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의 비망록
주제 사라마구 지음, 최인자 외 옮김 / 해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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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우리 나이로 88세의 노대가 주제 사라마구의 책을 드디어 읽게 됐다. 이미 작년에 <눈먼 자들의 도시> 영화로 접했었는데, 주위에 원작을 읽은 이들에게 물어 보니 영화가 도저히 책의 감동을 따라갈 수가 없다고 했던가. 영화만으로도 그의 글이 뿜어내는 심오한 아우라를 느낄 수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 멋진 영화조차도 한낱 사라마구의 작품세계의 “시뮬라크르”에 지나지 않았단 말인가.

작년 말 해냄 출판사에서 새로 펴내기 전인 10년 전에 문학세계사에서 1,2권으로 해서 국내에 처음 소개된 바 있는 <수도원의 비망록>은 사라마구의 13번째 작품이자(1982년), 영어로 번역된 첫 작품(1987년)이기도 하다. 이미 그의 고국인 포르투갈에서는 중견작가로 추앙 받고 있었지만, 그에게 비로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준 매우 뜻 깊은 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수도원의 비망록>은 한 때 초강대국으로 전 세계를 호령했던 스페인도 아니고 우리에게는 너무나 생소하기 그지없는 작가의 조국 포르투갈을 배경으로 해서 펼쳐지는 주인공 발타자르와 블리문다의 연애 스토리다. 리스본 외에는 포르투갈의 지명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지명들과 친숙해지기 위해 인터넷으로 포르투갈의 지도를 찾아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장 궁금했던 장소가 바로 예의 ‘수도원’이 건립되는 장소인 마프라(Mafra)였다. 마프라의 왕궁/수도원은 지금도 포르투갈의 유명한 관광명소라고 한다.

동시에 책에 등장하는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5세와 그의 왕비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리아 아나 조제파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봤다. 모두 실존했던 인물들이었다. 이 놀라움이란! 이 과정을 통해, <수도원의 비망록>이 실제 역사와 픽션을 다룬 팩션이라는 사실도 알 수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우리의 두 주인공이 등장하기 전에, 왕위 계승을 위한 국왕 부부의 후계자 생산을 위한 노력이 기술된다. 책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부부는 모두 6명의 아이들을 생산했는데 성인이 된 자식들은 셋뿐이라고 하는 부분도 역사적 사실이었다.

포르투갈 절대왕정 시대의 군주 주앙 5세는 후계자를 간절하게 원하는데, 이 때 프란시스쿠 수도회의 한 늙은 수사가 나서서 국왕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과 중재하겠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마치 무슨 미신처럼 이 사실에 기뻐한 주앙 5세는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마프라에 수도원을 짓겠다는 서원을 한다. 그 다음 이야기는 뻔하지 않은가. 마리아 아나 왕비가 오랜 기다림 끝에 회임을 하고, 우리의 주인공 발타자르 마테우스가 1711년 전투에서 왼손을 잃은 채, 고향으로 귀환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단자를 처벌하는 종교재판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발타자르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 블리문다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의례적인 신부의 성혼의례 없이 실제적인 부부가 된 그들은 발타자르의 고향인 마프라로 향하고, 그곳에서 <수도원의 비망록>에 등장하는 삼각 축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는 바르톨로메우 로렌수 드 구스마웅 신부(이하 바르톨로메우 신부라 칭하도록 하자!)와 만나게 된다. 여주인공 블리문다는 아침에 금식한 상태에서 타인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진기한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블리문다의 능력은 당시 종교재판에서 이단으로 몰리기에 적합한 기능이기도 했다. 한편, 바르톨로메우 신부는 당시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소위 말하는 신지식인의 표상으로 부각된다. 다른 캐릭터와는 달리 그는 실존 인물이기도 하다.

<수도원의 비망록>은 주앙 5세의 서원으로 건립되는 마프라의 수도원과 발타자르-블리문다 그리고 바르톨로메우 신부가 비밀리에 만들고 있는 날틀 파사볼라(Passarola: 포르투갈 말로 ‘큰 새’를 뜻한다고 한다)의 제작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된다. 이에 덧붙여져서 바르톨로메우 신부와 함께 주앙 5세의 장녀 마리아 바르바라 공주의 하프시코드 교수였던 이태리 나폴리 출신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가 등장한다.

계몽주의자이자, 신지식인 바르톨로메우 신부는 발타자르와 블리문다에게 파사볼라를 만들라는 지시를 하고, 자신은 포르투갈 중심부에 있는 코임브라에 가서 학업을 계속해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따기에 이른다.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면서, 18세기 기술로는 하늘을 나는 날틀을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르톨로메우 신부는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지”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블리문다에게 그 ‘의지’를 모아 오도록 지시한다. 마침 포르투갈 전역을 휩쓸었던 역병의 유행에 편승해서, 블리문다는 근 2,000개에 달하는 의지를 모아오는데 성공한다. 과연 그들의 비행은 성공할 것인가?

반면, 마프라 수도원 건축이 자신의 삶에 있어 지상과제가 되어 버린 주앙 5세는 국가의 재정과 인력을 총동원해서 자신의 살아생전에 수도원 건축을 할 것을 명령한다. 평범한 포르투갈 민중들의 삶은 고려치 않은 절대왕정 시절 국왕의 명령은 필연적으로 백성들의 노동력의 강제동원과 함께 많은 원성을 사게 된다. 오늘날에도 그 화려함을 자랑하는 왕궁이자 수도원의 위용의 뒤안길에는 그렇게 많은 민중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었다는 사실을 작가는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었다.

1961년부터 근 15년을 끌어 온 포르투갈 식민지의 독립전쟁으로 앙골라, 기니비사우 그리고 모잠비크가 차례로 독립을 이루고, 1974년 4월 좌익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비로소 포르투갈에서는 근대적인 민주주의 시스템이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포르투갈의 현대사는 작가들로 하여금, 역사적 사실보다는 사건들을 집중적으로 그 주제로 삼도록 강제해왔다. <수도원의 비망록>에서도 주제 사라마구는 역사적 기술보다는, 역사에 기반을 둔 몇몇 사건들을 바탕으로 한 역사에 대하 재해석 혹은 다시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절대왕정의 두 축인 왕조국가의 절대 권력과 그 절대 권력을 뒷받침해 주는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고 있는 가톨릭교회와의 결합과 이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주제 사라마구의 시선들은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페루 피녜이루에서 마프라까지 31톤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석재를 온전히 인력과 마소의 힘으로 운반하는 과정에 대한 작가의 너무나 자세한 묘사는 차라리 희비극에 가까웠다. 한낱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어머니의 돌” 때문에 무고한 백성들이 쓰러져 가지만, 수도원 건립이라는 대전제 앞에서는 사소한 희생에 불과했다.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5만 명이나 되는 인력들이 강제동원 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상의 천국을 보여 주기 위해 만들고 있다는 수도원 건축이, 천국을 보기 원하는 이들을 천국으로 보내 버리는 비극은 오늘날에도 재현될 조짐이 보이고 있지 않은가.

모두가 즐거워야 할 성축제의 시가행진에서도, 고난에 참석하는 이들은 순수한 의도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연인이나 혹은 사제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고행에 뛰어 들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나, 사도매저키즘적인 고통들의 행진은 당시 사회의 지배계층에 포진하고 있던 사제계급의 위선적인 일면들을 지적하고 있었다. 게다가 바르톨로메우 신부는 사제로서 당연히 믿고 따라야할 삼위일체설(Trinity)에 대해서 갈팡질팡한 모습(300페이지)을 보여 준다.

바르톨로메우 신부, 발타자르 그리고 블리문다가 전력을 다해서 만들었던 파사볼라는 18세기 당시, 유럽에서 발흥된 계몽주의 사상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으로 보인다. 파사볼라가 궁극적으로 뜻하는 자유를 위해, 이 세 명의 주인공들은 각각 이상주의, 실용주의 그리고 신비주의에 입각한 관념론으로 재현된다. 마프라 수도원을 건립하고 있던 사람들이, 파사볼라를 우연히 보았을 때 그것을 성령(Holy Spirit)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예 인용문을 사용하지 않는 사라마구의 문체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거부감이 안 들지도 모르겠지만 나처럼 사라마구와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예전에는 상하권으로 나뉘어져 나왔던 책이 합본으로 되어 장장 600페이지나 된다고 하면 선뜻 손이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8세기 초반의 포르투갈에서 벌어지는 매혹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대서사시를 다 읽고 났을 때, 얻을 수 있는 그 뿌듯한 느낌은 그 무엇에도 비할 수가 없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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