의 능력보다 못한 모든 이들을 우습게 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아들 오이겐과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19세기 초반, 전 유럽을 호령하던 나폴레옹 전쟁에 대해서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가우스는 아들 오이겐이 베를린에서 비밀집회에 참석했다가 비밀경찰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는 것을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만 볼 뿐이다. 당시는 보수적 프로이센 국가가 유럽을 휩쓴 자유주의 물결을 극도로 경계하면서 세 명 이상만 모여도 탄압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결국 훔볼트 남작의 호의로 오이겐은 신대륙에서 새로운 삶을 찾게 되는 것으로 소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구박을 받던 아들은 미국에 건너가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나 뭐라나.

 

원래 가우스와 훔볼트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화자에 의해 기술되는 방식이었는데 너무 가우스에게만 치중해서 리뷰를 쓴 느낌이 든다. 그러니 이제 균형을 맞출 시간이 되었다. 가우스와 훔볼트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의 본질을 알기 위해 도전했다. 그리고 화자는 그 둘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스타일로 소설을 이끌어간다. 철저한 경험주의자였던 훔볼트는 프랑스인 동료 식물학자 에메 봉플랑과 함께 스페인 식민지였던 지금의 라틴아메리카, 당시에는 뉴스페인 혹은 뉴안달루시아로 불리던 신대륙 탐험에 나선다.

 

식인종들이 출몰해서 무시로 공격을 해대는 오리노코 강과 아마존 강 일대를 탐험하고, 열병은 거의 일상에 가까웠고, 고소증으로 환각 증세를 보이면서도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진 침보라소 산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하기도 했다. 남작의 호기심은 자신을 스스로 실험제물로 삼아 전기 뱀장어를 테스트해보기도 하고, 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설에도 등장하는 쿠라레 독을 직접 삼키는 만용을 부리기도 했다. 장장 5년에 걸친 뉴스페인 대탐험을 마치고, 신생국가 미국의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을 만나 노예 제도에 대한 비판으로 연회장을 얼려 버리기도 했다고 하던가.

 

그런데 한 편으로 보면, 가우스는 몰라도 훔볼트의 탐험에서는 제국주의적 냄새를 지울 수가 없다. 훔볼트 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자연에 대한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에서 시작된 탐험이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건설과 효율적 지배에 공헌을 한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말이다. 근대 민족국가의 등장으로 그 어느 때보다 국가 간의 경쟁이 치열하던 시기에 외국인 학자가 자신의 나라에 와서 지리와 풍습, 문물을 조사한다는 데 환영할 군주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훔볼트가 고대하던 인도 원정은 식민지 모국 영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제국주의 라이벌 영국이 신흥국가 프로이센 출신의 학자에게 자신들이 가진 최고의 보석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재 보라고 할 리가 있었을까.

 

소설의 후반, 세계적 명성을 얻은 훔볼트가 러시아 짜르의 허락 아래 떠난 시베리아 원정 당시 지방 관리들이 남작을 곤경을 처하게 만든 상황들이 어디 한 두 번이었나. 위대한 과학자를 접대하기 위해 마련된 연회나 파티 그리고 무도회가 그저 셀럽 초빙을 빙자한 그들만의 사교모임이었을 뿐, 도대체 학문의 자리는 없었다고 한탄하고 불평을 해대던 가우스를 말년의 훔볼트는 비로소 이해하게 되지 않았던가.

 

중세의 어둠을 몰아내고, 마침내 이성과 진리가 시대정신으로 부각된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두 명의 프로메테우스들에 대한 문학적 접근은 기대이상이었다. 다니엘 켈만은 게르만 스타일의 국뽕이 흘러넘치는 고런 멋진 소설로 100만 명이 넘는 독일 시민들의 지갑을 털었다고 한다. 다니엘 켈만이 요즘은 어떤 작품을 쓰고 있는지 그냥 궁금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