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뒷골목 풍경 - 유랑악사에서 사형집행인까지 중세 유럽 비주류 인생의 풍속 기행
양태자 지음 / 이랑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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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중세’라는 코드에 반해 버렸다. 그래서 읽지도 못할 거라는 걸 빤히 알면서도 중세 관련 서적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물론, 어떤 책은 읽었지만 역시 상대적으로 그러지 못한 책이 더 많다. 하지만 지난주에 구입한 양태자 선생의 <중세의 뒷골목 풍경>은 책을 받아 들자마자 바로 다 읽어 버렸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총평은 희비가 엇갈리는 느낌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엄청 재밌다는 거다.

독일에서 20여 년간 살면서 꾸준하게 중세시대에 관한 연구를 발전시켜 온 저자는 확실히 나 같은 일반 독자에게 귀가 솔깃할 만한 재미난 이야기를 한 뭉텅이 안겨 준다. 중세시대 사형집행인은 가업으로 전승되었고, 특정한 가문끼리만 결혼해야 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단박에 사형수를 죽이지 못하면 거꾸로 자신이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참 놀라웠다. 유랑악사와 광대 같은 이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도 저자는 예리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요즘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전하지 않았던 중세에 그들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들은 다양하면서도 재밌는 이야기들을 전파하는 메신저들이었다.

심지어 거지에게도 모종의 역할이 있었단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시대에 부자들이 거지에게 하는 적선은 사후에 가게 될 하늘나라에 대한 투자였다. 그러기 위해서 적선 받는 주체인 거지들이 필요했고, 그들은 당당하게 구걸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요즘의 선동적 구호와 참 어긋나는 느낌이다.

종교가 지배했던 중세 시대에 가톨릭 미사는 모두 라틴어로 집전되었다. 중세 농민들에게 고도의 훈련을 받지 않은 식자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었던 라틴어 경전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현실적인 성인의 유품과 유골에 집착했다. 진위를 알 수 없는 대량의 성물이 거래되었고, 돈이 없는 가난한 이들은 이런 성물을 만져 보는 것만으로도 종교적 법열에 도취했다. 가톨릭 교회가 개발한 성서에도 나오지 않는 연옥 사상은 유골 장사를 더욱 부추겼다. 한편, 이런 성물과 성지순례에 대한 집착은 긍정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었다. 장거리 성지순례에 나서는 순례객을 위해 도로 정비와 숙박업이 발전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기술과 문화의 교류 그리고 상업의 발달이라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해석은 참신하다.

종교에 대해 저자는 가치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예의 비판을 거두지 않는다. 중세 시대에 존재한 것으로 알려진 여자 교황 때문에 아직까지도 교황의 성별을 가리기 위한 시스템에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정치적 이유 때문에 죽어 백골이 된 교황을 법정에 세우는 엽기적인 재판도 있었다.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프랑스에서 벌어진 구교도의 위그노 대학살 사건도 빠지지 않는다. 중세를 휩쓸었던 마녀 재판의 실상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던 마르틴 루터의 부인이 수녀 출신이라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기존의 역사가들이 거시적 차원의 정치사를 주로 다뤘다면, 최근 유럽 역사학계에서는 그동안 역사 연구에서 소외되었던 비주류들의 삶을 통한 미시적 접근이 대세인 것 같다. 역사 접근의 방식에서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후자에 더 흥미를 느낀다. 그런 점에서 양태자 선생의 <중세의 뒷골목 풍경>은 그야말로 나에게 안성맞춤인 그런 책이었다. 하지만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나 엠마뉘엘 르루아 라뒤리의 <몽타이유> 같은 저작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역부족이라는 느낌이다. 타문화권 연구자의 숙명적인 깊이의 결핍이라고 해야 할까. 재밌게 책을 읽으면서도 그 점이 참 아쉬웠다. 역사교양서의 형식을 띠고 있으면서, 인용이나 출처에 대한 두루뭉술한 세팅도 문제다. 누가 그렇게 말했다더라 식의 인용이 아닌 정식으로 출처를 밝혀야 하지 않았나 싶다.

마지막에 나온 <뒷골목의 정치>는 중세의 뒷골목 이야기라는 책의 주제에서 좀 벗어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너무 독일 역사에 치중했다는 점을 의식해서 프랑스 정치사를 다룬 것 같은데, 프랑스 절대왕정의 시기는 중세보다는 근세로 분류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철가면의 전설과 리슐리외 추기경 그리고 태양왕 루이 14세의 화려한 여성 편력은 기존의 통사와 그다지 큰 변별력을 보여 주지 못한 것 같다.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루이 14세의 유명한 정부 몽테스팡 부인이 일으킨 <악마의 미사> 스캔들은 얼마 전에 읽은 장 퇼레의 <몽테스팡>에서도 자세하게 다뤄진 바가 있다.

우리나라 출신 학자가 서구에서 이런 역사적 성과를 이뤘다는 점에서 양태자 선생의 <중세의 뒷골목 풍경>은 높은 가치를 가진다. 역사에서 그동안 중점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소외 계층에 대한 광범위한 저자의 연구는 특이할 만하다. 하지만, 그 깊이와 외연의 확장에 있어서는 여타의 서구 역사학자의 성과에 비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자타가 인정하는 훌륭한 결과를 위해 노력정진과 분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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