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사레 보르자 - 마키아벨리를 사로잡은 『군주론』의 모델
세러 브래드퍼드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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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체사레 보르자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 할머니를 통해서였다. 이탈리아 사에 흠뻑 빠진 노작가는 카이사르의 중세판 환생이라고 할 수 있는 체사레 보르자에 경도되어 이미 그에 대한 글도 쓰지 않았던가. 덧붙여서 체사레 보르자가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의 실제적인 모델이 되었던 인물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체사레 보르자에게는 냉철한 군주이자, 과감한 결단력의 소유자 그리고 전쟁터에서 뛰어난 전투지휘관이라는 온갖 미사여구가 뒤따르지만 결국 그는 아버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후광을 입어 그런 성공들을 이루었다는 것이 알렉산데르 6세의 사후에 드러난다.

스페인의 아라곤 지방의 보르자(스페인말로는 보르히아) 가문 출신으로 자신의 삼촌이자 교황이었던 칼릭스투스 3세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로마에 입성해서 추기경으로 발탁된 로드리고 보르자는 1492년(컬럼버스가 미국대륙을 발견한 바로 그 해!) 정적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를 꺾고, 오랜 염원이었던 교황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삼촌이 그랬던 것처럼 족벌등용이라는 폐습을 적극 활용해서 정부와의 관계를 통해 낳은 자신의 아이들인(사생아) 체사레, 후안, 루크레치아 그리고 호프레를 고위 관직에 연달아 등용시키기에 이른다.

과거 막강했던 교회 권력의 부활을 꿈꾸던 교황 알렉산데르와 로마의 전통적인 보수귀족 가문인 오르시니, 콜론나 가문들과의 마찰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갈등의 전면에 바로 이 책의 주인공 체사레 보르자가 서 있었다. 명예를 중시하는 보르자 가문의 후예답게, 체사레 보르자는 자신의 일족이 당한 수치나 모욕에 대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보복을 함으로써 당시 보르자 가문이 누리고 있던 권세를 당대의 모든 이들에게 인지시켰다.

한편, 당시 여러 개의 소국으로 나뉜 채 하나의 구심점이 없는 채로 이전투구를 계속하고 이탈리아 주변에는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스페인으로 대표되는 강대국들이 호시탐탐 이탈리아의 정치문제 특히 남부의 나폴리 왕국에 대해 자신들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알렉산데르가 주창한 대로, 교황령을 중심으로 한 주변의 여러 도시국가들과 공국 그리고 공화국들을 아우르는 대역사가 필요한 참이었다.

이미 어린 나이에 추기경에 임명되어 권세를 누리고 있던 체사레 보르자는 1498년 동생이자 교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간디아 공작 후안 보르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사제복을 벗고 환속하여 동생 후안을 대신해서 교황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이탈리아 정복에 나서게 된다.

체사레 보르자는 로마냐 지방 석권을 위한 자신의 첫 전장이었던 이몰라와 포를리 공략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 주면서 포를리의 영주 카테리나 스포르차를 사로잡고 자신의 첫 번째 공략을 대성공으로 이끌게 된다. 보르자 가문의 영욕을 그린 영화 <보르히아>에서 보면 음모의 달인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교황 알렉산데르를 독살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면서 파멸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그려진다. 뒤이어 리미니와 페사로, 파엔차 그리고 우르비노를 정복하면서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무장이라는 당대의 칭송을 얻게 된다.

이 책에서는 어제 본 영화 <공공의 적 1-1>에서 강철중이가 말했다시피 ‘무슨 가족 간에 이렇게 팀웍이 안 맞아 먹어!’라는 푸념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아들 체사레의 이탈리아 원정을 위해, 교권의 최고 지도자인 알렉산데르는 자신의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대의명분과 금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아직 상비군 체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던, 르네상스 시대에 용병들이 주를 이루는 전쟁에서 교황이 지원하는 돈의 힘은 그야말로 막강했다.

이탈리아에 존재하고 있던 각 공국들과 공화국들 간의 정치적 갈등과 더불어 주변 강대국들 간의 이해문제까지 겹쳐져서 그야말로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던 시대 상황이었다. 모든 일들에 대해 냉혹한 분석을 통해 판단하고 움직이던 당대의 풍운아 체사레 보르자조차도 자신이 내린 어떤 결정도 그 결정이 불러올 결과들에 대해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의 적이 내일은 맹방이 되고, 오늘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던 가문과 부하 장수들이 내일은 반대편에 서서 자신에게 칼날을 겨누는 상황 가운데 도대체 누구를 믿어야 하고, 그러지 않아야 하는지 격동의 세월을 겪은 지도자의 고뇌가 이 책의 곳곳에서 배어났다.

체사레 보르자와 그의 아버지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교황권의 강화라는 초석에 바탕을 해서 보르자 가문을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통일을 꿈꾸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알렉산데르는 우리 나이로 환갑에 교황이 되어 11년간 로마를 지배했지만 보르자 가문이 이탈리아에 뿌리를 내리고, 체사레 보르자가 정복한 로마냐 지방의 정복지들을 공고히 하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부족했고, 보르자 가문에 대한 정적들의 증오의 깊이는 상상을 초월했다.

체사레 보르자는 자신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정치적 상황과 수많은 판단과 결정 사이 가운데 위태로운 줄다리기들을 시도하면서 영락을 거듭했지만, 결국 아버지 알렉산데르의 죽음으로 자신에게 가장 큰 도움과 후원을 제공해 주던 보호막이 제거되면서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르네상스 시대 한 풍운아의 삶은, 비록 그의 성공의 상당 부분이 아버지의 후광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지만, 역시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에 있어서 어떤 결정들을 올바르게 해야 하고 그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현명한 삶의 처세술에 대한 귀감을 보여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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