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와일라잇 - Twiligh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여류작가 스테프니 메이어의 인간과 뱀파이어의 로맨스를 그린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대해 꽤 오래 전부터 들어 왔지만 청소년들이나 읽는  하이틴 로맨스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05년에 처음으로 세상의 빛을 본 <트와일라잇>은 이 후 <뉴문>과 <이클립스> 그리고 <브레이킹 돈>에 이르기까지 그칠 줄 모르는 행진을 계속했다. 결국 이번에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다고 해서, 책읽기는 보류하고 영화부터 먼저 보게 됐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그 어떤 영화도 책의 감동과 디테일을 넘어서지 못했기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도 원작이 갖는 아우라를 영화에서 제대로 보여 주었을까? 개인적으로 영화 <향수>도 좋아하지만, 그건 원작의 아우라에 대해 한 수 접고 들어가니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애초에 두 시간 남짓한 영화와 원작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처럼 느껴졌다.

<트와일라잇> 역시 그렇게 한 수 접고 들어가니 아주 재밌게 볼 수가 있었다. 물론 원작을 미리 읽지 않았다는 메리트(?)가 작용한걸까. 영화를 보기 전에 슬쩍 리뷰들을 보니 거의 영화에 대한 비난일색의 리뷰들이 차고 넘치고 있었다. 책을 먼저 읽은 지인들의 평가 역시 다르지 않았다. 어쨌든 이제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처음부터 뱀파이어 영화라는 건 알고 있으니 과연 누가 뱀파이어인지 알아보는 게 중요하겠지? 일단 영화의 배경은 미국에서 가장 많이 비가 내린다는 워싱턴 주 포크스라는 작은 마을이다. 여주인공 (이사)벨라 스완은 태양이 빛나는 도시 애리조나의 피닉스에서 엄마와 이혼한 아버지가 경찰서장으로 일하고 있는 포크스에 전학 온다. 책에서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별다른 설명 없이 애리조나에서 온 이 낯선 이방인에게 포크스 고등학교 학생들은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다.

새로 등장한 인물에게 왕따 같은건 보이지 않고, 바로 그들의 클릭(click)에 넣고자 하는 이들이 차고 넘친다. 그만큼 벨라의 매력이 출중하다는 걸까? 뭐 여느 여주인공 같은 대접은 받아야 하니 넘어가도록 하자. 자, 우리의 뱀파이어는 누굴까 퀘스트는 계속된다. 한눈에 척봐도 희여 멀건 밀가루를 뒤집어 쓴 것 같은 컬린들이 눈에 확 띄는구나. 게다가 5명이나 입양된 아이들이라고 하니 놀랍다. 물에 뜬 기름처럼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지 않고 지들끼리 몰려다니니 당연한 일이겠지.

자, 그럼 벨라의 미래의 뱀파이어 남친은 누굴까? 당첨, 한눈에 척봐도 남주인공의 포스를 가지고 있는 에드워드 컬린이로구나! 하지만 이 친구는 생물 시간에 벨라와 짝꿍이 되었으면서도 그녀를 기피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아마 벨라는 첫 눈에 바로 사라에 빠져 버린 듯. 그에게 항의를 하려고 하지만 에드워드는 아예 며칠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다가 다시 나타나서는 아주 살갑게 구는 모습이란. 벨라는 혼란에 빠져 버린다.

그러던 중, 벨라는 교통사고로 위기를 맞이하지만 그 순간 바람처럼 나타난 에드워드가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준다. 그것도 놀라운 스피드와 자동차를 찌그러뜨려 버릴만한 괴력으로 말이다. 벨라의 꿈에 에드워드는 무시로 나타나고, 미스터리와 수수께끼로 가득한 그들의 관계가 설정된다. 한편, 포크스 마을의 곳곳에서는 짐승들의 공격으로 인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과연 누구의 짓일까? 일단 에드워드가 뱀파이어라는 심증은 있으니 과연 그들의 짓일까 하는 생각이 관객들의 마음속을 파고든다.

아버지 친구의 아들인 네이티브 아메리칸인 제이콥 블랙의 도움으로 퀼루트 인디언 전설을 알게 된 벨라는 스스로의 힘으로 에드워드의 정체를 알게 된다. 포트 앤젤리스에거 구한 책과 구글을 통해 불사, 스피드, 놀라운 괴력, 얼음장처럼 차가운 피부 그리고 불멸의 존재 뱀파이어의 비밀을 알게 된 벨라. 그녀에게 의외로 쉽게 자신의 정체를 내보이는 에드워드, 책에서는 과연 어떤 식으로 전개를 했을지 궁금하다.

에드워드는 컬린 패밀리가 좋은 뱀파이어라고 소개를 한다. 물론 잠을 자지 않는다든가, 음식물 섭취를 하지 않는다는가 하는 뱀파이어들의 속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한편 포크스 마을에서 살인을 한 나쁜 뱀파이어들과 비오는 날 야구시합을 하러 간 우연히 만나게 된 벨라와 컬린 패밀리! 부드럽게 진행되던 고혹적인 러브 스토리는 위기와 절정의 클라이맥스로 치닫기 시작한다.

1897년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처음으로 출간되었을 당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었다. 뱀파이어와 인간의 관계는 그런 계급적 차이와 남성과 여성간의 차별(혹은 흡혈)로도 해석이 될 수가 있었다. 게다가 에로틱한 매력까지도 갖춘 뱀파이어 이야기들은 지난 한 세기 동안 꾸준하게 확대 재생산되어져 왔다. 과연 21세기 뱀파이어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하고 궁금해 하던 찰나에 스테프니 메이어가 놀랄만큼 진화한 새로운 뱀파이어의 유형을 제시해 주었다.

빛에 노출이 되어도 재로 변하지 않고, 오히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멋진 이상적인 모습과 생존을 위해 굳이 흡혈을 하지 않아도 되는(혹은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아도 되는) 신식 베지테리언 뱀파이어들이 등장한다. 아, 물론 소설의 극적 전개를 위해서 나쁜 뱀파이어들의 존재 역시 배제하지 않는 치밀함을 선보여 주기도 한다. 뱀파이어 에드워드가 가진 괴력은 여주인공 벨라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여주인공이 위기에 빠졌을 때, 번개처럼 등장해서 그녀를 구해주는 모습은 <슈퍼맨>의 그것과 진배없다. 게다가 자신의 집에(하우스 오브 뱀파이어?) 초대를 해서, 낭만적인 드뷔시의 달빛(Claire de Lune)까지 들려주니 이에 반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극중에서의 주인공들의 외모야 주관적이니 넘어가자. 게다가 트래커 뱀파이어인 제임스의 추격을 받으며, 애리조나로 떠나는 벨라에게 “Bella, You're my life, NOW!"라는 대사는 정말 최고였다.

후속편인 <뉴문>에서 이야기가 더 진화가 된다고 하는데 유한한 존재인 인간과 불사의 존재인 뱀파이어 사이에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영원불멸(immortal)의 이야기 역시 빼놓을 수가 없다. 1918년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카일 컬린에 의해 뱀파이어가 된 에드워드는 근 100년간을 17살의 모습으로 지내지만, 벨라는 그렇지 않다. 에드워드와 벨라의 사랑이 유한해 보이는 것처럼 어쩌면 벨라 역시 불멸을 꿈꾸는 게 아닐까? 발에 깁스를 하고 졸업 무도회장에 등장한 벨라가 에드워드에게 자신의 흰 목을 내미는 장면은 순간미학의 정점이었다.

영화의 첫 대사에서 벨라가 말한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 있는 곳에서 죽는 것”이라는 유한한 삶에 대한 말은 아마 이 시리즈에서 계속해서 반복될 것 같다. <트와일라잇>은 판타지이면서도 한편으로 현실 세계 속에서의 일들이 그려진다. 마치 한 편의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멋진 사랑을 꿈꾸면서도 현실에서 분리될 수 없는. 벨라는 에드워드와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뱀파이어가 되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위험에 빠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에드워드는 벨라를 사랑하지만, 뱀파이어인 에드워드는 그녀의 피를 원한다. 이렇게 영화의 곳곳에서 보이는 이성과 감성의 충돌은 독자들을 욕망과 절제의 위태로운 경계선으로 몰아넣는다.

게다가 영화는 후속편의 예고를 위한 교묘한 장치들의 배열에도 신경을 쓴다. 비범한 능력을 가진 제임스만큼이나 나중에 벨라의 생명을 위협하게 될 빅토리아가 졸업 댄스파티(prom)에 슬며시 모습을 비춘다. 미래를 예견하는 알리스는 벨라도 에드워드와 같이 될거라는 모호한 예언을 남긴다.

현재 2탄인 <뉴문>이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촬영 중에 있다고 한다. <뉴문>에서는 에드워드와 벨라의 로맨스보다 뱀파이어들의 숙적인 늑대인간(라이칸)과의 갈등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올 후반기에 개봉예정이라는 후속편이 너무나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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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 - 예니체리 부대의 음모
제이슨 굿윈 지음, 한은경 옮김 / 비채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보통 시리즈의 경우에는 차례대로 읽어 나가는 게 순서인데 제이슨 굿윈의 <스네이크 스톤>을 읽고 나서, 전작인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을 읽게 됐다. 여전히 공간적 배경은 천년고도이자 동서양의 접점인 이스탄불, 그리고 시대적 배경은 1836년이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비잔틴 사를 전공한 제이슨 굿윈은 환관 출신으로 그리스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환관 탐정 야심 토갈루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부제로 나온 <예니체리 부대의 음모>가 말해 주듯이,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화를 이루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예니체리 부대의 관한 역사를 바탕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술탄 무라드가 정복한 유럽 각지의 기독교도 가정에서 차출한 소년들을 징집해서 무슬림화 시킨 후, 술탄의 정예병으로 육성하기 시작한 예니체리 부대는 유럽정복과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 함락에 큰 공헌을 한다. 하지만 소설에서 언급되듯이 하나의 권력으로 민중을 착취하는 군대 마피아가 된 그들은 심지어 술탄마저도 교살하며, 오스만 제국의 정정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결국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의 당대 술탄으로 등장하는 마흐무트 2세가 1826년 6월 16일 신식군대인 신위병들을 동원해서 예니체리 부대를 물리적으로 해체하면서 예니체리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당시 주동자들만 처벌되고, 끈끈한 유대감을 자랑하는 예니체리 부대원들은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 네 명의 신위병들이 차례로 끔찍하게 살해되고 새로운 신위병 사령관인 세라스케르가 야심에게 10일 안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주문을 한다(<스네이크 스톤>에서도 기간이 아마 10일이었지 싶다!). 동시에 술탄의 후궁인 하렘에서도 괴즈데(술탄의 시중을 들 소녀)가 교살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환관으로 남성을 잃은 야심은 40년 전에 조국을 잃은 폴란드 대사 스타니슬라브 팔레브스키와 더불어 문제를 풀어 나가기 시작한다. 매주 목요일마다 야심의 집을 방문해서 요리를 함께 즐기는 스타니슬라브는 야심에게 보드카 배달부이다. 이스탄불에서 야심을 돕는 이로는 스타니슬라브외에도 쾨첵 무용수 출신의 프린과 무라드 에슬렉이 있다. 야심이 예니체리들의 비밀에 다가갈수록 그는 점점 더 위험에 다가간다.

그의 움직임을 파악한 적들은 무두질 공장에서, 그가 즐기는 터키탕 하맘에서 그리고 결국에는 벙어리 자객을 파견해서 그를 없애려고 한다. 책의 어디에선가 작가가 표현했듯이, 쫓고 쫓기는 자의 추격이 미로와 같은 이스탄불의 골목골목에서 상세하게 펼쳐진다. 게다가 잘난 투르크인 야심은 러시아 대사의 미모의 부인 예브게니아와 ‘뻔뻔한’ 스캔들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해, 추리 소설이 담고 있을 법한 요소들은 모두 가지고 있다. 마치 19세기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해서 펼쳐지는 제임스 본드의 종횡무진한 활약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예니체리 부대의 해체와 오스만 술탄의 개혁 정책 같은 역사적 사실들은 보너스로 다가온다.

야심이 사건들을 추적해 가는 과정에서 슬쩍 등장하게 되는 카라고지로 대변되는 이슬람 신비주의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다. 언제나 그렇듯이 정통에서 분리된 신비주의와 예니체리 부대와의 상관관계 역시 매력적인 이야기거리였다. 아직 등장하지 않은 네 번째 실종 신위병 장교를 찾는 과정에서 알게된 케르코포르타(작은 문)로 인한 비잔틴 제국의 보석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설 역시 소설의 흥미를 배가시키고 있었다.

연쇄살인 사건의 해결을 전제로 한 미스터리 물을 표방하는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의 주인공인 야심의 캐릭터는 환관으로 설정이 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호기심을 가질 술탄의 후궁인 하렘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남자 캐릭터는 오직 환관만이 가능할 것이다. 술탄의 모후인 발리데와도 교류를 하며, 그녀에게 프랑스 파리에서 막 출간된 <위험한 관계>나 <고리오 영감> 같은 신간 서적을 빌려 보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참 인상적이었다.

작가는 야심 시리즈를 오래 전부터 기획해 왔는지 2탄 <스네이크 스톤>의 중요한 소재가 되는 “스네이크 스톤”에 대한 언급을 이미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에서 언급하고 있었다. 아마 <스네이크 스톤>을 먼저 읽지 않았더라면 그냥 쉽게 스쳐갈 부분이었는데 후속편을 먼저 읽고 나서 전편을 읽게 돼서 그런지 더 반가웠다. 매혹의 도시 이스탄불에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펼쳐질 야심 토갈루의 활약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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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 - 심리학자가 만난 조선의 문제적 인물들
김태형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오래 전에 MBTI(The Myers-Briggs Type Indicator) 테스트를 한 적이 있었다. 제법 많은 문항들에 차례로 답변을 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나온 유형지표를 보고 개인적 성향과 너무 비슷한 점이 많아서 놀란 기억이 난다.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의 저자 김태형 씨는 조선의 다섯 인물들에게 칼 융의 심리유형론에 근거한 MBTI 분석으로 심리학과 역사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선보이고 있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조선조 22번째 왕이었던 정조 이산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고,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일설에는 사도세자가 정신질환을 앓았고 그로 인한 아버지 영조와의 불화로 죽음에 내몰렸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사도세자가 정신질환을 앓았다는 증거가 없다고 반박한다. 오히려 이복형 경종을 독살하고 세제로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이 농후한 영조의 피폐한 정신건강이 노론과 소론의 격심한 당쟁 가운데 영조-사도세자 불화의 도화선이었다고 한다.

사서에 보면 영조 대에 아버지 영조를 도와 14년간이나 대리청정을 한 사도세자가 공무 중에 정신질환을 앓았다면 그 증상에 대해 사관들이 기록을 했어야 하는데 사서에는 그런 증거가 없다고 한다. 다만 사적인 영역에서만 발병했다고 하는데, 이는 정신질환을 겪는 이들의 통제 밖의 일이다.

11살의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은 정조는 자신의 즉위를 방해하려는 노론의 끊임없는 방해와 즉위 후에도 암살음모와 역모에 시달려야 했다. 기가 막힐 노릇은 그 중심에 자신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가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혜경궁 홍씨를 풍산 홍씨 집안의 특공대원으로 부르면서, 왕실이나 자신의 친아들인 정조보다도 홍씨 집안만을 생각한 극단적 이기주의자로 폄하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게 된 상황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지아비를 구명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아버지 없이 자란 정조는 비슷한 케이스의 연산군과는 대조적인 전략가형(INTJ) 인물로 온갖 역경을 딛고, 유년기에 아버지 사도세자와의 건강한 관계를 기반으로 해서 안정적 정서를 갖추고, 사람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면서 국정운영에 나서게 된다. 필연적으로 부작용이 따르게 되는, 단시간에 무리를 해서 아버지의 추숭사업을 추진하려고 하기 보다는 많은 준비와 기다림의 긴 과정을 거치는 용의주도함을 보여 준다. 조선조의 마지막 개혁군주로써 비록 그의 계획한 개혁들이 완수되지는 못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모범적 정치지도자로서의 정조의 위상이 제시된다.

두 번째 인물로는 조선 3대 성리학자로 유명한 율곡 이이의 차례다. 율곡은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현모양처의 귀감으로 꼽히는 신사임당의 아들이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빛나는 재주와 능력을 가지고 있던 부인에 비해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너무나 초라한 삶을 살았다. 부인의 전폭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벼슬에 뜻이 없던 율곡의 아버지는 일찍이 사회생활을 포기해 버렸다. 그런 율곡에게 무능력한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야말로 애중의 관계였다.

율곡은 무려 장원급제를 9번이나 하여 구도장원공이라 불릴 정도의 천재였다. 율곡이 세운 기록은 조선조 500년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율곡 역시 정조와 마찬가지로 전략가형(INTJ) 스타일의 인물로, 대쪽 같은 절개와 청렴함을 바탕으로 그가 섬기던 임금 선조 앞에서도 그야말로 할 말 안할 말 가리지 않는 선비의 모습 그 자체였다. 비록 세조의 쿠데타와 중종반정 등의 정치적 격변을 겪기는 했지만 적장자 직계 승계를 유지해 오던 조선 왕실은 선조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방계 출신 왕을 내게 된다.

이런 태생적 한계에 의지박약과 실천력이 부족했던 선조는 율곡의 아버지처럼 내향직관감정형(INF)의 인물이었다. 저자는 율곡이 자신의 아들 뻘인 선조를 무의식적으로 아버지화했을지도 모른다고 추론하고 있다. 율곡은 선조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고 했으나, 비록 율곡을 크게 중용할 정도의 위인이 되지 못했던 선조는 율곡의 사람됨을 알고 크게 처벌하지는 않았다. 율곡은 관직생활을 하면서 관직에 나가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해서 낙향하기를 반복했지만 선조는 율곡에 대한 신임을 거두지 않았다. 그건 율곡만한 인재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화목한 대가족이라는 율곡의 이상은 현실에서는 이뤄지기 힘든 도원경이었지만 율곡은 평생 그 꿈을 버리지 않았던 참다운 유학자였다.

세 번째 인물로는 홍길동전의 저자로 유명한 교산 허균이 나온다. 누이 허난설헌과 더불어 수많은 명문장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한 허균에 대해 저자의 평가는 정조와 이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냉정하고 박하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어려서 잃은 허균은, 둘째형 허봉을 실질적인 아버지로 대하면서 자랐다. 그리고 첫 번째 부인 김씨를 통해 유년기의 심리적 상처들을 치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지만 임진왜란 통에 부인을 잃고, 은둔과 사회적 성공이라는 서로 병존할 수 없는 이상 사이에서 평생을 고민하게 된다.

허균은 홍길동전과 같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신분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이상사회를 건설하려고 했던 혁명가의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지만, 저자는 이를 반박하고 있다. 허균에게는 현실세계에서 안주하려는 경향만 있었지 그가 직접적으로 나서서 무언가를 개혁하려는 의지는 전혀 없었다고 단언하고 있다. 중앙정계에서, 다른 이들과 경쟁하지 않고 지방수령 자리들을 전전하면서 향락생활을 즐긴 것만으로도 그의 이중적인 모습들을 파악할 수가 있다. 결국 권력을 쫓다가, 광해군 대에 이이첨의 간계에 걸려 역적의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연산군은 그동안 숱하게 드라마와 영화 등을 통해 접해서 그런지 등장인물들이나 상황들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연산군의 기행과 폭정은 그의 잘못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세조의 쿠데타로 시작된 불의의 정치를 기원으로 봐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세조의 계유정난을 통해 득세한 훈구파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왕권에 버금갈만한 권력을 갖게 되면서 국정에 혼란이 야기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마마보이로 세 명의 대비들에게 휘둘리게 되면서,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를 사사하게 된다.

이렇게 암울한 유년기를 보내게 된 연산군 역시 자신의 할머니뻘인 대비들에게 의지하게 되면서 주변에 대해 불신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연산군은 군주의 성격보다는 예술가나 예능인의 재능을 타고났다. 훈구파의 조종에 의해 발생한 무오사화를 통해 자신에게 직간을 해대는 사림파들을 일소한 연산군은 갑자사화에서는 그 화살을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씨를 죽음에 이르게 한 훈구세력에 돌리면서 사방을 적으로 만든다. 결국 중종반정으로 폐위되고, 유배지 강화도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서두에서 작가가 말했듯이, 전업 역사학자가 아닌 이상 그네들처럼 전문적인 고증 작업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대신 자신의 전문분야인 심리학적 측면에서는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고 작업한 성과를 보여 주었다. 역사 분야에 있어서 좀 더 전문적인 식견의 부족이 아쉽긴 하지만, 거의 전무했던 타 학문과의 퓨전적인 만남이 무척이나 신선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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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와 함께 걷는 달콤한 유럽여행
홍지윤.홍수연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그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가끔 테마여행을 한 번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사실 나의 지난 여행들은 언제나 즉흥에 기초한 마구잡이식 여행이었다. ‘여행 작가 언니, 큐레이터 동생의 인상파 그림 여행’이라는 책의 카피가 말해 주듯이 <인상파와 함께 걷는 달콤한 유럽여행>은 유럽 각지에 산재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찾아 나서는 테마여행길이다.

미술관을 아주 싫어하는 이가 아니라면(실제 여행하면서 그런 사람을 만난 경험이 있다!), 누구나 대가들의 진품과의 만남을 마다할 이는 없을 거다. 아니 일부러 그 진품을 찾아 나서는 이도 있는 마당에 말이다. 그런 면에서 홍지윤, 홍수연 작가의 만남은 금상첨화라고나 할까. 그림 보는 눈이 있어도 베테랑 여행가가 아니라면 이 빡센 일정을 소화해낼 수가 없을 것이며, 여행가라고 하더라도 그림에 대한 안목이 없다면 아무리 고흐의 그 유명한 그림들도 여느 그림들과 다를 게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빛과 대기의 흐름의 미묘한 변화를 화폭에 담아낸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진적을 찾는 기행은 우선 카미유 피사로,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 폴 세잔, 클로드 모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일단 무얼 알아야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볼게 아닌가.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듯이 기초부터 다져준다.

자, 이제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으면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들을 찾는 여행길에 나서 보자. 우리의 인상파 화가 길라잡이들은 유럽 대륙과 떨어진 영국의 런던에서부터 출발을 한다. 개인적으로 왜 영국에는 관심이 없는지 모르겠다. 두 번 유럽에 갔었는데, 그 때마다 영국에 갈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다만 입장료가 무료라는 내셔널 갤러리에는 관심이 갔다.

개인적으로 인상파 화가 중에서 무희들의 그림을 많이 그린 에드가 드가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 못지않게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한다. 역시 개인적인 취향 때문인지 그가 그린 태양을 바라는 해바라기와 자화상들이 너무나 좋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다는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흐의 컬렉션을 가지고 있다고 했던가.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 중의 하나는 왜 사진을 절대 못 찍게 할까였다. 플래시만 쓰지 않는다면 그림이 상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마 저작권과 그를 이용한 상품들의 판권 때문이 아닐까?

책의 제목에서는 비록 ‘유럽여행’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이 책이 상당 부분이 대부분의 인상파 화가들의 모국인 프랑스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니 영원의 도시 파리가 빠질 수가 있나. 루브르나 오르세 미술관은 너무 많은 책들에서 다루어서 식상할 정도이고, 개인적으로 미처 관람하지 못한 오랑주리 미술관의 아쉬움을 지면으로나마 달래 본다.

재작년에 두 번째로 파리를 찾았을 때, 튈르리 정원 옆에 붙어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모네의 그 유명한 <수련> 연작을 보러 갔었다. 그런데 문제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 날이 휴관일이 아닌가. 그 당시에는 미처 몰랐었는데 이 책을 보면서 진품을 직접 대하지 못한 게 어찌나 아쉽던지.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인상파에 대해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사실들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특히 밀레의 아틀리에 편에서 다룬 그 유명한 밀레의 <만종>에 얽힌 일화는 섬뜩할 정도였다. 인상파 화가들인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주름 잡던 많은 문인들과도 폭넓은 교류를 했는데, 마네가 그린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의 초상화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책에서는 미처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인터넷으로 제대로 된 사진을 구하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쓴 유태계 장교 드레퓌스를 변호한 프랑스의 진정한 양심을 대표하는 에밀 졸라의 초상과 마네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올랭피아>가 그림 속의 그림으로 들어 있는 그림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이 초상화에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일본의 우키요에(일본의 목판으로 제작된 풍속화)도 한 점 들어 있다.

마네와 더불어 어려서 항상 날 헷갈리게 했던 클로드 모네가 만년을 보낸 지베르니의 정경을 다룬 에피소드 역시 일품이었다. 사진만으로도 그토록 아름다운 파리 교외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았던 모네의 만년이 신기루처럼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인상파 화가들의 삶과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역시 파리의 상징처럼 된 물랭 루주 부근에서 무희, 가수 혹은 창녀들 같은 소위 말하는 사회의 밑바닥의 삶을 그려낸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도 빼놓을 수가 없다. 다양한 카바레의 포스터 그림으로도 유명한 로트레크는 유전병으로 어려서 불구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만약에 신체건강한 몸이었다면, 그처럼 예술혼에 불타는 작품들을 남길 수가 있었을까 하고 작가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책의 말미에는 깜짝 보너스로 역시 여행 작가답게, 이 모든 여행을 위한 친절한 가이드라인이 소개된다. 여행일정 짜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이미 몇 번의 여행을 해본 이들이라면 패스할지도 모르겠지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여행을 떠나는 이들에게는 아마 꼭 필요한 부분이리라.

책을 읽는 내내 이렇게 유럽의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인상파 화가들의 진품들과 만나볼 수 있었던 작가들이 마냥 부러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언젠가 다시 기회가 되서 유럽에 가게 된다면, 작가들만큼은 아니어도 작은 인상파 화가 테마여행을 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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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코의 지름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3
나가시마 유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작가는 다카노 히데유키다. 사실 그 외에는 히가시노 게이고 정도 밖에는 잘 모른다. 이번에 읽은 <유코의 지름길>은 나가시마 유라는 작가의 오에 겐자부로 상 수상작이라고 하던가. 사실 나가시마 유도, 일본에서 두 번째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오에 겐자부로에 대해서도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일본 순수문학의 우수성을 해외에 알리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는 오에 겐자부로 상에 대해서도 처음 들었다.

<유코의 지름길>에는 공간적 배경은 존재하지만, 시간적 배경은 모호하게 그려져 있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나의 서양 골동품 가게 “후라코코”에서의 몇 달 간의 생활 그리고 그 공간을 바탕으로 해서 빚어지는 관계의 이야기들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상대방에서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일본인들 특유의 성격이 <유코의 지름길>을 통해 아주 적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후라코코 2층에 기거하는 나는 돈이 없거나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서라기보다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에 손님도 그다지 많이 찾지 않는 골동품점에서 알바를 한다. 가게에는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보다, 후라코코를 사랑방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더 많이 찾는다.

나는 그들에게 차를 대접하고, 그들의 삶 속으로 조금씩 스며든다. 근처에 사는 결혼했지만 남편의 존재감이 부재한 미즈에 씨와 오토바이 면허시험에 이야기를 하고, 후라코코 주인집 아저씨의 손녀딸인 미대생 아사코의 졸업 작품 준비를 지켜보고, 또 정시제 고등학교에 다니는 코스프레의 꿈을 안고 사는 말썽꾸러기 유코짱의 카운슬러가 되어 주기도 한다. 모두가 적어도 한 가지씩의 비밀을 안고 사는데, 주인공인 나는 언제나 그들과 거리감을 유지한다. 그들에게 적당선 이상이 관심이 없어서일까? 사실 창피한 일이지만, 책의 1/3 정도를 읽기까지 주인공 ‘나’의 성별도 알 수가 없었다.

나가시마 유의 글쓰기는 참으로 군더더기가 없고, 담백하다. 일본 문학의 우수성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뽑혔다고 하는데, 번역하면서 말맛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노파심이 들었다. 영어로된 작품들도 그렇지만, 그 나라 말 고유의 말맛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일어로 보면 또 그대로 느낄 수 있었던 감정들이 우리말로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부스러진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후라코코라는 공간을 통해 그리고 작은 시골마을길을 따라 부유하는 주인공의 움직임이 문득 느껴지는 듯했다. 유코짱이 끌고 다니는 자전거 바큇살이 빙그르 도는 청각을 동반한 이미지가 눈에 선하게 보여지는 것 같기도 하고, 24시간 편의점에서 컵술과 컵라면 등을 사가지고 달랑달랑 후라코코 2층으로 향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스릴러나 혹은 호러 같은 장르 소설에서 보이는 아싸라한 클라이맥스 같은 것은 없지만, 어느 자그마한 일본의 마을길에서 만나게 되는 골동품점의 한가로운 여유와 지극히 평범한 이들과의 만남이 숨어 있는 정감을 <유코의 지름길>에서 만나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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