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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호텔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45
비키 바움 지음, 박광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2월
평점 :

그렇게 오래 읽을 만한 책도 아닌데 수차례나 시도한 끝에 마침내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이번에도 중간에 다른 책들을 만나느라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한 5일 정도 걸린 것 같다. 그전에 138쪽 정도를 읽다 말았는데, 그 부분부터 소설이 흥미진진해지더라. 후반으로 갈수록 재밌어지는 그런 느낌. 중고로 산 줄 알았는데 새 책으로 샀나 보다. 산 지 2년만에 읽을 거였으면 중고로도 만날 수 있었는데 아까비.
오스트리아 빈 출신 유대인이었던 비키 바움은 생전에 수많은 작품들을 발표했지만, 국내에 현재 구할 수 있는 책은 <그랜드 호텔> 뿐이다. 1929년에 발표된 책으로 이미 두 번이나 영화화되기도 했고, 브로드웨이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1920년대 경제공황이 닥치기 전, 흥청거리던 호황 시절 베를린의 유명한 <그랜드 호텔>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한다. 내가 보기에 그랜드 호텔은 갖가지 욕망이 충돌하는 그런 공간이다. 욕망의 공간을 채우는 건, 끓어오르는 다양한 욕망의 주인공들일 수밖에 없다.
1차 세계대전에서 수류탄 부상으로 얼굴의 반쪽이 날아간 오터른슐라크 박사는 그랜드 호텔의 터줏대감이다. 그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소위 후진 객실에 머물면서 자신을 찾는 사람이나 편지가 없냐고 항상 묻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그는 프로이센 제2제국 시절의 영화를 대표하는 선수가 아닐까 싶다.
다음 주자는 프레더스도르프 출신 경리 보조 오토 크링엘라인이다. 지난 20년 동안, 장작 비용을 아끼기 위해 아침마다 아내를 위해 장작을 패온 사나이. 그는 이제 죽을 병(위암?)에 걸려, 27년간의 작소니아 방직회사 경리일을 때려치우고, 얼마 안 되는 유산을 가지고 공화국으로 변신한 새로운 국가의 수도 베를린에서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달려왔다. 문제는 일만 하는 개미 같은 사나이다 보니, 즐기는 방법을 하나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비키 바움 작가는 그런 크링엘라인을 위해 몰락한 남작 가문 출신의 한량 가이거른을 준비시켜 놓았으니 말이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게 흘러가는 거지. 유흥의 순간을 고대하는 크링엘라인에게 오터른슐라크 박사의 진중한 발레 공연 초대나 인생은 결국 모두가 빈 껍질 같다는 현학적인 충고보다 젊은 가이거른 남작이 제안하는 아찔하게 과속으로 달리는 드라이브, 자신의 내면을 강화시켜 준 과소비 그리고 베를린 상공을 질주하는 곡예비행이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홍일점으로 배치된 러시아 출신 발레리나 그루진스카야는 자신의 진가를 몰라주는 베를린 공연에 회의를 느낀다. 공연가들은 모름지기 관객들의 박수의 힘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닌가. 중년의 발레리나는 어느 날 밤, 자신의 방에 침입한 젊고 멋쟁이 남작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삶의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다. 그리고 불타는 연애 감정에 힘입어 그전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퍼포먼스를 보여 주게 된다. 어쩌면 비키 바움 작가는 원효대사의 유심론을 알고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모든 건 내 마음 먹기에 달렸노라는 유심론의 정수를 예리하게 파고든다. 문제는 그루진스카야의 새로운 연인이 된 멋쟁이 가이거른 남작이 사실은 그녀의 50만 마르크짜리 진주를 노리고 그녀의 객실에 숨어든 도둑이라는 점만 빼고는.
바로 삶이야말로 이런 아이러니의 연속이라는 걸 저자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평생 정직하게 살아왔다는 크링엘라인의 직속상사 프라이징 총회장은 또 어떤가. 순전히 마누라 잘 만난 덕에 부르주아 계급으로 수직상승한 졸부는 켐니츠 사와의 합병을 위해 영국 회사와의 협상이 결렬됐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짓 정보를 흘리면서 계약을 성사시키지 않았던가. 그의 그런 일탈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속기르 위해 고용된 매력적인 여성 플람2와 바람을 피우면서 파멸로 치닫기 시작한다.
홀연히 등장해서 프라이징 총회장의 심기를 건드리는 역할을 자처하게 된 미스터 크링엘라인의 활약도 주목할 만하다. 겉보기에는 점잖은 부르주아 신사처럼 보이는 프라이징이 사실은 돈 밖에 모르는 속물이고, 직원들의 안위 따위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악당이라는 사실을 그의 새로운 고용된 애인 플람2에 앞에서 가감 없이 까발리는 쾌거도 선사해준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인물이 바로 크링엘라인일 수밖에 없었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숙명 때문에 절박하게 새로운 삶의 행복을 추구하게 되었지만, 가이거른 남작의 도움으로 하루 동안 자신의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돈을 펑펑 써대면서 자존감을 회복하는데 성공한 전직 경리 보조 아저씨는 평소라면 앞에서 굽실거릴 처지의 상사에게 지난 27년 동안 가슴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모조리 포탄으로 쏘아 올린다. 아 진심으로 통쾌하구나. 그리고 총회장은 감방으로, 총회장의 새로운 애인을 가로챈 중년 사나이는 영국으로 출발한다.
하나 아쉬운 점은 크링엘라인이 위기의 순간, 자신을 도와준 오터른슐라크 박사에게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자신의 새로운 행복을 위해 출발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런데 그 또한 삶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배은망덕의 한 부분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너무 깔끔하다면, 그게 또 이상한 점이 아닐까.
결말로 갈수록 지나치게 극적이라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지난 2년을 묵혀서 읽은 책답게 세 번 정도 같은 부분들을 다시 읽다 보니 부드럽게 잘 익혀진 스테이크를 씹는 그런 기분이랄까. 세계적 유명 호텔을 배경으로 해서 벌어지는 인간 욕망의 소용돌이 한마당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