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과 부동명왕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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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미미 여사의 책을 읽었다. 한 때 미미 여사가 구사하는 에도 시대물에 빠져서, 사방팔방으로 뛰어 다니면서 일단 중고책방에서 작가의 책을 구하던 시절 생각이 났다. 그리고 잠시 멀리했었다. 우리 책쟁이들의 세계가 그러하지 아니한가. 모든 관심이 쏠려 있다가 또 잠시 시들했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는. 내게는 미미 여사의 시대물이 그러하다.

 

일본 시대물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19세기 에도를 중심으로 해서 펼쳐지는 진기한 괴담 이야기가 매혹적이다 못해 유혹적이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에도 미시마야라는 주머니 가게에는 흑백의 방이라는 곳이 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기이한 이야기를 들려 주고자 하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전에는 오치카라는 여성이 청자였는데, 시집가서 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녀를 대신한 사람이 바로 미시마야의 작은 도련님인 도미지로다. 24살 정도의 청년으로 생과자를 좋아하는 먹보 미식가로 보인다.

 

정갈하게 차려진 도코모나 앞에서 조금 세상 경험이 없어 보이는 도미지로가 이야기꾼들이 펼쳐 보이는 세상의 기담에 귀를 기울인다. 이야기의 힘이란 그런 것인가? 재미나고 신기한 이야기가 있다면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그렇다면 그들은 현대 소설가들의 전신이 아니었을까. 문득 서사의 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야기를 써서 돈까지 번다면 더욱 좋겠지.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을까? 소설에서는 우리의 도미지로가 그런 역할을 기꺼이 맡는다. 물론, 집안이 유복하여 힘들게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부르주아지 상인 집안의 청년이라는 점도 유념해 두어야 할 것이다.

 

미미 여사의 <청과 부동명왕>에는 모두 네 개의 인스톨이 실려 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멧돼지를 닮은 우린보 님을 메고 와서 출산이 임박한 오치카의 순산을 기원하는 기담으로 출발한다. 동천암이라는 곳에 소외받은 여성들을 위해 일종의 구호소를 차린 오나쓰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오나쓰 역시 어머니와 자기 형제들을 돌봐주던 이모를 잃고 불화를 빚던 아버지 곁을 떠나 독립한 에도 시대에서 볼 수 없는 그런 의지결연한 여성의 전형이다.

 

마을에서 품삯을 받고 허드렛일로 돈을 벌고, 쇠락해 가는 암자 부근의 땅에 콩을 심어 보지만 쇠 기운 때문에 작물이 자라지 못한다. 진부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행상 로쿠스케가 밭에 청과를 심어, 쇠 기운을 빼내라는 조언을 해준다. 그리고 부유한 집안에서 내쳐진 오사요가 동천암에 합류하고, 미미 여사는 그야말로 19세기 판 여성 연대의 저력을 보여준다.

 

오치카가 산기를 느끼면서, 미시마야는 바빠지기 시작한다. 출산은 여성들의 전투라는 말과 함께, 도미지로도 비록 꿈에서나마 우린보님을 닮은 청과들을 수확하면서 전설에 나오는 악당 지네와 한 판 대결을 벌인다. 그리고 나중에 오치카가 매화꽃을 닮은 어여쁜 고우메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두 번째 인스톨인 <단단 인형>에서는 번주를 섬기는 다이칸이 번주 휘하의 백성들을 위하지 않고 사리사욕을 추구하면 어떤 비극이 벌어지게 되는지에 대한 하나의 고찰로 다가온다. 아무리 에도 시대가 태평성대라고 하지만, 무사 계급을 필두로 한 고착화된 계급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에 대한 미미 여사식 비판이라고나 할까.

 

참 흑백의 방의 규칙 중의 하나는 화자가 굳이 실제 지명이나 인명을 말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에 대한 익명성에 대한 보장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이야기를 한 사람도, 이야기를 들은 청자도 모두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는 잊는 것이 대원칙이다. 물론 이 모든 걸 바로 옆에서 그야말로 녹취하듯이 기록한 미미 여사에게는 예외이긴 하지만 말이다. 구전 설화의 경우에서처럼, 터무니없어 보이는 전승도 하나의 이야기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기록에 남길 이유가 있지 않나 싶다.

 

상인이었던 자신의 현조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도미지로와 비슷한 또래의 몬자에몬은 가감 없이 들려준다. 선량한 다이칸이 영지를 다스릴 적에는 문제가 없지만, 악당 같은 다이칸이 백성들을 수탈하기 시작한다면 힘없는 백성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장류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이사와야에서 일하던 몬이치/이치몬은 사부 격에 해당하는 유지(유 씨)를 따라 미쿠라무라 마을로 향한다. 기존의 사람 좋은 다이칸 대신 도아쿠 단조라는 악인이 다이칸의 자리에 오르면서 전국에서 유명한 된장을 만들고, 인형 두레를 하던 미쿠라무라 마을에 비극이 시작되었다. 압정과 수탈을 위해, 기존 거래처인 이사와야와의 거래를 끊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마을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기 시작했다.

 

동행했던 유지마저, 무사들의 창에 살해당하고 몬이치는 길잡이 도비자루와 목숨을 건 탈출을 시작한다. 결국 도아쿠 단조의 악행에 세상에 알려져 그는 다이칸의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미쿠라무라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리고 죽은 유지를 사모하던 절세미인 오빈은 몬이치에게 답례로 흙 인형, 단단 인형을 하나 만들어서 선물해 준다.

 

3촌 정도 되는 크기의 자그마한 단단 인형은 일찍이 몬이치가 삼엄하게 포위된 미쿠라무라 마을을 탈출하면서 네 번이나 간이 녹아 내릴 뻔한 위기를 감안해서, 몬이치 가문을 네 번의 위기에서 구해줄 거라는 예언이 전해졌다. 그 예언을 이루고 단단 인형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게 큰 줄거리다. 마지막으로 단단 인형의 활약으로 몬이치 가문을 구할 적에는 마치 한 편의 닌자 드라마를 보는 듯한 쾌감이 들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짧지만 강렬했던 세 번째 인스톨인 <자재의 붓>이 가장 인상 깊었다. 화공 에이쇼가 소유하게 된 자재의 붓이 모든 화의 근원이었다. 이 붓을 들게 된 화공들은 그야말로 영감에 넘쳐 걸작들을 잇달아 생산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창작이라는 짐을 평생 지고 가야 하는 아티스트들의 한계를 뛰어 넘게 만들어주는 마리화나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다만, 자재의 붓은 소유자에게 자신의 재능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를 제공하는 대신 반대급부로 상상 이상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게 문제였다.

 

에이쇼의 부인을 필두로 해서, 딸과 아들 며느리 그리고 자기 집안에서 일하는 이들이 변사하기 시작했다. 결국 친구의 도움으로 저주 받은 붓을 봉인하는데 성공하지만, 에이쇼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붓을 봉인해서 맡긴 가게를 드나들기 시작한다. 결국 비극으로 끝나 버리는 이야기다. 전에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반 장 정도의 종이에 그림으로 그리던 도미지로는 충격을 먹게 된다. 한 때 자신 역시 화공을 꾸지 않았던가. 도락으로 취미면 되지, 화공을 직업으로 삼을 정도는 아니라는 자각을 하게 된 걸까. 뭐랄까 미미 여사는 안분자족하는 일상의 삶에 대해 만족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청과 부동명왕>의 대미는 <바늘비 내리는 마을>에 대한 이야기다. 직원들을 데리고 출타한 마시마야의 이헤에와 오타미를 대신해서 도미지로가 형님이자 마시마야의 후계자 이이치로가 가게 업무를 맡고, 도미지로는 지원에 나섰다가 정강이 부상을 입고 만다. 아직은 덤벙대는 도련님이라는 신호일까. 흑백의 방 수호격인 오카쓰는 2대 청자가 된 도미지모를 격려하고 응원한다.

 

부상당해 심심하기도 하던 차에, 유카타노구니 출신으로 심한 사투리를 쓰며 오른팔이 없는 사나이 몬지로가 등장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스스로를 이것이라 칭하는 몬지로는 버려진 아이였다. 그리고 종이가게 사환으로 일하다가 수양 소개상을 하는 센조에게 픽업되어 어린 나이에 하자마무라 마을로 떠나게 된다.

 

미쓰루기야마 산을 중심으로 한 첩첩산중에 자리잡은 하자마무라 마을은 야마와타리라는 산새 새끼의 알껍질과 깃털 생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알껍질은 폐병에 특효인 치료제로 그리고 깃털은 훌륭한 방화복을 만드는 재료로 외진 하자마무라 마을의 보물 같은 존재다. 이 마을에 투입된 몬지로는 2살 어린 나나시와 도다이소라파트너가 되어 야마와타리 둥지에서 알껍질과 깃털을 채취하는 일을 시작한다.

 

<바늘비 내리는 마을> 역시 첫 번째 인스톨인 <청과 부동명왕>과 마찬가지로 에도 사회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소외된 아이들에 위한 구호소적인 성격인 지니고 있는 하자마무라 마을의 비밀을 풀어내준다. 다만 그 주체가 누군가라는 미스터리는 최후에 배치해 둔 채로 말이다.

 

근래 최악의 불경기로 예년 같은 추석 분위기가 나지 않지만, 간만에 다시 만난 미미 여사의 기담 시리즈는 여전히 흥미롭고 재밌었다. 태평성대로 알려진 에도 시대에도 보통 사람들을 옥죄는 사회 시스템과 계급제도의 부조리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래도 없는 사람들끼리의 연대와 상부상조로 그럭저럭 사람 살만한 그런 세상이었다고 미미 여사는 <청과 부동명왕>을 통해 이야기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런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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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09-09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쁜 돌(?)을 읽으셨네요!

레삭매냐 2024-09-09 10:25   좋아요 0 | URL
언제 마지막으로 미미 여사의 책
을 읽었나 기록을 찾아 보니...
세상에나 9년 전이었네요.

9년 만에 다시 만나는 미미 여사!
말씀해 주신 대로 예쁜 돌이었습니다.
 
베네치아의 종소리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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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에스테의 언덕길>을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시작한 <베네치아의 종소리>가 추월해 버렸다. 비슷한 이야기의 반복인가 싶었었는데, 스가 아쓰코 여사의 이탈리아-유럽 시절보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성장기의 이야기들로 반전을 이루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볼 적에 아쓰코 여사는 일본의 전형적인 부르주아지 가정의 수혜자가 아닌가 싶다. 책의 곳곳에서 자신은 전후 가난한 유학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전후에 그렇게 유럽 특히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곳에 갈 수 있다는 자체가 아무에게나 허용된 일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로마 시절, 한국에서 온 김 씨는 결국 현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가 아쓰코 여사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갔다고 하지 않던가.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만난 카티아라는 독일 친구는 어쩌면 아쓰코 여사의 인생행로를 이탈리아로 인도한 그런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보니 그녀가 프랑스 시절 소르본에서 공부를 했다고 하지 않았다. 파리에서 노동사제가 주관하는 미사에도 참가하고 또 당시 프랑스를 휩쓸던 분위기에 편승해서 샤르트르 순례도 나섰다는 체험담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아무래도 그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아카데믹한 언어 말고, 실제 생활에서 원어민을 따라 가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아쓰코 여사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정말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와 있던 아쓰코 여사가 이탈리아에서 장학금을 준다는 유혹에 넘어가 관심도 없는 사회학 전공을 조건으로 이탈리아로 갔다고 했던다. 멀쩡한 방송국 일 대신, 다시 가난한 유학생 신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 아니었을텐데 말이지. 아무리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29세의 적지 않은 또 새로운 환경과 나라 그리고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게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인생은 결국 자신이 책임지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리 바람난 꼰대 아버지가 뭐라고 하더라도, 아쓰코 여사는 자신만의 삶을 꿋꿋하게 살지 않았던가. 미션스쿨에서 엄격한 수녀님들과 함께 야구를 즐기기도 하고, 무언가 새로운 것에 계속해서 도전하는 모습은 결국 그녀를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하고 또 그 다음에는 유럽으로 건너가 밀라노에서 페피노를 만나 결혼도 하지 않았던가.

 

사실 전작들인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등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든 생각이 과연 페피노는 어떻게 죽었는가 그리고 그의 병명은 무엇인가 등등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슬픈 과거를 꽁꽁 사매고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에 대해 아주 약간의 단서만 남길 뿐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은 하지 않는다. <베네치아의 종소리>에서 늑막염으로 고생하던 남편이 석달 뒤에 죽었다라는 실마리로 그녀의 고통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추론해 볼 뿐이다.

 

전쟁 중에 큰이모집에 피난 가 있던 시절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사람 좋은 그 집의 장남 긴이치 사촌오빠는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필리핀 전선에 파견되었다가 병사했다고 했던가. 시집간 나오 언니와 같이 친정에 와 있던 어린 카즈가 병으로 죽는 과정도 슬펐다. 전시에 근로봉사대로 동원되어 공장에 가서 강제 노동을 했다는 체험도 아쓰코 여사는 들려준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보다 더 한 일도 겪지 않았던가.

 

작가가 구사하는 어떤 죽음의 이미지(남편 페피노의 사망으로 귀결되는)<아스포델 들판을 지나>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페피노의 큰형과 누이가 결핵으로 돌아 가셨고, 철도원이었던 시아버지마저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어린 나이에 가족들의 이런 변고를 목격한 페피노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래도 이방인 아쓰코 여사와 결혼해서 건강을 되찾아 가나 싶었지만, 그 역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타향에서 남편을 잃은 그녀에게 인연들은 기꺼이 손을 내주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 그런 인연들은 삶 속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우리네 삶은 그런 것이다.

 

코르시아 서점이 1960년 말, 서점의 정체성을 두고 격렬한 논쟁에 휘말렸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그리고 이방인인 자신은 중립을 지키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노라고. 그 이면에는 이방인이라는 방패 뒤에 숨고 싶은 그런 마음이 엿보였다. 그전에는 나치 독일이 지배했던 나라의 언어인 독일어를 배우는 게 좀 꺼려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니 그렇다면 당시 일본은 군국주의 침략 전쟁에 대해 독일처럼 처절한 반성을 했었나?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왜 이렇게 일본 지식인들은 과거사에 대해 인색한지 모르겠다.

 

비슷한 경험으로는 2007년 봄, 잘츠부르크의 어느 게스트하우스에서 있었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게스트하우스 식당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다 만난 일본 친구에게 여행에 목적에 대해 물으니 자기가 정한 '평화 순례'라고 하면서 아우슈비츠 등지를 여행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유럽도 좋지만, 자국이 직접 연관된 필리핀의 마닐라나 731부대가 주둔했던 하얼빈 혹은 바탄 반도를 가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언어 구사의 부족과 첨예한 이야기로 저녁 식사 자리를 망치고 싶지 않아 패스했던 기억이 난다.

 

19366개월 여정으로 유럽 대륙을 누빈 저자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베네치아의 종소리>는 마무리된다. 가장 가까운 혈육에 대한 애증의 관계라고나 할까. 바람난 아버지는 가족들을 저버리고, 바깥으로만 돌았다. 그런 가운데 자신과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을 홀로 키우는 작고하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심정과 아버지가 재력으로 베푼 일그러진 사랑이 빚어내는 양가적 감정이 기묘하게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9월 들어 매일 같이 한 권씩 책을 읽고 있다. 이제 한계에 도달했나.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마구 책을 씹어 먹듯이 읽고 있는 건가. <트리에스테의 언덕길>은 쉬엄쉬엄 읽어야지 싶다. 뭐 또 읽다 보면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오늘 나 스스로에게 추석을 맞아 선물한 미미 여사의 신간 <청과 부동명왕>이 도착했다고 한다. 주말에는 미미 여사를 영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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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성의 사내 필립 K. 딕 걸작선 4
필립 K. 딕 지음, 남명성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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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여름이 물러서지 않은 가을이지만, 어쨌든 나의 독서열을 마구 타오른다. 어제 도서관에 상호대차로 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내>를 신청했는데 거의 바로 도착했고 빌려서 이틀 만에 완주했다. 그만큼 재밌다는 말이겠지.

 

오래 전 대체역사를 다룬 로버트 해리스의 <당신들의 조국> 영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책을 구했는데, 그 책은 미처 읽지 못했다. 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내>는 우연한 기회에 너튜브로 드라마 시리즈 요약본을 보고서 책이 너무 궁금해졌다. 결국 어제 빌려서 보기 시작했는데, 드라마와 원작 소설은 큰 틀만 유사하고, 큰 간격이 존재했다. 드라마 버전이 좀 더 큰 스케일로 진행되고, 소설은 뭐랄까 좀 더 등장인물들의 심리에 집중했다고 할까.

 

<높은 성의 사내>1962년 미국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1945430일 베를린의 지하벙커에서 죽지 않았다. 죽기는커녕 연합군을 쓸어버리고 미국의 동부까지 점령해 버렸다. 러시아에서는 슬라브족을 우랄산맥 저편으로 쫓아냈다. 나치 독일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독일의 파트너였던 일본은 미국의 서부 해안지역을 점령해해서 태평양연안공영권을 지난 15년 동안 운영해왔다.

 

그렇다면 미국에 살던 백인 원주민들은? 1947년 치욕스러운 조건부 항복을 받아들이고 철저하게 일본 지배계급에 복종하는 2등 신민의 지위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고 서부와 동부 중앙에는 로키산맥연방이라는 완충지대가 존재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현재 사는 상황과 너무 다른 그런 이질적 세계에 대한 스케치가 이어진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아마존 프라임 드라마와 같은 점이나 다른 점을 찾게 되는 부작용을 경험했다. 드라마가 독일과 일본이 패망하고 미국-영국-러시아 연합군이 승리한다는 2차 세계대전의 진실을 밝힌 필름을 추적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소설은 미국 내의 레지스탕스 운동보다 1947년 종전 이래, 타국의 지배를 받고 순응하면서 사는 미국인들의 삶에 방점을 찍은 느낌이다.

 

일본이 지배하는 서부연방의 수도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골동품점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골동품상 로버트 칠던, 일본 무역대표부의 다고미 노부스케, 전쟁에 참전한 퇴역 군인 프랭크 프링크 그리고 그의 아내 줄리아나 등이 엮어 나간다.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의 주인공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FDR(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암살당해 죽고, 아프리카의 롬멜이 영국군을 카이로 전투에서 패퇴시키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가 스탈린그라드에서 주코포의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결국 미국과 영국을 항복시킨다는 그런 가상의 설정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1962년 기술의 독일 제3제국은 달은 물론이고 화성과 금성까지 식민지로 만들 정도의 우주 공학이 발전되어 있지만 텔레비전 기술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군정장관으로 미국에 부임한 롬멜은 1949년에 대사면령을 내려 유대인들까지 동원해서 재건 사업에 몰두한다. 서부연방을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일본 제국은 독일 나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정한 방식으로 미국인들을 대했다고, 로버트 칠던은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민족적 자존심까지 내려 놓은 건 아니었다. 지배계급의 젊은 인텔리인 폴과 베티 가소우라 부부에게 묘한 질시의 감정과 동시에, 매력적인 폴의 아내 베티를 유혹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들... 그리고 진품이 아닌 가품으로 드러난 자신의 판매 물품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리뷰를 쓰다 보니, 소설의 전체적인 느낌보다 이렇게 단선적인 생각들만 쓰게 되는 기분이다. 게다가 2대 총통 마르틴 보르만이 죽으면서, 독일에서는 총통 후계 자리를 두고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요세프 괴벨스, 헤르만 괴링 그리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같이 한 시대를 풍미한 나치 악당들의 이름이 열거된다. 베를린의 템펠호프 공항에서 도미한 스웨덴 기업가 행세를 하는 바이네스(루돌프 베게너 대위)가 추진하는 이른바 <민들레 작전>도 엉성한 느낌이다. 결국 세계 정복을 위해 독일과 일본이 한 판 붙는다는 거지.

 

무엇보다 일본인 다고미야 그렇다 치더라도, 미국인 프랭크가 주역에 심취해서 허구헌날 산가지로 일상의 점괘를 치는 설정은 웃겼다. 과연 서양 사람들이 도()와 오(:깨달음)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프랭크와 에드가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해 만든 은세공품에 그렇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폴 가소우라의 모습에 어쩌면 그런 역설적인 의미로 풍자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

 

드라마에서 필름을 찾는 데 비중을 두었다면, 소설에서는 독일이 지배하는 영내에서는 금지된 호손 아벤젠의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라는 소설 속의 소설이 키워드가 아닌가 싶다. 이 또한 흥미로운 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조 치나델라와 함께 호손 아벤젠 수배에 나선 프랭크의 전처 줄리아나가 전화번호부에서 쉽게 찾아낼 정도가 아닌가. 그렇다면 오토 스코르체니가 이끄는 독일 특수부대들이 습격해서 눈엣가시 같은 아벤젠을 없애 버리는 건 시간문제가 아니었을까.

 

<높은 성의 사내>를 읽고 나서 되는 대로 적다 보니, 감상이 파편화되고 그만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아무래도 무려 62년 전, 작품이다 보니 소설의 구조나 전개 면에서 치밀하지 못하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동시에 나치 독일과 일본의 전쟁 승리라는 강렬한 이미지 덕분에 오롯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캐릭터들에 집중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좀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뱀다리] 그래도 책의 어디에선가 만난 너새네이럴 웨스트의 <미스 론리하트>는 한 번 찾아서 읽어봐야지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못 말리는구나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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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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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중독성 독서의 대상은 이번 가을 일본 출신 스가 아쓰코 작가에 가서 꽂힌 모양이다. <밀라노, 안개의 풍경>을 필두로 해서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그리고 <트리에스테의 언덕길>에 불이 붙었다. <코르시아>를 읽다 말고, 도중에 도착한 <트리에스테>도 만나고 뒤죽박죽이다. 결국 <베네치아의 종소리>까지 읽어야 그나마 속이 시원하게 되겠지.

 

저자에 따르면 밀라노 <코르시아 데이 세르비> 서점의 출발은 반파시스트 이탈리아 저항운동에서 비롯되었다. 등단 시인이자 선동가 그리고 가톨릭 좌익 사제로 알려진 다비드 마리아 투롤도와 카밀로가 의기투합해서 만들어진 서점이 바로 코르시아 서점이었다. 책을 파는 공간인 코르시아는 밀라노에 내노라하는 지식인들을 비롯해서, 문학 문화 정치 등에 관심이 이들이 모이는, 일찍이 안토니오 그람시가 역설한 문화진지의 거점이 아니었을까.

 

영화가 극장 상영이라는 유통 과정을 필요로 하듯이, 온라인 서점이 없던 전후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책들은 책방/서점을 통해 유통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 세상만사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또 토론하던 곳이 바로 코르시아였다는 말이다. 아무리 열심히 작가와 출판사가 책을 만들어도, 세상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렇게 책을 읽은 이들이 모여 책에 대해, 작가에 대해 그리고 연관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야말로 우리 책쟁이들이 꿈꾸는 대동세상의 이상적 모델이 아니겠는가.

 

그 시절의 코르시아 서점에 모이는 인간군상들의 묘사가 부러워서 그만 멀리 나간 것 같은 느낌이 퍼뜩 들었다. 그래도 어쩌랴, 부러운 건 부러운 것을.

 

자신과 정치성향이 다르더라도, 밀라노 부르주아지들과 귀족들은 견해가 다르더라도, 일종의 살롱 문화를 통해 그들을 포용하는 관용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방인의 눈으로 볼 때, 그들 내면세계의 꺼풀들이 의외로 많았던 모양이다. 19세기 산업화의 수혜를 받은 자본가 계급의 부르주아지 그리고 그 너머에서 황금접시와 빛나는 크리스털 식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주눅 든 가난한 유학생의 모습이 남다르게 보이지가 않았다.

 

교회에서는 눈엣가시 같았던 다비드 마리아 투롤도 신부를 영국 런던으로 유배시켜 버렸다. 매사에 자신넘치고 성당에서 <인터내셔널가>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투롤도 신부가 스가 아스코 일행을 이끌고 런던의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하자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핍박받은 사제이자 레지스탕스 영웅으로 그의 위상은 더 올라가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코르시아 서점에서 멀어지고, 신앙 공동체를 세우며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좀 씁쓸했다.

 

스가 아쓰코가 하도 알레산드로 만초니 타령을 해대서 결국 그의 책 <약혼자들>을 구해서 읽어야 하나 싶을 정도다. 우리나라에 이 책이 소개됐었다는 것도 놀랍고, 절판되어 이제 구할 수 없다는 것도 놀랍다. 전자책으로는 구할 수 있긴 한데, 개인적으로 전자책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

 

스가 아쓰코 여사의 전작도 그랬지만, 한 때 열심히 읽었던 다카노 히데유키의 <별난 친구들의 도쿄 표류기>가 떠올랐다. 그 책에서도 일본에 표류 중인 다양한 군상의 친구들이 등장하지 않았던가. 물론 아쓰코 여사의 책에 실릴 정도라면 최소한 에리트레아 출신의 양탄자 행상 미켈레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에리트레아에서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끌려 와서 사육제에 참가하게 되고, 이름도 잊은 미켈레가 어느 추운 날 석탄이 떨어졌다고 저자를 찾아온다. 그리고 양탄자 행상으로 변신해서 코르시아 서점을 찾아왔다고 했던가. 이 정도 수완과 뻔뻔함 정도는 기본으로 장착해야 험난한 타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이었을까. 여기 나오는 미켈레의 이미지는 왠지 오래 전 영화 <파니 핑크>에 등장하는 선무당 오르페우스의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 미켈레가 아쓰코 여사에게 커피를 사겠다는 제안으로 더 오래 기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은 그런 일화로 누군가의 추억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독일인 청년과 사랑에 빠진 딸 덕분에 졸지에 부모의 원수 국가의 사위를 맞게 된 헝가리계 유대인 가브리엘레(피슈타) 시포슈 씨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가 보다. 피슈타의 딸 니콜레타는 자신의 유대인 가계를 몰랐다. 고지식한 독일 청년 베르트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의 삶에서 결혼은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되어 버렸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니콜레타는 결혼을 강행했다. 서로 다름에도 그 둘은 어찌어찌해서 삶을 영위해 나갔다. 전후 세대인 니콜레타와 달리, 히틀러가 통치하던 시절에 태어난 베르트는 어쩌면 히틀러 유겐트 대원이었지도 모르겠다. 더 심각한 문제(?)는 베르트의 외모가 총통과 닮았다는 점이다.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미국을 오가며 복잡한 생활을 이어가던 니콜레타와 베르트의 이야기. 그리고 목숨을 걸고 조국이었던 사회주의 국가 헝가리를 탈출한 뒤, 이탈리아에서 치과의사로 변신해서 10년 만에 다시 일어서는 괴력을 보여 주기도 했다. 피슈타 아저씨는 자기 집에서 좌파 이야기가 나오면 공산주의 치하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그런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던가. 이렇게 인간사 속에 녹아든 과거 그리고 정치적 이야기들이 끝없이 명멸한다.

 

코르시아 서점의 또다른 주요 인물 중의 하나인 출판쟁이 가티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코르시아 서점은 책 판매와 문화진지 역할 말고도, 좋은 원고들을 찾아 책으로 만들기도 한 모양이다. 바로 그런 책의 편집을 맡은 이가 바로 가티였다. 하지만 이 인간, 언제부터인가 넋을 놓고 산다. 그리고 이런 가티를 걱정한 서점 동지들이 저자를 지목해서 말해 보라고 한다.

 

맛 좋은 아이스크림을 파는 포르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대화해 본 결과, 가티 인생 일대의 문제로 고민이 많아서란다. 그건 바로 아버지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겼고 또 동생까지 생길 판이라고 한다. 아니 이럴 수가!!! 노총각 가티가 아이를 가져도 믿을까 말까인데 일흔도 넘은 노인네가 자식을 보게 생겼다니. 아니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책으로 옮기지 않고 배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여동생' 그라치아가 태어나고, 새엄마(?) 리나는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돈벌이하러 나섰다. 그런데 계속해서 애인을 갈아 치우던 바람둥이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가브리엘레 카레티의 이야기도 왠지 가티의 아버지의 이야기와 결을 같이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아쓰코 여사의 후배에 해당하는 싼마오 생각도 났다. 이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다양한 체험을 하고 그걸 바탕으로 책을 발표한 작가 말이다. 외국에 나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 이방인 문필가들의 비슷한 어떤 하나의 패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소멸하듯이, <코르시아 데이 세르비> 서점 역시 문을 닫게 됐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1960년대 말, 문화혁명의 여파로 부르주아지 계급과 좌파 세력 간의 갈등이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책의 말미에 아쓰코 여사의 친구 루치아 피니의 편지로 저간의 사정들이 밝혀진다. 코르시아 서점은 한 때, 젊은 레지스탕스 영웅들의 이상향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그들에게 짐으로 작동하게 된 점을 지적했을 때는 참 아쉬웠다.

 

그리고 뒤늦게 일본에 도착한 다비드 마리아 투롤도의 부고 소식으로 모든 것이 시작된 코르시아 서점의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진짜 이런 이상적인 서점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인간관계가 점점 파편화되어가는 새로운 밀레니엄에는 불가능한 미션이라는 느낌이다. 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이기에 더 부러웠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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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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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서는 대개 우연으로 이루어진다. 지난주엔가 일본 출신 번역가이자 작가인 스가 아쓰코를 알게 됐다. 아마 이번에 새로 나온 <트리에스테의 언덕길> 덕분이지 않았을까 싶다. 궁금하다면, 작가의 전작들을 읽으면 된다. 우선 가장 가까운 중고서점에 품절된 <밀라노, 안개의 풍경> 재고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람처럼 날아가서 샀다. 그리고 <러시아의 전쟁>을 다 읽고 나서 바로 읽기에 돌입했다.

 

파리와 로마 유학을 했다는 자칭 롬바르디아 사람 스가 아쓰코에게서 왠지 모를 시오노 나나미의 향기가 났다. 나나미 씨가 극우 인사였다는 걸 알았다면 내가 그렇게 열심히 <로마인 이야기> 완독을 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서사하라에서 호세와 로맨스를 나누었던 대만 출신 작가 싼마오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니 연배로 보면 어쩌면 스가 아쓰코는 그들에 앞선 코스모폴리탄 선배일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구사하는 이야기는 마치 밀라노의 안개처럼, 베네치아의 물결처럼 그렇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다. 밀라노 코르시카 서점에서 일하던 페피노와 만나 결혼하고, 롬바르디아인으로 살다가 남편이 죽은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는 문장을 읽고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에서 단서를 찾기 시작한다. 어쩌면 스가 아쓰코의 이야기들은 미스터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스가 아쓰코의 이야기에는 사람들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 거구의 순박한 노총각 안토니오가 죽은 남편의 장례식에 등장해서, 운구 중인 관에 반쯤 시든 금작화를 내려놓는 장면에서는 정말 눈물이 날 정도였다. 소소해 보이는 무심한 이야기들로 독자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킨 다음, 이렇게 한단 말이지.

 

작가의 아버지에게 들은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 에피소드에서는 나도 가봤던 나폴리 생각이 절로 났다. 그 시절 나의 여행은 항상 무계획이었다. 그래서 로마 민박집에 여권을 두고 아무 생각이 나폴리 그리고 내친 김에 카프리섬까지 갔다가 소렌토를 돌아 나폴리 중앙역에 도착했다. 아뿔싸, 로마행 마지막 기차가 출발했다고 한다. 미치겠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폴리의 싸구려 호텔에라도 가서 자자 싶었지만 여권이 없다고 해서 모든 호텔에서 거절당했다. 그래서 결국 나폴리 중앙역 부근의 경찰서에 들어가 쪽잠이라도 자려고 했는데 역시나 거절당했다. 하는 수 없이 나폴리 중앙역 앞에서 박스를 깔고 잠을 청했다. 그 와중에 내 가방을 노린 누군가가 머리에 베고 있던 가방을 빼가려다 나에게 걸렸다. 날 보고 씩하니 웃고 그냥 갔던가. 어쨌든 나는 나폴리를 봤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걸까.

 

나와는 다른 관습과 생각 그리고 사고방식을 지닌 이들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환영이다. 매일 같이 나와 비슷한 생활을 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내가 관심을 있을까? 아마 아닐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나라로 여행을 하고, 또 스가 아쓰코처럼 유학생활도 하고 그러는 게 아닐까. 내가 그럴 수 없다면, 작가 같은 선배님이 쓴 글이 이렇게 반가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폴리의 좁은 골목 정중앙에 떡하니 의자를 내놓고, 사설통행세를 걷던 동네 아줌마의 패기가 부럽기도 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사이드브레이크를 풀지 않고 이중주차를 한 어느 차주 때문에(전화를 네 번이나 했으나 받지 않았다) 결국 관리사무소까지 가서 인터폰으로 방송해서 겨우 풀려날 수가 있었는데, 푼돈을 아줌마에게 쥐어주고 골목을 지나가야 했던 트럭 운전사 아저씨 같은 그런 기분이었을까.

 

아무래도 저자가 지식인 계급이다 보니, 보통의 여행자들과 달리 이탈리아 지식인들과 상당한 교류가 있었던 모양이다. 전쟁 중 동맹국이었던 나라 출신 여성은 환대받지 않았을까. 전쟁 중에 실제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마리아 보토니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저자의 말에 따르면, 아마 마리아 보토니가 없었더라면 자신은 작고한 부군 페피노를 만날 일이 없었을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스가 아쓰코의 문학적 오딧세이 역시 존재할 수 없었단 말인가.

 

우리들의 인연들은 그렇게 한 순간의 인연에서 출발해서 영원으로 갈 수도, 또 그렇지 않고 단발성 만남으로 끝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엽서라는 통신수단으로 마리아 보토니와의 갸날픈 인연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장면이 신기했다. 그리고 보니 지난 천년에 체코 여행 중에 나에게 엽서를 보내준 사찌에 나카무라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시절 참 재밌는 친구였는데 말이지. 자신의 나라에서 잘 살고 있겠지 싶다.

 

평범한 보통 사람인 줄 알았던 마리아 보토니가 알고 보니 레지스탕스 영웅이었다. 직장 상사의 부탁으로 빨치산 대장을 숨겨주었다는 혐의로 독일 수용소까지 끌려갔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실제 영웅이 바로 마리아 보토니였다. 아니 이 정도는 되어야, 글감으로 써먹기에 부족함이 없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리 둘러 봐도, 내 주위에는 그런 영웅 레벨에 올라갈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책의 어디선가 등장한 안토니오 타부키의 <인도 야상곡>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어 나도 그 책 가지고 있는데 싶어서 어제 찾아서 첫 몇 페이지를 읽었다. 5년 전에 읽은 책인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가 썼다는 <만초니가 사람들> 그리고 알렉산드로 만초니의 <약혼자들> 그동안 내가 모르고 있던 이탈리아 문학에 대한 소개가 이어진다. 이거 알고 보니 무서운 책이었구만 그래.

 

시인 움베르토 사바가 쓴 시들에 대해, 누군가가 이방인인 스가 아쓰코가 알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듣고 실망했다는 에피소드는 좀 씁쓸하게 다가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또 삶에는 어쩔 수 없는 그런 부분들이 존재한다는 걸 이제는 어느 정도는 수긍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이 시리즈가 마음에 들어서 일단 주말에 도서관에 들렀다가 <코르시카 서점의 친구들>도 빌렸다. 바로 읽어야지. <트리에스테의 언덕길>도 어젯밤에 이런저런 쿠폰 때문에 주문했다. 이렇게 알라딘 쿠폰 지옥에 시달리게 될 줄이야.



어제 저녁에 책 읽다 말고 잔뜩 쌓인 쿠폰을 해결하기 위해 주문한

스가 아쓰코 작가의 신간은 바로 오늘 도착했다.

번개배송의 파워.


[덧붙임] 이탈리아 유수의 회사인 올리베티 사에서는 해마다 한 권씩 고전 명작들을 선정해서 멋진 디자인의 양장본을 만들어 배포했었다고 한다. 삽화도 가득 넣어서 말이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부럽더라. 독서 문화가 나날이 피폐해져 가는 한국에서도 그런 멋진 이벤트를 할 수 있는 재력과 기획력을 갖춘 회사가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 선진국이 괜히 문화 선진국이 아니라는 생각도 아울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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