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적뒤적 끼적끼적 : 김탁환의 독서열전 - 내 영혼을 뜨겁게 한 100권의 책에 관한 기록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타깝게도 그동안 수많은 책을 발표해온 김탁환 작가의 책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그의 책을 먼저 읽고, 이 책에 대한 에세이집을 접했으면 좋았으련만, 아쉽다. 책을 받아 보기 전에 400페이지가 훨씬 넘는다고 해서 약간 걱정을 했었는데 그런 걱정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 자그마치 열권도 아니고 100권에 달하는 책에 대한 개인적이거나 혹은 사유에 근거한 이야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사실 작년 가을에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라는 책을 읽고 나서, 책에 대한 소개를 하는 글들을 좀 멀리 하고 싶었었다. 왜냐, 그런 책들을 읽게 되면 어김없이 그렇게 알게 된 책들을 사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뒤적뒤적 끼적끼적>의 책자락들을 넘기면서 역시나 다시 한 번 세상은 넓고, 읽을 책들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2장에 나오는 심노숭의 <눈물이란 무엇인가>에서 다룬 집착에 담긴 이야기를 보면서, 나의 집착의 대상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한 때는 영화에 집착했었고 또 한 때에는 사진과 낚시 그리고 야구에 집착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에 와서는 책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본다. 조선시대 최고의 로맨티스트라는 멋진 별호를 가진 심노숭이 어떤 글을 남겼는지 자연스레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같은 장에 나오는 아니 에르노에 대한 글들을 통해서는 정직과 가혹한 글쓰기가 눈에 밟혔다. 모름지기 글을 쓰는 이들은 정직해야 한다는 걸까? 그리고 또 가혹한 글쓰기는 무엇인가. 동시에 책읽기에서 독자가 감당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이탈로 칼비노는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나만의 고전을 만들어 내라고 주문을 했었다. 어떤 책이 아무리 다른 이들로부터 칭송과 환호를 받더라도, 나와 공명하지 못하면 나에게는 그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이들은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난 아무도 가지 않을 만한 곳에 가서, 아무도 하지 않을 일들을 하면서 기상천외한 글들을 써내는 다카노 히데유키의 글들이 좋다.

거의 온갖 장르의 책들을 섭렵하다 보니 사랑에 대한 이야기 또한 빠질 수가 없다. 피츠제럴드의 단편선에서 인용한 세상에 온갖 사랑들이 있지만, 똑같은 사랑은 없다는 그의 선언이 가슴이 때린다(93페이지). 아마 인류의 불멸의 주제인 사랑에 대한 글들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종이책 더 나아가서는 디지털북이 그 수명을 다하지 않는 한 끊이지 않고 재생산될 것이다. 그런데 비슷한 사랑들이 차고 넘칠 진 몰라도, 자신만의 유니크한 사랑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피츠제럴드의 기분 좋은 속삭임.

어려서 헤딘의 전기를 읽으면서 사막에 가보고 싶다는 꿈을 꿨었다. 수잔 휫필드의 <실크로드 이야기>에 나오는 10명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마치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그 타클라마칸 사막, 황량한 모래로 뒤덮인 사막이 그리워졌다. 위구르어로 들어가면 되돌아 나오지 못하는 땅이라고 했던가. 태어나서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막이건만 왜 그렇게 간절하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거창하게 구도를 말하기 전에 앞서 데자뷰처럼 사막에 대한 그리움이 우선한다.

<뒤적뒤적 끼적끼적>에 나오는 책들을 보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었는데 의외로 절판이 돼서 이제는 보고 싶어도 못 보는 책들이 많아서 참 아쉬웠다. 특히 레이 황의 <1587 만력 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와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과 같이 미시와 거시적 측면에서 역사 바라보기의 전범이 되는 연구와 해석을 담은 책들이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다는 점이 너무나 아쉬웠다.

<뒤적뒤적 끼적끼적>의 후유증은 벌써부터 그 조짐을 보이고 있다. 어쩌면 어떤 책들을 먼저 구입해야 하는 패닉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내가 모르고 있던 좋은 책들이 많다는 것과 책은 읽어도 읽어도 그 끝이 없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 알찬 독서의 경험이었다.

*** 내가 찾은 오탈자
1. 사의 -> 사람의 (62페이지)
2. 하연 -> 하얀 (157페이지) : 진은영 시인의 시집 37페이지 확인
3. 「해가 : 우측 낫표가 빠졌습니다 (239페이지)
4. 하는 -> 하지 (255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제 사라마구의 새로운 책 <죽음의 중지>를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을 번역한 이는 영문학을 전공한 정영목 씨라고 한다. 사라마구가 포르투갈 작가가 아니었던가? 2005년에 나온 이 책은 작년 10월에 미국에서 마가렛 줄 코스타가 영어로 번역해서 출간이 됐다. 그렇다면, 포르투갈어로 쓰인 책의 영문판을 다시 한국말로 번역했단 말인데……. 원래 그리스어로 쓰인 신약성경이 라틴어, 영어 그리고 다시 중국어를 거쳐 우리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숱한 오역들에 대한 예를 굳이 들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사라마구의 책인 <수도원의 비망록>이 작년 말에 재출간되면서 포르투갈어를 전공한 송필환 교수가 감수를 맡았었는데, 왜 이번에는 그냥 영어책을 번역했는지 그 점이 좀 아쉬웠다.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노년에 비로소 자신의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한 포르투갈 출신의 노대가 주제 사라마구의 상상력은 18세기 신비로운 날틀제작에 얽힌 발타자르와 블리문다의 로맨스를 거쳐, “눈먼 자들”이 사는 도시에서 벗어나 드디어 ‘하데스의 세계’에 다다른다. 소설 <죽음의 중지>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국가에서(작가의 조국인 포르투갈일 것으로 추정된다), 죽음이 새해 전날에 파업을 일으키면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 죽음이 그 작동을 멈춘 것이다.

죽음이 멈추면서 그에 따른 사회적 혼란과 부작용들이 충분히 예상되지 않는가. 그전에 작가의 상상력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하긴 유사 이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이미 할리우드에서는 1934년에 <명절에 나타난 저승사자(Death Takes A Holiday)>라는 제목으로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가 만들어졌었다.

주제 사라마구가 올드 할리우드 영화에서 영감을 얻었던 그렇지 않던 간에, 이야기는 계속된다. 당장 종교계에서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를 하고, 더 이상 수익을 낼 수 없게 된 장의업계, 더 이상 죽지 않는 이들로 넘쳐 나게 된 병원 업무는 마비가 되는 아수라장이 펼쳐진다. 다만, 보험업계에서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처럼 새로운 수익모델을 창출해낸다. 젊어서 공산당 활동을 했던 사라마구의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비꼼의 미학이 느껴졌다.

종교계와 철학자들이 모여 죽음의 실종에 대해 무의미한 논쟁을 하고 있는 동안, 마피아(Maphia)들은 여전히 죽음이 유효한 국경 밖으로 죽기를 원하는 이들을 실어 나르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물론 국가에서는 이를 알고서도, 그들의 행위를 묵인한다. 이 시점에서, ‘물리적 죽음’에 대한 질문이 고개를 들지만 작가가 언급하지 않았으니 살짝 패스하도록 하자. 문제는 죽지는 않지만, 인간의 실존적인 노화를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 싶지만 죽을 수도 없는 상황이 연출되면서, 이에 대한 사회적 비용과 연금제도의 붕괴로 인한 국가적 위기가 목전에 다가와 있다. 그야말로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회색지대에 놓인 상황이다(47페이지).

여기까지가 <죽음의 중지>에 첫 번째 부분에 해당되는 이야기고, 이제부터 진짜 “죽음”이 개입을 하게 되는 두 번째 이야기 시작이 된다. 인간의 죽음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소문자 ‘죽음’은 방송국에 직접 편지를 보내 7개월간에 걸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전위적 실험의 실패를 인정하고, 앞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죽음을 전달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동안 유보되어 왔던 죽음의 시행을 그날 자정부터 단행하겠다고 말한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대명제가 반드시 필요했던 종교계에서는(특히 가톨릭) 이런 죽음의 선포를 자신들의 오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받아들이고, 장례업계 역시 환호성으로 죽음의 매니페스토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앞으로 죽을 사람들에게 7주일간의 말미를 주면서, 자줏빛 편지들이 배달되기 시작한다. 국가에서는 경찰력을 동원해서, 예의 편지를 발송하는 ‘죽음’을 찾아 나서지만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늘 불필요한 행정 절차들을 고안해내는 국가에 대한 사라마구식의 조소가 뒤따른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시점에서 죽음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죽음이 발송한 편지가 되돌아온 것이다! 누구에게나 평등했던 죽음이 거부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도시에 거주하는 매우 평범한 첼로연주자였다. 우리의 죽음은 몇 번 더 죽음의 발송장을 보내보지만 항상 그 결과는 반송이었다. 자, 이제 자신의 직업의식에 불타는 죽음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게 된다.

우선 죽음이라는 누구나 원하지 않는 주제를 가지고, 이렇게 독창적이면서도 참신한 아이디어로 세태를 풍자하는 멋진 글을 써낸 노작가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소문자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국왕의 모후에게도, 그리고 산골에서 농사를 짓는 이름 없는 농부에게도 죽음은 차별이나 편애 없이 평등하게 다가선다. 우리의 일상에서 항상 일어나고 있지만, 인지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이 -죽음- 발생하게 되었을 때를 가정한 사라마구의 우화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 양심의 문제를 다룬다.

우리는 삶 가운데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이 불행하게 되었을 때 혹은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되었을 때 그들을 돌봐야 한다는 명제 아래서, 인도주의와 이웃사랑 그리고 연대의 중요성을 작가는 말없이 지목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에서 죽음이 실종되었을 때 일단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이유로 죽음을 원하는 이들에게 죽음을 배달하는 붐이 일지만 곧바로 이 사태를 지각한 사람들의 되살아난 양심이 회복되는 과정을 노작가는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라마구가 우중충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만을 이 책을 통해 하는 것만은 아니다. 죽음이 다시 본업에 복귀하게 되었을 때, 그녀(죽음은 여성으로 묘사가 된다)에 대한 미디어의 적대적인 보도의 예를 들면서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블랙 유머의 진수를 보여준다(168페이지). 사라마구의 책에서 이런 유머를 읽을 줄은 미처 몰랐다. 미래에는 자줏빛 편지대신 마이크로소프트의 아웃룩 익스프레스로 죽음의 발송장을 보내야겠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등장시키기도 하고(181페이지), 첼리스트가 일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샤먼(223페이지)이라고 부르는 등의 유머와 진지한 주제의 균형에도 정성을 들인다.

표지에 등장하는 해골나방을 어디에선가 본 것 같지 않은가? 바로 <양들의 침묵>의 표지에 당당하게 등장하는 바로 그 녀석이다. 학명은 아케론티아 아트로포스(Acherontia atropos). 아케론은 사후 세계의 주인인 하데스가 다스리는 지하에 흐르는 스틱스 강의 지류이고, 아트로포스는 운명의 여신(모이라이:Moirae/라틴어 파르카이:Parcae 에 해당한다) 세 자매의 맏이로 죽음을 주관한다. 이보다 더 적절한 이름이 또 있을까. 해골나방은 예로부터, 불운을 상징하는 불길한 징조로 받아 들여져 왔다. 소문자 죽음은 첼리스트가 보고 있던 자연도감으로부터 이 해골나방을 자줏빛 편지를 대신할 죽음의 메신저로 사용하고 싶다는 영감을 얻는다. 팔방미인의 노작가 사라마구에게 한 수 배웠다.

<수도원의 비망록>으로 주제 사라마구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기존의 문법체계를 거부하는 그의 소설 작법에 도대체 적응이 되지 않아 책을 읽으면서 내내 고생했었다. 하지만, 두 번째로 그의 작품을 대하게 되면서 조금씩 익숙해졌는지 그전 같은 부담감이 덜해졌다. <수도원의 비망록>을 읽으면서도, 작가에 대해 그리고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들에 대해 공부를 하게 만들었었는데, <죽음의 중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통해, 삶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노대가의 묵시록 같은 계언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조용히 점멸하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관의 피 - 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2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전편에서 두 건이 미제 살인사건과 그 사건들을 풀기 위해 매진하던 안조 세이지 주재 경관의 의문사 그리고 덴노지 화재 사건 현장을 떠나 순직처리조차 되지 못한 아버지의 원한을 풀기 위한 아들 다이조의 노력이 가중되는 가운데 아쉽게도 후속편으로 그 바통을 넘겨주게 되었다.

어느 미스터리를 다룬 소설도 마찬가지겠지만, <경관의 피> 역시 예의 공식을 따른다. 하지만 그 몫은 세이지의 아들 다이조의 몫이 아닌 듯 싶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관이 된 다이조는 자신이 희망하는 보직인 주재경관 대신에 공안경찰로 발탁이 되어, 뛰어난 공훈을 세우지만 경찰이면서도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본의 아니게 적군파 조직에 몸을 담게 되면서 극심한 자아의 충돌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 공안 임무를 마치긴 했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가정불화를 겪게 된다. 한편 아버지의 친구들로 다이조의 후원을 도맡았던 삼총사들은 이제 경찰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어 다이조의 희망대로 주재경관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써준다. 주재경관이 된 다이조는 다시 자신의 아버지의 오명을 벗기기 위해, 발생한지 근 30년 된 사건들을 탐문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주재경관으로서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다이조지만, 아들 가즈야와는 어머니인 준코를 폭행했던 기억으로 인해 서먹서먹하기만 하다. 별다른 일 없이 평화롭기만 하던 어느 날, 다이조의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아버지의 의문사에 대한 단서를 밝혀내게 되지만 관내에서 발생한 인질 총기사고로 인해 다이조는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 다이조의 뒤를 이어, 가즈야 역시 도내의 국립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다음 경찰에 지원한다.

3대째 경관을 배출한 집안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달고, 경찰직에 첫발을 내딛은 가즈야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경시청 본청으로부터 오직 혐의를 받고 있는 동료 경관에 대한 내사임무였다. 수사과의 능력 있는 경관이지만, 어쩐지 경찰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보이는 고급 세단과 옷차림의 가가야 경부. 그의 수하로 들어간 가즈야는 충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 나간다. 책을 읽으면서 점점 결말은 다가오는데, 도대체 이 모든 미스터리의 끝을 어떻게 내려고 작가 사사키 조는 이렇게 질질 끄는 건가라고 생각하는 순간, 가즈야의 에피소드는 마무리가 지어지고 할아버지의 의문사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비밀들이 차례로 밝혀진다.

<경관의 피> 상하권을 다 읽고 나서 바로 든 생각은, 그 엄청난 스케일이었다. 전후시대 일본에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의 일본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경찰이라는 특정 집단을 주제로 해서 일관된 모습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 사사키 조의 구성력에 감탄을 마지않았다. 시대상의 변화에 담보된 소설 내의 사건들에 대한 전개 역시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3대에 걸친 이야기를 풀어 나가면서, 소설에서 크든 작든 등장한 인물들을 나중에라도 다시 등장시켜 독자들로 하여금 아 그 때, 그 사람이라고 연상시키는 방법은 정말로 기발했다. 더불어 등장인물들이 내던지는 말들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큰 줄거리인 미결 살인사건과 세이지의 의문사에 대한 미스터리에 연결시키는 집중력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물론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과 사회주의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편향적인 사고에 바탕한 흑백논리가 조금은 부담스럽긴 했지만, 너무 정치적이지 않으면서도 중용적인 태도로 이에 대한 논쟁을 살짝 빗겨 나가는 기술 역시 인정해줄만한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족으로 결말 부분에 가서 너무 쫓기는 듯한 인상으로, 엔딩을 처리한 점이 좀 불만스럽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만족할만한 수준이었다.

옥의 티를 하나 꼽자면, 하권 394페이지에서 작가는 안조 세이지가 2차 세계대전 당시 북인도에 갔었다고 언급을 하고 있는데 지리적으로 북인도라 하면 델리와 캐슈미르 지방을 지칭하는데 아마 이것은 일제의 1944년 임팔-코히마작전을 착각한 기술로 보인다. 굳이 정정하자면, 북인도라기 보다는 동인도라고 하는게 맞는 표현이다.

사사키 조 작가의 또 다른 작품들의 조속한 소개를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관의 피 - 상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1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경관의 피>라…….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생각이 중첩되고 있었다. 하나는 대대로 경찰이라는 직업을 물리고 있는 안조 집안의 내력과 그러기 위해 희생되는 경찰의 피라는 점이 말이다. 경찰을 주인공으로 한 추리소설을 쓰기로 유명하다는 사사키 조의 가장 뛰어난 수작으로 알려진 <경관의 피>가 드디어 출간이 되었다. 도대체 얼마나 유명하길래 영화 그리고 드마라 제작까지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걸까? 책을 통해 직접 체험해 볼 수가 있었다.

이야기의 배경은 전후 아직 패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일본이다. 상하권으로 이루어진 책에는 모두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모두 안조 집안의 남자들이다. 1대 안조 세이지, 2대 안조 다미오 그리고 3대 가즈야. 상권에서는 다미오의 이야기까지만 나와 있었다. 군 출신으로 전후 사회혼란기에 경찰훈련소를 통해 경찰직에 투신한 안조 세이지는 주재 경관이라고 하는 어떻게 보면 작은 업무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자 한다.

지극히 소시민적인 삶을 사는 안조 일가. 박봉의 월급이지만, 민중의 지팡이이자 민주경찰이라는 말처럼 2차 세계대전 중 국민을 억압하던 세력에서 새로운 경찰조직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물론, 군 출신 인사들이 여전히 고위직을 장악하고 있는 관계로 세이지의 상사 중에는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지만 말이다. 태생적으로 체제 유지를 위한 조직인 경찰 조직 내의 인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 초반부 경찰학교 훈련 과정에서 알게 된 구보타, 가토리 그리고 하야세 등의 인물들이 소개된다.

세이지는 경찰훈련을 마치고, 여느 경찰들처럼 일선 파출소에 순사로 근무하게 된다. 첫 근무지로 그가 주로 활동하게 되는 우에노 공원과 아메야요코초는 작년 가을에 가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무척이나 익숙한 지명이었다. 그의 관할 구역 내에서 알고 지내던 미도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몇 년 후에 야나카 묘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에 의혹을 느낀 세이지는 은밀한 조사에 나선다. 하지만 주재경관이 된 어느 날, 인근의 덴노지에서 화재가 일어나고 알고 지내던 지인으로부터 범인이라고 지목을 받은 사내를 쫓다가 의문의 사고사를 당하게 된다.

세월은 흘러, 세이지의 큰아들 다미오 역시 경찰직에 투신하고자 한다.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들이었던 하야세 삼총사들은 다미오의 학업을 지원한다. 고등학교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대학 진학을 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대째 경찰을 지망하겠다는 다미오는 경찰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경시청의 공안부로부터 은밀한 제안을 받는다. 홋카이도 대학에 진학을 하면, 경찰로 인정해 주면서 그에 해당하는 대우도 해주겠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것은 바로 경찰의 프락치로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던 일본 적군파 색출을 위해 내부 침투를 하라는 것이었다. 바로 여기서 영화 <무간도>의 비정한 경찰과 폭력조직의 암투가 떠올랐다. 다미오는 예상대로, 적군파 내부에 무사히 침투해서 혁혁한 공을 세우긴 하지만 언제나 거짓을 말하고, 자신을 철저하게 감추어야 하는 이중생활 앞에서 무너지는 자신을 느낀다.

모든 공안 임무가 종결된 후, 다미오는 자신을 간호해 주던 호리고메 준코와 결혼해서 평범한 경찰관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은 주재경관을 희망하면서,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고자 하는 사명감과 유능한 공안경찰로 활약하던 시기에 얻게 된 신경불안증으로 고달픈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 와중에 아내 준코에게 손찌검을 하는 등,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한 불안증상을 보인다.

아직 하권을 다 읽지 못해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무척이나 궁금한 가운데, 역사적 사실들과 함께 하는 사사키 조가 쓴 <경찰의 피>의 묘미를 느끼게 됐다. 전후 일본 사회의 불안은 당연히 강력한 경찰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까지도 그런 전통이 이어왔는지 일본 경찰의 사회질서 유지력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그냥 언뜻언뜻 들어왔던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이 전후 일본이 다시 경제대국으로 부흥하게 된 계기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경관의 피>의 서술을 통해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아울러 예의 전쟁이 일본 내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활동에도 영향을 미쳐, 일단의 사회불순세력들이 경찰서를 습격해서 무기를 탈취하는 일들이 빈번했다는 기술도 흥미로웠다.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되면서 사회불안이 안정되었다는 이야기에도 수긍이 갔다. 쿠바 혁명과 베트남전의 영향으로 60년대부터 시작해서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전공투 세력과 적군파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일본 경찰에서 프락치를 동원해서 그들을 제압했다는 가설도 인상적이었다.

각 시대마다 경찰들이 주목하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분석도 예리했다. 전후에는 주로 생계형 범죄들이 난무했었지만, 전후 고도 성장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기존의 사회적 모순들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지면서 무장폭력투쟁에 대한 경찰력의 대응이라는 시기적절한 주제에, 대를 이어 경찰을 업으로 삼는 안조 집안의 내력이 결합되면서 소설은 더욱 독자들의 흥미를 끌고 있었다.

더군다나 대를 이어 경찰직을 자원한 아들이 의문의 사고사를 당한 아버지의 죽음의 비밀을 쫓는다는 대의명분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는 작가의 소설작법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과연 하권에서 다미오는 아버지 죽음에 대한 진실에 얼마만큼 다가갈 수 있을 것이며, 세이지의 손자 가즈야는 또 어떤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줄 것인지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메리 앤 셰퍼.애니 배로우즈 지음, 김안나 옮김 / 매직하우스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책을 다 읽고 나서, 한동안 어떻게 북글을 써야 할지를 몰랐다. 솔직하게 말해서, 책을 읽는 내내 쩌릿쩌릿하게 느꼈던 그 많은 감동들을 도대체 글로 풀어낼 자신이 없었다. 한 권의 책이 이렇게 다양한 감정들을 담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웠다. 이 책의 저자인 메리 앤 셰퍼는 안타깝게도 이 책의 마무리를 조카인 애니 배로우즈에게 맡기고 타계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운명처럼 내게 다가왔고, 소설의 마무리를 지은 애니 배로우즈는 극중 인물인 줄리엣 애쉬튼과 공명을 이루고 있었다.

이야기는 참혹했던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위치한 영국령의 채널 제도 중 가장 큰 섬인 건지 아일랜드의 독일군 점령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전쟁 중에 르포 작가로 유명세를 탄 줄리엣 애쉬튼에게 어느 날 편지가 한 통 날아들면서 이 멋진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편지는 건지 섬의 도시 애덤스라는 남자가 찰스 램의 책을 통해 알게 된 줄리엣의 주소로 쓴 것이다. 물론 작가가 치밀하게 배열한 구성이겠지만, 짧은 한 통의 편지로 이렇게 황홀하면서도 감동적인 서사시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너무나도 멋진 발상이었다.

한 때 전 세계에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통했던 대영제국은 전 유럽을 석권한 히틀러의 위협으로 유서 깊은 자치를 자랑하는 채널 제도를 포기하고, 건지 섬에 진주한 독일군의 점령으로 너무나 평화로웠던 건지 섬 주민들에게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차가운 현실로 다가온다. 독일군의 침입에 앞서, 어린 아이들을 본토로 소개하는 과정은 애끓는 이별의 현장이었다. 아울러 독일은 전세가 기울면서 대서양 방벽을 구축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건지 섬에 독일이 제압한 유럽 각국에서 차출된 토트 노동자들을 데려다가 열악한 환경 아래서 강제 노동을 시킨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함께 그동안 책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던 건지 섬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감자껍질파이 클럽>이라는 문학회를 조직하고, 책을 읽고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또 그 가운데 책에 대한 재발견을 이루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과정들이 줄리엣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건지 섬의 문학회원들이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소개되고 있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에는 어둠처럼 스며든 죽음과 고통, 억압 그리고 굶주림이 상존하는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지상과제 아래, 한줄기 희망으로 건지 섬의 주민들에게 다가온 책들과 그 책들이 그들의 영혼에 부여한 인간 존엄 그리고 지고의 휴머니즘의 흔적들이 곳곳에 배어 있다. 물론 항상 우울한 이야기들만 있는건 아니다, 유쾌한 유머와 상대방에 대한 진실함을 배경으로 한 부러울 정도로 멋진 관계들이 있다. 이런 다양성이야말로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자산들이다.

줄리엣과 미국 출신의 자기 밖에 모르는 ‘선샤인 보이’ 마컴 V. 레이놀즈의 풋사랑 로맨스와, 조실부모하고 어려서부터 홀로 자란 줄리엣과 그녀의 절친 소피의 과거를 공유할 수 있는 진한 우정과, 비록 이루어질 수 없을 사랑이었을지 모르지만 건지 섬의 영웅 엘리자베스와 독일군 장교 크리스티앙 헬만 대위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들은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하면서 독자들에게 희로애락, 다시 말해서 인간관계를 통해 드러날 수 있는 거의 모든 감정들을 전달해 주고 있다.

어디 그 뿐이랴. 자신보다 타인의 안위를 걱정하고 몸소 실천하는 엘리자베스는 폴란드 출신 토트 노동자를 구하려다 자신은 어린 키트를 남기고 유럽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한다. 불의를 보고서는 참지 못하는 엘리자베스의 그런 용감한 행동들을 읽으면서, 숙연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등장하는 도시 애덤스, 이솔라 프리비, 아멜리아 등 하나 같이 개성이 넘치는 건지 섬 문학회원들의 에피소드들은 감동 그리고 또 감동 그 자체였다.

나중에 북글을 쓰게 되면 꼭 쓰고 싶은 내용이 있었다. 조각을 좋아하는 일라이에게 판목을 줄리엣이 선물하자 바로 에벤이 답장을 쓰면서 (일라이가) 나무 조각 안에 숨겨진 모양을 본다고 쓴 장면에서는, 바로 그 옛날 최고의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자신이 조각할 대리석 안에 사로잡힌 영혼을 본다고 했던 말이 불쑥 생각이 났다. 세월과 공간을 초월하는 예술혼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전쟁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그 전쟁의 와중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더군다나 그 매개체가 책이라면 더더욱!, 우리의 영혼을 인도해줄 수 있는 대상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위대한 인간 승리의 현현이었다. 개인적으로 해피엔딩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지만, 이렇게 끝날 것 같지 않은 기나긴 고통의 터널을 헤쳐 나온 이들에게 이 정도의 작은 해피엔딩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을 다 읽고 나서, 넘치는 감동으로 북글을 썼는데 여전히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감정의 1/10도 채 담지 못한 것 같아 내내 아쉬울 따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