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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의 개 - 삶과 죽음의 뫼비우스의 띠
후지와라 신야 지음,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작년 가을에 처음으로 일본을 대표한다는 사진가 후지와라 신야의 전설 같은 여행에세이 <동양기행>을 읽었다. 예의 책을 읽고, 같이 수록된 사진들을 보면서 보통의 사진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낯선 이국의 풍경만이 아닌, 인간사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번에 <황천의 개>란 묘한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에는 또 어떤 책일까 하는 호기심이 샘솟았다.
<황천의 개>의 구성은 낯설다. 우선 이야기는 일본의 패전 50주년인 1995년 3월 20일에 발생한 도쿄 지하철의 사린 가스 테러로 시작한다. 사건의 주범은 신흥 사이비 종교집단인 옴진리교를 믿는 신도들과 그들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 일본에서는 같은 해 초에 발생한 한신대지진(고베대지진)과 함께 한 시대의 종언처럼 받아들여진 큰 사건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비중 있게 다뤄지진 않았었다고 한다.
포토 저널리스트인 후지와라 신야는 공업화와 수출입국의 기치 아래, 성장과 경쟁 일변도의 삶을 달려온 일본인들의 병리적 심리상태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옴진리교의 교주의 고향인 구마모토 현의 야쓰시로를 방문해서, 미나마타병으로 알려진 수은공해와 아사하라 쇼코의 원념에 찬 사회에 대한 복수의 실마리를 풀어 나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글은 작가가 20대에 부모와 연인 그리고 대학마저 죄다 포기하고 찾았던 인도로 공간이동을 한다. 마치 작가의 이전 작품인 <인도방랑>의 후속편인 것처럼. 후지와라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인도의 갠지스 강가에서 소멸하는 인간의 육신을 날마다 지켜보면서 개인의 번뇌의 화살을 소진하고, 진아(프르샤)를 찾는 수행에 들어간다.
후지와라는 그 과정을 굳이 여행이라고(혹은 방랑) 부르는데, 이 여정 가운데 많은 가짜 구루지(도사)들을 만나게 된다. 계급적인 종교에 대해 계속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작가는 명상과 수행이라는 미명 하에 서구의 소위 깨인 지식인들로부터 금전과 성을 갈취하는 얼치기 구루지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특히 4번째 장인 <히말라야의 할리우드>에서 눈속임과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이들이 벌이는 할리우드 쇼같은 공중부양의 허상, 다시 말해서 환영(마야)을 폭로하고 있다.
그 다음 장에 등장하는 같은 일본인 여행자 출신의 Y와의 만남에서는 1960년대 말 일본에서 학생운동의 실패에 좌절하고, 티베트, 중동 그리고 인도를 찾은 수많은 여행자들의 부질없는 환영을 다루고 있다. 이는 역시 비슷한 모습으로 인도를 찾았던 아사하라 쇼코와 그의 추종자들의 그릇된 종교관과 진리는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옴진리교의 모래성 같은 이데올로기들을 분석해낸다.
이 책을 읽게 되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만, 후지와라가 갠지스 강에서 우연히 만난 “황천의 개”와의 조우는 가히 충격적이다. 책에 실린 같은 제목의 사진을 한참을 보면서 도대체 이게 무슨 사진이가 하고 한참을 지켜봤다. 천부인권사상에서 비롯된 현대사회 인간의 존엄은 죽음이 일상생활에서 분리되지 않은 채, 삶의 리얼리티와 병존하고 있는 인도에선 생로병사의 근원적 진리 앞에서 너무나 보잘 것 없게만 느껴졌다.
구루지들의 사기 행각에 대한 설명은 예전에 봤던 할리우드 영화 <구루>(2002)의 그것과 내 기억 속에서 오버랩되고 있었다. 인도의 신비주의에 현혹된 미국의 부유층과 구루 행세를 하면서, 그들의 돈을 뜯어내는 사이비 구루의 작태가 <황천의 개>에 등장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환각제를 먹이고 공중부양 쇼를 벌이는 프랑스 청년의 패러디처럼 느껴졌다.
얼치기 구루들이 사람들을 속이는데 써먹은 문구가 계속해서 화두처럼 머리에서 맴돌고 있다. 우리는 모두 환영이고, 우리가 사는 이 사회 역시 환영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린 모두 미아가 되어 버리고 만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