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들 을유세계문학전집 101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김태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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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스위스 출신 작가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신간 <망자들>을 읽었다. 일본 가무극인 노에서 따온 조()-()-()3단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왜 느닷없이 독일어 작가가 일본 가무극 타령이냐고. 그건 소설을 만나 보시면 바로 알 수 있다.

 

1930년대 초, 동서양의 독일과 일본은 제각각 다른 스타일의 파시즘 국가로 변신 중이었다. 전자가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즘, 국가사회주의 스타일이었다면, 일본은 만주사변으로 중국 동북부를 침공하고 탈아입구라는 메이지 유신 이래 구호를 들고 아시아의 패자가 되겠다는 군국주의 파시즘이 대세였다.

 

베른 출신 에밀 네겔리는 영화감독이다. 당대를 주름잡던 프리츠 랑이나 무르나우 혹은 에이젠슈타인에 버금가는 그런 영상감각을 가진 유망주로 등장한다. 그리고 독재자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소설 <망자들>에는 제목처럼 사방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소설의 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사는 일본에서는 셋푸쿠(할복)하는 사무라이를 몰래 촬영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극와 극은 항상 서로 어떤 동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유년 시절, 천재소년이었던 역사적으로 만주국의 요괴였던 아다마스는 제국의 선전물 제작과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다른 영화 선진국이었던 독일에 영화 전문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한다. 아다마스는 어쩌면 독일 자본과 기획으로 양성된 파시스트였는지도 모르겠다. 크리스티안 크라흐트는 실존 인물을 기묘하게 비트는 방식으로 소설에 긴장감을 잔뜩 불어 넣는다.

 

우파(UFA, 처음에는 나치 우파 영화사로 잠깐 착각했었다) 영화사의 후겐베르크는 실력 있지만 해외로 파견하는데 전혀 부담이 없는 에밀 네겔리를 선택해서 일본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 산업에는 막대한 자본이 든다. 한 마디로 영화를 만들기 위한 기술력과 기획은 어떻게 해볼 수 있지만, 그 영화를 실제로 만들기 위해서는 돈이 든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과 예술의 접목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셀룰로이드 추축은 착착 현실화되어 간다.

 

물론 후반의 비극적 전개를 위한 부비트랩을 조심스레 설치하는 것도 작가는 잊지 않는다. 우매한 독자는 작가의 그런 세심한 설정보다는 일본 군국주의자들과는 전혀 정서가 맞지 않는 찰스 채플린이 등장하고, 네겔리의 독일 애인 이다가 참석한 자리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시베리아 출병을 의미하는 북진론과 남방의 천연자원을 얻기 위한 남진론이 대결하는 대화에 더 관심이 갔다. 당시 일본 제국의 주력이었던 만주의 관동군은 소련을 주적으로 상정해서 전쟁에 대비하다가, 결국 해군이 중심이 된 남방작전으로 수정되면서 동남아 정글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지 않았던가.

 

사실 노의 1막에 해당하는 조()에서는 지루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가 느릿하게 흘러가는 걸까. 하지만 2막인 하()에서는 비로소 흥미진진한 서사가 등장하고 달리기 시작한다. 찰스 채플린 호위에 나선 무뚝뚝한 표정의 일본 장교가 딸 아이에게 줄 채플린에게 사인을 아다마스에게 요청하는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엘리트 청년으로 성장한 아다마스가 사소한 복수에 집착했고, 방화범이기도 했다는 점은 그의 천재성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마지막 규()는 진짜 비극의 재현이자 일본을 방문한 가이진(外人) 네겔리의 부서진 영혼이 어떻게 타격받았는지를 마치 카메라의 필름 롤이 도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으로 중계된다.

 

크라흐트 작가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그리고 흑백필름에서 컬러필름으로 넘어가는 영화의 역사적 순간을 포착해낸다. <동경 이야기(Tokyo Story)>의 대가 오즈 야스지로는 이미 1930년대에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이었던 모양이다. 굳이 영화의 미적 아우라를 해치는 사운드트랙이 필요한가라는 시네마틱 질문에 대해서는 그 시절 영화에 대한 지식의 부족으로 더 할 말이 없을 듯 싶다. 흑백 필름으로도 영화의 미적 영상미를 재현해 내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이런 영화적 난제들까지 크라흐트가 의도적으로 커버했다면, 소설에 둘러져 있던 완벽한 소설이라는 띠지는 전혀 과대광고가 아닐 것이다.

 

우파 영화사의 유일신 후겐베르크는 유대계 지식인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와 로테 아이스너에게 포섭된 네겔리에게 일본으로 건너 가 동양적 야만성을 포착하라고 지시한다. 서구 제국주의적 사고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재능 있는 감독은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꼭두각시가 되어 하라는 대로 영화를 만들 계획은 눈곱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야말로 아티스트로서 자존감을 지키고 싶어서였을까? 후반으로 갈수록 소설은 사실 대신 죽음이 다양하게 얽힌 변주곡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크라흐트의 <망자들>은 가이진이 바라 본 정적인 일본 문화에 대한 시선, 독일과 일본 두 제국이 경쟁하듯이 영화를 이용한 선전전에 나서게 되는 일련의 과정 그리고 부유하는 죽음에 대한 사유들로 복잡한 그런 소설이었다. 엔딩에 등장하는 덧없는 죽음 역시 겉보기에 화려한 할리우드의 삶을 좇는 부나방 같은 그런 게 아니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엔딩 하나는 정말 화끈했다. 이제 읽다 만 크라흐트의 <제국>을 다시 펼쳐 들어야 할 시간인가.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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