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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 Kiss of the Spider Woma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마누엘 푸익의 1976년 소설을 1985년에 영화화한 동명의 작품을 봤다. 감방에 갇힌 두 남자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다양한 주제들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를 무척 쉽게 만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영화의 메가폰은 브라질 출신의 감독 헥터 바벤코가 맡았다.
배경은 남미의 어느 감옥(영화가 실제로 촬영된 곳은 브라질의 사웅 파울루다). 미성년자 추행혐의로 8년형을 선고 받은 루이스 몰리나(윌리엄 허트 분)와 정치범 발렌틴 아레기(라울 줄리아 분)이 한 감방에 갇혀 있다. 이 둘은 그들 개인의 성적 취향만큼이나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다. 사회 혁명을 꿈꾸는 마르크스주의자인 발렌틴과 진정한 남자와의 로맨스를 바라는 몰리나.
영화는 몰리나의 시시껄렁한 나치 영화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정말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감방에서 두 남자가 무얼 하겠는가. 발렌틴은 그다지 영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으면서도, 굳이 몰리나의 이야기를 말리진 않는다.
몰리나가 이야기하는 영화를 나치 프로파간다로 비난하는 발렌틴. 그런 공격적인 발렌틴과 한 방을 쓰면서, 몰리나와 발렌틴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한편, 교도소장인 워든과 발렌틴이 가담한 조직을 검거하려는 페드로는 고문을 해서라도 발렌틴으로부터 정보를 캐내고자 한다. 하지만 여느 혁명가처럼 조직에 대한 신의를 지키려는 발렌틴은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조직을 보호하려고 한다.
상점의 윈도우 디스플레이어였던 몰리나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발렌틴에게 털어 놓는다.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나치 영화의 줄거리보다 그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더 흥미롭다. 그는 꾸준히 진정한 남자(a real man)를 찾고 싶어 하지만, 동성애자인 그에게 사회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격렬한 비난과 8년간의 구형뿐이다. 역설적이게도, 혁명가와 동성애자 모두 자유를 꿈꾼다. 서로 다른 궤도에서 원하는 것이 일치한다.
발렌틴의 나치 영화의 줄거리는 <거미 여인의 키스>의 전개에 복선과 암시를 전달한다. 사랑과 배신, 조국애 그리고 휴머니즘 등등 통속적이긴 하지만 전통적인 주제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본 영화에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배탈이 난 발렌틴을 돌봐 주면서, 그 둘의 관계는 급속하게 가까워진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몰리나에 비해, 자신의 본심을 들어내려 하지 않는 발렌틴도 몰리나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한편 몰리나는 교도소장은 워든과 비밀리에 거래를 해서 발렌틴으로부터 당국이 필요한 정보를 빼내는 조건으로 가석방을 약속받는다. 몰리나는 교도소장을 교묘하게 속여서 일반 교도소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맛있는 음식들을 갈취한다. 하지만 몰리나와 발렌틴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다지 많지가 않다.
아직 소설을 읽지 않아서, 소설과 영화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가 없지만 다른 이들이 쓴 북글을 보니 원작 소설에서는 한 6편 정도의 영화가 소개된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 버전에서는 달랑 두 개의 영화만이 소개된다. 예의 나치 영화 그리고 “거미 여인”이 등장하는 영화 하나 이렇게 두 개다. 거미 여인이란 이름만 들어도 팜므 파탈이 연상되는데, 이 거미 여인은 난파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남자를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마치 감방에서 몰리나가 발렌틴을 돌보듯이 말이다.
지금 막 글을 쓰다가 든 생각인데, 원작가인 마누엘 푸익은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위해 교도소라는 특수한 공간에, 혁명가와 동성애자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우리 삶에 있어서 대개의 갈등은 상대방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출발이 되지 않는가 말이다.
또한 무산계급의 혁명을 꿈꾸는 발렌틴의 고백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의 무상성에 대해서도 작가는 슬쩍 언급을 하고 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의 건널 수 없는 괴리가 느껴졌다.
마초 스타일의 발렌틴을 연기한 이제는 작고한 라울 줄리아의 연기도 일품이었지만, 역시 이 영화의 프리마돈나는 동성애자로 분해서 발군의 연기를 보여준 윌리엄 허트였다. 진짜 동성애자들을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로 보이는 섬세한 연기 선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마누엘 푸익도 동성애자였던가?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 투게더>도 그의 작품을 원전으로 삼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소설에서는 몰리나와 발렌틴의 대사 부분에 대한 적확한 표시가 없어서 책을 읽으면서 조금 헷갈렸다는 글들이 있었는데, 영화에서는 그런 모호함이 없어서 아주 좋았다. 영화를 보고 나니,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영화의 결말에서 다시 교도소로 돌아온 카메라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의료실에 누워 있는 발렌틴을 비춘다. 그의 여자 친구인 마타가 나타나서 그들은 어느 해변으로 달려간다. 몰리나의 영화 이야기에서 항상 나오던 세피아 톤의 영상은 어느 순간, 칼라로 바뀌고 파도 소리가 철썩이는 가운데 매혹적인 주제가 선율과 더불어 노를 저어 어디론가 떠나 버린다.
<거미 여인의 키스> 소설과 영화 모두 그동안 동성애라는 낙인이 찍혀 왔지만, 실제 주제는 자유와 구속 그리고 보통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는 이들의 삶에 대한 태도다. 인간 심리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과 놀라움으로 가득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