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의 불행학 특강 - 세 번의 죽음과 서른 여섯 권의 책
마리샤 페슬 지음, 이미선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아마 이 책을 말하는데 있어서 두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독자는 아무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출신의 여성작가 마리샤 페슬가 쓴 어느 미국 여고생의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블루의 불행학 특강>은 자그마치 832쪽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을 자랑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책의 마리샤 페슬의 데뷔작이라는 점이다.

주인공이자 화자로 등장하는 블루 반 미어는 어려서 나비를 채집하러 다니던 중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하는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나이 5살 때부터, 유목민의 삶을 살게 된 블루와 그녀의 아버지는 미국의 곳곳에 정착을 하지 못하고 유랑한다. 부유한 유대인 가정 출신의 어머니와의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의 외국인 아버지의 짧은 결혼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 책은 블루의 삶 중에서 15살 가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그 다음 해 봄까지 그녀가 다닌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스톡턴의 세인트 골웨이 사립학교를 바탕으로 해서 집중된다. 이야기는 블루와 아버지가 이 학교에서 영화 수업을 하는 한나 슈나이더라는 미스터리에 쌓인 미모의 여자 선생님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그녀의 도움으로 “블루블러드”라는 미국의 여느 고등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잘난 '클릭(click)'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블루에 대해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블루블러드들.

<블루의 불행학 특강>은 책의 상당 부분을 어느 그룹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주변을 빙빙 맴도는 지적으로 너무나 뛰어난 여고생 블루의 자의식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뛰어난 지성을 자랑하는 아버지의 지도 아래, 어려서부터 다양한 독서를 한 블루는 곳곳에서 자신의 비범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게다가 언제나 그녀의 아버지 가레스 교수 주변에는 준 버그(풍뎅이)라고 그녀가 명명한 여성들이 끊이질 않는다. 아버지의 짧은 연애 행각을 쥐의 임신기간에 비유하는 블루의 블랙유머가 눈에 잡혔다.

사실 <블루의 불행학 특강>의 전반부는 다소 지루하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의 모티브를 떠올리게 하는 블루와 아버지 가레스의 관계, 참신하긴 하지만 지나치게 인용과 주석들 그리고 미국 고등학생들의 생활에 대한 천착이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게다가 후반에 아주 중요한 나이트워치맨들에 대한 엉터리 홈피 주소를 직접 찾아보는 열의를 가진 독자들이라면 더욱 허탈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블루의 불행학 특강>이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하는 지점은 비극으로 끝난 블루와 블루블러드 그리고 한나 슈나이더의 봄방학을 이용한 인근 테네시 주와 경계한 스모키산 국립공원 등반이 끝나면서부터이다. 책의 시작에서 한나 슈나이더의 죽음으로 비롯된 이야기를 밝히고 있듯이, 평범하지만 뛰어난 여고생으로부터 블루는 한나의 죽음의 비밀을 캐는 사립탐정으로 극적 전환에 성공한다. 이때부터는 “내가 왜 이 책을 읽고 있지”하던 생각은 바람결에 날아가 버리고 본격적인 미스터리에 흠뻑 빠지게 된다. 그동안 마리샤 페슬이 책의 곳곳에 무심코 던져두었던, 실마리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쑥쑥 딸려 나온다. 긴 책을 포기하지 않고, 읽어낸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우선 마리샤 페슬은 각 장마다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긴 뛰어난 고전들을 제목으로 배치하고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로부터 시작을 해서,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이르는 36개의(한 개는 가상의 소설) 고전들을 통해 자신이 <블루의 불행학 특강>의 소주제들을 녹여 내고 있다. 그 외에도 칠백여개에 달하는 주석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블루와 그의 아버지의 삶에 대한 현학적 태도와 현란하기 그지없는 수사의 바다가 넘실거린다.

책을 읽으면서, 중간 부분에서 지루하게 느꼈던 이유를 생각해 봤다. 그것은 아마 미국 청소년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블루는 또래의 청소년들답지 않게, 문학, 고전영화 그리고 심지어 모차르트의 오페라에까지 깊은 조예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 조숙하게만 느껴진다, 고작 15살 난 소녀가 이제는 거의 활동을 접은 엽기가수 위어드 알 얀코빅(636쪽)을 알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수많을 책들을 읽고,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하기에는 여전히 어린 나이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그런 점에서 블루의 캐릭터는 너무나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왜 블루는 그렇게 ‘블루블러드’와 어울리고 싶어 했을까. 그녀의 학업성취도와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굳이 블루블러드가 아니라 다른 클릭들과 어울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게 작가가 고안해낸 장치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블루의 불행학 특강>은 이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혹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아름다움’(642쪽)을 장착하고 있다. 특히 평범한 성장소설에서 한나 슈나이더의 죽음에서 비롯된 살인 미스터리로의 극적인 전환은 마리샤 페슬을 읽는 독자들에겐 수확의 계절이다.

아, 그리고 <블루의 불행학 특강>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독자들이라면 이 책의 공식웹사이트를 한 번 방문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http://calamityphysics.com/main.htm). 책에는 나오지 않는 비주얼 자료들과 블루의 졸업 앨범에 실린 사진들도 볼 수가 있다. 다만, 영어로 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할 것이다. 블루의 ‘불행학 특강’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행운이 깃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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