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뒷골목 풍경 - 유랑악사에서 사형집행인까지 중세 유럽 비주류 인생의 풍속 기행
양태자 지음 / 이랑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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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중세’라는 코드에 반해 버렸다. 그래서 읽지도 못할 거라는 걸 빤히 알면서도 중세 관련 서적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물론, 어떤 책은 읽었지만 역시 상대적으로 그러지 못한 책이 더 많다. 하지만 지난주에 구입한 양태자 선생의 <중세의 뒷골목 풍경>은 책을 받아 들자마자 바로 다 읽어 버렸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총평은 희비가 엇갈리는 느낌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엄청 재밌다는 거다.

독일에서 20여 년간 살면서 꾸준하게 중세시대에 관한 연구를 발전시켜 온 저자는 확실히 나 같은 일반 독자에게 귀가 솔깃할 만한 재미난 이야기를 한 뭉텅이 안겨 준다. 중세시대 사형집행인은 가업으로 전승되었고, 특정한 가문끼리만 결혼해야 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단박에 사형수를 죽이지 못하면 거꾸로 자신이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참 놀라웠다. 유랑악사와 광대 같은 이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도 저자는 예리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요즘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전하지 않았던 중세에 그들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들은 다양하면서도 재밌는 이야기들을 전파하는 메신저들이었다.

심지어 거지에게도 모종의 역할이 있었단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시대에 부자들이 거지에게 하는 적선은 사후에 가게 될 하늘나라에 대한 투자였다. 그러기 위해서 적선 받는 주체인 거지들이 필요했고, 그들은 당당하게 구걸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요즘의 선동적 구호와 참 어긋나는 느낌이다.

종교가 지배했던 중세 시대에 가톨릭 미사는 모두 라틴어로 집전되었다. 중세 농민들에게 고도의 훈련을 받지 않은 식자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었던 라틴어 경전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현실적인 성인의 유품과 유골에 집착했다. 진위를 알 수 없는 대량의 성물이 거래되었고, 돈이 없는 가난한 이들은 이런 성물을 만져 보는 것만으로도 종교적 법열에 도취했다. 가톨릭 교회가 개발한 성서에도 나오지 않는 연옥 사상은 유골 장사를 더욱 부추겼다. 한편, 이런 성물과 성지순례에 대한 집착은 긍정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었다. 장거리 성지순례에 나서는 순례객을 위해 도로 정비와 숙박업이 발전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기술과 문화의 교류 그리고 상업의 발달이라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해석은 참신하다.

종교에 대해 저자는 가치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예의 비판을 거두지 않는다. 중세 시대에 존재한 것으로 알려진 여자 교황 때문에 아직까지도 교황의 성별을 가리기 위한 시스템에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정치적 이유 때문에 죽어 백골이 된 교황을 법정에 세우는 엽기적인 재판도 있었다.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프랑스에서 벌어진 구교도의 위그노 대학살 사건도 빠지지 않는다. 중세를 휩쓸었던 마녀 재판의 실상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던 마르틴 루터의 부인이 수녀 출신이라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기존의 역사가들이 거시적 차원의 정치사를 주로 다뤘다면, 최근 유럽 역사학계에서는 그동안 역사 연구에서 소외되었던 비주류들의 삶을 통한 미시적 접근이 대세인 것 같다. 역사 접근의 방식에서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후자에 더 흥미를 느낀다. 그런 점에서 양태자 선생의 <중세의 뒷골목 풍경>은 그야말로 나에게 안성맞춤인 그런 책이었다. 하지만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나 엠마뉘엘 르루아 라뒤리의 <몽타이유> 같은 저작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역부족이라는 느낌이다. 타문화권 연구자의 숙명적인 깊이의 결핍이라고 해야 할까. 재밌게 책을 읽으면서도 그 점이 참 아쉬웠다. 역사교양서의 형식을 띠고 있으면서, 인용이나 출처에 대한 두루뭉술한 세팅도 문제다. 누가 그렇게 말했다더라 식의 인용이 아닌 정식으로 출처를 밝혀야 하지 않았나 싶다.

마지막에 나온 <뒷골목의 정치>는 중세의 뒷골목 이야기라는 책의 주제에서 좀 벗어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너무 독일 역사에 치중했다는 점을 의식해서 프랑스 정치사를 다룬 것 같은데, 프랑스 절대왕정의 시기는 중세보다는 근세로 분류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철가면의 전설과 리슐리외 추기경 그리고 태양왕 루이 14세의 화려한 여성 편력은 기존의 통사와 그다지 큰 변별력을 보여 주지 못한 것 같다.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루이 14세의 유명한 정부 몽테스팡 부인이 일으킨 <악마의 미사> 스캔들은 얼마 전에 읽은 장 퇼레의 <몽테스팡>에서도 자세하게 다뤄진 바가 있다.

우리나라 출신 학자가 서구에서 이런 역사적 성과를 이뤘다는 점에서 양태자 선생의 <중세의 뒷골목 풍경>은 높은 가치를 가진다. 역사에서 그동안 중점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소외 계층에 대한 광범위한 저자의 연구는 특이할 만하다. 하지만, 그 깊이와 외연의 확장에 있어서는 여타의 서구 역사학자의 성과에 비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자타가 인정하는 훌륭한 결과를 위해 노력정진과 분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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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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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신데렐라 스토리다.

세계 3대 전기 작가로 알려진 슈테판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 어느 시골 마을 우체국에 일하는 여직원을 주인공 삼아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라는 매력만점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능청맞게 주인공을 단순하게 “여자”라고 부르며 객체화를 시도한다. 마치 자신이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이. 작가는 이 잿빛 금발의 아가씨가 가난 때문에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를 체험하면서 자신에게 잠재해 있던 자아와 매력을 찾는 과정을 조용하게 들려준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미 제목에 중요한 키워드를 조용하게 배치했다, “변신”이란 단어는 미운오리 새끼가 어떻게 백조로 변신해 가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선택이다.

전쟁(1차 세계대전)은 우리의 주인공 28세의 크리스티네 호프레너 양의 젊음을 앗아가 버렸다. 가장의 부재로 인한 가난은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를 생계 전선으로 이끈다. 고향 마을에서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크리스티네는 오래전 미국으로 건너가 성공한 클라라 이모의 초청으로 스위스 휴양지 엥가딘에서 백조로 거듭난다. 미국에서 성공한 부유한 이모의 재력은 자신감 없고, 촌스러웠던 크리스티네를 단박에 사교계의 여왕으로 ‘변신’시킨다. 그런데 이 이야기, 왠지 걱정이 앞선다. 하늘을 날던 이카루스의 경우처럼 추락에 대한 우려가 솟아난다. 자신이 것이 아닌 타인의 도움으로 올라탄 ‘호화와 사치’의 롤러코스터에서 내릴 시간이 되면, 신데렐라의 마법이 풀리는 자정이 되면 어쩌나. 이런 우려와 걱정은 독자가 소설에 몰입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소다.

호텔의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던 크리스티네의 추락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내심 자신의 애인으로 점찍은 독일 엔지니어 에드빈이 크리스티네에게만 관심을 갖자, 만하임 출신의 카를라는 크리스티네의 발밑을 무너뜨리기 위한 치밀한 준비에 들어간다. 그리고 카를라는 아주 적절한 시기에 사교계의 별로 부상한 크리스티네가 별 볼일 없는 시골 처녀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젊음과 이모 부부의 재력으로 평생 누리지 못하던 성공을 즐기던 여자의 추락은 그래서 더 비참하다. 설상가상으로 오랜 병고로 고통 받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뜬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점이다. 스위스 호텔에서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은 제 자리의 삶으로 돌아온 여자에게 증오와 분노의 씨앗일 뿐이다. 허상의 별천지를 체험한 여자는 도저히 예전에 삶에 적응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주변 사람들을 모두 호텔에서 만났던 빛나는 젊음과 부유한 재력을 갖춘 사교계의 인사들과 비교하면서, 어쩔 수 없는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다. 이거 너무 빤한 진행 아닌가?

바로 이 지점에서 소설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여자의 형부 프란츠의 오랜 전우 페르디난트가 그 주인공이다. 첫눈에 반한 여자와 남자는 빈의 어느 허름한 싸구려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절망적인 사랑을 키워 나간다. 국가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은 상이용사 페르디난트는 젊은 시절의 패기와 총기를 모두 잃어버렸다. 이 가난한 연인들에게 정상으로 가는 탈출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럼 그들에게 남은 선택은?

조국 오스트리아를 떠나 브라질의 망명지에서 생을 마감한 슈테판 츠바이크는 소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에서 오늘의 현실에 대한 놀랄만한 예언을 가득 담아낸다. 냉혹한 자본주의의 현실 속에서 하루가 다르게 심화되어 가는 양극화 현상은 이미 전후 오스트리아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다. 미처 몰랐던 상류 사회의 단맛을 본 여자에게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은 지옥이었다. 변신, 도취 그리고 현실에 대한 자각은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재력, 배경 그리고 가문 같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평가받는 상류사회에 대한 츠바이크의 날선 비판도 매력적인 관전 포인트다.

츠바이크가 그리는 멋진 드레스와 미용으로 대변되는 허영의 세계에 초대된 여성의 심리묘사에 그만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츠바이크가 오랜 시간을 공들여 저술한 이 미완성 소설의 진가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대의 불안의 초상이다. 예상대로 그들은 일탈을 꿈꾸며, 새로운 출발을 위한 범죄를 모의하는 과정에서 자기합리화를 나선다. 당대를 살던 젊은이들의 절망이 느껴졌다. 하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일자리 부족으로 고통 받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과 그들이 다를 게 무엇이던가. 그런 시대의 결핍에 대한 교집합 때문인지 책을 읽는 동안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에 그만 흠뻑 빠져 버렸다.

69년 전에 망명지에서 외롭게 죽은 위대한 작가가 남긴 유고 더미에서 불사조처럼 살아남아 40년 뒤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작품과의 만남은 그리고서도 또 30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인지 더 의미 있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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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문제들
안보윤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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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소하다는 상대적인 거라고. “사소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보잘것없이 작거나 적다, 그리고 반대말은 예상대로 중요하다였다. 어떤 사소한 문제는 지극히 주관적 판단의 소치다. 내가 보기에 사소한 것도 타인의 눈으로 보면 중요할 수도 있다는 상대성이야말로 처음으로 만나는 안보윤 작가의 <사소한 문제들>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사족으로 ‘사소하다’의 예제를 찾아보니 가장 먼저 나오는 문장이 ‘사소한 문제’더라.

일단 소설 <사소한 문제들>의 배경이 내 서식지 부근의 인천 배다리가 반가웠다. 예전에 종종 헌책 사냥을 하러 다니던 헌책방이 즐비했던 바로 그 배다리. 지금은 구 도심에서 밀려나 소설에 나오는 대로 그저 시간이 고이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어제 책을 다 읽고 나서 한 번 배다리에 들러볼까 싶었는데, 바람이 차서 그만뒀다. 항상 행동이 생각을 쫓지 못하는구나.

안보윤 작가는 <사소한 문제들>에 두 명의 주인공을 배치한다. 먼저 등장하는 캐릭터는 권아영, 볼품없고 뚱뚱해서 스스로를 숲 속에 사는 몬스터 슈렉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 생각조차 자신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던가. 어쩌면 그것도 사소한 문제일지 모르겠다. 싱글맘과 함께 사는 아영이는 외롭고, 쓸쓸하다. 게다가 동네 양아치 황순구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모욕과 협박을 받는다. 이거 초반부터 심상치가 않다. 그리고 보니 그 황순구도 자신보다 우월한 이들에게 무시로 폭압적인 대접을 받는다. 그렇게 폭력의 사슬은 이어진다는 말을 작가는 하고 싶었던 걸까. 독자는 상식을 벗어난 전개에서 작가의 진의를 부지런히 수사한다.

두 번째 주인공 배두식은 39세 중년의 헌책방 주인이다. 두식은 동네 건달 황순구의 횡포를 이기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온 아영을 거둔다. 물론,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칼로 자해하겠다는 아영의 협박에 못 이긴 결과다. 그렇게 둘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문제는 이 아저씨가 게이라는 점이다. 안보윤 작가는 슬그머니 두식의 성 정체성의 원류를 플래시백으로 소설 곳곳에 파묻는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런 부비트랩처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식과 아영은 서로에게 한 줌의 체온을 전해주면서 서로를 보듬게 되는 험한 여정에 오른다.

폭력의 먹이사슬은 황순구를 괴롭히는 일단의 무리에게서 아영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아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약한 이를 때리고 갈취하는 그야말로 전형적 노예근성이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게이 두식에게 가망 없는 로맨스를 꿈꾸게 하는 성현의 존재는 한 술 더 뜬다. 도박에 미쳐 집에서까지 버림받은 성현에게 두식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두식은 성현이 개털이 되어 오갈 데 없을 때 찾게 되는 마지막 버팀목이다. 물론 그런 오아시스도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게이 혐오자에게 끔찍한 폭행을 당하자 언제나 차고 넘칠 것 같은 물이 고갈되어 버린다. 그렇게 돈오하게 된 두식은 ‘조심스러운 태도와 상반된 갈구하는 눈빛’으로부터 마침내 해방된다. 물론, 그 과정에 아영의 철부지 행동이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다.

정교하게 제조된 우유부단한 캐릭터 두식의 돈을 갈취하는 성현을 독자는 미워할 수박에 없다.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공허하다. 오만가지 이유로 멀쩡한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만들고, 사채 빚으로 가정 파탄에 일조하며, 아내마저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질병을 선사하는 성현은 두식을 철저하게 이용해 먹는다. 이 밉상 캐릭터에 대한 증오는 분노로 발전할 판이다. 어쩌면 성현은 두식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습기’ 같은 존재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두식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성현은 유리문에 갇힌 “죽은 넙치 얼굴을 한” 실패자다.

아영의 화끈한 방화로 두식의 터전이었던 헌책방이 홀랑 타버렸을 때, 두식은 ‘욕망이 거세된 책’들을 지켜본다. 그런데 정작 거세된 욕망의 주인공은 있으나 마나 한 책이 아니라 두식이 아니었을까. 죽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시간이 고인 헌책방에서 도대체 두식은 무슨 꿈을 꾸고 있었을까. 희한하게도 헌책방 주인이 책 읽는다는 말은 아마 소설에 등장하지 않은 것 같다. 그저 하루의 벌이를 위해 분류를 하고, 인터넷에 가격을 넣는 일을 할 뿐이다. 그마저도 아영이 등장한 다음에는 아영의 몫이 되었지만. 아영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헌책방이 그렇게 어이없이 사라져 버렸을 때, 비로소 두식은 자신의 과거에 이별선언을 할 수가 있었다. 아영이 남긴 최소한의 체온의 아스라한 추억을 뒤로 한 채.

그러고 보니 <사소한 문제들>에 진짜 ‘사소한’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

[뱀다리] 방화 와중에 두식의 헌책방 위에 거주하던 성인용품점 사장이 구하기 위해 던진 각종 낯 뜨거운 물품들을 구경꾼들이 잽싸게 약탈해 가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정말 일품이었다.

[뱀다리2] 작가 사진은 파주가 아니라 배다리에서 찍었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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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권영주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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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체스도 둘 줄 모르면서 순전히 귀엽다는 이유로 심슨 가족이 체스 판의 말로 등장하는 체스 판을 산 적이 있다. 같이 살던 친구와 체스에 취미를 붙여 보려고 한동안 체스 두는 법을 배우곤 했는데, 끈기가 없어서인지 만날 같은 상대를 상대하다 보니 재미가 없어져서인지 금세 그만둬 버린 것이 나의 체스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다.

우리에게는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유명한 오가와 요코의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로 다시 체스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어느 한가한 휴일 오후, 이 책과 그동안 읽고는 있었는데 미처 읽지 못한 세 권의 책을 들고 카페로 향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바깥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커피향이 그윽하게 밴 카페에 들리는 적당한 소음과 BGM으로 깔린 재즈 음악을 들으며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를 읽기 시작했다.

일본 작품이 분명한데도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에는 이 아름다운 소설의 배경이 일본인지 아니면, 서구의 어느 조용한 고장인지 알 방법이 없다. ‘리틀 알레힌’이라는 이름의 주인공 소년의 이름도 알 수가 없다. 천재 체스 플레이어 소년은 체스 판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는 우직한 말의 상징처럼 그렇게 다가온다. 조실부모하고 가구 수리를 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소년은 입술이 달라붙은 채 태어난다. 정강이 살을 이식한 수술로 입이 튼 소년, 당연히 말수가 적고 주변에 친구도 없다.

아, 아니다 소년에게는 백화점 옥상에 올라갔다가 너무 커서 내려올 수 없게 된 코끼리 인디라와 좁은 틈에 갇혀 죽었다는 전설의 미라가 있다. 어쩐지 그의 주변에서 죽음의 그늘이 떠날 줄을 모른다. 아,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은 호러 엽기 소설은 아니니까. 게다가 어느 날 학교 수영장에서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버스 운전사 아저씨를 발견한 소년, 해초처럼 너풀대던 그의 겨드랑이 털이 유난히 떠오른다. 그날 이후, 소년은 그의 입술 주변에 돋아난 솜털로 그를 괴롭히던 소악당들로부터 해방된다.

버스를 개조한 트레일러에서 살면서 간식을 즐기던 마스터로부터 소년은 체스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 마음을 둘 곳이 없던 소년은 8X8 반상의 세계에 그만 홀딱 반해 버린다. 체스 세계의 SCV 같은 존재인 폰(pawn)을 제 이름으로 한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마스터에게 한 수 한 수 배우는 즐거운 나날들이 계속된다. 세상 무엇보다 체스 두는 도중에 간식을 즐기던 마스터가 심장마비로 죽고 나자, 비로소 소년은 홀로서기에 나선다. 스승의 죽음과 제자의 홀로서기라는 신화의 전형을 소설은 그대로 재현한다.

체스를 사랑하는 재력가 노파 영양의 도움으로 체스 두는 인형 리틀 알레힌으로 소년은 체스의 바다에 뛰어든다. 체스 판에서 상대에 맞서기보다 체스 판 밑으로 기어 들어가 체스의 바다를 헤엄치기 좋아하는 소년의 환상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코끼리 인다라의 꼬리를 잡고 흑백의 체스 무늬가 들어간 고양이 폰을 왼손에 앉은 소설의 표지 그림이 완벽하게 이해됐다.

체스를 위해 자신의 몸집까지 줄여 가면서 체스에 몰입해서 손끝으로 이야기하는 어느 소년의 이야기는 경이로웠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천명관 작가의 <고래>가 떠올랐다. 그 소설에서도 아마 박제된 코끼리 이야기가 나왔지. 현실 세계와 조금은 얼토당토않은 환상이 겹쳐지는 교차점이 조금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온통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체스 기보를 통해 실존을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불완전한 존재는 그래서 기록을 좇게 되는 것일까. 비록 그것이 주관적이라고 해도 말이다.

삶의 고갱이가 농축된 체스 무대를 배경으로 종횡무진 활약하던 리틀 알레힌의 최후에는 유려한 비장미가 흐른다. 실존했던 체스 계의 그랜드마스터 알렉산드르 알레힌의 죽음처럼 소설의 주인공 역시 선구자의 길을 따른다. 그렇게 반하(반하의 시인, 리틀 알레힌의 짧았지만 치열한 삶의 궤적을 따르는 문학 여행은 조용하게 막을 내린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바로 리틀 알레힌과 그의 조수 미라의 ‘체스 기보 편지’였다. 인형 속에 들어가 수를 두던 소년을 위해, 대신 기보를 기록하고 말을 처리하던 미라와 헤어져 산 위의 요양원에 올라가 있던 소년은 미라에게 단 한 줄의 체스 기보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곤 했다. 그리고 편지는 보내는 순간부터 기다리던 미라의 답장에 적힌 기보를 보고 기뻐하던 주인공의 그 순수한 감정에 대한 묘사는 정말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아직 오가와 요코의 대표작인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어 보진 못했지만 왠지 이 작품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간 내서 영화로 먼저 이 작품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를 영화로 만들면 소년의 환상 부분이 어떻게 표현될지 못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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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문학 걸작선 1
스티븐 킹 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조지훈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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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종말의 시대는 오래전부터 매혹적인 문학 소재였다. 그래서 많은 장르 소설 작가들이 앞 다투어, 지구 종말과 인류 멸망 이후의 어떤 세계가 펼쳐질 지에 대해 수많은 작품을 발표해 왔다. 이번에 황금가지를 통해 선보이는 <종말 문학 걸작선>에서는 거장 스티븐 킹의 단편을 비롯한 모두 22편의 지구 종말을 주제로 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지구 종말이 다가왔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에 이 소설 선집의 키포인트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건 바로 생존이다. 인류는 진화 단계에서, 어떤 식으로 생존에 집착해왔다. 후손에게 자신의 유전인자를 물려주고,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간단하게 말해서, 지구에 종말이 닥쳐와도 인류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마저 사라진 종말시대에 진짜 동물을 본 기계 인류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유기물이 아닌 무기물로 생존하고, 자유자재로 재생이 가능한 시기에 구시대의 유물로 등장하는 개의 존재는 그들에게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에서 파올로 바시갈루피는 신인류에게는 없는 다른 생명체와의 교감의 중요성을 슬쩍 내비친다. 거창하게 왜 우리에게 종의 다양성이 필요한가를 말하기보다 종말 이후의 삭막한 지구의 현실을 통한 우화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는 <빵과 폭탄>에서는 나와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법에 대한 M. 리케르트의 사고를 엿볼 수가 있다. 9-11 사건 이후, 전 미국을 휩쓸었던 반 이슬람 분위기에 대한 냉소적 시선을 아이들 사이의 갈등으로 풀어내가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웜바이러스 때문에 순식간에 지구의 시스템이 파괴되는 과정을 그린 <시스템 관리자들이 지구를 다스릴 때>에서는 저자 코리 독토로의 네트워크 환경에 대한 전문적 지식에 감탄했다. 사랑하는 아들과 아내를 잃은 주인공 펠릭스(역설적으로 주인공의 이름이 “행운아”라니!)는 인류 삶의 터전인 지구와 가족이 붕괴되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고 문명의 보존과 재건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전통적인 오프라인 관계 상실의 시대에, 네트워크로 연결된 공동체의 생존 방식에 대한 작가의 문제제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들이 어쩌면 작가들이 나중에 그 외연을 확대해서 장편으로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희미하나마 보이는 희망의 끈이 인상적이었다.

<종말 문학 걸작선> 첫 번째 권에 실린 소설 중에서 역시 가장 관심을 끄는 작품은 1번 타자이자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 스티븐 킹의 <폭력의 종말>이었다. 프리랜서 작가인 하워드 포노이의 마지막 원고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작가의 천재 동생 바비 포노이가 어떻게 인류를 종말로 이끌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다.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드러낸 바비는 인류의 폭력성과 비열함에 절망하고, ‘특수한 물’의 심판을 내린다. 문제는 그의 극단적 치료제가 가진 부작용이었다. 선의가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건 아니라는 방증이다.

스티븐 킹의 단편을 보고 나서 바로 미국 케이블 채널인 TNT에서 제작된 동명의 텔레비전 영화를 구해서 봤는데, 원작을 그대로 구현한 콘텐츠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큰 차이점은 원작에서는 주인공 하워드가 바비의 전동타자기로 기록을 남기는 것으로 나오는데, 텔레비전 영화에서는 비디오카메라로 좀 더 비주얼적인 측면을 다룬다는 점 정도. 나머지는 정말 환상적으로 원작을 재현해내는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종말 문학 걸작선>을 읽고서 두 가지 아쉬운 점을 말하고 싶다. 하나는 존 조지프 애덤스가 “들어가는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아포칼립스 문학에서 빠질 수 없는 좀비 창궐과 외계인의 지구 정복이라는 소재의 글이 빠진 것이다. 후자는 차치하고서라도,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지구 문명이 파괴되고 죽어도 죽지 않는 좀비와의 사투야말로 종말 문학 중에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아쉽기 짝이 없다. 두 번째로는 책의 곳곳에서 보이는 오탈자와 아귀가 맞지 않는 전후관계 설명이다.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교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좀 엉뚱한 질문이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에도 문학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러기 위해선 문학의 생산자와 소비자인 인류가 꼭 필요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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