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프로젝트
박세라 지음 / Media2.0(미디어 2.0)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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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에서 꽤 오래 살아 봤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의 주체할 수 없는 역마살은 주기적으로 도지곤 한다. 책이나 혹은 잡지, 아니면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에서 매력적인 곳들을 보면 ‘아, 나도 저기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한 석 달쯤 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만, 경제적이거나 혹은 시간적 이유로 해서 실천에 옮기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하지만 <런던 프로젝트>의 작가 박세라 씨는 분연히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런던으로 떠났다. 솔직히 그녀가 왜 런던에 갔는가에 대해서 분명 책의 초반에서 읽었을 텐데, 그건 다 까먹고 말미에 가서 목적이 “낭비”였다라는 낱말에 왜 이렇게 꽂혔는지 모르겠다. 다시 한 번 부럽다, 그렇게 낭비할 수 있다는 여유가.

살면서 유럽에 두 번 갔었는데, 사실 영국과 런던은 한 번도 나의 목적지가 아니었다. 왠지 대륙과 동떨어진 채 나 홀로 유로(Euro)도 거부하고 파운드화를 쓰는 고집쟁이들의 나라가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 <런던 프로젝트>를 통해 본 바에 의하면 그런 나의 생각들이 모두 고정관념이고, 편견이었다고 자수해야할 것 같다.

작가가 그리는 입헌군주제를 택하고 있는 영국은 공화제 국가인 대륙의 프랑스와 독일과는 또 다른 맛이 배어 있었다. 기품이라고나 할까? 책의 곳곳에서 여왕에 대한 이야기들과 프린세스 다이애나 그리고 왕실납품이라는 낱말들이 확실히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왕국이라는 이미지들을 독자들에게 전달해 주고 있었다. 왕을 모시고 사는 이들의 심리는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불쑥 들었다.

확실히 남성과는 여성 특유의 세심하면서도 주변의 사물들에 대한 빼어난 관찰력이 돋보이는 글과 사진들이 인상적이었다. 매주 마다 <이 주의 낭비 결산>이란 코너를 만들어서, 나라면 한 번 받아 보고 내버렸을 영수증이나 클럽이나 혹은 각종 이벤트들을 선전하는 플라이어들을 곱게 모아 찍은 사진들을 통해 자신의 ‘낭비들’(물론 긍정의 뜻이다!)로 꾸며지는 알찬 삶들을 소개한다. 이 기발한 아이디어란!!!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좋은 장점으로 꼽고 싶은 점은 바로 다양성이다. 열린 마음으로 주변의 모든 것들과 소통하는 가운데(물론 쇼핑도 빠지지 않는다, 아마 남자들이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이런저런 재밌는 에피소드들과 정말 화려하면서도 멋진 런던의 이모저모를 다룬 이미지들을 요소요소에 잘 배치해주고 있다. 특히 작가도 런던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꼽았던 픽토그램도 빠질 수가 없다.

런던에 거주를 하면서 주말마다 바지런히 다닌 주말여행을 통해 영국 교외에 멋진 관광지와 만나는 즐거움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휴일 마켓에 어워드 리본으로 무장하고 나가, 현지인들과 부대끼는 삶의 스케치 역시 높이 평가할만하다. 그러니까 순전한 관광객의 시선이 아닌 비록 임시적이긴 하지만 체류자로서의 여유라고나 할까? 아마 짧은 여행을 하는 이들은 절대 짚어낼 수 없는 런던의 숨은 볼거리들과 할거리들 그리고 먹거리들의 향연이 조근조근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그녀가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다양성은 마치 양날의 칼처럼 책으로의 몰입을 막는 훼방꾼 같기도 하다. 왜 15주나 되는 이야기들을 읽으면서도 패턴에 적응을 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아직 가보지 못하거나 경험부족으로 인한 관심도의 저하 탓일까? 작가의 마켓 입성기가 좀 더 궁금했었는데 살짝 맛보기만 보여 준 것 같아 많이 아쉬웠다.

<런던 프로젝트>를 읽으면서 영화 <노팅 힐>과 <러브 액츄얼리>이 이 책과 참 궁합이 맞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들을 보고 나면 아마 책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책에 나오는 것만으로 부족한 독자들이라면, 작가가 아주 친절하고 꼼꼼하게 적어 놓은 인터넷 사이트들을 직접 방문해 보는 것도 간접적으로나마 런던을 체험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세계화에는 반대하지만, 이렇게 지구촌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엮는 세계화라면 대찬성이다. 참 그거 아나? 영국에는 캔커피가 없다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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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날>을 리뷰해주세요.
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강경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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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년 11월 1일의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런 간단한 질문으로 <운명의 책>은 시작된다. 가톨릭 국가 포르투갈의 축일이었던 만성절 오전 9시 30분 경에 시작된 대지진의 여파로 인해, 해일과 화재가 덮친 세계제국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고 만다. 이 사건은 그냥 인류사에 흔히 등장하는 하나의 대재앙으로 기록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니콜라스 시라디는 중세에서 근대로, 신의 세계에서 합리적 사고가 지배하는 이성의 세계로의 극적 전환이 이루어진 사건으로 리스본 대지진을 바라보고 있다.

한 때 이웃 에스파냐와 더불어 전 세계를 주름잡던 해상왕국 포르투갈 왕국은 세계 각처의 식민지로부터 무한대로 유입되는 금과 다이아몬드 그리고 노예들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식민지로부터의 수탈경제에만 의존하느라 라이벌 국가들인 영국과 네덜란드처럼 안정적인 자국 산업 건설에는 미처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예수회와 보수적인 귀족들의 교권주의로 인해 계몽철학 사조가 전 유럽을 휩쓰는 동안에도 여전히 포르투갈은 중세적 시대정신을 고집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이교도들인 유대인들을 박해하고, 학살하면서 국가경제를 이끌어나갈 상인과 지식인 계층의 다수를 차지하는 유대인들이 경쟁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포르투갈은 개혁추진을 위한 인적 자원들을 내쫓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에 정착하게 된 유명한 포르투갈 출신 유대인 중의 한 명이 바로 스피노자라고 했던가.

이런 시대적 상황을 바탕으로 해서 18세기 중반 리스본을 강타한 대지진의 여파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물론 인적 물적 피해는 둘째 치고, 근대 유럽 역사에서 이런 자연재해는 전무후무했다. 정치적인 고려도 한몫을 했지만 인본주의적인 차원에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포르투갈의 재난 대책에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이런 국가적 위기를 새로운 시대로 도약을 위한 결정적 기회로 본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포르투갈의 총리로 위기극복에 앞장 선 카르발류였다.

리스본 대지진이 타락한 포르투갈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재앙이라는 예수회 출신 사제들의 공세에 분연히 맞서, 자연재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카르발류는 대대적인 리스본 재건공사에 나서게 된다. 물론 그 바탕에는 신권주의에 사로잡혀 종교재판소의 무소불위한 권력이 작동하고 있던 중세적 포르투갈을 근대국가로 탈바꿈시키겠다는 총리 카르발류의 의지와 국왕 주제 1세의 적극적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브라질로 대변되는 식민지들로부터의 유입되는 물적 토대가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고금을 망라하고, 돈 없이 되는 일이 있었던가.

물론 카르발류의 이런 개혁에 반동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회 소속의 사제들과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구귀족들의 반대는 리스본 재건과 국가개조에 걸림돌이었다. 그 결과, 카르발류는 국왕 주제 1세로부터 부여 받은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해서 반대파들을 제압해 나가면서, 식민지에서 산출된 부를 바탕으로 근대국가 포르투갈 건설에 나서게 된다.

작가 니콜라스 시라디는 참 다양한 각도에서 리스본 대지진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인간의 구원과 사랑을 강조하는 기존의 가톨릭 신학 시스템이 1만 명에서 6만 명에 달하는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된 대재앙에 이성적인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아울러 당시 많은 철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인간의 존재가치와 낙관주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이런 대재앙을 근대국가 건설의 호기로 삼아, 근대적인 상하수도 설비와 도로망을 갖춘 새로운 리스본을 만드는 과정을 작가는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근대로의 이행에 있어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교육 분야의 개혁과 인재양성도 빠뜨리지 않고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연초에 읽었던 주제 사라마구의 <수도원의 비망록>이 바로 떠올랐다. 포르투갈의 전제군주 주앙 5세가 야심차게 건립한 마프타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발타자르와 블리문다의 러브 스토리의 배경이 바로 예의 18세기 포르투갈이지 않았던가. 이 책은 <운명의 날>에서 언급이 되지 않는다. 대신 당시 프랑스 출신의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리스본 대지진의 모티브를 따서 자신의 소설 <캉디드>에 에피소드로 사용했다고 한다. 아마 이 두 책을 읽으면, <운명의 날>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기에 일어난 중대한 사건에 대한 작가의 뛰어난 혜안과 다양한 분야에서의 해석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는데, 아직도 쓰나미와 허리케인 카트리나 같은 자연재해들에 대한 미숙한 대처와 사후처리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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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에이지 3:공룡시대 - Ice Age 3: Dawn of the Dinosaur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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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개인적으로 3D 애니메이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 한 번 만들어 본 경험 탓일까? 물론 거의 습작이긴 했지만 모델링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델에 애니메이션을 주고 렌더링 그리고 포스트프로덕션 등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스토리도 만만치 않았지 아마?

20세기 폭스 사에서 꾸준하게 나오고 있는 <아이스 에이지>(빙하시대) 3편이 나왔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나오나 싶었는데, 부제에 달린 것처럼 공룡이 나온단다. 아이들에게 공룡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이 왜 그렇게 매력적인 걸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여튼 대단한 시리즈다. 




언제나 그렇듯이 다람쥐 스크랫의 에피소드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도토리를 찾아 나섰다가 우연하게 예쁜 날다람쥐 스크레티와 도토리를 두고 사투를 벌이게 된다. 이 귀여운 녀석들이 아웅다웅 다툼을 벌이는 모습이란 정말!

이번에도 역시 매니와 엘리 맘모스 부부와 우리의 말썽꾸러기이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수다꾼 나무늘보 시드, 사납지만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 호랑이 디에고, 조연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주머니쥐 크래쉬와 에디 그리고 송곳니가 아주 인상적인 다람쥐 스크랫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아이스 에이지>를 빛내 주었던 애니메이션 스타들이 총출동한다.

1편과 2편은 하도 오래 전에 봐서 기억이 잘 나는데, 3편에서의 키워드를 골라 보라고 한다면 아마 가족애와 역시나 진한 우정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출산을 앞둔 엘리와 매니 부부는 태어날 주니어를 위해 놀이동산도 준비하고 부모가 될 준비에 분주하다. 너무나 안락하고 평화롭지만 따분한 삶에 지친 디에고는 친구들을 뒤로 하고 떠난다는 선언을 한다. 한편 나무늘보 시드는 우연한 기회에 알 세 개를 구하게 되고 애지중지하며 친구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기도 부모가 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그런데 그 알의 주인이 누군지 아나? 바로 티라노사우르스(이하 티렉스로 호칭)다! 자기 자식들을(?) 잃은 엄마 티렉스는 분노에 차서 시드네 마을에 들어선다. 새끼 티렉스들을 보호하려고 하다가 결국 시드마저 엄마 티렉스에게 잡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자, 이제 시드의 친구들이 행동에 나설 타이밍이 아니던가. 위험천만한 정글을 지나, 죽음의 계곡과 용암폭포를 거쳐 말썽쟁이 시드를 찾아 나선다. 점점 더 진정한 우정이 휘발해 버리는 세상에 역시 관계와 우정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20세기 폭스 사는 친절하게도 알려 주고 있다. 그런 우정을 찾아볼 수가 없으니 영화로라도 대리만족하라는 계언일까? 





항상 시리즈마다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하는 <아이스 에이지> 시리즈에서 이번에도 역시 빠지지 않고 멋들어진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건 바로 캡틴 잭 스패로우를 연상시키는 이미지의 외눈박이 족제비 벅이다. 영국 출신 배우 사이먼 페그가 보이스를 맡아 영국식 악센트로 다른 녀석들에 비해 훨씬 더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하 공룡세계를 휘잡고 있는 알비노 수코미무스 “루디”에게 오른쪽 눈을 잃는 대신 녀석의 이빨을 하나 얻어 칼로 삼아 가지고 다니는 외로운 캐릭터다. 매니와 디에고 일행을 식충식물로부터 구해내고, 길라잡이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는 그야말로 감초 같은 녀석이다. 물론 말미에 시드 구출에 있어서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애니메이션 영화들은 하나 같이 교훈적인 내용들을 필히 담고 있다. 정상적인 가족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시드와 디에고 같은) 외톨이들도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선 두발 벗고 나서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3D 애니메이션 기법의 발전은 하루가 다르게 놀라워져서, 이젠 정말 실사 영화는 저리가라할 정도의 디테일까지도 가능하게 된 것 같다. 예전에는 보통 동물들의 털 묘사가 참 어려웠었는데,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는 것을 장면에서마다 느낄 수가 있다. 리플렉션과 그림자 같은건 두말할 것도 없다.

확실히 좋은 장편 애니메이션이 되기 위해서는 기승전결의 멋들어진 구조를 제대로 갖춘 스토리라인의 필요하다는 것을 이번 <아이스 에이지> 3탄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전후로 해서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이야기 구조가 절로 아하~하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기발한 아이디어들로 가득 차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재밌으면서도 멋진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첫 번째로 스크랫과 섹시 날다람쥐 스크레티가 도토리를 사이에 두고 격렬한 탱고를 추는 장면 하나, 두 번째로는 족제비 벅이 크래쉬와 에디를 데리고 익룡을 잡아채서 시드 구조에 나서는 공중전 장면이다. 지난 2탄에서 수중전의 묘미를 보여 주었다면 이번 3탄에서는 업그레이드된 공중전의 재미가 쏠쏠치 않다.

촌철살인의 유머로 가득 무장한 <아이스 에이지>의 빙하시대를 보면서 이 무더운 여름날을 보내는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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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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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이란 소설 있다는 것을 내가 처음 들었던 건 대학 교양국어시간이었다. 군사독재의 서슬 시퍼런 학창시절을 보냈던 국문과 교수님이, 당시 금서였던 <임꺽정> 일일이 손으로 필사해 가면서 읽으셨다던 그 전설 속의 소설 <임꺽정>! 정말 대단한 포스를 가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난 새로운 천년에 고전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고미숙 작가가 쓴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을 통해 비로소 소설 <임꺽정>과 만나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난 <임꺽정>이 미완의 대작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어 대수랴, 책의 어느 부분에선가 읽은 것처럼 때로는 조금은 무식하게 나의 존재와 세계의 간극을 좁혀 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나의 인물 임꺽정에 대한 정보는 조선 중기 무렵 황해도 출신의 의적으로(책을 읽으면서 임꺽정이 단 한 번도 의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조정에 반역한 숭악한 도당이라는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고미숙 작가는 아주 기발하면서도 맛깔나는 글맛으로 내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들을 여지없이 타파해 주었다.

우리의 고전 인물에 대한 무척이나 포스트모던스러운 접근법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난 여전히 소설 <임꺽정>을 읽어 보지 않은 터라 역시나 작가의 주해가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의 임꺽정론에 대해 많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한다. 사실은 사실일 테니까.

쇠백정 출신의 임꺽정이 어떻게 해서 화적패거리의 두목이 되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얼개를 비롯해서, 그 주변에 몰려드는 7두령들과 엄청난 수의 까메오들, 게다가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소설의 곳곳에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에 대한 암시와 복선을 묻어둔 벽초 선생의 작법에 대해 얼추나마 되짚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의 백미는 소설 <임꺽정>에 대한 작가의 유쾌한 해석이었다. 어떤 텍스트를 이렇게 재밌게 풀어낼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이 어느 순간 한 없이 부러워졌다. 게다가 타인의 텍스트 분석만으로도 밥벌이(책 쓰기?)를 할 수 있다니 놀랍다!

모두 7장으로 이루어진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에서 작가는 사실상 무위도식하고 노는 이들의 그것을 21세기 한국의 현실에 대입하고 있다. 넘쳐나는 백수일반, 비정규직으로 대변되는 마이너들의 애환에 대한 대안으로 아주 획기적이면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어 놓는다. <임꺽정>을 관통하고 있는 우정과 의리로 우리 백수친구들을 구제하잔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다, 우리가 가진 것을 서로 공유하고 나눔으로써 충분히 가능하다는 게 작가의 주장이다.

물론 전적으로 이해가 되는 주장은 아니었지만 상당 부분, 공명할 수가 있었다. 사실 산업과 근대화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핵가족 시스템은 더 이상 현대사회의 고독과 소외의 주범이 아닐까? 왜 우리는 우리가 진정 하고 싶은 말들을 우리 친구들에게 하지 못하고, 정신과 의사에게나 가서 하게 된 걸까?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개인화라는 미명 하에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는건 아닌지 하는 끊임없는 질문들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그렇게 진지하고 심각한 주제만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 책의 주요 키워드 중의 하나는 바로 “유쾌”가 아니었던가. 특히나 4장의 <사랑과 성>, 5장의 <여성>의 서사는 압권이었다. 꺽정이네들의 우악스러워 보이는 애정행각을 읽으면서 킬킬거리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는 정말 유머의 유자로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영화제목이 바로 떠오르는 임꺽정 속의 인물들의 복수론 역시 주목할 만하다. 아울러 꺽정이 패거리들의 행동의 원천으로 꼽히는 자존심/자부심에 대해 해부 역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큰 보람 중의 하나는 내 삶의 지평의 확장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고미숙 작가의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은 그런 면에 있어서 참 많은 도움이 된 책이다. 그나저나 말이 필요 없다, 벽초 선생의 <임꺽정>을 당장에라도 읽어야겠다. 아직도 안 읽고 뭘 했는지,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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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프리카에 펭귄이 찾아왔습니다
테오 글.사진 / 삼성출판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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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테오란 작가의 이름은 처음으로 들어본 게 어언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어느 볼리비아 여행기에서였다. 물론 아직도 읽지 않았고, 다만 서점에서 본 그 책의 제본을 아주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아주 인상적인 제목의 책이 나와서 살펴보니 작가의 이름이 테오란다. 바로 그 작가다!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독자들의 시선을 끌만한 <당신의 아프리카에 펭귄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난 아쉽게도 이미 김영희 PD의 책을 통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근처의 볼더스 비치에 펭귄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새로울 게 없었지만 그 제목은 참 인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책은 지난 2006년 나온 테오의 첫 에세이집을 재출간한 것이다. 아마 싸이월드를 통해서 포스팅을 했는지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사실 비주얼 자료들은 책보다도 온라인 포스팅이 훨씬 더 넉넉해 보였다.

문득 궁금한 게 그는 왜 다른 나라도 아니고 아프리카로 갔을까? 그것도 아프리카에서 가장 아프리카적이지 않을 것 같은 도시 케이프타운에 잠시 동안 둥지를 틀었을까. 하지만 에세이 내내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아서 그 배경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냥 한국에서 삶이 지루하고 따분해서 정말 낯선 곳에 가서 새로운 출발을 꿈꾸었을까? 아니면 지독한 실연을 당해서 아프리카로? 별별 상상을 다해본다.

우선 펭귄 한 마리 그리고 제목 외에는 모두 하얀 책으로 처리한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어디서고 쉽게 펴볼 수 있는 스타일의 아담 사이즈도. 이거 너무 좋은 점만 들이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역시 펭귄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을 하는군. 무엇보다 초반에 등장하는 랑가방 비치 레스토랑 이야기가 나의 미각과 미뢰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하늘을 나는 갈매기들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무언가가 들어간 홍합 냄비를 마구 휘젓는 장면이, 스튜를 맛보는 그들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허브를 발라 노릇하게 구워진 랍스터 브라이를 보자니 절로 입에 군침이 돌았다. 이거 여행에세이야 아니면, 쿠킹북이야!

케이프타운 근처에 있는 일종의 모래사막 아틀란티스 샌듄에서 사막 보딩을 즐기고, 호주의 에어즈락을 떠올리게 하는 팔락 마운틴을 오르는 테오의 모습이 마냥 부러워지는 순간들이었다. 여행이 내게로 오면 난 그냥 내게 매어 있는 것들을 단칼에 잘라 버리고 언제라도 떠날 수가 있을까? 아마 그러지 못하겠지. 그래서 이렇게 타인의 여행 에세이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거겠지. 안타깝다 안타까워.

핫베이에서 바로 잡은 참치 맛은 과연 어떨까? 정말 먹어 보지 않았으면 말을 할 수가 없겠지. 사자왕 쟈카의 나라 크루거를 찾아 빅 파이브를 찾는 사파리에 나서기도 했다고. 높이 450m나 되는 블루크랑스에서의 번지 점프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테오의 말대로 내 돈까지 내가면서? 절로 사양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 책을 보면서 느낀 점은 정말 사람 사는 맛이 푹푹 배어난다는 점이다. 테오는 케이프타운 변두리의 그 위험하다는 빈민가 하라레에서 700원 짜리 귤사기사건을 경험하기도 하고, 또 다시 그 동네를 찾아 아이들과 어울려 축구공을 차고, 오렌지를 까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고서는 힘든 일이겠지. 대서양과 인도양을 가르는 희망봉처럼 그렇게 사람에 대한 희망이야말로 그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테오의 책에는 참 푸른 하늘이 많이 나온다. 그 푸른 하늘을 보고만 있어도 케이프타운에 절반 정도 다가선 기분이 든다. 참 그나저나 <소금사막>은 언제 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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