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가게 소년
로베르트 제탈러 지음, 이기숙 옮김 / 그러나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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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만에 고대해 마지 않던 로베르트 제탈러가 돌아왔다. 이미 영문판으로 사서 읽다가 포기해 버린 <담배 가게 소년>이 바로 그 작품이다. 1년 전에 만났던 <한평생>은 정말 아름답고, 삶에 대해 되돌아 보게 해주는 그런 소설로 기억하고 있다. 한편의 소설로 난 오스트리아 드라마 스쿨 출신 작가 로베르트 제탈러의 팬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어제 우연히 <담배 가게 소년>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맨발로 달려 나오다 시피 해서 입수했고, 바로 읽기 시작했다.



(2007년 5월 13일, 오스트리아 잘츠캄머구트 할슈타트, 이런 호수 부근에 살았단 말이지.)


때는 1937년 오스트리아의 잘츠캄머구트. 17세 소년 프란츠 후엘의 삶은 어머니 후엘 부인의 피후견인 역할을 하던 지역 유지 알로이스 프라이닝거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변곡점을 그리기 시작한다. 프란츠가 숲에서 일하는 또래 친구들과 달리 거친 육체노동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후엘 부인은 아들을 빈으로 보내기에 이른다. 빈 시내에서 담배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상이용사 오토 트르스니에크에게 하나 뿐인 아들을 맡긴다. 어머니의 곁을 떠나 스스로 삶을 개척해야 하는 프란츠는 성인이 되는 도전에 직면한다. 익숙했던 고향 환경을 떠나 이방인으로서 삶을 개척해야 하는 운명을 고대 <오디세이아> 이래 인류의 영원한 과제가 아니었던가. 프란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프란츠의 고용주 오토는 자신의 담배 가게에서 신문, 담배 그리고 문구를 파는 오스트리아가 제국이었던 당시 세계대전에서 다리를 잃은 상이용사로, 견습생 프란츠에게 신문을 통해 세상을 읽는 법을 가르친다. 호수에서 헤엄치다가 죽은 프라이닝거가 프란츠의 재정적인 면을 담당했다면, 트르스니에크는 청년의 교육 분야에서 유사(pseudo) 아버지 역할을 대신한다. 한편, 프란츠가 새로 둥지를 튼 빈에서는 안슐루스(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1년 앞둔 빈의 살벌한 풍경이 이어진다. 쿠르트 슈슈니크(위키로 검색해 보니 극우주의자라고 한다)로 대변되는 사회주의자들과 히틀러에 찬성하는 소독일주의 나치 협력자들 사이의 반목과 반유대주의가 극성을 부리는 가운데 프란츠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명한 세기의 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사와의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설 <담배 가게 소년>은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에서 특별한 단계로 도약한다. 정신분석학의 대가가 조언한 대로, 소년은 정체불명의 보헤미아 처녀 아네스카와 첫만남부터 사랑에 빠진다. 그 둘의 만남은 정착민과 유목민의 사랑을 연상시킨다. 종잡을 수 없는 보헤미아 처녀의 행동에 절망한 프란츠는 아바노 시가로 애연가 프로이트 박사님을 매수해서,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처방전을 요청한다. 오랫동안 베일에 쌓여온 인간 무의식의 세계를 세상에 알린 대가조차도 한 사람의 마음을 분석하는 건 쉽지 않은 미션이었던 모양이다. 자신이 그동안 연구해온 업적들이 어쩌면 사랑이라는 무도한 파도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을 거라는 자조 섞인 고백이 어찌나 그렇게 현실적으로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프란츠를 새로운 섹슈얼리티의 세계로 인도했던 아네스카는 다시 사라져 버리고, 사랑에 애끓는 청년의 순애보가 시작된다. 자신의 카우치에서 부유한 고객들을 상대하던 프로이트 박사는 프란츠와의 만남을 삶에 있어 하나의 활력소로 받아 들이면서, 이제 막 성에 눈뜨기 시작한 십대 소년과 노년의 교수님은 신뢰를 쌓아 가기 시작한다.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스무살 난 보헤미아 처녀가 소설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적어지는 대신, 빈 시내에서 점증하는 국가사회주의 나치즘이 득세하는 과정과 노골적인 반유대주의 열풍에 대한 제탈러의 문학 분석에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한다.

 


트르스니에크 씨의 신문읽기 훈련으로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을 즈음, 유대인들과 거래한다는 이유로 트르스니에크 씨가 게슈타포에게 폭행을 당하고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끌려간다. 체포 당시의 표면적 이유는 야릇한 애정 잡지를 유포했다는 혐의였는데, 훗날 그가 심장 질환으로 사망했다는 설명과 함께 기소된 이유 중의 하나는 무시무시한 국가 전복 활동 혐의였다. 조국을 위해 나선 전쟁터에서 다리를 잃은 상이용사조차 이런 혐의를 받는 판이니, 나치들에게 눈엣가시 같았던 공산주의자들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붉은 에곤 역시 트르스니에크 씨의 운명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끌려 가는 대신 붉은 에곤은 다른 방식으로 나치즘에 대한 저항으로 삶을 마감했다.

 


(2007년 5월 15일, 독일 다하우 수용소 앞에서)


프로이트 박사가 냉정하게 말한 대로, 1938년 봄의 빈은 그야말로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비록 프로이트 박사만큼의 지식은 없었지만 우리의 주인공 프란츠 역시 나치가 벌이는 비극의 전조를 읽어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빈의 지성은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를 메꾼 것은 바로 공포를 위한 폭력이었다. 자신의 고용인 트르스니에크 씨의 행방을 알기 위해 관공서를 찾아갔던 프란츠는 게슈타포의 물리적 폭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전에 등장한 나방의 사체가 아네스카와 가졌던 관계의 종언이었다면, 부러진 이빨은 이제 더 이상 어머니를 비롯한 타인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주체적 존재로서 프란츠의 비상을 예고한다. 그렇게 성장한 존재는 다시 되돌아 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게슈타포의 감시와 나치의 핍박에 견디지 못한 프로이트 박사 가족은 재산의 1/3에 해당하는 금전을 망명세로 지불하고, 오랜 고향이었던 빈을 떠나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직장 상사, 사랑한다고 믿었던 애인 그리고 그동안 믿고 따랐던 정신적 지주를 잃게 된 프란츠는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하는 위협마저 무릅쓴 채 프로이트 박사와의 마지막 만남을 갖는다. 인생에서 이별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겠지만, 이제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한 프란츠와 말년의 프로이트 박사가 나누는 대화들은 세대와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상징한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제탈러 작가의 문학적 상상이겠지만, 유대인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이 난무하던 야만의 시대를 그려내는 데 있어 상당히 효과적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사서 없는 시간을 쪼개서 읽은 끝에, 24시간이 되지 않아 <담배 가게 소년>을 모두 읽고 책장을 덮었다. 깊어가는 가을에 만난 수작(秀作)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모름지기 좋은 작품이라고 한다면, 자꾸만 그 내용에 대해 반복적으로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 저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로베르트 제탈러의 <담배 가게 소년>은 나에게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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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10-26 1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그 책이로군요.
아름답다고 하시니 정말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기억하겠슴다.^^

레삭매냐 2017-10-26 13:58   좋아요 1 | URL
이 책을 읽어 보시기 전에 같은 작가의
<한평생>을 만나 보시는 것도 더더욱
좋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

sprenown 2017-10-26 16: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우연히 <담배 가게 소년>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맨발로 달려 나오다 시피 해서 입수했고, 바로 읽기 시작했다.‘ 책에 대한 리뷰보다 전 이 부분에 감동했습니다. 이정도의 열정은 있어야 책을 좋아한다. 책좀 읽는다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추천하는 책 읽어보고 싶네요..기회되면은.^^

레삭매냐 2017-10-26 16:07   좋아요 1 | URL
다행이 근처 서점에 책이 비치되어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의 열기가 다 식어
버리지 않았을까요 ㅋㅋㅋ

비록 두 권 밖에 읽지 않았지만 로베르트
제탈러의 애독자라고 자청하겠습니다.

sprenown 2017-10-26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베르트 제탈러..저같은 책초보는 들어보지도 못한 작가 입니다만, 기억해서 읽어보겠습니다. 님을 통해 겨우 알게된 줄리안 반스의 ‘예감은~‘을 겨우 입수해서 읽으려던 참이거든요.^^

레삭매냐 2017-10-26 17:42   좋아요 1 | URL
제 개인적 의견으로는 줄리언 반스보다
진입 장벽이 높지 않다고 사료됩니다.

무엇보다 분량이 적어 독서에 부담이
없답니다. 부디 빠이팅!!!