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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메리 앤 셰퍼.애니 배로우즈 지음, 김안나 옮김 / 매직하우스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책을 다 읽고 나서, 한동안 어떻게 북글을 써야 할지를 몰랐다. 솔직하게 말해서, 책을 읽는 내내 쩌릿쩌릿하게 느꼈던 그 많은 감동들을 도대체 글로 풀어낼 자신이 없었다. 한 권의 책이 이렇게 다양한 감정들을 담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웠다. 이 책의 저자인 메리 앤 셰퍼는 안타깝게도 이 책의 마무리를 조카인 애니 배로우즈에게 맡기고 타계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운명처럼 내게 다가왔고, 소설의 마무리를 지은 애니 배로우즈는 극중 인물인 줄리엣 애쉬튼과 공명을 이루고 있었다.
이야기는 참혹했던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위치한 영국령의 채널 제도 중 가장 큰 섬인 건지 아일랜드의 독일군 점령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전쟁 중에 르포 작가로 유명세를 탄 줄리엣 애쉬튼에게 어느 날 편지가 한 통 날아들면서 이 멋진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편지는 건지 섬의 도시 애덤스라는 남자가 찰스 램의 책을 통해 알게 된 줄리엣의 주소로 쓴 것이다. 물론 작가가 치밀하게 배열한 구성이겠지만, 짧은 한 통의 편지로 이렇게 황홀하면서도 감동적인 서사시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너무나도 멋진 발상이었다.
한 때 전 세계에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통했던 대영제국은 전 유럽을 석권한 히틀러의 위협으로 유서 깊은 자치를 자랑하는 채널 제도를 포기하고, 건지 섬에 진주한 독일군의 점령으로 너무나 평화로웠던 건지 섬 주민들에게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차가운 현실로 다가온다. 독일군의 침입에 앞서, 어린 아이들을 본토로 소개하는 과정은 애끓는 이별의 현장이었다. 아울러 독일은 전세가 기울면서 대서양 방벽을 구축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건지 섬에 독일이 제압한 유럽 각국에서 차출된 토트 노동자들을 데려다가 열악한 환경 아래서 강제 노동을 시킨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함께 그동안 책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던 건지 섬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감자껍질파이 클럽>이라는 문학회를 조직하고, 책을 읽고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또 그 가운데 책에 대한 재발견을 이루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과정들이 줄리엣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건지 섬의 문학회원들이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소개되고 있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에는 어둠처럼 스며든 죽음과 고통, 억압 그리고 굶주림이 상존하는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지상과제 아래, 한줄기 희망으로 건지 섬의 주민들에게 다가온 책들과 그 책들이 그들의 영혼에 부여한 인간 존엄 그리고 지고의 휴머니즘의 흔적들이 곳곳에 배어 있다. 물론 항상 우울한 이야기들만 있는건 아니다, 유쾌한 유머와 상대방에 대한 진실함을 배경으로 한 부러울 정도로 멋진 관계들이 있다. 이런 다양성이야말로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자산들이다.
줄리엣과 미국 출신의 자기 밖에 모르는 ‘선샤인 보이’ 마컴 V. 레이놀즈의 풋사랑 로맨스와, 조실부모하고 어려서부터 홀로 자란 줄리엣과 그녀의 절친 소피의 과거를 공유할 수 있는 진한 우정과, 비록 이루어질 수 없을 사랑이었을지 모르지만 건지 섬의 영웅 엘리자베스와 독일군 장교 크리스티앙 헬만 대위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들은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하면서 독자들에게 희로애락, 다시 말해서 인간관계를 통해 드러날 수 있는 거의 모든 감정들을 전달해 주고 있다.
어디 그 뿐이랴. 자신보다 타인의 안위를 걱정하고 몸소 실천하는 엘리자베스는 폴란드 출신 토트 노동자를 구하려다 자신은 어린 키트를 남기고 유럽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한다. 불의를 보고서는 참지 못하는 엘리자베스의 그런 용감한 행동들을 읽으면서, 숙연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등장하는 도시 애덤스, 이솔라 프리비, 아멜리아 등 하나 같이 개성이 넘치는 건지 섬 문학회원들의 에피소드들은 감동 그리고 또 감동 그 자체였다.
나중에 북글을 쓰게 되면 꼭 쓰고 싶은 내용이 있었다. 조각을 좋아하는 일라이에게 판목을 줄리엣이 선물하자 바로 에벤이 답장을 쓰면서 (일라이가) 나무 조각 안에 숨겨진 모양을 본다고 쓴 장면에서는, 바로 그 옛날 최고의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자신이 조각할 대리석 안에 사로잡힌 영혼을 본다고 했던 말이 불쑥 생각이 났다. 세월과 공간을 초월하는 예술혼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전쟁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그 전쟁의 와중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더군다나 그 매개체가 책이라면 더더욱!, 우리의 영혼을 인도해줄 수 있는 대상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위대한 인간 승리의 현현이었다. 개인적으로 해피엔딩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지만, 이렇게 끝날 것 같지 않은 기나긴 고통의 터널을 헤쳐 나온 이들에게 이 정도의 작은 해피엔딩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을 다 읽고 나서, 넘치는 감동으로 북글을 썼는데 여전히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감정의 1/10도 채 담지 못한 것 같아 내내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