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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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의 새로운 책 <죽음의 중지>를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을 번역한 이는 영문학을 전공한 정영목 씨라고 한다. 사라마구가 포르투갈 작가가 아니었던가? 2005년에 나온 이 책은 작년 10월에 미국에서 마가렛 줄 코스타가 영어로 번역해서 출간이 됐다. 그렇다면, 포르투갈어로 쓰인 책의 영문판을 다시 한국말로 번역했단 말인데……. 원래 그리스어로 쓰인 신약성경이 라틴어, 영어 그리고 다시 중국어를 거쳐 우리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숱한 오역들에 대한 예를 굳이 들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사라마구의 책인 <수도원의 비망록>이 작년 말에 재출간되면서 포르투갈어를 전공한 송필환 교수가 감수를 맡았었는데, 왜 이번에는 그냥 영어책을 번역했는지 그 점이 좀 아쉬웠다.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노년에 비로소 자신의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한 포르투갈 출신의 노대가 주제 사라마구의 상상력은 18세기 신비로운 날틀제작에 얽힌 발타자르와 블리문다의 로맨스를 거쳐, “눈먼 자들”이 사는 도시에서 벗어나 드디어 ‘하데스의 세계’에 다다른다. 소설 <죽음의 중지>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국가에서(작가의 조국인 포르투갈일 것으로 추정된다), 죽음이 새해 전날에 파업을 일으키면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 죽음이 그 작동을 멈춘 것이다.

죽음이 멈추면서 그에 따른 사회적 혼란과 부작용들이 충분히 예상되지 않는가. 그전에 작가의 상상력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하긴 유사 이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이미 할리우드에서는 1934년에 <명절에 나타난 저승사자(Death Takes A Holiday)>라는 제목으로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가 만들어졌었다.

주제 사라마구가 올드 할리우드 영화에서 영감을 얻었던 그렇지 않던 간에, 이야기는 계속된다. 당장 종교계에서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를 하고, 더 이상 수익을 낼 수 없게 된 장의업계, 더 이상 죽지 않는 이들로 넘쳐 나게 된 병원 업무는 마비가 되는 아수라장이 펼쳐진다. 다만, 보험업계에서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처럼 새로운 수익모델을 창출해낸다. 젊어서 공산당 활동을 했던 사라마구의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비꼼의 미학이 느껴졌다.

종교계와 철학자들이 모여 죽음의 실종에 대해 무의미한 논쟁을 하고 있는 동안, 마피아(Maphia)들은 여전히 죽음이 유효한 국경 밖으로 죽기를 원하는 이들을 실어 나르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물론 국가에서는 이를 알고서도, 그들의 행위를 묵인한다. 이 시점에서, ‘물리적 죽음’에 대한 질문이 고개를 들지만 작가가 언급하지 않았으니 살짝 패스하도록 하자. 문제는 죽지는 않지만, 인간의 실존적인 노화를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 싶지만 죽을 수도 없는 상황이 연출되면서, 이에 대한 사회적 비용과 연금제도의 붕괴로 인한 국가적 위기가 목전에 다가와 있다. 그야말로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회색지대에 놓인 상황이다(47페이지).

여기까지가 <죽음의 중지>에 첫 번째 부분에 해당되는 이야기고, 이제부터 진짜 “죽음”이 개입을 하게 되는 두 번째 이야기 시작이 된다. 인간의 죽음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소문자 ‘죽음’은 방송국에 직접 편지를 보내 7개월간에 걸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전위적 실험의 실패를 인정하고, 앞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죽음을 전달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동안 유보되어 왔던 죽음의 시행을 그날 자정부터 단행하겠다고 말한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대명제가 반드시 필요했던 종교계에서는(특히 가톨릭) 이런 죽음의 선포를 자신들의 오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받아들이고, 장례업계 역시 환호성으로 죽음의 매니페스토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앞으로 죽을 사람들에게 7주일간의 말미를 주면서, 자줏빛 편지들이 배달되기 시작한다. 국가에서는 경찰력을 동원해서, 예의 편지를 발송하는 ‘죽음’을 찾아 나서지만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늘 불필요한 행정 절차들을 고안해내는 국가에 대한 사라마구식의 조소가 뒤따른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시점에서 죽음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죽음이 발송한 편지가 되돌아온 것이다! 누구에게나 평등했던 죽음이 거부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도시에 거주하는 매우 평범한 첼로연주자였다. 우리의 죽음은 몇 번 더 죽음의 발송장을 보내보지만 항상 그 결과는 반송이었다. 자, 이제 자신의 직업의식에 불타는 죽음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게 된다.

우선 죽음이라는 누구나 원하지 않는 주제를 가지고, 이렇게 독창적이면서도 참신한 아이디어로 세태를 풍자하는 멋진 글을 써낸 노작가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소문자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국왕의 모후에게도, 그리고 산골에서 농사를 짓는 이름 없는 농부에게도 죽음은 차별이나 편애 없이 평등하게 다가선다. 우리의 일상에서 항상 일어나고 있지만, 인지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이 -죽음- 발생하게 되었을 때를 가정한 사라마구의 우화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 양심의 문제를 다룬다.

우리는 삶 가운데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이 불행하게 되었을 때 혹은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되었을 때 그들을 돌봐야 한다는 명제 아래서, 인도주의와 이웃사랑 그리고 연대의 중요성을 작가는 말없이 지목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에서 죽음이 실종되었을 때 일단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이유로 죽음을 원하는 이들에게 죽음을 배달하는 붐이 일지만 곧바로 이 사태를 지각한 사람들의 되살아난 양심이 회복되는 과정을 노작가는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라마구가 우중충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만을 이 책을 통해 하는 것만은 아니다. 죽음이 다시 본업에 복귀하게 되었을 때, 그녀(죽음은 여성으로 묘사가 된다)에 대한 미디어의 적대적인 보도의 예를 들면서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블랙 유머의 진수를 보여준다(168페이지). 사라마구의 책에서 이런 유머를 읽을 줄은 미처 몰랐다. 미래에는 자줏빛 편지대신 마이크로소프트의 아웃룩 익스프레스로 죽음의 발송장을 보내야겠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등장시키기도 하고(181페이지), 첼리스트가 일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샤먼(223페이지)이라고 부르는 등의 유머와 진지한 주제의 균형에도 정성을 들인다.

표지에 등장하는 해골나방을 어디에선가 본 것 같지 않은가? 바로 <양들의 침묵>의 표지에 당당하게 등장하는 바로 그 녀석이다. 학명은 아케론티아 아트로포스(Acherontia atropos). 아케론은 사후 세계의 주인인 하데스가 다스리는 지하에 흐르는 스틱스 강의 지류이고, 아트로포스는 운명의 여신(모이라이:Moirae/라틴어 파르카이:Parcae 에 해당한다) 세 자매의 맏이로 죽음을 주관한다. 이보다 더 적절한 이름이 또 있을까. 해골나방은 예로부터, 불운을 상징하는 불길한 징조로 받아 들여져 왔다. 소문자 죽음은 첼리스트가 보고 있던 자연도감으로부터 이 해골나방을 자줏빛 편지를 대신할 죽음의 메신저로 사용하고 싶다는 영감을 얻는다. 팔방미인의 노작가 사라마구에게 한 수 배웠다.

<수도원의 비망록>으로 주제 사라마구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기존의 문법체계를 거부하는 그의 소설 작법에 도대체 적응이 되지 않아 책을 읽으면서 내내 고생했었다. 하지만, 두 번째로 그의 작품을 대하게 되면서 조금씩 익숙해졌는지 그전 같은 부담감이 덜해졌다. <수도원의 비망록>을 읽으면서도, 작가에 대해 그리고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들에 대해 공부를 하게 만들었었는데, <죽음의 중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통해, 삶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노대가의 묵시록 같은 계언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조용히 점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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