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꿈 - 당신은 어떤 시간에 살고 있나요?
앨런 라이트맨 지음, 권루시안(권국성) 옮김 / 다산책방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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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젠가 신문에서 어느 신예 작가의 내 삶의 책인가 하는 코너로 이 책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됐다. 그 글에서 이 책이 너무 좋아서 지인들에게 자주 선물하곤 했다는 말이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좋은 책이길래 하는 생각으로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을 해보니, 절판되었단다. 온라인 헌책방을 샅샅이 뒤졌어도 <아인슈타인의 꿈>은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다산북스에서 재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그 자리에서 공중부양이라도 할 듯이 기뻤다.

이 책은 20세기 초반에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실존 인물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특정 시기, 1905년을 그린 소설이다(이 해는 그가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기념비적인 해이다). 글쓴이는 물리학자 출신의 앨런 라이트맨이다. 화려한 그의 경력을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리학자이면서도 인문학의 소양을 두루 갖춘 지식인이라고 해두자.

소설의 배경은 스위스 베른이다. 도시를 굽어 흐르는 아레 강, 그리고 처음으로 등장하는 지명인 마르크트 거리와 베른 동쪽의 니데크 다리를 구글 맵의 도움으로 찾으면서 미지의 도시에 대한 윤곽을 잡아냈다. 참 세상 좋아졌다. 전지적 시점의 작가는 “시간은 원이다”라는 명제 하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바로 원형(圓形)의 순환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문득 기시감, 데자뷰(deja vu)가 떠올랐다. 더불어 불가에서 말하는 억겁의 윤회도.

작가는 미래에서 온 나그네를 임시주인공으로 해서 ‘만약에’라는 매혹적인 가정으로 독자들에게 시간의 일회성에 대해 각인시켜 준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시간의 진리,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는 미래를 조각한다는. 그리고 갑자기 가로, 세로 그리고 높이라는 세 가지 가능성으로 어떤 일들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이론적 설명이 불쑥 튀어 나온다. 놀랍다, 마치 오래 전에 본 영화 <런 롤라 런>의 감독 탐 튀크베어처럼 시간을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매 순간마다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하면서 살지만 그 중요성에 대해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중요성에 대해 정말 심각하게 깨닫게 된다면, 바로 미쳐 버릴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가 문득 시간의 본질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명명한 “시간의 아티스트”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연구를 진행하던 중에 시간을 이해하고 싶게 되었다고 하던데. 그 이유가 뭐래더라, 신에게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라고? 내가 보기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절대적이면서도 너무나 상대적이다. 게다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뒤엉켜 있는 느낌이다. 앨런 라이트맨 같은 물리학자처럼 구체적으로 뭐가 어때서 그렇다고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뜬금없이 등장하는 세계 종말에 대한 가정은 인간들의 내면을 아주 조금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해 준다. 모두가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면서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 말이다. 아마 누구나 세상 마지막 순간에 자신들에게 허락되지 않았거나,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어느 순간 앨런 라이트맨의 전지적 시점에서 진행되던 책은 드디어 아인슈타인을 등장시킨다. 하지만 곧 다시 그 이야기는 작가의 시점으로 돌아간다. 곧 이어 등장하는 계절에 따른 사람들의 심리묘사는 탁월하면서도 유쾌한 경험을 제시해준다. 질서 가운데 살기를 원하면서도, 무질서를 원하는 인간 본연의 심리라고나 할까. 봄기운이 뻗치면 모두들 무질서를 받아들이고, 다시 여름이 오면 질서정연하게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앨런 라이트맨의 서정적인 스위스 베른의 곳곳에 대한 풍경 묘사는 가히 예술적이다. 공학도 출신의 작가가 논리적인 글뿐만 아니라 이런 멋진 묘사의 기술을 보여준다니 놀랍기만 하다. 게다가 일상의 삶을 통해, 그 복잡하고 어렵다는 상대성 이론에 독자들을 이끌고 가는 솜씨는 역시 대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인간이 자신의 인식 영역 밖에 존재하는 시간의 존재에 토론 이야기는 일품이었다(103쪽). 더 나아가 그는 이 진지한 토의를 시간미학으로까지 승화시킨다.

이 책에는 아인슈타인과 더불어 유이하게 실존이 확인되는 유일한 인물로 그의 취리히 시절부터 친구였던 미켈레 베소(Michele Angelo Besso, 1873-1955)가 등장을 한다. 공교롭게도 아인슈타인과 같은 유대인이었고, 실제로 베른의 특허 사무실에서 함께 일했었다. 과도하게 연구에 매달리는 아인슈타인을 진정으로 걱정해주는 카메오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꿈>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도대체 시간이 절대적인가 아니면 상대적인가 하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을 해봤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근거한 시간에 대한 논의는 자못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과학 계통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어서 그런진 몰라도, 개인적으로 인문학적 접근을 선호하는 모양이다. 이 우주에는 절대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진리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 인간이 가진 인식의 한계로 인해 그 절대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 새삼 깨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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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의 개 - 삶과 죽음의 뫼비우스의 띠
후지와라 신야 지음,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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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년 가을에 처음으로 일본을 대표한다는 사진가 후지와라 신야의 전설 같은 여행에세이 <동양기행>을 읽었다. 예의 책을 읽고, 같이 수록된 사진들을 보면서 보통의 사진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낯선 이국의 풍경만이 아닌, 인간사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번에 <황천의 개>란 묘한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에는 또 어떤 책일까 하는 호기심이 샘솟았다.

<황천의 개>의 구성은 낯설다. 우선 이야기는 일본의 패전 50주년인 1995년 3월 20일에 발생한 도쿄 지하철의 사린 가스 테러로 시작한다. 사건의 주범은 신흥 사이비 종교집단인 옴진리교를 믿는 신도들과 그들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 일본에서는 같은 해 초에 발생한 한신대지진(고베대지진)과 함께 한 시대의 종언처럼 받아들여진 큰 사건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비중 있게 다뤄지진 않았었다고 한다.

포토 저널리스트인 후지와라 신야는 공업화와 수출입국의 기치 아래, 성장과 경쟁 일변도의 삶을 달려온 일본인들의 병리적 심리상태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옴진리교의 교주의 고향인 구마모토 현의 야쓰시로를 방문해서, 미나마타병으로 알려진 수은공해와 아사하라 쇼코의 원념에 찬 사회에 대한 복수의 실마리를 풀어 나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글은 작가가 20대에 부모와 연인 그리고 대학마저 죄다 포기하고 찾았던 인도로 공간이동을 한다. 마치 작가의 이전 작품인 <인도방랑>의 후속편인 것처럼. 후지와라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인도의 갠지스 강가에서 소멸하는 인간의 육신을 날마다 지켜보면서 개인의 번뇌의 화살을 소진하고, 진아(프르샤)를 찾는 수행에 들어간다.

후지와라는 그 과정을 굳이 여행이라고(혹은 방랑) 부르는데, 이 여정 가운데 많은 가짜 구루지(도사)들을 만나게 된다. 계급적인 종교에 대해 계속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작가는 명상과 수행이라는 미명 하에 서구의 소위 깨인 지식인들로부터 금전과 성을 갈취하는 얼치기 구루지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특히 4번째 장인 <히말라야의 할리우드>에서 눈속임과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이들이 벌이는 할리우드 쇼같은 공중부양의 허상, 다시 말해서 환영(마야)을 폭로하고 있다.

그 다음 장에 등장하는 같은 일본인 여행자 출신의 Y와의 만남에서는 1960년대 말 일본에서 학생운동의 실패에 좌절하고, 티베트, 중동 그리고 인도를 찾은 수많은 여행자들의 부질없는 환영을 다루고 있다. 이는 역시 비슷한 모습으로 인도를 찾았던 아사하라 쇼코와 그의 추종자들의 그릇된 종교관과 진리는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옴진리교의 모래성 같은 이데올로기들을 분석해낸다.

이 책을 읽게 되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만, 후지와라가 갠지스 강에서 우연히 만난 “황천의 개”와의 조우는 가히 충격적이다. 책에 실린 같은 제목의 사진을 한참을 보면서 도대체 이게 무슨 사진이가 하고 한참을 지켜봤다. 천부인권사상에서 비롯된 현대사회 인간의 존엄은 죽음이 일상생활에서 분리되지 않은 채, 삶의 리얼리티와 병존하고 있는 인도에선 생로병사의 근원적 진리 앞에서 너무나 보잘 것 없게만 느껴졌다.

구루지들의 사기 행각에 대한 설명은 예전에 봤던 할리우드 영화 <구루>(2002)의 그것과 내 기억 속에서 오버랩되고 있었다. 인도의 신비주의에 현혹된 미국의 부유층과 구루 행세를 하면서, 그들의 돈을 뜯어내는 사이비 구루의 작태가 <황천의 개>에 등장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환각제를 먹이고 공중부양 쇼를 벌이는 프랑스 청년의 패러디처럼 느껴졌다.

얼치기 구루들이 사람들을 속이는데 써먹은 문구가 계속해서 화두처럼 머리에서 맴돌고 있다. 우리는 모두 환영이고, 우리가 사는 이 사회 역시 환영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린 모두 미아가 되어 버리고 만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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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트레커 -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커피 순례자
딘 사이컨 지음, 최성애 옮김 / 황소걸음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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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카페인 탓일까? 가끔 커피를 마시긴 하지만, 아직도 커피 맛을 모르는 것 같다. 세계에서 석유 다음으로, 교역량이 많다는 커피를 다룬 책이라는 점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공정무역(혹은 대안무역:fair trade)에 대한 관심으로 이 책을 읽게 됐다.

미국 변호사 출신으로 <자바트레커>를 쓴 딘 사이컨은 어느 날 판에 박힌 듯한 변호사 업무에서 벗어나 커피를 볶고, 커피를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다가 더 궁극적으로 커피를 직접 재배하는 이들에게까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렇게 해서 <자바트레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딘 사이컨은 커피 재배 농부들을 만나기 위해, 장거리 여행과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는 커피의 진실에는 아프리카에서, 남아메리카에서 그리고 아시아에서 자신이 소중하게 재배한 커피를 제 값을 받지 못하고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인해 거의 갈취 수준으로 약탈당하고 있는 커피 농부들의 눈물 어린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다. 커피를 통해 얻는 대부분의 수익들은 커피 경작자들이 아닌 중간상인들(이 책에서는 코요테라 부른다)과 부패한 관료들 그리고 이런저런 과정을 통해 흩뿌려진다.

게다가 이런 영세한 커피 농부들의 마을에는 학교도, 건강을 지켜줄 제대로 된 보건소도 없다. 아니 무엇보다 커피 재배를 위한 깨끗한 용수마저도 부족한 실정이다. 저자는 공정무역 뿐만 아니라 박애주의에 입각해서 어려운 이들에게 자선사업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정당하게 커피를 재배해서 세계 경제에 편입할 수 있는 방법들을 함께 고민한다.

스타벅스 같은 대기업들은 오로지 생산단가를 낮춰서 소비자들로부터 최대한의 수익을 내려고 하지만, 그에 따른 고통들은 커피 농부들에게 가중될 뿐이다. 열심히 커피나무를 재배하면서도 그들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채무만 쌓여간다. 이제 커피가 우리 생활에서 거의 필수기호품으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바로 이 시점에서 딘 사이컨이 제시하는 것이 바로 공정무역인 것이다. 지구상에서는 수많은 커피 로스팅 회사들이 있지만, 그들은 다만 제품 다시 말해서 커피를 사들일 뿐이다. 딘 사이컨의 딘스 빈즈(Dean's Beans)와 코퍼레이티브 커피스(Cooperative Coffees)에 참여하는 파트너들은 질 좋은 커피뿐만 아니라 그 커피를 생산해내는 이들의 생활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들은 세계각처에서 커피 농부들의 위생환경개선, 섭생의 문제, 빈곤퇴치, 보건의료 그리고 자녀들의 교육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자바트레커>는 오늘날 우리가 즐기고 있는 커피문화에 대해 시사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접근을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중앙아메리카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1993년 저자가 과테말라 군부독재가 종식된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선거에 국제감시단원으로 활동한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웠다. 멕시코를 가로 지르는 “죽음의 열차”에 얽힌 비극적인 이야기들도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딘 사이컨이 페루의 팡고아 마을 사람들을 도운 이야기는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혁명 이후 그들의 삶에 대한 스케치 또한 인상적이었다. 대학도시 레온에서 콘트라 반군과의 내전으로 장애를 입은 이들을 위해 만든 카페 벤 린더(Cafe Ben Linder)의 설립 과정 또한 일시적인 지원이 아닌 지속적인 자활을 위한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즉각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이 책이 그렇게 심각한 주제만을 다룬 것은 아니다. 딘 사이컨은 사회적인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세계 곳곳의 사람들과 만나면서 체험한 일들을 유머스럽게 다루고 있다. 특히 마지막 장인 파푸아 뉴기니를 방문했을 때, 기껏 배운 현지어로 치명적인 실수(?) 에피소드는 너무나 재밌었다.

<자바트레커>를 읽으면서, 우리나라에서는 공정무역의 상황이 어떤가 알아보게 되었다.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경제의 폐해가 들어나게 되면서 많은 이들이 공정무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주류산업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전국에 산재한 생협들을 중심으로 유기농 제품과 공정무역 라벨을 단 제품들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얼마 전, 찾았던 <아름다운 가게>에서 공정무역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유기농 인증을 받은 공정무역 제품의 커피를 파는 것이 생각났다. 주체적인 소비자의 입장에서 ‘착한 소비’로 세계 경제에 이바지하고,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삶을 일깨워준 <자바트레커> 독서였다.

*** 책을 읽으면서 참조하면 좋은 사이트 

1. 딘스 빈스 (http://www.deansbeans.com

2. 코퍼레이티브 커피스 (http://www.coopcoffe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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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의 불행학 특강 - 세 번의 죽음과 서른 여섯 권의 책
마리샤 페슬 지음, 이미선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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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마 이 책을 말하는데 있어서 두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독자는 아무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출신의 여성작가 마리샤 페슬가 쓴 어느 미국 여고생의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블루의 불행학 특강>은 자그마치 832쪽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을 자랑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책의 마리샤 페슬의 데뷔작이라는 점이다.

주인공이자 화자로 등장하는 블루 반 미어는 어려서 나비를 채집하러 다니던 중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하는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나이 5살 때부터, 유목민의 삶을 살게 된 블루와 그녀의 아버지는 미국의 곳곳에 정착을 하지 못하고 유랑한다. 부유한 유대인 가정 출신의 어머니와의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의 외국인 아버지의 짧은 결혼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 책은 블루의 삶 중에서 15살 가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그 다음 해 봄까지 그녀가 다닌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스톡턴의 세인트 골웨이 사립학교를 바탕으로 해서 집중된다. 이야기는 블루와 아버지가 이 학교에서 영화 수업을 하는 한나 슈나이더라는 미스터리에 쌓인 미모의 여자 선생님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그녀의 도움으로 “블루블러드”라는 미국의 여느 고등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잘난 '클릭(click)'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블루에 대해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블루블러드들.

<블루의 불행학 특강>은 책의 상당 부분을 어느 그룹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주변을 빙빙 맴도는 지적으로 너무나 뛰어난 여고생 블루의 자의식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뛰어난 지성을 자랑하는 아버지의 지도 아래, 어려서부터 다양한 독서를 한 블루는 곳곳에서 자신의 비범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게다가 언제나 그녀의 아버지 가레스 교수 주변에는 준 버그(풍뎅이)라고 그녀가 명명한 여성들이 끊이질 않는다. 아버지의 짧은 연애 행각을 쥐의 임신기간에 비유하는 블루의 블랙유머가 눈에 잡혔다.

사실 <블루의 불행학 특강>의 전반부는 다소 지루하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의 모티브를 떠올리게 하는 블루와 아버지 가레스의 관계, 참신하긴 하지만 지나치게 인용과 주석들 그리고 미국 고등학생들의 생활에 대한 천착이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게다가 후반에 아주 중요한 나이트워치맨들에 대한 엉터리 홈피 주소를 직접 찾아보는 열의를 가진 독자들이라면 더욱 허탈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블루의 불행학 특강>이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하는 지점은 비극으로 끝난 블루와 블루블러드 그리고 한나 슈나이더의 봄방학을 이용한 인근 테네시 주와 경계한 스모키산 국립공원 등반이 끝나면서부터이다. 책의 시작에서 한나 슈나이더의 죽음으로 비롯된 이야기를 밝히고 있듯이, 평범하지만 뛰어난 여고생으로부터 블루는 한나의 죽음의 비밀을 캐는 사립탐정으로 극적 전환에 성공한다. 이때부터는 “내가 왜 이 책을 읽고 있지”하던 생각은 바람결에 날아가 버리고 본격적인 미스터리에 흠뻑 빠지게 된다. 그동안 마리샤 페슬이 책의 곳곳에 무심코 던져두었던, 실마리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쑥쑥 딸려 나온다. 긴 책을 포기하지 않고, 읽어낸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우선 마리샤 페슬은 각 장마다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긴 뛰어난 고전들을 제목으로 배치하고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로부터 시작을 해서,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이르는 36개의(한 개는 가상의 소설) 고전들을 통해 자신이 <블루의 불행학 특강>의 소주제들을 녹여 내고 있다. 그 외에도 칠백여개에 달하는 주석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블루와 그의 아버지의 삶에 대한 현학적 태도와 현란하기 그지없는 수사의 바다가 넘실거린다.

책을 읽으면서, 중간 부분에서 지루하게 느꼈던 이유를 생각해 봤다. 그것은 아마 미국 청소년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블루는 또래의 청소년들답지 않게, 문학, 고전영화 그리고 심지어 모차르트의 오페라에까지 깊은 조예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 조숙하게만 느껴진다, 고작 15살 난 소녀가 이제는 거의 활동을 접은 엽기가수 위어드 알 얀코빅(636쪽)을 알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수많을 책들을 읽고,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하기에는 여전히 어린 나이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그런 점에서 블루의 캐릭터는 너무나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왜 블루는 그렇게 ‘블루블러드’와 어울리고 싶어 했을까. 그녀의 학업성취도와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굳이 블루블러드가 아니라 다른 클릭들과 어울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게 작가가 고안해낸 장치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블루의 불행학 특강>은 이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혹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아름다움’(642쪽)을 장착하고 있다. 특히 평범한 성장소설에서 한나 슈나이더의 죽음에서 비롯된 살인 미스터리로의 극적인 전환은 마리샤 페슬을 읽는 독자들에겐 수확의 계절이다.

아, 그리고 <블루의 불행학 특강>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독자들이라면 이 책의 공식웹사이트를 한 번 방문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http://calamityphysics.com/main.htm). 책에는 나오지 않는 비주얼 자료들과 블루의 졸업 앨범에 실린 사진들도 볼 수가 있다. 다만, 영어로 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할 것이다. 블루의 ‘불행학 특강’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행운이 깃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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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 Kiss of the Spider Woma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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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마누엘 푸익의 1976년 소설을 1985년에 영화화한 동명의 작품을 봤다. 감방에 갇힌 두 남자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다양한 주제들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를 무척 쉽게 만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영화의 메가폰은 브라질 출신의 감독 헥터 바벤코가 맡았다.

배경은 남미의 어느 감옥(영화가 실제로 촬영된 곳은 브라질의 사웅 파울루다). 미성년자 추행혐의로 8년형을 선고 받은 루이스 몰리나(윌리엄 허트 분)와 정치범 발렌틴 아레기(라울 줄리아 분)이 한 감방에 갇혀 있다. 이 둘은 그들 개인의 성적 취향만큼이나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다. 사회 혁명을 꿈꾸는 마르크스주의자인 발렌틴과 진정한 남자와의 로맨스를 바라는 몰리나.

영화는 몰리나의 시시껄렁한 나치 영화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정말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감방에서 두 남자가 무얼 하겠는가. 발렌틴은 그다지 영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으면서도, 굳이 몰리나의 이야기를 말리진 않는다.

몰리나가 이야기하는 영화를 나치 프로파간다로 비난하는 발렌틴. 그런 공격적인 발렌틴과 한 방을 쓰면서, 몰리나와 발렌틴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한편, 교도소장인 워든과 발렌틴이 가담한 조직을 검거하려는 페드로는 고문을 해서라도 발렌틴으로부터 정보를 캐내고자 한다. 하지만 여느 혁명가처럼 조직에 대한 신의를 지키려는 발렌틴은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조직을 보호하려고 한다.

상점의 윈도우 디스플레이어였던 몰리나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발렌틴에게 털어 놓는다.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나치 영화의 줄거리보다 그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더 흥미롭다. 그는 꾸준히 진정한 남자(a real man)를 찾고 싶어 하지만, 동성애자인 그에게 사회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격렬한 비난과 8년간의 구형뿐이다. 역설적이게도, 혁명가와 동성애자 모두 자유를 꿈꾼다. 서로 다른 궤도에서 원하는 것이 일치한다.

발렌틴의 나치 영화의 줄거리는 <거미 여인의 키스>의 전개에 복선과 암시를 전달한다. 사랑과 배신, 조국애 그리고 휴머니즘 등등 통속적이긴 하지만 전통적인 주제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본 영화에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배탈이 난 발렌틴을 돌봐 주면서, 그 둘의 관계는 급속하게 가까워진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몰리나에 비해, 자신의 본심을 들어내려 하지 않는 발렌틴도 몰리나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한편 몰리나는 교도소장은 워든과 비밀리에 거래를 해서 발렌틴으로부터 당국이 필요한 정보를 빼내는 조건으로 가석방을 약속받는다. 몰리나는 교도소장을 교묘하게 속여서 일반 교도소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맛있는 음식들을 갈취한다. 하지만 몰리나와 발렌틴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다지 많지가 않다.

아직 소설을 읽지 않아서, 소설과 영화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가 없지만 다른 이들이 쓴 북글을 보니 원작 소설에서는 한 6편 정도의 영화가 소개된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 버전에서는 달랑 두 개의 영화만이 소개된다. 예의 나치 영화 그리고 “거미 여인”이 등장하는 영화 하나 이렇게 두 개다. 거미 여인이란 이름만 들어도 팜므 파탈이 연상되는데, 이 거미 여인은 난파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남자를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마치 감방에서 몰리나가 발렌틴을 돌보듯이 말이다.

지금 막 글을 쓰다가 든 생각인데, 원작가인 마누엘 푸익은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위해 교도소라는 특수한 공간에, 혁명가와 동성애자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우리 삶에 있어서 대개의 갈등은 상대방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출발이 되지 않는가 말이다.

또한 무산계급의 혁명을 꿈꾸는 발렌틴의 고백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의 무상성에 대해서도 작가는 슬쩍 언급을 하고 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의 건널 수 없는 괴리가 느껴졌다.

마초 스타일의 발렌틴을 연기한 이제는 작고한 라울 줄리아의 연기도 일품이었지만, 역시 이 영화의 프리마돈나는 동성애자로 분해서 발군의 연기를 보여준 윌리엄 허트였다. 진짜 동성애자들을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로 보이는 섬세한 연기 선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마누엘 푸익도 동성애자였던가?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 투게더>도 그의 작품을 원전으로 삼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소설에서는 몰리나와 발렌틴의 대사 부분에 대한 적확한 표시가 없어서 책을 읽으면서 조금 헷갈렸다는 글들이 있었는데, 영화에서는 그런 모호함이 없어서 아주 좋았다. 영화를 보고 나니,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영화의 결말에서 다시 교도소로 돌아온 카메라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의료실에 누워 있는 발렌틴을 비춘다. 그의 여자 친구인 마타가 나타나서 그들은 어느 해변으로 달려간다. 몰리나의 영화 이야기에서 항상 나오던 세피아 톤의 영상은 어느 순간, 칼라로 바뀌고 파도 소리가 철썩이는 가운데 매혹적인 주제가 선율과 더불어 노를 저어 어디론가 떠나 버린다.

<거미 여인의 키스> 소설과 영화 모두 그동안 동성애라는 낙인이 찍혀 왔지만, 실제 주제는 자유와 구속 그리고 보통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는 이들의 삶에 대한 태도다. 인간 심리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과 놀라움으로 가득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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