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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1 - 시대를 일깨운 역사의 웅대한 산
한승원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전남 장흥에서 13년째 칩거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한승원 작가가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의 삶을 그린 <흑산도 하늘 길>, <초의> 그리고 <추사>에 이어 올해 역사소설 <다산>을 발표하면서 대망의 4부작에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최근 텔레비전에서 정조 임금을 다룬 역사드라마 <이산>이 인기리에 방영이 되면서 조선 후기 위대한 계몽군주였던 정조에 대한 조명이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정조와 더불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로 빠뜨릴 수 없는 이가 바로 이 책의 주인공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다.
그는 정조의 아버지였던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뒤주에 갇혀 죽음을 당하던 해인 1762년에 지방관을 역임한 정재원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난다. 어려서부터 지필을 가까이하고, 학문에 능했던 정약용은 조선시대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면서 절대군주인 정조와 긴밀한 연을 맺기에 이른다. 당시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야기했던 노론에 대항하여, 권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젊은 남인 출신의 유능한 선비군을 양성하려던 정조와 정약용의 만남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중국을 통해 밀려들어오는 서양문물 특히 서양 가톨릭을 지칭하는 천주학의 대유행에 맞서, 종래 조선왕조의 국시로 받들어져 오던 주자의 성리학을 지키기 위해 수구 노론파 관리들과 지식인들은 개혁적 성향의 남인들과 첨예한 대결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천주학을 신봉하는 남인계열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맹자>, <대학> 그리고 <중용>에 나오는 천명(天命)의 개념을 천주학의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하면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혁파하고 사민평등이라는 당시 기존체제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이념들이 대유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 정약용 형제들도 예외는 아닐 수가 없어서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를 통해 천주학을 접하게 된다. 여기에서 미래의 그들의 비극이 잉태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해서, 역사소설 <다산>은 독자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먼저 경남 장기와 전남 강진에서 18년간의 긴 그리고 언제 죽음이 닥쳐올지 모르는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유배생활을 마치고 끝내 살아 고향땅 두물머리 소내 땅을 밟은 정약용. 부인과의 60번째 결혼기념일날, 그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신산한 삶을 플래시백을 통해 독자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한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어가며,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간 뒤에도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아 정약용은 관계에서도 승승장구를 거듭하게 된다. 하지만, 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그만큼 짙어지는 법. 대쪽 같은 성품으로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하고 상소를 마다하지 않는 정약용의 올곧은 성품 때문에 그만큼 많은 정적들을 만들게 된다. 다산과 평생의 악연을 만들게 되는 서용보가 대표적인 예이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노론계열 관리들의 모함과 질시로 중앙정계에서 물러나 충청도 홍주의 금정으로, 그리고 황해도 곡산 등의 좌천성 외지근무를 하게도 된다. 하지만 이런 기간에도 언제나 백성이 정치의 근본이라는 유가사상에 입각해서, 백성들을 위한 공평무사한 정치의 도를 베풀고, 스스로 깨닫게 된다. 자신을 극진히 아끼는 정조 임금의 배려로 다시 중앙정계에 복귀하게 된 정약용. 하지만 재위기간 24년을 동안 많은 개혁과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기 위해 노력하던 정조 임금은 악성 종기로 끝내 죽게 되고, 그 때부터 정약용을 든든하게 지켜 주던 바람막이가 걷히면서 고통스러운 삶이 시작된다.
정조 사후,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게 되면서 그동안 정조 치세 하에 숨을 죽이며 때만을 기다려 온 노론의 영수인 심환지·서용보 등은 정순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동시에 천주학을 믿어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정조 대에 총애를 받던 신하들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이가환, 정약용 형제를 비롯해서 이승훈 등 그야말로 일거에 자신들의 정적인 남인들에게 치명타를 가한 노론은 남인의 상징적인 인물인 정약용을 죽이기 위해 갖은 방법을 모색한다.
개인적으로 솔직히 말해서, 다산에 대해 기나긴 유배생활로 대변되는 불우한 삶을 살았다는 정도 밖에는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소설 <다산>을 통해, 그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조망을 다시 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한승원 작가는 치밀한 고증과 방대한 조사를 통해,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들에 기반을 해서, 공식 역사기록에는 빠져 있을 다산의 개인적인 고뇌와 울분과 같은 부분들을 무리 없이 깔끔하게 재창조해내고 있다.
중앙정계에서 승승장구하던 정약용이 정조의 죽음으로 단박에 몰락하고,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천주학을 신봉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억울한 모함을 받아 국문을 받고 사경에 이르러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신의 깨달음과 배움을 후대에 전해야 한다는 선비로서의 처절한 사명감의 인식은 그의 삶의 존재이유였다. 당당한 사대부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대한 다산의 사랑과 천착은 고향에서 천릿길 떨어진 강진 땅에서 기나긴 유배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1권 서두에서 다산은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자와 <천주실의>의 저자인 마테오 리치와 상상 가운데 만나게 되고, 그들이 제공하는 약을 서로 섞어 마시게 된다. 이것은 마치 영화 <메이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주는 빨간약과 파란 약을 고르게 되는 니오의 선택과도 같다. 이것은 천하 만물의 운용의 진리는 온전히 성리학에서 유래했다고 믿었던 조선시대에, 그렇다면 그 진리는 어디에서 유래하였는가에 대한 대답을 천주학에서 찾았던 다산의 갈등과 고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울러 다산이 살아가는 내내 그의 발목을 잡았던 주류 노론과의 긴장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역시 소설적 재미를 더하기 위해 작가는 “연두색 머리처네”라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을 등장시킨다. 미스터리한 이 여인의 존재는 다산에게는 구원자로써, 또는 자신을 죽음의 파멸로도 이끌 수 있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끝까지 자세한 설명을 생략함으로 소설의 역사적 기반을 허물지 않고 자연스러운 퇴장을 유도한다. 또한 소설의 말미에 등장한 초의선사 역시, 유가는 물론이고 도가와 불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에 통달한 다산과의 이어지는 선문답을 통해 다산이 가진 학문의 깊이를 은근하게 드러내 보여 준다.
하루가 다르게 더워져 가는 이 여름, 말년에 이른 노대가의 역작 <다산>을 통해 자신과 대척점에 서 있던 이들도 품으려고 했고, 우리네 민초들의 삶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역경 가운데서도 치열한 삶을 살았던 다산의 그 넉넉한 품에 안겨 보는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