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영웅들 김영사 모던&클래식
윌 듀런트 지음, 안인희 옮김 / 김영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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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명한 문명사학자 윌 듀런트가 저술한 <역사 속의 영웅들>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간단한 명제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역사가 영웅을 만드는가? 아니면 영웅이 역사를 만드는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윌 듀런트는 후자에 방점을 찍은 것 같다.

 

세계사에 대한 서양 편향적 사고는 <역사 속의 영웅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반복된다.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비유럽 대륙에 걸쳐 있건만, 우리가 아는 세계사는 언제부터인가 서구 중심적 사고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아마도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도시국가의 대결 이후, 서방(옥시덴트)이 동방(오리엔트)에 승리하면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 이후에도 몽고와 오스만튀르크가 서방을 위협한 적이 있지만 서방을 아우르는 항구적인 제국 건설에는 실패했다.

 

동서양 문명의 교류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인물로는 역시 정복자 알렉산드로스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이후 로마제국으로 이어지는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던 그리스 제국을 완성했던 약관의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인들이 야만인이라고 부르던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부왕 필리포스 2세의 뒤를 이어 도시국가로 나뉘어 패권다툼으로 세월을 보내던 그리스를 제압하고 동방의 거대한 제국 페르시아 정복에 나선다. 정복군주로서 전장에서 동물적인 감각을 자랑하던 알렉산드로스는 엄청난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다. 물론 그의 제국은 명민한 군주의 요절과 함께 찰나처럼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서양문명의 원류를 이루는 로마제국의 멸망의 원인 중의 하나를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기독교에서 찾고 있다. 제국의 근간을 이루던 관용(클레멘티아)이 로마가 유일신을 신봉하는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면서 실종되었다는 지적이다.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설명이다. 유대 민중에게 나사렛 출신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의 핍박에서 그들을 해방시킬 메시야로, 유대의 제사장과 기득권층 그리고 로마 총독에게는 사회혁명가로 인식됐다고 윌 듀런트는 분석한다. 그리고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로마 전역에 전파한 두 명의 전도사 사도 바울과 베드로에게 높은 점수를 부여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오늘날과 같은 세계 종교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유대의 민족종교로 남았을 것이다.

 

이후 기독교는 중세 시대에 세속의 권력을 뛰어넘는 정치권력 그 자체가 되었다. 교황권의 최전성기에 치러진 십자군 전쟁이 결국 실패로 귀결되면서, 프랑스 남부를 중심으로 한 순결파(카타리파)의 등장은 훗날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는 공고한 교권 추락의 시발점이었다. 기존의 질서를 위협하는 새로운 사상의 등장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국가와 교회는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철퇴를 가했다. 중세 말엽에 유럽 남부에서는 르네상스 운동이 그리고 유럽 북부에서는 마르틴 루터로 대변되는 종교개혁의 불길이 치솟게 되었다.

 

인류 구원이라는 종교 원래의 목적보다 철저하게 세속화된 가톨릭교회의 부정부패는 당대 지식인들의 지탄을 받았다. 어쩌면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 운동과 종교개혁은 상호 작용을 통해 인간 해방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지 않았나 싶다. 마치 에릭 홉스봄이 <혁명의 시대>에서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의 연관성을 다뤘던 것처럼 말이다. 초기 종교개혁 지도자들이었던 위클리프, 얀 후스 그리고 에라스무스는 타락한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민중과 제후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던 독일의 시대상에 대한 윌 듀런트의 냉철한 분석은 확실히 <역사 속의 영웅들>에서 가히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듀런트는 종교개혁을 하나의 혁명으로 간주하면서, 루터의 반박문 발표 이후 독일에서 벌어진 농민 전쟁의 전개 과정을 소개한다.

 

윌 듀런트의 현대판 영웅전은 기대와 달리 어느 특정한 인물을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객관적 분석을 시도한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마르틴 루터는 종교 지도자라기보다 일종의 사회혁명가로 묘사된다. 참을성 없었던 알렉산드로스의 세계 정복 야욕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후대의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와 비교를 통해 냉정한 시선을 유지한다.

 

요즘 한창 인기를 끄는 미시사의 디테일은 부족하지만, 전반적인 서양 역사 개론서로는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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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현상을 말한다 - 개정판 - 2012 진보가 집권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
김용민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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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의 열렬한 팬이다. 그러니 그 4인방 중의 한 명인 김용민 교수가 쓴 책도 아니 읽어볼 수가 없었다. 그전에 김어준 총수가 쓴 <닥치고 정치>도 읽었는데, <닥정>은 이미 <나꼼수>를 통해 들은 이야기들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다만, 책이 방송보다 먼저 기획되고 집필됐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무학을 자랑해 마지않는 김 총수의 정치적 혜안을 엿볼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나꼼수>에서 울부짖는 에어컨보다 못한 존재감의 시사평론가 김용민 씨의 기술(記述)은 어떨까? 나는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다.

힌트는 바로 책의 부제로 딸려 나온 <2012 진보가 집권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에서 집필 이유를 찾을 수가 있다. 김용민 교수의 논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여야의 정권 교체로서는 현재 벌어지는 역사의 역주행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통 크게 다음번 집권을 보수에게 맡기고 차차기를 도모해서 장기 집권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사실 이번 정권의 뒷감당은 어느 세력을 집권을 하든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가장 가까운 예로 지난 6·10 지방선거로 교체된 인천시의 예를 들어 보자. 전임 한나라당 안상수 시장의 대책 없는 선심성 사업과 막대한 부채로 후임 민주당의 송영길 시장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가 말이다. MB정권 이래 가히 천문학적으로 증가한 국가 부채의 규모를 들으면 정말 입이 딱 벌어진 정도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김용민 교수는 2012년 아니라 2017년을 주목한다. 그리고 그 무대에 등장할 선수들을 차례로 분석한다. 그리고 김 총수가 문재인 이사장에 주목했듯이, 그는 조국 서울대 교수야말로 차차기 지도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무려 28쇄나 찍은 이 책이 안철수 교수의 태풍이 불기 전에 나온 점이 아쉽다. 어쨌든 김용민 교수는 범야권에서 조국과 문재인이라는 정치적 자산을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조국 교수가 정치판에 뛰어 든다는 가정 하에 그가 가진 장점과 단점을 조목조목 분석해준다.

유학파 엘리트 출신이라는 조국 교수의 가장 큰 장점은 동시에 단점이다. 그리고 ‘강남좌파’라는 이미지로 빠뜨릴 수 없다. 그 외에 마치 1960년대 케네디를 연상시키는 젊음과 수려한 외모도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강력한 요소다. 그렇다면 단점은 어떨까? 말미에 실린 조국 교수에 대한 평가 중에 공희준 씨의 지적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공 씨의 가혹한 비판은 큰 무대를 앞두고 있는 조국 교수에게 약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대한민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정당정치의 실종이다. 이제 대중은 여권도 야권도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안철수 교수가 신당설을 부인했건만, 내년 총선을 앞두고 신당설이 끊이지 않는다. 마음 둘 곳이 없는 무당파의 향방이 내년 총선과 대선의 승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안철수 교수에 대한 비판처럼 조국 교수 역시 하늘에서 내려와 현실 정치세계에 뛰어 들어야 한다는 지적에 그래서 공감한다. 선출직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 소위 말하는 ‘검증’과 선거라는 과정이 조국 교수에게 필요하다.

지난 번 대선과 총선이 ‘욕망의 정치’의 현현이었다면 이번 총선과 대선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김용민 교수의 분석과 예단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두가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에 표를 몰아주었지만,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은 너무나 암담하기만 하다. 누구나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소통이라고 말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불통의 시대가 아니던가. 투표장에서 한 번의 선택이 얼마나 큰 (정치적) 스트레스를 불러오는지 깨달았으니 이제 행동에 나설 때가 됐다. 부디 다음번에는 올바른 선택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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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구레빌라 연애소동

개인적으로 재밌는 책을 좋아한다. 아니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술술 잘 읽히는 책이 좋다. 어떤 책/소설은 정말 읽는 게 곤욕이다 싶을 정도로 빡센 책도 있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미우라 시온의 <고구레빌라 연애소동>과 이스마일 카다레의 <죽은 군대의 장군>이 그랬다.

고구레 영감이 주인인 고구레빌라를 공간적 배경으로 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7개 묶음 서비스다. 각각의 에피소드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캐릭터들이 서로 겹치는 게 아주 인상적이다. 그리고 보니 최근에 읽었던 최제훈 작가의 <일곱 개의 고양이 눈>하고 그 구성이 비슷하구나. 물론 장르는 다르지만. 



 

 

 

 

 

 

 

[2] 허조그

역시 문학의 세계는 깊고도 넓다. 솔 벨로우는 전혀 모르고 있던 작가였는데, 이번에 펭클에서 두 권의 책이 나오면서 관심을 갖게 됐다. 당장에 접하고 싶지만, 지금 대기 중이 책들이 제법 있어서 내년에나 읽게 될 것 같다.

퓰리처상 수상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그 콘텐츠를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주노 디아스를 직접 만나 봐서 그런진 몰라도 퓰리처상에 더 애착이 가는 느낌이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유대계 미국 작가로 분류되는 특이한 아이덴티티를 자랑하는 솔 벨로우와 만나는 첫 작품으로 40년도 더 전에 발표된 <허조그>가 어떨지 기대가 된다. 



 

 

 

 

 

 

[3] 희랍어 시간

한강이라는 이름의 작가 역시 처음이다. 그냥 들으면 어쩌면 남자일 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 분은 여자 작가다. 그동안 문학동네 블로그를 통해 연재되던 특이한 제목의 책이 단행본으로 엮어서 세상에 나왔다.

희랍어는 분명 그리스어를 말할진대, 왜 굳이 그리스어가 아닌 희랍어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영어 알파벳의 원형을 이루는 정말 특이한 그리스어 문자를 보니, 문득 그 희랍어나 라틴어 강의에 관심이 간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라고 하는데 호기심이 인다. 참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읽어본 분들이 문체가 참 멋지다는 말을 하더라. 읽어볼만한 책인 듯 싶다. 오늘에라도 도전해 보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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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05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랍어 시간] 지금 읽고 있는데 서평단 도서로 뽑힐 것 같아요 -ㅅ-ㅋㅋ
먼저 번에 [흑산]도 그랬는데... 여지 없이 다른 분들에게 숑숑 보내야겠어요.
한국소설/일본소설 - 또 이런 구성이 되지는 않을까 우려되기도 하네요.
영미소설이나 다른 지역 소설도 읽어보고 싶은데 말이죠!

레삭매냐 2011-12-06 09:58   좋아요 0 | URL
<흑산>... 나오자마자 사서 읽었거든요 :>
저와 비슷하시네요.

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도 어제 다 읽었답니다.
이제 리뷰를 쓸라구요.

정말 문체는 한 번 기가 막히더군요.
어쩜 예언하신 대로 될지도 ㅋㅋㅋ
 

 

 그동안 베스트셀러는 안 보겠노라고, 몽니를 부리곤 했었는데 이제 생각을 좀 바꿔야지 싶다. 언제고 읽을 거라면 좀 더 빨리 읽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때마침 수중에 들어온 문화상품권이 있어서 바로 주문장을 날렸다.

 

딱히 저자 싸인본에 집착하는 건 아니지만, 읽은 책에 저자의 싸인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직접 작가분과 만나 책에 싸인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천성이 게으르니 왕왕 그럴 일이 생길 것 같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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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24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경숙 소설집 옆에 있는 책은 무슨 책이에요? 그게 더 궁금하네요 ㅎㅎ
8년 만에 나온 소설집이라니 기대가 커요. 늘 한결 같지만...

레삭매냐 2011-11-25 08:58   좋아요 0 | URL
신경숙 작가의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이라는 미니북이랍니다.
정말 작아서 딱 손바닥 안에 들어올 정도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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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레빌라 연애소동
미우라 시온 지음, 김주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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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예상대로 재밌다.

어제 책을 받아 들었다. 택배 봉투를 벗기는 순간, 소설에 등장하는 고구레빌라의 당당한 거주자 존(개)의 일러스트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그 뒤로는 이 연작소설의 첫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 세 명이 주르륵 앉아 있다. 막 읽기 시작한 나쓰메 소세키 선생의 <그 후>를 미루고 바로 독서삼매로 뛰어들었다. 재밌을 거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그런 작품이었다.

도쿄도 신주쿠에서 출발하는 오다큐 라인의 남쪽에 있는 세타가야다이타 부근의 허름한 목조 건물 고구레빌라가 이 재미난 연작소설의 공간적 배경이다. 독자에게 친근한 지명이라면 확실히 공감대를 빨리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세타가야다이타를 찾아보았으니까 말이다.

연작소설의 스타트는 꽃가게에서 일하는 마유와 아키오 사이에 끼어든 불청객이자 마유의 전 애인 나미키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자신의 첫사랑인 마유를 남겨 두고 3년 동안이나 전 세계를 주유하며 사진 찍는 일에 정신이 팔렸다가 돌아와 보니, 마유는 이미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나미키의 뻔뻔함에 질려 버렸다. 일본 사람들은 타인에게 민폐 끼치는 걸 정말 싫어한다고 하던데, 다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다음 에피소드에서 주책맞은 일흔 살 노인네 고구레 영감은 시한부 삶을 친구를 찾았다가 죽기 전에 섹스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에 그만 강한 자극을 받는다. 고구레는 50년 이상을 같이 산 와이프에게 섹스 타령을 했다가 타박만 받는다. 금지된 욕망은 언제나 일탈적으로 흐르기 마련, 고구레는 자신의 빌라를 드나드는 마유의 남친 아키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욕구를 풀 수 있는 방법을 문의한다. 허허, 이거 점입가경일세! 결국 고령자 전용 서비스를 담당하는 아가씨를 부른 고구레, 현장에서 반찬을 들고 찾아온 아내에게 발각될 위기에 내몰린다. 과연 우리의 노장 고구레 씨는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개인적으로 이 7개의 연작소설 중에서 최고는 바로 위층에 사는 간자키의 아래층 여대생 엿보기에 대한 보고서 <구멍>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사는 간자키는 어느 날 고구레빌라가 허술한 판자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아래층 여대생 미쓰코를 엿보는 재미를 시작한다. 간자키는 새로운 삶을 위해 시작한 공부마저 포기하고, 남자 1호, 2호 그리고 3호와 번갈아 가며 연애하는 미쓰코의 삶을 엿보는 ‘피핑 탐(peeping Tom)’으로 변신한다. 이제는 미쓰코보다 더 그녀의 삶을 잘 알게 된 간자키는 그녀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부실하기 짝이 없는 고구레빌라가 건재하기를 소원한다. 잘하는 짓이다!

각각의 연작에서 조연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다른 연작에서는 대뜸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비상한다. <고구레빌라 연애소동>은 도저히 우리네 일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을 텔레비전을 통해 만나는 것과 유사한 즐거움을 날것 그대로 우리에게 던져준다. 만날 하는 말이지만, 우리의 삶이 드라마처럼 즐겁다면 우리가 뭣 때문에 드라마에 그렇게 열광하는가 말이다. 내 삶이 드라마보다 훨씬 재밌는데 말이다.

<고구레빌라 연애소동>은 짐짓 얌전한 척 하지만, 안에서는 ‘간헐천처럼 솟구쳐 운석처럼 쏟아진 욕망’의 고갱이를 짚는다. 말하기 부끄러운 노년의 성을 전면에 내세우기도 하고, 막장 드라마의 전형인 삼각관계 때문에 시작된 기묘한 동거, 그 연쇄작용으로 튕겨 나온 남자가 불륜과 바람을 맛으로 식별해 내는 여자에게 얹혀살면서 방세로 섹스를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쓸데없는 고민에 빠지는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의 행진이 이어진다.

문제는 미우라 시온이 소개하는 에피소드에는 소통의 부재를 줄기로 한 고독이 배어 있다는 점이다. 고구레 씨의 섹스에 대한 갈구를 늙다리의 추잡한 욕망으로 치부해 버리고, 위층 남자의 훔쳐보기는 당연히 변태 짓이며, 새벽만 되면 집을 나가는 남편에 대한 의심의 밑바탕에는 도무지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대화의 단절이라는 마물이 웅크리고 있다. 얼음장같이 차디찬 서로에 대한 불신과 오해를 녹이는 건, 작가가 요상하게 빚어내는 “소동”이라는 키워드다. 그래서 아마 역자는 ‘모노가타리(이야기)’라는 원제목에서 ‘연애소동’이라는 묘하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우리말 제목을 뽑아낸 게 아닐까?

어젯밤에 이 책을 읽느라 밤잠을 설쳐 버렸다. 너무 시간이 늦어서 고만 읽고 자자하고 가까스로 잠에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쩔 수 없이 이 책을 펼치게 됐다. 그만큼 중독성이 강하다는 방증이리라. 때로는 어이없을 정도로 황당한 사건의 연쇄적으로 발생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작가가 그 소동을 매개로 일상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한 번 읽어 보시라, 다른 건 몰라도 재미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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