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의 비망록
주제 사라마구 지음, 최인자 외 옮김 / 해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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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우리 나이로 88세의 노대가 주제 사라마구의 책을 드디어 읽게 됐다. 이미 작년에 <눈먼 자들의 도시> 영화로 접했었는데, 주위에 원작을 읽은 이들에게 물어 보니 영화가 도저히 책의 감동을 따라갈 수가 없다고 했던가. 영화만으로도 그의 글이 뿜어내는 심오한 아우라를 느낄 수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 멋진 영화조차도 한낱 사라마구의 작품세계의 “시뮬라크르”에 지나지 않았단 말인가.

작년 말 해냄 출판사에서 새로 펴내기 전인 10년 전에 문학세계사에서 1,2권으로 해서 국내에 처음 소개된 바 있는 <수도원의 비망록>은 사라마구의 13번째 작품이자(1982년), 영어로 번역된 첫 작품(1987년)이기도 하다. 이미 그의 고국인 포르투갈에서는 중견작가로 추앙 받고 있었지만, 그에게 비로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준 매우 뜻 깊은 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수도원의 비망록>은 한 때 초강대국으로 전 세계를 호령했던 스페인도 아니고 우리에게는 너무나 생소하기 그지없는 작가의 조국 포르투갈을 배경으로 해서 펼쳐지는 주인공 발타자르와 블리문다의 연애 스토리다. 리스본 외에는 포르투갈의 지명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지명들과 친숙해지기 위해 인터넷으로 포르투갈의 지도를 찾아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장 궁금했던 장소가 바로 예의 ‘수도원’이 건립되는 장소인 마프라(Mafra)였다. 마프라의 왕궁/수도원은 지금도 포르투갈의 유명한 관광명소라고 한다.

동시에 책에 등장하는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5세와 그의 왕비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리아 아나 조제파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봤다. 모두 실존했던 인물들이었다. 이 놀라움이란! 이 과정을 통해, <수도원의 비망록>이 실제 역사와 픽션을 다룬 팩션이라는 사실도 알 수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우리의 두 주인공이 등장하기 전에, 왕위 계승을 위한 국왕 부부의 후계자 생산을 위한 노력이 기술된다. 책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부부는 모두 6명의 아이들을 생산했는데 성인이 된 자식들은 셋뿐이라고 하는 부분도 역사적 사실이었다.

포르투갈 절대왕정 시대의 군주 주앙 5세는 후계자를 간절하게 원하는데, 이 때 프란시스쿠 수도회의 한 늙은 수사가 나서서 국왕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과 중재하겠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마치 무슨 미신처럼 이 사실에 기뻐한 주앙 5세는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마프라에 수도원을 짓겠다는 서원을 한다. 그 다음 이야기는 뻔하지 않은가. 마리아 아나 왕비가 오랜 기다림 끝에 회임을 하고, 우리의 주인공 발타자르 마테우스가 1711년 전투에서 왼손을 잃은 채, 고향으로 귀환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단자를 처벌하는 종교재판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발타자르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 블리문다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의례적인 신부의 성혼의례 없이 실제적인 부부가 된 그들은 발타자르의 고향인 마프라로 향하고, 그곳에서 <수도원의 비망록>에 등장하는 삼각 축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는 바르톨로메우 로렌수 드 구스마웅 신부(이하 바르톨로메우 신부라 칭하도록 하자!)와 만나게 된다. 여주인공 블리문다는 아침에 금식한 상태에서 타인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진기한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블리문다의 능력은 당시 종교재판에서 이단으로 몰리기에 적합한 기능이기도 했다. 한편, 바르톨로메우 신부는 당시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소위 말하는 신지식인의 표상으로 부각된다. 다른 캐릭터와는 달리 그는 실존 인물이기도 하다.

<수도원의 비망록>은 주앙 5세의 서원으로 건립되는 마프라의 수도원과 발타자르-블리문다 그리고 바르톨로메우 신부가 비밀리에 만들고 있는 날틀 파사볼라(Passarola: 포르투갈 말로 ‘큰 새’를 뜻한다고 한다)의 제작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된다. 이에 덧붙여져서 바르톨로메우 신부와 함께 주앙 5세의 장녀 마리아 바르바라 공주의 하프시코드 교수였던 이태리 나폴리 출신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가 등장한다.

계몽주의자이자, 신지식인 바르톨로메우 신부는 발타자르와 블리문다에게 파사볼라를 만들라는 지시를 하고, 자신은 포르투갈 중심부에 있는 코임브라에 가서 학업을 계속해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따기에 이른다.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면서, 18세기 기술로는 하늘을 나는 날틀을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르톨로메우 신부는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지”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블리문다에게 그 ‘의지’를 모아 오도록 지시한다. 마침 포르투갈 전역을 휩쓸었던 역병의 유행에 편승해서, 블리문다는 근 2,000개에 달하는 의지를 모아오는데 성공한다. 과연 그들의 비행은 성공할 것인가?

반면, 마프라 수도원 건축이 자신의 삶에 있어 지상과제가 되어 버린 주앙 5세는 국가의 재정과 인력을 총동원해서 자신의 살아생전에 수도원 건축을 할 것을 명령한다. 평범한 포르투갈 민중들의 삶은 고려치 않은 절대왕정 시절 국왕의 명령은 필연적으로 백성들의 노동력의 강제동원과 함께 많은 원성을 사게 된다. 오늘날에도 그 화려함을 자랑하는 왕궁이자 수도원의 위용의 뒤안길에는 그렇게 많은 민중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었다는 사실을 작가는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었다.

1961년부터 근 15년을 끌어 온 포르투갈 식민지의 독립전쟁으로 앙골라, 기니비사우 그리고 모잠비크가 차례로 독립을 이루고, 1974년 4월 좌익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비로소 포르투갈에서는 근대적인 민주주의 시스템이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포르투갈의 현대사는 작가들로 하여금, 역사적 사실보다는 사건들을 집중적으로 그 주제로 삼도록 강제해왔다. <수도원의 비망록>에서도 주제 사라마구는 역사적 기술보다는, 역사에 기반을 둔 몇몇 사건들을 바탕으로 한 역사에 대하 재해석 혹은 다시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절대왕정의 두 축인 왕조국가의 절대 권력과 그 절대 권력을 뒷받침해 주는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고 있는 가톨릭교회와의 결합과 이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주제 사라마구의 시선들은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페루 피녜이루에서 마프라까지 31톤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석재를 온전히 인력과 마소의 힘으로 운반하는 과정에 대한 작가의 너무나 자세한 묘사는 차라리 희비극에 가까웠다. 한낱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어머니의 돌” 때문에 무고한 백성들이 쓰러져 가지만, 수도원 건립이라는 대전제 앞에서는 사소한 희생에 불과했다.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5만 명이나 되는 인력들이 강제동원 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상의 천국을 보여 주기 위해 만들고 있다는 수도원 건축이, 천국을 보기 원하는 이들을 천국으로 보내 버리는 비극은 오늘날에도 재현될 조짐이 보이고 있지 않은가.

모두가 즐거워야 할 성축제의 시가행진에서도, 고난에 참석하는 이들은 순수한 의도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연인이나 혹은 사제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고행에 뛰어 들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나, 사도매저키즘적인 고통들의 행진은 당시 사회의 지배계층에 포진하고 있던 사제계급의 위선적인 일면들을 지적하고 있었다. 게다가 바르톨로메우 신부는 사제로서 당연히 믿고 따라야할 삼위일체설(Trinity)에 대해서 갈팡질팡한 모습(300페이지)을 보여 준다.

바르톨로메우 신부, 발타자르 그리고 블리문다가 전력을 다해서 만들었던 파사볼라는 18세기 당시, 유럽에서 발흥된 계몽주의 사상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으로 보인다. 파사볼라가 궁극적으로 뜻하는 자유를 위해, 이 세 명의 주인공들은 각각 이상주의, 실용주의 그리고 신비주의에 입각한 관념론으로 재현된다. 마프라 수도원을 건립하고 있던 사람들이, 파사볼라를 우연히 보았을 때 그것을 성령(Holy Spirit)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예 인용문을 사용하지 않는 사라마구의 문체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거부감이 안 들지도 모르겠지만 나처럼 사라마구와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예전에는 상하권으로 나뉘어져 나왔던 책이 합본으로 되어 장장 600페이지나 된다고 하면 선뜻 손이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8세기 초반의 포르투갈에서 벌어지는 매혹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대서사시를 다 읽고 났을 때, 얻을 수 있는 그 뿌듯한 느낌은 그 무엇에도 비할 수가 없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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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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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책 이름 한 번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밥바라기별이라, 책을 읽으면서 이 말이 금성, 샛별의 다른 이름이라는걸 알게 됐다. 모두들 식사를 마치고 날 무렵, 개가 자기도 밥을 바랄 즈음에 보이는 별이라고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나. 마치 책의 주인공인 준 그리고 그 준에게 투영된 황석영 작가 자신이 모습이 느껴졌다. <개밥바라기별>은 이 세상에 태어나, 무언가를 희구하면서 살지만 정작 그 무언가를 찾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이루어지는 만남과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과 허무적인 방황을 통해 성장해온 우리네 부모 세대의 이야기다.

물론 작가가 말한 대로 그 사이에는 수십 년의 세월이 가로 놓여 있지만, 청춘의 본질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가 보다. 학교라는 제도교육을 통해, 사회가 요구하는 규격화된 인간상으로 제조되어지면서도 우리의 뜨거운 가슴은 그런 위선과 허울들을 견뎌내지 못한다. 게다가 4월 혁명과 5월의 쿠데타를 경험한 이들에게는 오죽하겠는가. 그런 정치적 격랑의 세월과 근대화를 통한 수출입국의 기치 아래 무한경쟁으로 내몰리던 세대에게 평범한 삶에서의 일탈은 바로 낙오를 의미했다.

이야기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문학청년의 꿈을 꾸던 준이 월남파병을 앞두고, 자신의 청소년기에 대한 자조적인 회상으로 시작된다. 자신의 친구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총탄에 맞아 죽는걸 목격한 이들에게, 삶은 그야말로 치열한 전장이 아니었을까. 고도 성장기의 과정에서, 넘쳐나는 수많은 서적들은 그 어느 누구도 제도화 교육 내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현실들과 만나게 되는 유일한 해방구였다. 그렇게 독서를 하고, 몰래 담배와 술을 배우며 성장통을 앓아 나간다.

준과 그의 친구들에게 학교는 그들을 가두는 울타리였고 족쇄였다. 그들은 학교를 빼먹고 산행을 즐겼고, 연상의 여대생들과 얼치기 연애를 했으며, 서울 인근의 산에 아지트를 만들고 보급투쟁을 한다. 그런 모든 과정들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과정으로 형상화된다. 때로는 명상을 통해, 때로는 자신만의 절대고독을 통해.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은 혼란스럽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앞으로 뭘 해먹고 살 것인가와 같은 생존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이들의 성장과정은 그에 대한 자신만의 해답을 찾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준은 지기 인호와 휴학과 자퇴의 어중간한 선상에 있던 어느 해 여름, 전국을 일주하는 무전여행에 나서게 된다. 어떤 여행의 뚜렷한 목적 없이 때로는 고적답사의 길을 가기도 하다가, 고향에 내려가 있는 친구들의 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자신들의 나름의 모험을 경험한다. 그리고 여행의 말미에서 소년에서 청년으로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여정에 올랐음을 인지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도, 사회는 그들의 장기적인 일탈을 용서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대학이라는 관문에 들어선다. 다시 제도권이라는 소행성 궤도에 오른 이들의 고민들은 여러 갈래로 분열하게 된다. 어떤 이는 연애라는 방법으로,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미래의 설계로 또 누구는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을 길을 개척해 나간다. 준은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가담했다가 유치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대위 장 씨와 두해 남짓 전국을 떠도는 부평초 인생길에 나선다. 동래에서는 승려가 되기 위해, 행자생활을 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자신을 버리려는 시도도 해본다. 아버지의 부재 가운데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린 걸까? 다시 삶과 죽음이 확연하게 갈리는 월남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다.

황석영 작가의 젊은 날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나의 그 때는 어땠나 하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들었다. 콩나물 시루 같은 교실에서 12년간의 제도 교육을 받으면서, 단 한 번도 일탈을하지 않았었다. 아니 그런 시도조차 해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대학에 가서는 그동안 억눌려 왔던 감정들이 일순간에 폭발해 버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순 유치한 감정처럼 보이지만, 당시에는 참 많이도 고민했던 것 같다.

주인공 준을 중심으로 해서, 상진 영길 정수 등 그의 친구들의 시선에서 서술되는 이야기의 전개가 마음에 들었다. 어찌 보면 주인공 한 명이 말하는 것보다 다양성의 측면에서 볼 때 다채롭기도 하고, 타인의 속마음을 엿보는 재미도 있는 것 같다. 소설 속의 준이 무전여행을 떠나던 시절만 해도, 세상을 경험해 보겠다는 젊은이들의 낭만적인 무전여행에 호의적인 시선들이 있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취업이라는 명목 아래, 다른 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것들이 되어 버렸다. 이제 젊은이들 사이에서 낭만을 논하는 것은 정말 “개밥바라기별”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된게 아닐까하는 자조감이 문득 들었다.

실용, 경제 그리고 취업이라는 살풍경한 키워드들이 점거한, 그야말로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보다 더 격렬한 생존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새로운 천년에 이순(耳順)의 나이를 훌쩍 넘긴 작가의 자전적 소설 <개밥바라기별>이 누구든지 삶의 본질을 물으며, 이 세상을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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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검은 새 - 누가 메리 로저스를 죽였을까?
조엘 로즈 지음, 김이선 옮김 / 비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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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에드가 A. 포에 대해 아는 건? <검은 고양이>와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 정도. 하지만 이번에 조엘 로즈가 자그마치 18년간에 걸쳐 저술한 <가장 검은 새>를 통해 에드가 포가 추리소설뿐만 아니라 시문학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조엘 로즈는 뉴욕타임즈를 필두로 해서 LA 타임즈에 이르기까지 많은 매체에 기사를 쓴 바 있다. 그리고 <마이애미 바이스>와 <코작>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쓰기도 했다.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실존했던 저명한 작가 에드가 포를 등장시키면서, 미스터리 팩션 소설의 막이 오른다.

<가장 검은 새>는 19세기 인구 35만 명이 살고 있던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이 그 중심에 서 있다. 메리 로저스, 뉴욕의 어느 시가 가게에서 일하던 누구나 흠모해 마지않을 그런 미모를 가지고 있던 여성이 변사체로 발견이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베테랑 상급 치안관인 제이컵 헤이스(올드 헤이스)가 등장한다. 그는 사건해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직관이라고 믿고 있다.

이야기는 이제부터 가속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도대체 누가 이 아리따운 아가씨를 살해했단 말인가? 그와 관련되어 그녀의 전 애인과 약혼자가 수사관들의 용의자 명단에 오르고, 당시 뉴욕 시에서만 3만 명에 달하던 갱들 역시 의심스럽다. 그 와중에 메리 로저스의 약혼자인 다이엘 페인은 자살을 하고, 제3의 인물인 존 콜트의 살인과 뉴욕에서 한가락 하는 갱단의 두목인 타미 콜먼의 살인사건이 겹치면서 스토리 전개는 급물살을 탄다.

여기에 올드 헤이스의 유일한 혈육으로 등장하는 메리 올가 헤이스는 에드가 포의 열혈 팬으로, 메리 로저스 사건에 핵심이 되는 미스터리한 인물을 쫓는 아버지 올드 헤이스의 보좌역을 자처한다. 에드가 포가 발표한 글들과 그가 자신의 전작들을 통해 보여준 ‘사건의 재구성’이란 방식을 아버지 올드 헤이스에게 전수해주는 올가. 이 북새통에 재판을 통해 사형수가 된 존 콜트와 타미 콜먼을 구하기 위한 거대한 음모가 진행되면서 존 콜트의 사형집행 당일, 우스꽝스러운 그의 약혼자와의 결혼식에 이어 대화재가 발생되면서 존 콜트의 자살과 타미 콜먼의 탈옥이 벌어진다.

에드가 포 역시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작가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긴 했지만 경제적 곤궁과 죽어가는 자신의 어린 아내 버지니아와 숙모이자 장모를 봉양해야 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그의 영혼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연약하며, 소설가라기보다는 비평가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면서 거의 모든 언론들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그에게는 독자들이라는 강한 우군이 있지만, 성공에의 집념과 병마와 싸우고 있는 아내 사이에서 그는 끊임없이 방황하고 있다. 도대체 누가 메리 로저스를 죽였단 말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점 중의 하나는 책 안쪽에 붉은 색으로 채색된 고담 시티의 지도였다. 21세기 밀레니엄 캐피탈의 그것과는 너무나 다른 19세기 미국이 건국된 지 채 70년 남짓한 시절의 고담 시티의 전경에 대한 조엘 로즈의 묘사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아직 경찰조직이 정비되지 않았던 시기에, 고담 시티 뉴욕은 그 시작에서부터 살인과 폭력이 난무했었다고 한다. 그런 무질서가 횡행하는 가운데, 질서를 확립하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지난 40년간 한결같이 범인색출에 투신해온 올드 헤이스의 모습은 에드가 포가 자신의 작품들에서 오귀스트 뒤팽이라는 탁월한 탐정의 모습으로 재탄생시켰다는 것이 작가 조엘 로즈의 주장이다.

아울러 올드 헤이스의 브레인으로 등장하는 딸 올가의 활약 역시 빼놓을 수가 없다. 에드가 포의 추리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현실에 적용을 하고 신문에 난 기사들을 토대로 해서 보통의 경우 흔히 빠뜨리게 되는 실수들을 예리한 시선으로 잡아내면서 재구성하는 기술은 여느 탐정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캐릭터에 버금갈 정도였다.

아울러 타락한 도시에서, 사형수마저 금권과 결탁한 일단의 무리들이 사법집행을 방해하고 다수의 죄수들을 탈옥시키게 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당시뿐만 아니라 법 앞에 만인의 평등이라는 우리 사회의 대전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다름이 아니다. 새뮤엘 애덤스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판결을 받은 존 콜트가 수감 중에 누리는 온갖 특권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유감없이 노출시키고 있다.

존 콜트의 형으로 콜트 리볼버를 발명해서 돈방석에 앉은 콜트 대령은 다가올 남북전쟁에 다량의 총기들을 보급 유통시킴으로써 미국 사회가 오늘날에까지 사회 도처에서 벌어지는 총기관련 사고들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그려진다. 물론 정당한 사법집행을 방해하는 주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실제적인 주인공인 에드가 포에 대해서는 몇 편의 단편소설 외에는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책의 분량에 반비례하면서 흥미가 떨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조엘 로즈는 분명 미국 문학계에 큰 별로 에드가 포를 바라보는 것 같다. 소설의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끊임없이 현실세계로부터 도주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는 작가의 태생적 한계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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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마가 사랑한 화가 들라크루아 - 별난 화가에게 바치는 별난 그림에세이
카트린 뫼리스 글.그림, 김용채 옮김 / 세미콜론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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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짧은 그림 에세이인 <뒤마가 사랑한 화가 들라크루아>를 읽다 보니, 옛 중국의 고사인 ‘지음(知音)’이 떠올랐다. 거금고의 명수였던 백아(伯牙)와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종자기(鍾子期)의 이야기에서 유래된 지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진실로 이해할 수 있었던 종자기가 세상을 뜨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었다고 했던가.

색채예술의 대가로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봉장이었던 외젠 들라크루아가 죽은 해였던 1864년 12월 우리에게는 삼총사로 널리 알려진 대문호 알렉상드로 뒤마가 들라크루아를 추모하며 발표한 <들라크루아에 대한 한담>을 바탕으로 해서 21세기에 카트린 뫼리스라는 역시 프랑스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가 재구성해서 한 편의 책으로 내놓았다. 내용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몇 개의 선으로 그려내는 카트린 뫼리스의 일러스트들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던 1798년에 태어난 들라크루아는 게랭의 지도 아래 제리코와 함께 동문수학하면서 그림을 배워 나갔다고 한다. 그의 화풍은 책에도 나오지만, 당시 고전주의 양식이 판을 치던 프랑스 미술계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던 것처럼 대담한 색채의 사용과 도발적인 주제들을 모티브로 삼았다. 그가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중요하게 생각했던 색채의 다양성에 대한 연구는 훗날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822년 <단테의 조각배>라는 작품으로 살롱전에 출품을 하면서 일대를 풍미한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이 작품에서, 죽음의 강 스틱스를 배를 타고 건너가는 단테 자신과 베르길리우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에 뒤를 이어 1824년에 발표된 <키오스 섬의 학살>은 2년 전인 1822년 그리스 독립전쟁의 와중에 그리스 키오스 섬에서 오스만 제국의 의한 학살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에 등장하는 ‘손’은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가했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세상을 떠난 영국의 대시인 바이런 경에 대한 들라크루아식의 오마쥬였다.

그 외에도 이 책에서는 들라크루아와 관계된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등장을 한다. 살롱전에 출품을 해야 하는데, 프레임을 만들 돈이 없어서 고생했던 이야기, 오를레앙 공작이 빅토르 위고에서 선물하기 위해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구입을 하도록 뒤마가 손을 쓰지만 선물대상을 모르고서는 그림을 팔지 않겠다고 뻐팅기는 들라크루아, 평생의 적수였던 앵그르를 체제전복적인 그림들을 그려대는 들라크루아의 대항마로 출전시키는 미술평론계의 편협한 모습들에 이르기까지 화가로서의 들라크루와 뿐만 아니라 인간 들라크루아의 참모습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뒤마의 글과 카트린 뫼리스의 절묘한 공동 작업이 너무나도 멋들어졌다.

역시 들라크루아의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830년에 발표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일 것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자유의 여신 옆에 나팔총을 가지고 뒤따르는 남자의 모습이 보이는데, 바로 이 사람이 바로 들라크루아 자신이라고 추측하기도 했지만 뒤마는 들라크루아가 공화주의자였다기 보다는 귀족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이 가설을 부인하고 있다. 자신과는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는 들라크루아와 그의 예술세계를 편견이나 고정관념 없이 대하고, 평생의 지기로 지냈던 이 둘의 우정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1833년 뒤마가 살던 생나자르 가에서 열린 가장무도회에서, 뒤마와 그의 화가 친구들이 공동 작업으로 무도회장을 꾸민 이야기는 뒤마가 경험한 들라크루아 예술인생의 백조의 노래처럼 다가온다. 루이와 클레망 블랑제, 알프레드와 토니 조아노, 드캉, 자댕, 바리, 그랑빌 그리고 낭퇴이 등이 그 작업에 참여했는데, 유독 들라크루아만이 무도회가 다가올수록 코빼기도 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할당된 벽면을 다른 이들에게 돌리자는 의견을 들라크루아의 지음 뒤마는 온 몸으로 막아냈다고 증언하고 있다. 뒤마의 기대대로 들라크루아는 밑그림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그림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물 흐르듯 유연하게 모든 것을 처리해냈다. 뒤마의 표현대로 ‘정말 좋은 시절’의 이야기였다.

근대 미술사에 있어서 길이 남을 수많은 명작들을 남겼지만, 죽을 당시에는 끝까지 시중을 들었던 시종과 가정부만이 그의 마지막 순간을 지켰다는 것을 개탄하는 글로 책은 끝이 난다. 정말 들라크루아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뒤마의 ‘지음’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이 책을 통해 들라크루아의 예술세계에 대해 다시 알게 되기 전까지, 나는 들라크루아와 로트렉을 헷갈리고 있었다. 하지만 뒤마가 남긴 글에, 21세기식 새로운 해석이 덧붙여진 이 책을 통해, 19세기 가열찬 혁명과 반동의 뜨거운 기운이 넘실거리던 시대를 살았던 어느 예술혼에 불타는 작가와의 친밀한 만남을 가질 수가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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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목사님의 즐거운 유머
오카와 쓰구미치 지음, 최선임 옮김 / 지식여행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어떤 책이든지 반드시 그 목적성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오카와 쓰구미치 목사님이 쓴 <유쾌한 목사님의 즐거운 유머>는 도대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을까? 아주 간단하다. 그건 기존에 기독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딱딱하고 고루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유머를 통해 한 방에 날려 버리고,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으라는 거다. 너무 뻔한다구?

뭐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책에 등장하는 오카와 목사님이 비장의 무기처럼 준비한 유머들이 어디선가 한 번 정도는 들어본 듯한 기시감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유머라는 본질로서의 기능에 충실하면 그만 아닌가 말이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 중에서 일본의 전통문화와 관계된 부분이 무척 흥미로웠다. 기독교가 일본에 전래되었을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이 대개의 경우 무사계급의 사무라이들이었다고 하는데 전통적으로 사무라이들은 얼굴에 희로애락을 들어내면 안되었다고 한다. 한 번의 미소가 백 마디의 말보다도 더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 유추해 보았을 때, 무표정한 사무라이가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이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으랴. 그 자체가 유머였다. 하지만 실제에서는, 그 반대였다고 하니 참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엄마를 따라 슈퍼마켓에 간 꼬마가, 엄마에게 초콜릿칩 쿠키를 사달라고 조르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계산할 무렵, 카트에서 벌떡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초콜릿칩 쿠키를 사달라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선포하자 무려 23상자의 초콜릿칩 쿠키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참으로 마음에 와 닿았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도 역시 세상 가운데 살면서, 세속적인 욕망들 가운데 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가 아는 대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뜻에 합당한 바람이 아닌 자신들의 희망사항들이 우선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바람들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전에 먼저 그 바람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부합되었는가를 먼저 물어 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하지만 실제의 적용에서는 아무리 좋은 유머라고 할지라도 듣는 상대방이 어떤가를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아침에 바로 뼈저리게 느낄 수가 있었다. <도베르만>(37페이지)의 블랙유머를 말했다가 낭패를 당했다. 관계의 상처가 주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는데,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은 제시하지 않고 유머만 말했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

이 작은 책을 통해서, 사랑과 치유의 종교인 기독교가 고난에 찬 세상살이에 시달린 이들에게 즐거운 웃음과 행복을 되찾아 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조금 더 바란다면 책을 읽고 나서, 가까운 교회에 설교를 들으러 나간다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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